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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전초전 (203/326)

  < 202. 전초전 >

  202.

  진군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마르쿠스의 명에 따라 8개 군단이 카렌 왕국으로 향했다.

  평소부터 이런 상황을 상정해두고 훈련을 거듭했기에 병사들의 행군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물론 처음 계획은 이런 전군 동원이 아니었다.

  8개 군단에 보급을 책임질 수송부대가 전부 출격하게 되면 시리아에는 고작 1개 군단만이 남게 된다.

  그래도 나바테아에 아라비아까지 전부 평정한 상태였기 때문에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은 로마의 다른 동맹국들도 4만에 달하는 유목민들이 쳐들어 왔다는 소식에 불안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었다.

  그러니 지금은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해 로마의 힘을 보여주는 게 최선의 판단이다.

  이미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려 있던 카렌 왕국은 수레나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마치 구세주처럼 받아들였다.

  "어서 오십시오!"

  "상황은 어떤가?"

  수레나스는 모든 단계를 건너뛰고 현황 보고부터 들었다.

  왕국의 분봉왕인 카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정리해둔 자료를 앞으로 내밀었다.

  "일단 적군의 기세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거셉니다. 성벽을 견고하게 세우지 못한 거점은 이미 대부분 적의 손에 들어갔고 저희는 수도에서 방어를 굳히고 로마의 지원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적의 규모는 이제 정확히 파악됐나?"

  "예. 최소 3만이라고 했지만 그것보다는 확실히 더 많습니다. 4만은 넘어가고 5만은 안 될 거라는 게 저희 참모진의 예상입니다."

  "많군."

  수레나스가 가볍게 혀를 차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희도 최선을 다해 저항을 하긴 했습니다만······."

  카렌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병력을 아무리 동원해봐야 침공해 들어온 적군과 수를 맞추는 정도밖에 할 수 없다.

  그나마 그중 대다수는 보병이었고 무장상태도 빈약했으니 상대가 될 리 없다.

  수레나스는 방어선이 뚫렸다고 카렌을 질타할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이건 산사태가 일어났는데 어째서 막지 못했느냐고 책임자를 질책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까닭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밀리는 와중에도 적의 규모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동 경로와 현재 위치를 조사하는 것만으로도 카렌은 할 일을 다 했다고 봐야 한다.

  "적의 기동성이 좋으니 섣부르게 전투를 하기보다는 일단 방어선을 두텁게 하고 적을 몰아내는 데 중점을 두는 게 좋겠군. 남은 병력은 얼마나 있지?"

  "초반에 저들과 싸우며 너무 큰 손실을 입었습니다. 거점을 지키는 수비 병력을 제외하면 지원해드릴 수 있는 병력은 1만 정도밖에는 없습니다."

  "나쁘지 않군. 그 정도면 충분하다."

  "그런데 마르쿠스 님은 오시지 않는 겁니까?"

  "마르쿠스 님은 5개 군단이 추가로 편성되는 대로 그들을 이끌고 합류하실 거다. 그전까지는 내가 임시로 군단을 지휘하게 됐고."

  임시라고는 해도 귀화한 파르티아의 귀족이 로마군을 지휘한다는 말에 카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르쿠스가 얼마나 수레나스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지 짐작이 됐기 때문이다.

  동시에 귀화한 사람에게 이런 중책을 맡기는 로마와 마르쿠스의 관용정책의 진가를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됐다.

  애초에 마르쿠스가 굳이 수레나스를 먼저 보낸 건 카렌 왕국과 남부의 수렌 왕국에게 지금 같은 느낌을 주려고 한 것이다.

  그리고 수레나스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스키타이의 공세를 억제할 수 있는 거라는 확신도 있었다.

  수레나스는 자신을 믿고 중책을 맡긴 주군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우선 척후병을 풀어 분쟁 지역의 동태를 파악하고 스키타이군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현재 로마군의 수는 5만 남짓.

  여기에 카렌 왕국의 1만 지원군이 더해졌으니 6만이었다.

