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3 대초원의 지배자 >
203.
바야투르는 흉노의 서쪽 변경에 자리 잡은 작은 부족의 전사였다.
용감한 자라는 뜻의 바야투르라는 이름은 흉노에서는 단순한 전사의 이름이 아니었다.
중원을 통일한 한나라의 고제를 쓰러뜨리고 서역의 26개 나라를 평정해 흉노를 전성기로 이끈 대선우.
그게 바로 흉노족이라면 모두가 경의를 표하는 위대한 전사의 이름이었다.
이 위대한 이름을 받은 건 바야투르가 딱히 세력이 있는 부족의 후계자라서가 아니었다.
그냥 아이가 장차 그렇게 커다란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바람이었을 뿐이다.
그 누구도, 심지어 바야투르 자신도 흉노를 통일하는 대선우가 되겠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그의 부족은 본래 서역에서 근근하게 약탈을 이어가며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는 약소 세력이었다.
원 역사에서 바야투르의 부족은 식량난을 이기지 못하고 동쪽으로 이주해 호한야 선우의 눈 밖에 나게 된다.
선우란 흉노족의 우두머리를 칭하는 이름이지만, 통일되지 않은 흉노는 다섯 명의 선우가 대립하며 끊임없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다.
역사대로라면 이 다섯 선우 중 호한야가 다른 선우들을 굴복시키고 흉노를 통일하게 된다.
하지만 그 뒤 세력의 분열을 막지 못한 호한야는 한의 신하가 되어 자신의 자리를 보전받았다.
바야투르의 부족은 이 과정에서 호한야에게 전멸당하고, 아직 어렸던 바야투르는 재능을 피우지도 못하고 단명하게 된다.
그러나 마르쿠스가 실크로드를 원 역사보다 훨씬 더 발전시키며 역사의 궤도가 어긋나기 시작했다. 동방과 서방의 모든 부가 실크로드로 쏠리자 자연스레 떡고물을 받아 챙기고자 하는 자들이 꼬여든 것이다.
이 당시의 실크로드는 파르티아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아직 정비가 완벽히 되어 있지 않아 많은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바야투르의 부족은 이미 경쟁이 치열한 동쪽으로 가는 대신 새로운 기회의 땅인 서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이 판단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바야투르는 서쪽에서 실크로드를 습격하려는 마적 떼를 털기도 하고, 파르티아의 돈을 받고 상인들을 호위해 주기도 하며 경험을 쌓았다.
듣자 하니 한나라로 흘러들어가는 설탕이나 포도주라는 물건은 파르티아가 아닌 로마라는 나라에서 온다고 했다.
'이런 진귀한 물건들을 만드는 로마는 대체 어떤 나라일까.'
원래 강대했던 파르티아는 로마에게 전쟁에서 패배해 비옥한 땅을 잃어버리고, 약소국으로 전락했다는 말도 들렸다.
그게 바야투르가 처음으로 로마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 순간이었다.
로마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었던 찰나, 로마와 파르티아 사이에 재차 전쟁이 터졌다.
제대로 병력을 충원할 수 없었던 파르티아는 급한 대로 돈을 풀어 용병을 모집했다.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오는 돈은 아직 많았으니 용병을 모집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파르티아가 제시하는 돈에 이끌려 스키타이 기병대와 바야투르의 부족들도 상당수 로마와의 전쟁에 참가했다.
그 전쟁은 마치 신의 계시와도 같았다.
처음으로 전장에서 맞닥뜨린 로마군은 충격과 경악 그 자체였다.
전쟁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짓밟힌 전투였으나, 바야투르에게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배울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다.
"···이게 바로 로마군의 전쟁인가."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거라고는 말을 타고 돌아다니는 병정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느낄 정도로 로마군의 전투력과 전술은 인상 깊었다.
특히 파르티아의 병사들을 썩은 짚단마냥 베고 다니던 전사는 바야투르의 호승심을 크게 자극했다.
'지금 여기서 죽더라도 저자와 싸워보고 싶다!'
