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4. 대전의 시작 >
204.
티투스 아티우스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수석 부관이자 갈리아 전쟁 초기부터 맹활약을 펼친 우수한 지휘관이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전기에서도 라비에누스에 대한 신뢰를 숨기지 않았고, 그에게 여러 차례 배후를 맡기기도 했었다.
다만 폼페이우스와 동향 출신인 그의 가문은 엄연히 폼페이우스의 클리엔테스였다.
그 때문인지 원 역사에서는 내전이 발발했을 때 카이사르가 아닌 폼페이우스의 편에 붙어 결국 최후를 맞이했다.
정확히 어째서 그가 카이사르를 등졌는지는 아직 역사가들도 명확하게 답을 내리지 못한 사안이다.
그러나 지금 두 사람의 관계는 역사와는 달랐다.
폼페이우스가 사망하면서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클리엔테스로 전향했고, 빛나는 미래를 약속받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를 대신해 갈리아 속주를 안정화 시키는 임무를 맡은 것만 보아도 그가 어느 정도의 신뢰를 받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라비에누스는 카이사르의 기대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안심하고 자리를 비울 수 있었던 것이다.
섹스투스와의 내전이 끝난 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와 마실리아를 오고 가며 여러 가지 뒤처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새로 채굴권을 손에 넣은 히스파니아 지역을 시찰하고, 어이없게 점령당했던 마실리아를 다시 보수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라비에누스가 게르마니아에 도착했을 때는 슬라브족은 다시 엘베강 너머로 쫓겨난 뒤였다.
보고를 들어보니 모든 게 순조로웠다.
3개 군단만으로는 엘베강의 방어선을 전부 커버하는 건 불가능했으나, 도하를 허용해도 별로 문제 될 건 없었다.
강을 건너온 슬라브 부족들은 로마군의 압도적인 힘에 도륙당하거나 다시 강 반대편으로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1개 군단만으로 2만 명의 슬라브 부족들을 밀어낸 적도 있었다.
라비에누스는 병사들의 자신감이 조금 과한 게 아닌가 싶으면서도 그걸 제지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까지 야만족들을 상대로 고전 따위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갈리아,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그리고 이번에 싸워본 슬라브 부족들까지.
그 누구도 로마군의 적수는 되지 못했다.
특히 게르마니아에 주둔 중인 군단들 사이에서는 이런 풍조가 더 심해졌다.
강을 건너오는 야만족들과 아무리 싸워 봐도 자신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로마군이 자랑하는 궁기병은 갈리아나 게르만 기병들에게 일방적인 손해만을 강요했다.
거기에 보병끼리의 전투도 로리카 세그멘타타 덕분에 교전비를 세는 게 무의미할 정도였다.
오죽하면 섹스투스와의 내전 때문에 차출됐던 장교 한 명이 이런 농담을 남길 정도였다.
"이거 참 긴장되는데. 8년의 군생활 동안 전투를 하러 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
이 말에 병사들은 물론 동료 장교들마저 박장대소하며 웃었다.
그런 상황에서 흉노의 대군이 게르마니아에 밀어닥친 건 로마군에게 있어서는 불행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3개 군단밖에 되지 않는 로마군이 흉노의 20만 기병과 맞서 싸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강을 건너지 못하게 견제하면서 그 사이에 카이사르에게 지원군 파병을 요청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흉노의 천태선우 바야투르는 오랜 시간 동안 로마군의 대응을 지켜보며 계획을 세워왔다.
슬라브족을 밀어낸 것도 사실 로마군이 어떻게 대응하는지 관찰하며 전략을 구상하기 위한 것이었다.
로마군은 엘베강 전체를 감시할 정도로 수가 많지는 않아 도하하기 좋은 지역을 우선적으로 감시했다.
그래서 바야투르는 병력을 여러 개로 쪼개 로마군이 감시하고 있는 지역에 기병대 수만 명을 일부러 주둔시켰다.
수만의 기병을 발견한 로마군은 당연히 초비상이 걸렸다.
다른 곳에서 감시를 하고 있는 병사들까지 끌어모아 기병들이 강을 건너오지 못하게 견제했다.
당연히 라비에누스에게도 흉노 기병의 출현 소식이 전해졌다.