  유목민을 상대하기 위해 특별히 기병의 비율을 늘렸으나, 기병대의 수는 1.5만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수적으로는 적보다 앞서지만 기병의 수가 이토록 차이가 나면 섣불리 싸움을 걸긴 어렵다.

  하지만 몇 번 정도 적과 부딪쳐 보니 이 정도라면 문제없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적의 군세는 사납긴 했어도 체계화된 움직임이 부족했고, 전력도 그리 충실해 보이지는 않았다.

  수레나스는 확실한 견적이 나오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우수한 지휘관일수록 판단은 신중하게, 결행은 신속하게 하는 법이다.

  8개 군단이 지축을 울리며 스키타이군의 진영으로 접근했다.

  적의 밑바닥이 대충 보이는 이상 전쟁을 오래 끌 이유가 없었다.

  "스키타이가 회전에 응한다면 이 전쟁은 사흘 안에 끝날 거다. 그래도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 절대 방심은 하지 말도록. 철저하게 준비를 하고 적들을 요격해야 한다."

  마르쿠스가 수레나스에게 붙여준 안토니우스도 별다른 이견을 품지 않았다.

  스키타이가 정말로 흉노에게 쫓겨나 터전을 잃어버린 거라면 로마군과 싸워서 이기는 것 외에는 생존할 방법이 없다.

  로마군은 스키타이 병사들이 결사의 각오를 품고 회전에 임하리라 예측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스키타이는 로마와의 결전을 피했다.

  그들은 로마군이 접근해오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지를 버렸다.

  그리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며 다른 마을과 도시들을 약탈하는 데에 전념했다.

  실로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카렌 왕국을 점령하고 여기에 눌러앉을 생각이 아니었나? 아니면 일종의 위장 공작인가······."

  이해가 되지 않는 적의 움직임에 자연스레 생각이 많아졌다.

  안토니우스는 후자 쪽에 좀 더 무게를 두었다.

  "아무래도 우리를 초조하게 만들려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그냥 정면으로 싸우면 승산이 없을 것 같으니 최대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 뒤에 승부를 보려는 게 아니겠소?"

  "역시 그렇게밖에 볼 수 없겠지."

  이게 단순히 약탈을 위해 쳐들어온 거라면 4만이나 되는 병력을 끌고 올 이유가 없다.

  스키타이의 입장에서는 로마군을 전멸시켜 그들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야 한다.

  그리고 카렌 왕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략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지금 나와 있는 수레나스의 군단과 일전을 벌여야만 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지원군이 도착할 테고 그러면 스키타이의 승률은 0에 수렴하게 된다.

  어린아이라도 알 수 있는 간단한 흐름이었다.

  이런 간단한 사실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저런 움직임을 보이는 것일까.

  수레나스는 적들이 그 정도로 멍청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신중에 신중을 기할 정도로 벼랑 끝에 몰린 상황이 아닐까 싶었다.

  '이렇게 되면 마르쿠스 님이 도착하실 때까지 장기전을 예상해야겠군.'

  스키타이가 전면전을 벌일 마음이 없다면 그에 맞는 전략을 취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렇게 흘러가면 수레나스에게는 오히려 나쁠 게 없었다.

  카렌 왕국의 피해는 심해지겠지만, 로마로서는 군단의 손실을 최소화한 채로 적을 무력화하기가 용이해지는 까닭이다.

  "적에게 식량이 넘어가지 않도록 모든 식량을 후방으로 옮겨라. 옮길 수 없는 식량은 불태워 적들의 현지조달을 막는다."

  수레나스는 무리하게 적들을 쫓는 게 아니라 조금씩 스키타이군을 몰아넣으며 퇴로의 방향을 강제했다.

  스키타이의 병력은 그물에 걸린 줄도 모르고 수레나스가 설정해둔 경로로 움직이며 변방을 들쑤시는 데 전념할 뿐이었다.