만약 그가 속한 부대가 후퇴하지 않았다면 바야투르는 바로 만곡도를 뽑아 들어 돌진했으리라.
장비와 기술 모두 아직 부족했던 바야투르가 그때 스파르타쿠스에게 덤벼들었다면 거기에서 명을 다했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남은 바야투르는 그 전투 이후로 자신의 안에서 무언가가 변하는 게 느껴졌다.
전사로서도, 부족을 이끄는 수장으로서도 좇을 수 있는 이상적인 목표를 만났다.
바야투르는 그 길로 파르티아군을 떠나 부족으로 돌아갔다.
그의 손에는 기적적으로 손에 넣은 로마군의 활이 들려 있었다.
"부족장의 자리를 주십시오. 저는 흉노를 통일해 대선우의 자리에 오를 것입니다."
커다란 세계를 접하고 온 바야투르는 현재의 흉노를 뿌리부터 뒤집어 놓고자 하는 열망을 느꼈다.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출발해야 한다.
순식간에 젊은 전사들을 수하로 만든 그는 부족장에게 결투를 신청해 단 일 합에 그를 쳐 죽였다.
순조롭게 부족을 손에 넣은 그는 모든 걸 바꾸어놓았다.
흉노가 사용하는 초기 등자를 로마군이 사용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기술자들을 납치해와 연구에 돌입한 끝에 로마의 활과 유사한 성능을 가진 활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건 천운이라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본디 천하의 주인은 하늘이 결정하는 법.
이 뜻밖의 성과는 바야투르와 그의 부족들의 자신감을 더욱 치솟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이상 한의 눈치를 보이는 나약한 선우는 필요 없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 것이다."
천자는 더 이상 천하의 중심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국가 역시 중원이 아니다.
이 인식이 미치는 파장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했다.
바야투르는 흉노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목표와 꿈을 제시해 수많은 부족들을 끌어들였다.
물론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무력과 전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없이 많은 전투를 거치며 바야투르는 끝도 없이 강해졌다.
그의 세계를 뒤흔든 로마의 장수에 버금갈 정도의 경지에 닿을 때까지 그의 성장은 멈추지 않았다.
궁기병을 활용하는 그의 전술도 나날이 발전을 더했다.
로마군이 보여주었던 정교한 편제와 유기적인 움직임도 자신의 나름대로 재현해 보았다.
바야투르는 그렇게 어느새 흉노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강대한 세력이 되어 있었다.
다섯 선우들은 차례차례 그의 먹이가 되어 흡수당했다.
나약해진 선우들을 먹어치운 바야투르는 3년도 채 되지 않아 호한야를 뺀 모든 선우들을 자신의 발아래에 복속시켰다.
위협을 느낀 호한야는 한나라의 힘을 빌려 바야투르와 대적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게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한발 빠르게 이 정보를 입수한 바야투르가 전사들을 이끌고 호한야의 진영으로 쳐들어간 것이다.
"초원의 긍지를 버리고 중원의 개돼지가 되어 살아가기로 한 호한야가 선우를 칭하는 것은 어불성설. 그를 따르는 자는 똑같이 한의 개가 된 자들이라 여기고 자비를 베풀지 않겠다!"
12만의 기병을 이끌고 내려온 바야투르의 기세에 눌린 호한야의 병사들은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솔직히 그들이 봐도 한의 신하가 되려는 호한야와 흉노를 일통해 강대한 대제국을 세우려는 바야투르의 그릇은 차원이 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한야를 따르는 부족들은 하나하나 바야투르의 손에 들어갔고, 흉노는 수십 년 만에 다시 하나로 통일되었다.
바야투르는 호한야의 목을 베어 한나라에 보내는 것으로 앞으로 흉노는 한의 눈치를 보지 않겠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었다.
하나로 통일된 흉노의 저력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 한에는 문자 그대로 초비상이 걸렸다.
어마어마한 수의 병력이 장성과 흉노의 국경으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흉노는 한을 치지 않았다.
바야투르에게 한나라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먹음직스러운 먹이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가장 손에 넣고 싶은 곳은 더욱 서쪽에 따로 있었다.