그러나 바야투르는 그 사이에 미리 상대적으로 감시가 빈약한 지역에 숨겨둔 기병들로 강을 건너게 했다.
눈앞의 기병대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로마의 경계병들은 빙 돌아서 내려온 기병대에게 후방을 공격당해 어이없이 전멸해 버렸다.
유유히 강을 건넌 바야투르는 20만의 기병을 4개로 쪼갰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걸 초토화하고 빼앗아라. 그리고 진지에 틀어박혀 있는 로마군이 있다면 무리하게 공격하지 마라. 노리는 건 밖으로 나돌아 다니는 로마군과 게르마니아 부족들의 촌락이다."
"천태선우의 명을 받듭니다!"
바야투르가 이끄는 본대와 다른 3명의 부족장들이 이끄는 부대는 종횡무진 게르마니아를 누비며 대학살극을 벌였다.
로마가 게르마니아를 개간하기 위해 상당수의 숲을 밀어버린 게 흉노의 움직임을 한층 원활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들이 지나다니는 곳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식량은 빼앗고, 남자는 죽이고, 여인은 겁탈한 뒤 목숨을 취했다.
숙영지에서 이 보고를 받은 라비에누스는 혼란에 빠졌다.
대관절 저렇게 많은 기병이 대체 어디에서 뚝 하고 떨어졌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일단 카이사르에게 보고를 보냈지만, 답장을 기다리기엔 시시각각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게르마니아 전역에서 올라오는 보고 때문에 말발굽 소리가 며칠 밤낮 동안 끊일 줄을 몰랐다.
"노르트 삼림 근처에서 적의 기병대가 목격되었습니다. 마을 3개가 불타고 수백 명의 게르마니아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케루스키 부족에서 구원 요청이 왔습니다. 12개의 마을이 적의 기병대에게 약탈당하고 마을 사람들은 전원 사망했다고 합니다."
"적과 맞서기 위해 전사를 집결시켰던 마르시족이 전멸했다고 합니다."
보고서 하나에서 눈을 떼기가 무섭게 다른 보고가 날아들었다.
게다가 그 무엇 하나 긍정적인 소식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라비에누스의 초조함은 커져만 갔다.
가장 큰 문제는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는데도 적의 정확한 규모가 파악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올라온 보고나 전령의 소식으로 봐서는 적은 최소 4개 정도의 부대를 따로 운용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속도로 보건대 그것도 전부 기병이었다.
저항하는 게르마니아 부족들을 너무 쉽게 짓밟아 버리는 걸 봐서 한 부대당 최소 1만은 훌쩍 넘는다고 봐야 한다.
그러면 최소로 잡아도 5만 이상. 어쩌면 10만이 넘을 수도 있다.
10만이 전원 기병이라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찔한 수준이었다.
아무리 로마군이 강하다고 해도 저 정도 수의 기병과 정면으로 싸우면 심각한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으리라.
라비에누스는 연일 홍수처럼 쏟아지는 비보에 파묻혀 머리를 싸맸다.
"카이사르 님의 명령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나?"
"아무리 빨라도 며칠은 더 걸릴 겁니다. 부관, 임페라토르의 명령이 없어도 우리끼리 뭔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엔 이쪽은 3개 군단. 적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기병으로만 5만이 넘는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 뭉쳐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라비에누스가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 급하게 들어온 전령이 황급히 보고를 올렸다.
"적의 기병대 중 하나가 근처까지 접근했습니다. 아마 케루스키의 부족장을 노리는 것 같습니다. 케루스키 부족에서 구원 요청이 왔습니다."
케루스키 부족이라면 로마에 협력적인 게르마니아의 부족들 가운데 특히 호전적이고 전투력이 높은 이들이다.
이들이 쓸려나간다면 로마에게도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여지가 있었다.
"부족장을 이쪽으로 후퇴시키고 진지에서 농성을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이미 그렇게 말을 했지만 이미 수많은 부족원들이 살해당해 복수심으로 눈이 뒤집힌 상황이었습니다. 침략자 놈들을 갈가리 찢어 죽이지 않는다면 분이 풀리지 않는다고······."
"미치겠군."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동쪽에서 쳐들어온 야만족들은 대체 무슨 원수라도 진 것인지 눈에 띄는 이들은 닥치는 대로 죽이고 보는 중이었다.
