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 전초전 >
201.
안티오키아로 돌아온 마르쿠스는 의례적인 행사를 전부 건너뛰고 곧바로 업무보고부터 받았다.
평소 같았으면 자신에게 일을 다 맡겨놨다고 툴툴거렸을 셉티무스도 불만을 쏟아내지 않았다.
그만큼 현재 벌어지는 일을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뜻이리라.
차라리 농담 섞인 비난이라도 듣고 싶었던 마르쿠스로서는 입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의 서역도호부가 박살이 났다고?"
"예. 그래서 한에서 사신이 왔습니다. 비단길을 통한 교역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지만, 자신들의 탓이 아니라고 강조하더군요. 그리고 안정적인 교역의 재개를 위해 그곳에 자리 잡은 유목민들을 함께 쓸어버리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서역도호부를 점령한 유목민들은 흉노족인가?"
"글쎄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한나라에서는 흉노라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저희 쪽 상인들은 흉노라는 자들과 접촉해본 적이 없으니 제대로 확인을 해줄 수 없는 상황이지요."
서역도호부는 한나라가 현대의 내몽골 남부에 해당하는 지역에 설치한 관청이다.
주요 역할은 당연히 실크로드라 불리는 서역통상로를 방어하는 일이었다.
실크로드는 한나라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기 때문에 상당한 수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곳이 무너졌다는 건 한나라로서도 당황할 수밖에 없는 비보였다.
"비단길을 점령한 놈들이 우리 상인들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았나?"
"···그게 지금 가장 당혹스럽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한나라와 협력해 유목민들을 토벌할 확실한 명분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비단길을 점령한 유목민들은 생각 이상으로 저희 쪽에 온건한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통행료도 합리적이고 지나가면서 불편한 점이 없는지 많이 신경을 써준다고 하더군요."
"그게 정말인가?"
셉티무스는 몇 번이나 확인을 해보았다며 즉답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서역도호부의 눈길을 피해 암약하던 마적 떼도 전부 뿌리가 뽑혔다고 합니다. 이전과 비교해봤을 때 교역로는 오히려 더 안전해졌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러니까 교역에 문제가 생긴 자들은 한나라뿐이지 저희는 해당 사항이 없는 거죠."
"한나라 입장에서는 내지 않아도 됐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하니 심사가 뒤틀릴 수밖에 없겠군."
"냉정하게 따져봤을 때 한나라가 비단길을 관리하고 있을 때보다 비용이 적게 듭니다."
대충 상황이 다 이해됐다.
한나라의 말대로 서역도호부를 점령한 이들은 십중팔구 흉노일 것이다.
흉노가 이상할 정도로 온건한 이유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먼 훗날의 몽골제국도 이 비단길을 안정화하는 데 엄청난 공을 들였던 까닭이다.
막대한 부가 창출되는 실크로드는 중원의 어느 왕조라도 중요한 수입원일 수밖에 없었다.
몽골이 이곳을 관리할 때도 근방에 자리 잡았던 도적들과 마적들의 씨가 말랐다는 기록을 본 적이 있다.
흉노도 당연히 같은 이유로 실크로드를 안정화하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들이 관리하는 쪽이 더 안정적이라는 인식을 줘야 로마가 한나라의 편을 들지 않을 테니까.
'가장 최상은 우리가 직접 관리하는 거지만 지금 이 정도만 되어도 만족할만한 정도는 되겠군. 오히려 예상되는 수입은 훨씬 늘어났으니까.'
셉티무스가 추산한 예상액의 증가 수치를 보니 미소가 절로 나올 정도로 훌륭했다.
단순히 통행세만 줄어든 게 아니라 호시탐탐 상인들을 덮칠 기회만 보고 있던 마적들이 아예 씨가 말라버린 게 가장 컸다.
"다음에 한나라 사신이 오면 대충 둘러댈 구실을 생각해 놔야겠네. 우리로서도 동맹인 한나라를 도와주고 싶지만, 아무래도 군사를 일으킬 형편이 되지 않는다고 말이야."
"좋은 핑곗거리로 뭐가 있을까요? 당장 떠오르는 게 없는데요."
"없긴 왜 없어. 내전이 있잖아. 내전의 피해가 너무 참혹하고 복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많아 도저히 병력을 동원할 수가 없다고 하면 저쪽이 뭐라고 하겠어."
카이사르와 섹스투스가 정면으로 부딪친 걸 고려하면 내전의 피해 규모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았다.
권력 구조의 재편까지 생각하면 그 영향력은 막대하겠지만, 한나라 측에서 그걸 알 리가 없지 않은가.
그냥 로마 쪽에서 그렇다고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만 아직 한 가지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다.