"모두 들어라! 흉노의 유일무이한 대선우 바야투르가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모든 문명의 중심은 바로 저 중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더욱 넓은 곳으로 시선을 돌려야 할 때다. 서쪽에는 저 중원보다도 더 풍요롭고 더욱 많은 식량이 흘러넘치는 대국이 존재한다.
나는 어렸을 적 직접 그들의 군대와 칼을 맞대본 경험이 있다. 그들이야말로 현 세계의 중심이며 우리가 포식해야 할 진정한 먹잇감이다. 서쪽으로 가자. 상상할 수조차 없는 부를 축적한 황금의 땅이 우리를 기다린다!
"
"우오오오오!"
"대선우를 따르자!"
흉노의 대군은 크게 세 덩어리로 쪼개져 서쪽을 향해 진군했다.
여정은 순조로웠다.
새로운 활과 등자로 무장한 흉노의 기병들에게는 그 누구도 대적하지 못했다.
서역에 있던 소국들과 여러 부족들은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먼지처럼 쓸려나갔다.
바야투르는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자들은 모조리 죽이고, 싸우기 전에 항복하는 이들만을 살려주었다.
로마와 흉노의 중간 지대에 살던 사람들은 마치 먼지가 빗자루에 쓸려나가듯 서쪽으로 밀려 나갔다.
흉노에게 처음으로 저항다운 저항을 한 건 파르티아의 북쪽에 자리를 잡고 있던 스키타이였다.
그러나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는 스키타이는 전성기보다 아득하게 강해진 흉노를 막아낼 수 없었다.
바야투르는 10만의 기병대를 계속 서쪽으로 진군시키고 나머지 기병대를 이끌고 스키타이와 맞상대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로부터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스키타이의 부족장들은 바야투르의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복속되는 걸 거부한 몇몇 부족들은 로마의 영역으로 내려갔으나 거기서 전부 죽임을 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바야투르는 여기서 일단 한 번 숨을 고르고 정비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힘 싸움에서 밀린 놈들이 로마에 도착한 이상 그들도 우리의 존재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우선 전방에 위치한 병력을 뒤로 물리고 원정에 필요한 군량을 축적하도록 한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대선우시여."
바야투르의 심복이 된 기존 네 선우의 후계자들은 명령대로 움직였다.
그들은 흉노에게 항복한 부족들을 철저히 입단속 시키고, 멀찌감치 병력을 뒤로 물려 로마 정찰병들의 눈을 피했다.
그리고 인근의 소국들을 철저히 파괴해 식량을 징발해 다가올 대전쟁을 준비해 나갔다.
바야투르의 밑에 있는 세력은 이제 흉노만이 아니었다.
서쪽으로 진군해 오며 수많은 유목민족들을 흡수하고 계속해서 세력을 불려 나갔기 때문이다.
마침내 볼가강 유역까지 나아가 북방 대초원의 모든 유목민들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 대선우.
그는 초원의 네 선우들과 수백의 족장들이 보는 앞에서 천신 텡그리에게 바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나 바야투르. 지금까지는 흉노의 대선우(텡리고도선우)를 칭했으나 이제부터는 대초원 전체를 다스리는 천태선우(텡리아구유크선우)라 칭한다."
동쪽으로는 천산산맥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볼가강까지 끝없이 펼쳐진 광활한 초원.
바야흐로 일찍이 유래가 없었던 대초원을 전부 평정한 거대세력의 출현이었다.
초원 전체를 뒤덮을 정도의 힘을 지니게 된 천태선우는 그러면서도 자만하지 않고 로마의 동향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였다.
그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로마는 3명의 황제가 다스리고 있었다.
흉노는 다스리고 있는 지역을 따라 그들을 각각 북제와 동제, 남제로 구분했다.
가장 눈에 가시인 건 동제 마르쿠스였다.
파르티아 전에 참전했던 바야투르는 마르쿠스의 군대가 얼마나 강력한지 이미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다스리는 지역은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땅이라는 사실도 익히 알았다.