  그러나 예상되는 공격지점은 이미 주민들을 대피시킨 뒤라 실질적인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한 달, 앞으로 한 달이다.'

  지금이야 수적 우세가 그리 크지 않지만 마르쿠스의 군단까지 도착하면 저들이 지금처럼 움직일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바로 행동을 개시한다.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돌아다닐 수 있는 것도 이제 한 달이면 끝날 것이다.

  스키타이 기병대는 오늘도 저 멀리 까마득한 곳에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질주하고 있었다.

  수레나스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롭게 번뜩였다.

  ※※※

  마르쿠스가 이끄는 군단이 카렌 왕국에 도착한 건 수레나스의 예상대로 정확히 한 달 뒤였다.

  전쟁이 장기화되어도 문제없을 정도로 모든 준비를 끝내놓았으니 이제 걸릴 건 아무것도 없었다.

  수레나스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보고하고 마르쿠스에게 지휘권을 반납했다.

  그는 지금까지 훌륭히 임무를 수행한 부하를 치하하고 본격적인 토벌작전을 개시했다.

  추가 군단 편성에 한 달이나 시간을 들인 건 이번에 끌어모은 병사들의 거의 절반이 기병대였기 때문이다.

  덕분에 현재 마르쿠스가 이끄는 군사의 수는 9만이 훌쩍 넘었고, 기병의 수만 해도 3만이 넘었다.

  이 정도라면 포위망을 펼쳐서 스키타이군을 압박하기에 충분했다.

  "적들은 어디까지 왔지?"

  "동쪽 숲의 경계에서 진을 치고 있습니다. 아마 거기서 식수를 보급한 듯싶습니다."

  "이젠 더 내려갈 곳도 없으니 국경 밖으로 도망가든가 아니면 싸울 수밖에 없겠지."

  스키타이가 이동할 수 있는 경로 중 서쪽과 북쪽은 이미 마르쿠스의 군단에게 완벽히 틀어 막혔다.

  수렌 왕국으로 향하는 남쪽의 경계는 지형상 기병들이 빠르게 돌파할 수 없었다.

  억지로 뚫고 가려고 하면 마르쿠스의 군단에게 후방을 타격당해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카렌 왕국에서 손을 떼고 도망가든지, 아니면 로마군과 일전을 벌이는 수밖에 없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더 이상 길이 없다고 판단한 스키타이군은 새벽녘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두두.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동쪽 저편으로부터 들려왔다.

  "진형을 갖춰라! 저들에게 우리와 맞선 대가를 치르게 해줘라!"

  동방 로마군은 동방을 평정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줄곧 유목민들을 상대하기 위한 훈련만을 해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앞으로 그들이 마주칠 적이 있다면 그건 동쪽에서 밀고 들어올 유목민들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마치 기계처럼 정확히 진형을 갖춘 로마군은 기병대와 유기적으로 호흡을 맞춰 착실히 스키타이의 병력을 깎아냈다.

  기병대의 전력도 로마군 쪽이 더 우수했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손쉽게 적을 무력화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예상외의 상황이 펼쳐졌다.

  스키타이의 기병대가 전황이 불리해지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병력을 뒤로 물린 것이다.

  그리고는 쏜살같이 말을 내달려 동쪽으로 후퇴해 버렸다.

  일단 보병이 주력인 로마군은 작정하고 후퇴하는 유목민들을 추격하기가 힘들었다.

  기병대만을 풀어 쫓아가기엔 도주하는 적들의 수가 너무 많았다.

  유인책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한 마르쿠스는 기병대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적의 움직임을 살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반나절 정도 적을 쫓아다닌 기병대가 돌아와서 올린 보고는 귀로 듣고도 믿지 못할 정도로 이상했다.

  "스키타이군은 그대로 국경 밖까지 도주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는지 망설인다거나 아쉬워하는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더군요."

  "···이상하군. 자신들의 터전에서 쫓겨나서 여기까지 밀려온 게 아니었나? 이렇게 쉽게 물러날 리가 없을 텐데?"