'흉노가 서진을 한 건 서역도호부를 점거하고 실크로드를 차지하기 위해서였나? 로마를 노릴 수도 있다는 건 단순한 기우였고?'
단순히 그런 이유로 움직였다고 보기에는 설명이 안 되는 점이 많았다.
얼마 전 카렌 왕국으로 내려왔던 소수의 스키타이 유목민들.
그리고 게르마니아로 넘어오려고 했던 슬라브 부족들.
이들은 그럼 대체 누구에게 밀려나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버렸다는 말인가.
'흉노가 실크로드를 차지하고 주변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충돌이 있었나?'
일단 지금 상황에서는 이렇게 보는 게 그나마 합리적이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보면 흉노의 활동반경이 말도 안 되게 넓어졌다.
슬라브인들이 사는 지역과 스키타이가 활동하는 영역, 그리고 실크로드는 상당한 간격을 두고 떨어져 있다.
이 모든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가정하면 이미 로마의 동북방은 전부 흉노의 영역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조사대를 보냈을 때는 별다른 징후를 찾아내지 못했었다.
그렇다면 흉노 측에서 은폐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봐야 했는데, 그들의 목적이 단순히 실크로드의 관리에 있었다면 굳이 그렇게까지 숨어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서역도호부를 점령하기 위해서라고 하기에는 필요 이상으로 신중한 느낌이었다.
즉, 아직 뭔가가 더 남아있다.
이런 불길한 예감이 들었을 때는 빗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셉티무스, 일단 한나라 사신이 찾아오면 너무 단호하게 지원을 거절하지는 마. 어디까지나 상황이 나아진다면 협력해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여줘야 해."
"뭔가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저희로서는 비단길이 흉노라는 자들 손에 있는 게 가장 이득일 것 같은데요."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신중을 기해야지. 놈들이 언제 갑자기 돌변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교역로를 잘 닦아놨다고 안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는 건 사절이다.
마르쿠스는 추가로 한 가지 더 지시를 내렸다.
"카프카스 산맥 북쪽으로 조사대를 파견할 거야. 적당한 인원이 편성되는 대로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조치해줘."
"상당히 험준한 경로인데 무엇을 조사하면 되는 겁니까?"
"알 수 있는 모든 걸 전부 조사하라고 전해둬. 현지 부족들의 상태와 동향, 그리고 흉노의 입김이 정확히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봐야겠어."
아무리 은폐 공작을 하고 있더라고 해도 볼가강 유역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티가 날 수밖에 없다.
이렇게 했는데도 별다른 이상 징후가 포착되지 않는다면 그냥 걱정이 과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일단 결정을 내렸다면 누구보다 신속하게 움직이는 게 마르쿠스의 특징이었다.
상당한 무장과 장비를 갖춘 탐사대는 마르쿠스의 명령대로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가 테레크강 유역까지 나아갔다.
거기서 들어온 중간보고에 의하면 아직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현지 부족들도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마르쿠스는 일단 북쪽의 볼가강 하류까지는 올라가 보라는 명령을 내렸다.
'내가 너무 의심이 많았던 건가.'
추가 조사가 필요할 거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제 슬슬 마음을 놓아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마르쿠스가 흉노를 걱정하는 건 그가 원 역사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한나라라는 대제국이 흉노의 전성기에 얼마나 큰 피해를 봤는지 로마인들은 몰랐으나 그는 알았다.
애초에 유목민들이 강성해질 때마다 정주민족들이 피해를 보는 건 유구한 역사의 전통이자 어쩔 수 없는 흐름이기도 했다.
이건 단순히 동양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라 서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 흉노와 스키타이의 혼혈인 훈족이 발호했을 때 서방은 일방적으로 그들에게 유린당하며 공포에 떨었다.
이후 원나라가 침공해 왔을 때는 치열하게 싸우고 있던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사이좋게 나란히 쓸려나가 버렸다.
이때 기독교 세력은 처음에는 이슬람 세력을 짓밟는 몽골군의 침략을 환영했다고 한다.
그러나 무자비하게 모든 걸 초토화시키는 몽골군에 대한 공포로 도리어 후퇴하는 이슬람 세력을 도와주었다는 기록까지 있다.
마르쿠스는 이런 역사적인 사실들을 전부 알고 있기 때문에 유목민들의 침략을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지식이 너무 과한 걱정으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흉노의 서진은 분명 원 역사에서는 없었던 일이었고, 충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사안이었다.