가장 탐나는 땅이긴 했으나 그 정도의 생산력을 지닌 토지라면 어마어마한 수의 군대를 뽑아낼 수 있을 터.
당연히 점령도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마르쿠스는 가장 먼저 흉노의 침략을 경계하고 조사대를 파견하고 있었다.
바야투르는 이곳을 통해 밀고 들어가려고 했던 기존의 계획을 백지로 돌렸다.
어떻게 해야 고민을 하고 있던 찰나, 다행스럽게도 북제와 새롭게 자리를 이어받은 남제가 내전을 벌인다는 소식이 귀에 들어왔다.
바야투르는 마침내 전쟁을 시작할 때가 왔다고 판단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군량을 보충하고 눈속임 작전을 펼치기 위해 한나라의 서역도호부를 공격했다.
수만 기병의 군세에 휩쓸린 서역도호부는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서역도호부의 모든 물자를 챙긴 흉노는 보급로를 확실히 하기 위해 실크로드 주변에 있는 모든 도적과 마적의 씨를 말려버렸다.
그리고 로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지나가는 상인들에게는 소량의 통행료만을 거두었다.
이걸로 모든 준비는 끝났다.
바야투르는 본대를 이끌고 게르마니아 방향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동시에 속국으로 전락한 스키타이의 부족장들에게는 전군을 이끌고 마르쿠스가 다스리는 지역을 침공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너희들의 목적은 승리하는 게 아니라 동제를 자신의 땅에 묶어두는 것이다. 전면전을 피하고 철저하게 신경을 끄는 데에만 주력해라. 추가로 카이두 족장의 2만 기병대가 특별임무를 맡는다."
4만의 스키타이 기병과 2만의 별동대가 순조롭게 작전을 완수해낸다면 이 계책은 성공할 것이다.
원역사보다 천 년 이상 일찍 하나로 집결된 유목민의 대군이 마침내 로마를 향해 진군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초원에 끝도 없이 늘어선 기병들의 위용은 감히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질주하는 기병들의 말발굽 소리는 마치 천둥소리와도 같았다.
그들의 발걸음에 땅이 뒤흔들리고 하늘마저 숨죽이는 듯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앞으로 반나절 더 진군하면 로마가 경계로 삼은 강이 보입니다. 아마 그곳을 넘어가기 전에 적들도 우리의 존재를 눈치챌 것입니다."
부하의 보고에 바야투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미 주변 지리를 완벽히 숙지하고 있었다.
"대규모의 기병이 강을 도하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저들이 눈 뜨고 그걸 지켜보고 있다면 몰라도."
"예. 강폭이 그리 넓지 않은 곳이 몇 군데 있긴 하지만 그곳은 적의 감시병이 상주하고 있습니다."
"일단 강을 도하하고 난 뒤에도 문제다. 게르마니아 지역은 숲이 많아 기병이 마음껏 활보하기에 그리 좋은 지형이 아니야. 여기서 시간이 끌리면 우리 측의 피해만 커질 우려가 있다."
"속전속결로 돌파해야겠군요."
"그래. 그러니 여기서 다시 한번 명한다. 항복 따위는 받지 마라. 눈에 들어오는 자들은 예외 없이 전부 죽이고 최대한 빠르게 앞으로 나아간다."
"천태선우의 명을 받듭니다!"
바야투르의 지시에 모든 부족장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이며 우렁차게 외쳤다.
살기로 눈을 번득이는 부하들을 굽어보는 바야투르의 입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그가 천천히 둥근 만곡도로 저 멀리 보이는 게르마니아의 땅을 겨누었다.
지금 이 칼끝이 향하는 곳, 저 지상 최대의 제국에 텡그리의 진노를 내리리라.
"가라, 초원의 전사들이여!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짓밟고, 파괴해라! 로마는 우리의 것이다!"
20만. 역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 기병의 진군과 함께, 로마의 전신 마르스와 대초원의 천신 텡그리가 격돌할 대전쟁의 문이 열렸다.
< 203 대초원의 지배자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