  상식적으로 기습공격이란 실패하면 그 다음의 성공률은 처참할 정도로 곤두박질치기 마련이다.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국경 밖으로 도망간 이상 스키타이가 다시 카렌 왕국을 도모하는 건 이제 거의 불가능하다.

  "일단 재침공을 대비해 방어선을 구축하도록 한다. 우리를 안심시킨 뒤 다시 쳐들어오려는 기만전술일지도 모르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적의 행동이 의문스럽긴 했으나, 마르쿠스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마쳤다.

  만약 스키타이가 로마군을 방심시키기 위해 후퇴하는 척을 한 거라면 완벽한 오판이었다.

  마르쿠스는 방심 따위는 하지 않았다.

  15개의 로마군은 한동안 카렌 왕국에 머물면서 방어선을 두텁게 구축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이 정도로 방비를 철저히 해두면 스키타이의 전력으로는 어떤 수를 쓴다고 해도 돌파가 불가능하다.

  차라리 진로를 틀어 인도 쪽으로 내려가는 게 더 현실성 있는 계획이리라.

  마르쿠스가 필요 이상으로 방어선을 까는 건 단순히 스키타이만을 의식해서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다소 과하게 느껴질 정도의 투자를 하는 것이었다.

  '스키타이가 단순히 흉노에게 밀려났다고만은 볼 수 없지. 그들에게 복속돼서 첨병으로 쓰이고 있을 확률을 배제할 수 없어.'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스키타이군의 움직임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전면전을 피하고 마치 시간을 끌려는 듯한 두서없는 움직임.

  그리고 전투에서 밀리자마자 미련 없이 후퇴해 버리는 모습까지.

  벼랑 끝에 몰려서 새로운 터전을 찾아야 하는 자들 특유의 절박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카이사르를 따라 종군했던 갈리아 전쟁 첫해에 헬베티족과 싸웠기에 알 수 있었다.

  터전을 버리고 온 이들은 여기서 물러나면 죽음밖에 없다는 절박함을 가슴속에 품고 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스키타이 병사들에게서는 그런 심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저들이 단순한 정찰병의 용도라면 이후 흉노의 본대가 밀고 들어올 가능성이 있었다.

  스키타이가 이리저리 돌아다닌 건 본대가 쳐들어왔을 때의 침공 루트를 조사해본 거라고 하면 얼추 말이 된다.

  그래도 15개 군단이 상주하며 철통같은 방어선을 형성한 이상 제아무리 흉노가 대규모 기병을 이끌고 온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수개월에 걸쳐 국경을 완벽히 틀어막고 있을 동안에도 별다른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서쪽으로 도망간 스키타이 병사들은 하늘로 솟았는지 땅으로 꺼졌는지 별다른 이야기가 들려오지 않았다.

  너무 과민반응을 했던 것일까.

  그저 스키타이는 로마군이 너무 강해 도주했을 뿐인데 자신이 거기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게 아닐까.

  조금씩 그런 생각이 피어날 무렵.

  "크, 큰일 났습니다! 임페라토르시여!"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완전히 새하얗게 얼굴이 질린 채 달려오는 전령의 기세가 딱 봐도 심상치 않았다.

  어찌나 급해 보였던지 경계를 서는 병사들이 지체 없이 몸을 빼 길을 열어주었다.

  제대로 된 경례조차 하지 않고 다짜고짜 품속을 뒤진 병사는 거의 던지다시피 서신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로, 로마에서 급보가 도착했습니다!"

  그렇게 먼 거리를 달리지는 않았을 텐데 병사의 숨은 턱밑까지 차 있었다.

  체력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그만큼 마음이 급했기 때문이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서 서신을 펼쳐 내용을 읽기도 전에 전령의 황망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마르쿠스의 귓전을 울렸다.

  "엘베강의 방어를 위해 주둔하고 있던 군단이 전멸했습니다! 게르마니아 지역이··· 완전히 초토화됐다고 합니다!"

  < 202. 전초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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