게르마니아 부족들은 로마가 그나마 온건한 지배자들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하게 됐다.
불과 며칠 사이에 수만 명이 가뿐히 넘는 게르마니아 사람들이 이유 없이 학살당했다.
가족과 친지를 잃은 전사들이 복수심에 불타지 않는 게 도리어 이상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로마의 입장에서도 정복한 지역의 원주민들이 침략자들에게 학살당하는 걸 마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이건 단순한 위신만이 아니라 정복자로서 신뢰가 걸린 문제였다.
피정복자를 외부의 침략에서 보호해주지 못한다면 게르마니아만이 아니라 다른 속주의 치안까지 같이 흔들릴 우려가 있었다.
이런 일이 벌어진다면 카이사르에게 상당한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도 있었다.
카이사르에 대한 충성심이 남다른 군단장들은 그런 사태가 벌어지도록 놔둘 수 없었다.
"우리가 이대로 틀어박혀서 수비만 하고 있다면 게르마니아의 참상을 방관만 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근처에 접근한 적의 기병대 하나는 잡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13군단장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야만족들과 어째서 싸우지 않느냐는 병사들의 불만도 상당한 상황입니다. 여기서 한 번 정도는 전투를 할 필요가 있어요."
라비에누스가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카이사르 님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출격한다는 건······."
"본래 군단장은 현장의 상황에 따라 자체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게다가 부관님은 임페라토르의 대리로 이 자리에 계신 게 아닙니까. 라비에누스 님이 허락하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막사의 모든 지휘관들의 시선이 라비에누스에게 집중되었다.
너무 막중한 결정을 떠맡게 된 라비에누스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마음 같아서는 카이사르의 답장이 올 때까지 수비를 굳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는 동안 게르마니아의 부족들이 몰살당한다면 그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한다는 말인가.
다른 군단장들의 말처럼 전투를 하러 가는 시늉이라도 하면 설령 일이 잘못되더라도 면죄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는 마침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일단 인접한 적병들만이라도 퇴치해 봅시다."
"와아!"
라비에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막사 안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싸우지도 못하고 억눌려 있었던 장교들은 속이 후련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저 흉포한 야만족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도록 하죠. 솔직히 말해서 지금까지 있긴 했습니까? 우리 앞에서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기라도 했던 놈들이."
"이번에는 그래도 진짜 전투가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방심은 금물입니다."
"암요! 하하하!"
단 한 번도 전투에서 고전해본 적이 없는 실적으로 인한 자신감.
그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호사가 모두의 얼굴에 깃들어 있었다.
그러나 라비에누스가 모든 병력을 이끌고 떠나고 바로 하루 뒤, 카이사르의 답장을 든 전령이 뒤늦게 숙영지에 당도했다.
그가 들고 있는 명령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인근의 부족들을 전부 가까운 로마군의 진지로 대피시킨 뒤, 절대로 적과 정면으로 싸우지 말고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방비를 철저히 할 것.
마르쿠스의 경고를 떠올린 카이사르는 최선의 판단을 내렸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명령은 단 하루의 차이로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
자신만만하게 출격한 로마군은 케루스키 부족과 합류해 지척까지 다가온 흉노 기병들과 맞닥뜨렸다.
앞서 파견 나간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적 기병대의 규모는 최소 3만 이상.
생각보다 적의 병력 규모가 더 컸지만, 로마군 그 누구도 기가 죽지는 않았다.
갈리아나 게르만의 기병들과도 이미 숱하게 겨뤄본 바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로마군을 고전시키지 못했다.
수가 많다고 하더라도 야만족은 결국 야만족에 불과할 뿐이다.
더욱이 케루스키 부족을 중심으로 집결한 게르만 전사들까지 합치면 로마군이 수적으로도 밀리진 않았다.
라비에누스가 불안감을 느꼈던 건 정찰병이 적의 기병대가 등자 비슷한 물건을 쓰고 있다는 보고를 했을 때부터였다.
'기술이 유출된 것인가? 아니면 저들이 독자적으로 개발한 것인가?'
사실 흉노는 원래 로마보다도 훨씬 먼저 등자를 사용하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도입한 것이 오히려 원역사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지만, 라비에누스가 그걸 알 길은 없었다.
