< 200. 마르쿠스의 여인들 >
200.
느슨해진 푸블리우스를 한 번 다잡아준 마르쿠스는 예정대로 안티오키아로 돌아가려고 했다.
더 이상 가족들을 알렉산드리아에 머물게 할 이유도 없으니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한 가지 변수가 발목을 잡았다.
"···임신?"
"예. 저만이 아니라 파라오 두 명도 전부 아이를 가진 것 같더군요."
푸블리우스와 헤어지고 곧바로 율리아를 찾은 마르쿠스는 그녀의 말에 일순간 할 말을 잊어버렸다.
멍하니 그녀의 복부 쪽으로 시선을 옮기니 확실히 배가 미약한 호선을 그리며 볼록해져 있었다.
"아니, 잠깐. 당신만이 아니라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도 전부 아이가 생겼다고?"
"네. 딱 하루 만에 두 명 다 아이를 가지게 하다니 정말 놀라운 적중률이네요."
"아니, 저기······."
왠지 뼈가 있는 율리아의 목소리에 마르쿠스의 목소리가 자연히 기어들어갔다.
그래도 내심 율리아가 아이를 가져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만약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만 임신했더라면 율리아의 심기가 지금보다 훨씬 더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율리아와는 기절할 때까지 동침을 했으니 그렇다고 쳐도 그 두 사람은···신기한 일도 다 있군.'
냉정하게 고려해 보면 둘 중 한 명만 아이를 가지는 것보다는 둘 다 아이를 가지는 게 가장 좋았다.
아무래도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 중 한 명만이 출산을 한다면 그쪽으로 힘의 균형이 확 기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지금 상황은 최상에 가까운 결과를 얻었다고 볼 수 있다.
율리아도 말은 그렇게 해도 마르쿠스를 놀리려는 것이지 정말로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예상대로 그녀는 짓궂은 미소를 짓기만 할 뿐 진심으로 마르쿠스를 구박하려 하진 않았다.
"저랑 볼일이 끝나면 이제 그 두 사람에게 가볼 건가요?"
"당신 다음에는 다나에의 얼굴을 봐야지. 그 다음에 갈 거야."
"저도 그게 맞다고 봐요. 다나에가 당신을 얼마나 정성을 다해 섬겼는데 엄연히 구별을 둬야죠."
율리아의 마음속에서 우선순위는 자신이 가장 먼저.
그 다음이 다나에와 두 파라오 순이었다.
마르쿠스가 이 점을 확실히 하고 나자 그녀의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그런데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은 없었지? 그러진 않았을 것 같지만 묘한 신경전이 있었다거나, 대놓고 다툼이 있었다거나······."
"전혀요. 사실 따로 얼굴을 본 적도 없어요. 저도 식솔들을 챙겨야 하는 몸이다 보니 이것저것 할 일이 많아서요. 하지만 이제 슬슬 얼굴을 볼 때가 되긴 했으니 갈등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데 갈등을 계속 끌고 갈 리가. 지금까지 충돌이 없었다면 앞으로도 없겠네.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것 아닌가요?"
율리아가 멋쩍게 웃으며 자신의 배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마르쿠스에게도 여러 가지 만감이 스쳐 지나갔다.
"셋째라··· 이걸 늦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빠르다고 해야 하나."
"늦은 거죠. 사실 전 부담감이 조금 있었어요. 당신이 안티오키아에 있을 때는 매일같이 함께 잠자리를 가졌는데 도통 아이가 생기지 않았으니까요."
로마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가문을 이을 아들에 대한 집착을 극단적으로 보이는 풍조는 없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 여인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는 게 이 시대였으나, 로마는 그 정도의 말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아들이 없는 가문이 피가 섞인 친척을 양자로 입양해 가문을 물려주는 게 보편화 되어 있었던 까닭이다.
물론 그래도 자신의 친아들에게 가문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게 사실이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대놓고 조롱을 받지 않아도 어느 정도는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다.
율리아는 처음에 바로 아들을 낳긴 했지만, 사람 일이라는 건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가문의 미래를 위해서 두 번째 아들을 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굳이 아들이 아니더라도 한 명쯤 아이가 더 생겼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그래서 저번에 마르쿠스를 그토록 닦달했던 것이다.
기절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은 데에는 괘씸한 남편에게 벌을 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말이다.
어찌 됐든 율리아는 그토록 바라던 셋째를 얻었으니 이제 아무런 불만도 없었다.
다만 이것 때문에 마르쿠스의 계획에 한 가지 차질이 생긴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이제 막 안정기에 접어든 거니 안티오키아까지 장거리 이동을 하는 건 무리겠지?"
"문제없다고는 할 수 없겠네요. 솔직히 제 심정으로는 한 달 정도는 더 여기서 쉬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요."
