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초강대국의 저력 >
207.
수렌 왕국의 구원 요청을 받은 마르쿠스는 최대한 빠르게 군단을 나눠서 진격했다.
카렌 왕국을 공격한 스키타이 기병대는 4만 남짓, 수렌 왕국으로 쳐들어온 기병은 3만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수렌 왕국 쪽에 더욱 많은 군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카렌 왕국은 이미 방어선을 형성해 둔 덕분에 4개 군단만으로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한 까닭이었다.
그러니 나머지 9개 군단은 전부 수렌 왕국으로 돌리는 게 최선의 판단이었다.
예상대로 마르쿠스가 도착했을 때 수렌 왕국의 피해는 상당히 컸다.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을 뿐인데 변방의 촌락들이 불탔고, 성벽이 부실한 도시들 역시 약탈의 손길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적의 기병대는 엄청난 속도로 수도를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수도의 방위가 뚫릴 수도 있었던 아찔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적의 기병들은 로마군이 당도하자마자 바로 꼬리를 말고 도망쳐버렸다.
"적은 아무래도 저희와 싸워줄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몇날 며칠을 추격해도 적들은 주변을 빙빙 맴돌기만 할 뿐 아무런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로마군의 추격이 느슨해졌다 싶으면 바로 방비가 허술한 지역을 공격해 왔다.
지난 며칠간 적의 움직임을 분석한 수레나스가 확실히 결론을 내렸다.
"적은 점령은 물론 약탈에도 그리 집착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군의 신경이 다른 곳에 쏠리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게 저들의 목적인 게 확실합니다."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짜증이 샘솟는 건 어쩔 수가 없군."
오늘도 공격받고 있는 도시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적들은 이미 모습을 감추고 사라진 지 오래였다.
먼저 기병대를 이끌고 돌진했던 안토니우스와 푸블리우스는 허탕만 친 채 잔뜩 열이 뻗쳐서 돌아왔다.
"적들은 이전에 만난 스키타이와는 다르게 등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적들과 마주친 병사들의 말을 들어보자면 생김새도 조금 다르게 생긴 듯하고요."
"수는 조금 적어도 이쪽이 좀 더 기동성이 뛰어나고 전술적인 움직임도 좋은 것 같습니다. 격퇴하기가 쉽지 않겠는데요."
"역시 수렌 왕국을 친 놈들은 스키타이가 아니라 흉노였나··· 처음부터 이렇게 시간을 끌려고 작정하고 있었던 모양이네."
카렌 왕국과 수렌 왕국을 공격한 기병들의 총수는 6만 남짓.
엄청난 전력이기는 해도 정면으로 마르쿠스의 군단과 붙는다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양쪽으로 나뉘어서 정면승부를 피하고 철저히 치고 빠지기만 하는 것이다.
처음에 4만의 기병만을 보여준 것도 다분히 의도적인 전략이었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인 건 저들이 생각보다도 더 동방 로마군의 전력을 자세히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르쿠스는 6만의 기병이 와도 박살을 낼 자신이 있었지만, 어째서 흉노가 그렇게 생각했는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6만의 기병이라면 지금 시대에서는 어마어마한 전력이다. 거기에 흉노의 기병들은 등자까지 쓰고 있었지. 그런데도 정면승부로는 처음부터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신중한 지휘관이라고 해도 6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있다면 한 번쯤 싸워보는 시늉은 해야 정상이다.
특히 동쪽에서부터 모든 지역을 평정하며 승승장구한 흉노의 기병대라면 더욱 그래야 정상이었다.
아무리 시간을 끌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도 적의 군단이 생각보다 약하면 그냥 전멸시키는 게 더 이득이지 않겠는가.
하지만 흉노는 마르쿠스의 군단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처음부터 싸움을 피했다.
스키타이도 어디까지나 싸우는 척만 했을 뿐이지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바로 뒤로 도주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 정도면 신중한 게 아니라 사전에 어떠한 경로로든 정보를 손에 넣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파르티아가 박살 났단 소문을 들은 것인가. 아니면 그때 용병으로 참전했던 스키타이 부족들에게서 어떤 말을 들었을지도 모르겠군.'
제아무리 마르쿠스라도 흉노의 천태선우가 파르티아와의 전장에 참가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그동안 흉노가 로마 상인들에게 우호적이었던 것, 비단길을 장악하고 안정화시킨 것, 카렌을 먼저 쳐서 자신을 끌어들인 것까지 전부 전략적인 구상이었다고 봐야 했다.