물론 흉노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등자는 바야투르가 로마군의 등자를 보고 영감을 얻어 개선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기술이 유출됐다는 생각 역시 틀린 건 아니었다.
거기에 적의 기병들이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와는 달리 너 나 할 것 없이 활을 들고 있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불길한 마음에 먼저 탐색전을 펼치려 했으나, 적을 보자마자 눈이 뒤집힌 케루스키 부족의 전사들이 흉노 기병을 보자마자 앞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예상외로 흉노기병들은 로마군과 게르만 기병들의 공격에 밀려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결국 수가 많아 봐야 야만족은 야만족인가."
자신감이 오른 로마군은 도망치는 흉노군을 쫓아 추격을 개시했다.
라비에누스는 적의 매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떨치지 못했으나, 기습 공격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적의 매복 따위가 아니었다.
게르마니아에 그리 많지 않은 탁 트인 평야까지 나왔을 때 로마군은 저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어마어마한 수의 기병대를 마주했다.
적의 수는 고작 4만 따위가 아니었다.
라비에누스의 군대가 쫓아온 4만을 제외하고도 각각 그 이상의 부대가 좌우에서 로마군을 굽어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유인책에 걸려들었단 말인가?"
"저번에 보고를 받았을 때만 해도 분명 나머지 병력은 북쪽에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아연실색하는 군단장들과 달리 라비에누스는 냉정하게 현 상황을 판단했다.
적은 단순히 로마군을 유인하기만 한 게 아니었다.
처음 보란 듯이 진지에 접근한 것 자체가 계획적인 행동이었다.
북쪽에서 약탈과 살육을 일삼던 본대는 일부러 별동대와 떨어진 척하고 로마군을 진지 밖으로 유인해 내려고 한 것이다.
라비에누스의 눈에 저 멀리서 무심한 시선으로 로마군을 내려다보는 적장의 모습이 들어왔다.
로마군을 유인한 부대의 대장이 굽실거리는 걸 보면 그가 적의 수괴가 분명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보는 피부색에 괴상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으나 나이 자체는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라비에누스와 마찬가지로 바야투르 역시 로마군의 지휘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흉노족의 기병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위치가 살짝 더 높았기 때문에 로마군의 움직임을 훤히 다 볼 수 있었다.
"수고했다, 쿠블라이. 완벽한 유인이었다."
"과분한 치하입니다. 저는 천태선우께서 명하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래, 저놈들의 활의 성능은 어떻더냐."
"예상하신 대로입니다. 저희와 큰 차이는 나지 않았습니다."
쿠블라이는 바야투르가 가장 신뢰하는 네 명의 선우 중 한 명이었다.
활솜씨에 있어서는 전 흉노족 중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였다.
그런 그의 눈썰미가 틀릴 리가 없다.
바야투르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 북제와 동제의 군대는 완전히 같은 장비를 쓰고 있지 않군. 게르마니아 놈들에게 들은 정보가 내가 알던 것과 미묘하게 달라 이상했거늘."
흉노가 복원한 로마의 합궁은 마르쿠스가 파르티아전에서 사용한 활과 거의 비슷하긴 했어도 완전히 대등한 성능은 아니었다.
원래부터 합성궁을 사용하던 흉노라고는 해도 단기간에 완전히 같은 활을 생산해내기란 무리였다.
그래도 마르쿠스의 군단보다 최신 장비의 보급이 늦은 카이사르의 군단이 사용하는 활과는 사거리가 별 차이가 없었다.
마르쿠스야 갈리아나 게르만과 싸울 때는 이 정도의 활만 해도 차고 넘치는 성능이니 아무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틀린 예측은 아니었다.
신이 아닌 이상에야 어떻게 이런 상황이 펼쳐질 거라고 예상했겠는가.
"흐흐흐, 로마 놈들. 얼이 빠진 모습이로군요. 서역을 지배하는 초강대국이라 들었는데 이렇게 유인책에 꼼짝없이 걸려든 걸 보니 천태선우 님의 적수는 되지 못할 듯싶습니다."
흉노족 기병 한 명이 조소를 흘리자 주변의 다른 병사들도 똑같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던 바야투르가 천천히 처음 비웃음을 흘린 병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 천태선우 님."