계산을 해보니 율리아는 현재 임신 후 12주가량 지난 상태였다.
현대 의학에서는 12주부터 안정기에 들어가고 16주가 됐으면 안심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시대의 의학으로 12주는 아직 약간 불안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아니, 사실 16주가 돼도 마찬가지다.
엄청나게 흔들리는 배에 아이를 가진 산모를 태운다는 건 마르쿠스가 불안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설령 율리아가 가고 싶다고 해도 마르쿠스 쪽에서 말렸을 것이다.
"내 생각에도 한 달은 무리하게 움직이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 안티오키아에 연락해서 수발을 들어줄 사람들을 추가로 오라고 할 테니 여행지에 놀러 왔다고 생각하고 푹 쉬고 있어."
"당신은 역시 안티오키아로 돌아갈 건가요?"
"원래 오늘 바로 출발하려고 했는데 며칠 정도 일정을 늦춰볼게, 한 달이나 머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율리아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알렉산드리아에 머물러 달라고 떼를 쓰진 않았다.
총명한 그녀는 마르쿠스가 평소와 달리 초조해하고 있다는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내전을 순조롭게 중재한 지금 뭐가 그를 이토록 동요하게 만들고 있을까 의문이었으나,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그것보다는 앞으로 알렉산드리아에 머무는 게 확정됐으니 클레오파트라나 아르시노에와의 관계를 확실히 매듭지을 필요가 있었다.
마르쿠스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춘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
마르쿠스가 알렉산드리아로 귀환하고 사흘 후 율리아는 자신이 주최하는 정찬 연회를 열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 그리고 다나에는 호화로운 식탁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본래 궁의 주인인 파라오가 당연히 가장 상석에 앉아야 했으나 이번에는 그럴 수 없었다.
자연스레 가장 상석에 앉은 율리아가 안주인으로서 연회를 주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거기에 어떤 불만도 토로하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오히려 이런 자리를 내심 긍정적으로 여기고 있었다.
율리아가 여성들의 모임에서 안주인 역할을 하겠다고 하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율리아가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에게 상석을 내주었다면, 두 사람은 오롯이 파라오로만 대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상석에 앉았다는 건, 즉 두 사람을 마르쿠스의 여인으로 인정해주겠다는 암묵적인 의미가 깔려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연회의 분위기는 제법 괜찮았다.
여러 가지 별미로 배를 채운 네 사람은 의자를 가까이 끌어 모은 채 마음속에 있는 깊은 이야기를 꺼내놓는 시간을 가졌다.
"공교롭게도 여기 있는 세 사람이 거의 같은 시기에 아이를 가졌네요."
율리아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사실 두 사람은 로마와 안티오키아에 있을 때 율리아와 사이가 좋은 편에 속했다.
거기에 이번에는 명백히 자신들이 일을 저지른 쪽이었기 때문에 당당한 태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
클레오파트라는 어느 정도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으나, 아르시노에는 딱 봐도 안절부절못하는 게 티가 났다.
두 사람이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자 율리아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분을 비꼬거나 탓하는 게 아니에요. 정말로 신기해서 그러는 거랍니다."
"···율리아 님이 이번 일로 기분이 상하셨을 거라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리 따뜻하게 대해주시니 우선 그 점에 대해 감사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클레오파트라가 가볍게 목례를 하자 아르시노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 뒤 그녀가 저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던 까닭이다.
이집트의 지배자인 파라오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면 부담스러워지는 건 다름 아닌 율리아다.
그녀가 살짝 한숨을 내쉬며 쓴웃음을 지었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완벽히 맞아떨어지고 있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그 정도도 이해 못 할 만큼 속이 좁은 여인은 아니랍니다. 저와 제 아이들을 향한 그이의 사랑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걸 믿고 있으니까요."
"멋진 신뢰관계네요. 전 예전부터 마르쿠스 님과 율리아 님이 이상적인 부부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만이 아니라 로마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겠죠. 지금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쭉."
"그건 참으로 고마운 이야기네요."
율리아와 클레오파트라의 미소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다나에는 곤란하다는 미소를 지으며 포도주를 홀짝거렸다.
반면 아르시노에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의외로 사이가 좋구나 하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지금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 가는 미묘한 공방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이 자리에서 그녀 한 명밖에 없었다.
이해관계가 완벽히 맞았다는 율리아의 말은 바꿔 말하자면, 마르쿠스가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를 취한 건 어디까지나 정략적인 일에 불과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뭘 해도 마르쿠스는 자신과 자신의 아이를 가장 사랑하니 신경 쓰지 않는다며 자신의 우위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그리고 클레오파트라는 자신은 부부관계에 개입할 마음이 없으니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돌려서 표현한 것이다.