이를 종합하면 적의 수뇌는 마르쿠스가 지금까지 싸운 자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전략가였다.
그리고 적들이 이렇게 로마와의 싸움을 회피하고 있는 이상 마르쿠스로서도 뾰족한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기병의 수를 많이 편제했다고 해도 로마군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건 역시 보병이다.
그리고 보병들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도망 다니기만 하는 기병들을 잡을 수 없다.
별동대로 기병을 운용해 봐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 번은 5천 정도의 소수 경기병만을 보내 적을 유인해 보려 했으나 이조차 실패로 돌아갔다.
흉노 기병대는 적이 적든 많든 로마군이 보이는 순간 조건반사적으로 바로 줄행랑을 쳐버렸다.
그리고 듣자 하니 카렌 왕국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보고가 들려왔다.
재침공한 스키타이 기병들은 방어가 약한 지역을 이리저리 찔러보기만 할 뿐, 그 이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질질 끌려다니면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한 마르쿠스는 우선 열이 오른 머리를 식힐 겸 추격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군단장들과 기병대장을 불러 현 상황을 정확히 이해시키고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적을 쫓아다니기만 해서는 결과를 내지 못한다는 건 이미 증명된 사실입니다. 마르쿠스 님의 말씀대로 적이 우리와 처음부터 싸울 마음이 없었다면 저희들의 전략을 완전히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방식으로 수정하면 좋겠나?"
"음··· 이전에 했던 것처럼 포위망을 형성해서 적들이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을 만드는 건 어떨까요."
"아니, 그건 써먹을 수 없어. 애초에 완벽한 포위망을 구성하기도 쉽지 않을 테고."
푸블리우스의 의견은 이론적으로는 옳았으나, 그건 적이 후퇴하기 여의치 않은 상황일 때나 효과가 있다.
스키타이가 이미 증명했듯 삼면을 막아버려도 후방으로 도주하면 아무런 효과가 없다.
그리고 현재 로마군의 기동력으로는 흉노의 뒤를 잡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면 이쪽에서 먼저 치고 나가면 어떨까요?"
의미 없는 추격전으로 분노가 쌓여 있던 안토니우스가 호전적인 의견을 제기했다.
"치고 나가봐야 저들은 도망가기만 할 텐데?"
"일단 카렌 왕국에서 저들을 밀어낸 뒤 숨 돌릴 틈도 없이 계속 추격하는 겁니다. 그러면 보급이 힘들어진 저들은 자연히 버티기 힘들어지지 않겠습니까."
"놈들은 비단길을 완전히 장악하고 그쪽을 통해 카렌 왕국으로 들어왔어. 아마 그 근처에 보급할 수 있는 거점이나 자원을 잔뜩 마련해 뒀을 거다. 그러니 약탈에 별로 열을 올리지 않은 것일 테고. 잠깐 쫓아내 봐야 금방 다시 돌아와서 우리를 귀찮게 하겠지."
이쪽에서 치고 나가도 저쪽에서 응해줄 마음이 없다면 허공에 주먹질을 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흉노의 거점까지 밀고 들어가 봐야 유목민들은 정주민들과 달리 터전을 버리고 도주하는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딱히 뾰족한 방법이 나오지 않자 수레나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현재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떻게든 저들을 몰아낸 뒤 국경을 철저하게 막는 것뿐이겠군요."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이긴 한데··· 아마 적들이 원하는 것도 우리가 저렇게 나오는 거겠지."
"예. 아무래도 카렌과 수렌의 국경선을 모두 방어해내려면 군단을 뒤로 물릴 형편이 되지 않으니까요."
"골치 아프게 됐군."
마르쿠스는 물론 다른 지휘관들도 자연스레 얼굴을 찌푸렸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을 치렀지만 이런 식으로 처음부터 싸울 마음이 없었던 자들과 대치하는 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시하자니 바로 다시 쳐들어올 게 뻔하다.
수레나스의 의견대로 적들을 밀어내고 국경에 병력을 배치하고, 요새화를 한다면 침공을 저지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 역시 시간과 인력이 너무 많이 소요됐다.
그리고 흉노는 그렇게 밀려난다고 해봐야 자신들은 임무를 완수했다며 도리어 신나할 게 틀림없었다.
그들이 목적은 마르쿠스의 군단을 동방에 묶어두는 것이다.
그러니 마르쿠스가 국경에 대규모 병력을 배치하고 적들이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계를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임무 완수였다.
그저 마르쿠스가 다시 군단을 빼지 못하도록 국경 근처를 왔다 갔다 하면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기만 하면 된다.