아부 섞인 미소를 짓던 기병은 순간 엄청난 속도로 자신의 머리 위를 훑고 지나간 바야투르의 검에 기겁하며 말에서 떨어졌다.
다소 들떠있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들어라."
바야투르가 허겁지겁 일어서서 무릎을 꿇은 기병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승리의 영광에 취한 자의 미래는 죽음뿐이다. 지금 너희들의 눈앞에 있는 저들처럼."
흉노 기병들의 눈에 다시금 긴장의 빛이 감돌았다.
바야투르의 말대로 대전쟁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싸우기도 전에 승리감에 취해서는 결코 최후의 승자로 남지 못한다.
군기를 다잡은 바야투르는 휘황한 장식이 달린 만곡도를 꺼내 들고 진형을 갖추고 있는 로마군을 겨누었다.
"쿠블라이, 오트곤바야르, 바트자르갈. 내 전우들은 들으라."
"예!"
휘하 선우들을 한 차례씩 둘러본 바야투르의 입가에 광소가 걸렸다.
"가서 모조리 죽여라."
"명을 받듭니다!"
팽팽하게 조여져 있던 긴장을 투지로 바꾼 흉노의 기병들이 일제히 사방으로 산개하며 로마군을 향해 밀려들어갔다.
파도처럼 덮쳐오는 흉노족에 맞서서 로마군도 반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숫자가 너무 차이가 났다.
심지어 함께 싸우는 게르만 전사들이 너무 쉽게 무너져서 진형이 꼬여 버리자 로마군 단독으로 싸우는 것보다 못한 상황이 펼쳐졌다.
단순히 운이 나빴다기보다는 진형을 살펴본 바야투르가 이렇게 흘러가도록 병력을 운용한 것이다.
라비에누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이 유기적인 부대의 움직임, 경악스러운 합류 속도, 절대로 단순한 야만족이 아니다. 저놈들을 막으려면 우리만으로는 안돼. 카이사르 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순식간에 전황이 기울자 라비에누스는 기병대의 일부를 뒤로 돌리고 전선을 빠져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가라! 그 무엇도 신경 쓰지 말고 카이사르 님에게 가서 이 소식을 전해라. 적의 기병대는 최소로 잡아도 10만이 넘고 등자까지 사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단순한 야만족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놈들이다. 그러니······."
"네. 그렇게 라비에누스 님이 전해주십시오."
"뭐라고?"
라비에누스는 이 전투에서 죽을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이 장소로 나왔으면 안 되는 거였다.
그릇된 판단을 내려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지휘관은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부하들이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여기에서 가장 군사적인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라비에누스 님입니다. 그러니 라비에누스 님이 가장 제대로 된 보고를 올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13군단장의 말에 라비에누스는 피가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군단장들도 알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몸 성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이는 별로 없다는 사실을.
지금 눈앞에 있는 야만족들은 지금까지 로마군이 싸워온 자들과는 다르다는 치명적인 현실을.
그걸 너무 늦게 알아차린 게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걸 가장 확실하게 전할 수 있는 사람은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있는 라비에누스였다.
빠져나가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라비에누스다.
정론이었지만 그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카이사르의 군단을 맡은 자가 카이사르의 군단을 패배의 구렁텅이에 빠트리고 어떻게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인가."
"돌아가야 합니다. 임페라토르의 군단을 맡았으니 임페라토르의 부관으로서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을 하십시오. 여기서 죽는 건 책임을 회피하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
군단장들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말머리를 돌렸다.
기병대들도 라비에누스를 둘러싸고 강제로 뒤로 물러났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데리고 가겠다는 뜻이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라비에누스는 피눈물을 흘리며 포기하지 않고 필사적으로 진형을 유지하려는 병사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미안하다거나 살아남으라는 말조차 지금은 사치다.
살아남아서 게르마니아를 빠져나가는 게 지금부터 죽어갈 병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말을 몰아 후퇴하는 라비에누스의 등 뒤로 부하들이 내지르는 최후의 함성 소리가 가슴 아프게 파고들었다.
"우리는 아직 지지 않았다! 로마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승리한다! 로마 인빅타!"
"로마 인빅타!"
라비에누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을 몰아 달리고 또 달렸다.
목숨을 불태워 적을 잡아두는 부하들의 함성이 살육의 파도에 묻혀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 204. 대전의 시작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