아직 이런 눈치 싸움에 익숙하지 않은 아르시노에는 설탕으로 만든 과자를 집어 먹으며 불쑥 한 마디를 꺼냈다.
"그런데 두 분은 아이가 딸이면 좋겠어요, 아니면 아들이면 좋겠어요?"
"······?"
율리아와 클레오파트라의 황당하다는 시선이 동시에 아르시노에에게 꽂혔다.
그녀는 묘한 분위기에 어리둥절해하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혹시 불편한 질문이었나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에요. 아르시노에 님은 안티오키아에 있을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으셨네요."
"아니에요. 제가 얼마나 달라졌는데요. 마르쿠스 님도 이제 어디 가서 밀리지 않을 만큼의 학식을 갖췄다고 칭찬해 주기도 하셨어요."
"그건 참 잘된 일이네요. 앞으로도 계속 정진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심으로 환하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아르시노에의 모습에 율리아도 그만 진심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아르시노에는 클레오파트라처럼 면밀히 힘의 균형을 따지고, 여러 가지 이해관계를 고려해 자신의 위치를 결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냥 당연히 율리아가 첫 번째고 자신들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래서인지 율리아는 아르시노에에게 묘하게 호감이 간다고 해야 할까, 견제할 마음이 별로 들지 않았다.
"아까 했던 물음에 답하자면 그이는 딸을 좋아해요. 전 아들을 낳았으면 하지만 아마 그 사람은 제가 딸을 낳기를 바라고 있을걸요."
"예? 로마인은 보통 아들을 낳길 원하지 않나요?"
"보통은 그렇죠. 그래서 저도 처음 임신했을 때 조금 당황했었어요. 그이는 대놓고 딸을 낳았으면 좋겠다고 노래를 불렀거든요. 처음에는 제가 아들을 낳지 못해도 기죽지 않게 하려는 배려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진심이었다?"
율리아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우리는 그런 데에 민감하잖아요. 실제로 아이를 낳았을 때 남편의 표정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죠.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런 척을 하고 있는 것인지.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요··· 딸아이를 안을 때 그 사람의 얼굴에는 제가 상상도 하지 못한 행복함이 깃들어 있었어요."
"하긴 안티오키아에서도 소피아를 끼고 살다시피 하긴 했죠."
"딸이 예뻐서 죽는 아버지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결국 가문을 이을 아들을 일순위로 원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죠. 하지만 남편은 진심으로 그런 데에 구애받지 않을 거예요. 어차피 아들은 이미 있기도 하니 진심으로 둘째 딸을 원하고 있겠죠."
"딸이라······."
아르시노에나 클레오파트라가 율리아의 말에 자연스레 고개를 세로로 끄덕였다.
'확실히 딸에게는 엄청 약한 느낌이었지······.'
마르쿠스가 트라야누스와 아킬레스를 볼 때도 훈훈한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소피아가 칭얼거리거나 안길 때는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 헤벌쭉한 얼굴을 처음 봤을 때는 얼마나 놀랐던가.
마르쿠스는 두 파라오가 아이를 낳는다고 해도 적법한 자식으로 대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들이 아니라 딸을 낳는다면 분명히 알게 모르게 상당한 애정을 쏟으리라.
율리아가 아는 마르쿠스는 그 정도로 딸에게 무른 사람이었다.
마르쿠스의 딸바보 행적이 화제에 오르며 대화의 분위기가 많이 부드러워진 찰나, 시종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식당에 들어왔다.
"연회를 즐기시는데 죄송합니다. 마르쿠스 님께서 급히 안티오키아로 돌아가셨습니다."
화기애애하던 방 안에 순간 침묵이 내려앉았다.
"왜죠?"
율리아가 살짝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안티오키아에서 급하게 전갈이 왔습니다. 자세한 건 저도 듣지 못했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은 듯했습니다. 미처 얼굴을 보고 가지 못해 미안하다는 사과를 전하셨습니다."
"작별인사도 못 했는데······."
아르시노에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차피 문제를 다 해결하시면 돌아오실 테니 너무 마음 쓰지 마."
클레오파트라의 말에 율리아가 웃으며 동의를 표했다.
"사실 저는 기다림에는 이제 익숙하답니다. 두 분도 이제 마르쿠스의 여인이라면 익숙해져야 할 거예요. 그 사람이 일을 처리하는 동안 돌아올 장소를 깨끗하게 정리해 두는 게 우리의 역할이죠."
그렇게 말한 율리아는 차분하게 일어서서 포도주병을 들어 올렸다.
"그러니 내일은 그 사람의 건강과 이제 곧 세상에 나올 우리의 아이들을 위해 신들에게 기도하러 가도록 하죠."
< 200. 마르쿠스의 여인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