'조사대가 볼가강까지 한 번 훑고 오면 이후의 계획을 고려해 봐야겠다. 흉노만이 아니라 로마의 권력 구도도 이제 슬슬 재편을 할 때가 됐으니까.'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맞아떨어졌다는 마르쿠스의 걱정은 이번에도 빗나가지 않았다.
조사대가 막 북쪽으로 진로를 잡아 움직이기 시작했을 무렵, 카렌 왕국에서 급보가 도착했다.
"큰일입니다! 수만의 북방 유목민들이 국경선을 돌파해 남진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카렌 왕국의 힘만으로는 막아낼 수 없는 규모라 로마의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합니다."
보고서를 읽고 있던 마르쿠스의 안색이 이전에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빛을 띠었다.
"정확한 병력 규모와 구성은?"
"확인된 걸로는 전원이 기병이고 최소 3만은 넘어간다는 것만 확인된 상황입니다. 이미 카렌 왕국의 국경 부근은 초토화됐다고 합니다."
최소 3만 이상의 병력이 전부 기병이라면 카렌 왕국의 힘으로는 막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밑에 있는 수렌 왕국의 도움을 받더라도 힘들 것이다.
"쳐들어온 놈들은 스키타이 부족인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선봉에 서있던 자들은 스키타이가 확실하다고 합니다."
"흉노에 밀린 놈들이 최후의 발악으로 전군을 이끌고 내려온 건가······."
최소 3만이라면 어쨌든 4만에 달하는 병력이라고 봐야 한다.
기병만 4만이라면 이는 아무리 로마라고 해도 절대로 얕볼 수 있는 규모의 병력이 아니었다.
문제는 지금 쇠락해 가고 있는 스키타이가 4만이나 되는 기병을 동원할 전략이 있느냐는 점이었다.
정말로 모든 걸 쥐어짜내면 가능할지도 모르긴 하다.
그렇다면 지금 스키타이는 자신들의 국운을 걸고 로마를 침공하는 것이라 봐야 한다.
'놈들이 로마의 힘을 모를 리가 없는데··· 자살할 생각이 아니라면야 이렇게 쳐들어오는 게 말이 되는 건가?'
이전에 잠깐 몇몇 부족이 카렌 왕국으로 쳐들어왔을 때 로마군은 이들을 간단히 격퇴해버렸다.
스키타이도 로마의 힘을 모를 리가 없는데 굳이 전 병력을 끌고 쳐들어오는 이유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어차피 터전을 버리고 이주할 생각이라면 차라리 서쪽으로 가든가, 아니면 아예 빙 돌아서 인도 쪽으로 가는 게 더 옳은 판단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이해가 가든 아니든 지금은 쳐들어온 침략자들을 격퇴하는 게 급선무였다.
카렌 왕국과 수렌 왕국은 혹시라도 밀고 내려올지 모르는 유목민들을 막아내기 위해 세운 로마의 방파제였다.
이들이 버틸 수 있도록 지원을 해줘야 동방의 국경에 안정감이 생긴다.
마르쿠스는 즉각 수레나스를 호출하고 로마에 보낼 보고서를 작성했다.
<선봉으로 내려온 자들이 3만에 달한다면 적의 전체 전력이 4만 이상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의 병력이 전부 기병이라면 우리도 전력을 동원해 맞서야 합니다. 그러니 추가로 5개 군단을 더 편성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려주시길 바랍니다.>
마르쿠스가 지휘할 수 있는 군단은 10개 군단이었으나, 이 중 1개 군단은 시리아를 방어하기 위해 남겨둬야 했다.
그리고 다른 1개 군단은 수송을 책임져야 하니 실질적으로 전투에 쓸 수 있는 군단은 8개가 최대치였다.
수레나스에게 8개 군단을 맡긴 건 마르쿠스로서도 총력전을 벌이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로마에서 오는 답장을 기다리지도 않고 일단 추가로 병력을 편성했다.
총독의 권한상 방어를 위해서라면 급한 대로 병력을 징발하고 사후 보고를 받아도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15개 군단이나 되는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동원하는 것이었지만, 크게 부담은 되지 않았다.
어차피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현재 동방의 생산력으로는 20개 군단도 거뜬히 감당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여기에 이집트와 아라비아 쪽의 지원까지 더하면 30개 군단까지도 병력을 늘릴 수 있었다.
그러니 아무리 스키타이가 모든 병력을 이끌고 내려온다고 하더라도 로마의 방어선을 뚫는 건 불가능하다.
마르쿠스는 동방 속주의 영토에 단 한 걸음도 적들을 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러려면 카렌 왕국에서 적들의 진입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했다.
그것이 가능한 압도적인 힘을 가진 군대.
그게 바로 현재 마르쿠스를 따르는 동방 로마군이었다.
< 201. 전초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