적의 노림수가 훤히 보이는데 그대로 따라주는 건 굴욕적일 뿐만 아니라, 성미에도 맞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봐도 이거다 싶은 전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던 찰나, 지도를 바라보고 있던 수레나스가 돌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는 마르쿠스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어지는 수레나스의 설명을 들은 마르쿠스와 다른 지휘관들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
이후 로마군은 병력을 넓게 퍼트린 채 천천히 흉노군을 압박해 그들을 밀어냈다.
딱히 싸울 마음이 없었기에 순순히 밀려난 흉노는 이내 마찬가지로 카렌 왕국에서 밀려난 스키타이 부족과 합류했다.
전투에서 이득을 보지 못하고 쫓겨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나 그들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바야투르에게 2만의 기병을 위임받은 부족장 카이두는 막사에서 스키타이의 족장 마우에스와 작전 성공을 축하하는 연회를 가졌다.
"하하하, 자네도 정말 수고했네. 처음에 세운 작전대로 아주 잘 움직여주었어."
"천태선우님이 세운 전략이 출중했고 카이두 부족장님의 지시가 무엇보다 적절한 덕분이었지요."
마우에스의 아부 섞인 칭찬에 카이두가 만면에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마우에스의 잔에 맑은 백주를 가득 따라주며 권했다.
"이게 그 한나라에서 들어온 고급술이라네. 자네도 이 전쟁이 끝나면 이런 사치품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갈 것이야."
"부족장님과 천태선우님의 은혜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충성을 다할 테니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마우에스는 넙죽 고개를 숙이고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로마에서 흘러들어온 포도주는 몇 번인가 마셔본 적이 있었으나, 한나라의 술을 입에 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포도주와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맛이었으나 뒷맛이 나쁘진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에 세운 공적이 바야투르에게도 전해진다고 생각하니 들뜬 기분을 억누르기가 쉽지 않았다.
'역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이야.'
마우에스는 흉노가 처음 밀고 내려왔을 때 다른 부족들과는 달리 바야투르와 적대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 결과 흉노와 대립한 다른 부족들은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나, 마우에스의 부족은 참상을 피해 갈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살아남은 스키타이의 잔존 세력을 전부 끌어모아 자신의 세력으로 편입시키는 데까지 성공했다.
기마병의 보충을 원했던 바야투르에게 스키타이는 제법 좋은 병력 공급원이었던 까닭이다.
저항하지 않는 부족장이 있다면 적당한 감투를 하나 쥐어주고 스키타이를 통제하는 주구로 써도 나쁘지 않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마우에스 역시 이를 알면서도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뱀의 머리로 살기보다는 용의 꼬리가 되어 더 넓은 물에서 헤엄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이번 전쟁에서 공도 톡톡히 세웠으니 잘만 처신한다면 훗날 흉노에서도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눈앞에 있는 카이두를 넘어 바야투르가 총애하는 네 명의 선우에 버금가는 지위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네놈도 더 이상 우리 부족을 지금처럼 수족 다루듯 대하지는 못하겠지.'
철저히 본심을 숨긴 마우에스는 웃는 낯을 가장하며 카이두의 빈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런데 카이두 님, 마르쿠스가 앞으로도 계속 여기에 묶여있게 될까요?"
"아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동제의 대장군 수레나스가 바로 우리가 위협하고 있는 수렌 왕국의 왕의 삼촌이라고 하지 않는가.
자신의 봉신을 버리고 그냥 회군한다는 건 바로 반란으로 직결될 수도 있는 엄청난 정치적 부담이라고 천태선우께서 말씀하셨네. 그러니 저들은 아마 카렌 왕국 북부를 요새화한 것처럼 수렌 왕국의 국경도 방어선을 형성하려 하겠지. 우리는 그걸 적당히 방해하면서 완성 주기를 늦추기만 하면 되네.
"
"제가 알기로는 마르쿠스가 맡고 있는 동방은 현재 로마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라 합니다. 마르쿠스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 거느리고 있는 병사와 같은 수의 군단을 추가로 편성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 말은 즉 원래 20만을 지원군으로 보낼 수 있는 자가 그 반절밖에 보내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지. 어떻게 됐든 간에 우리는 임무를 완수한 셈이네."
다각도로 검토를 해봐도 마르쿠스가 이 상황에서 뭘 더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결국 두 사람은 천태선우의 예상대로 모든 게 흘러갔다며 자신들의 주군의 신묘한 계책에 감탄했다.
그러나 장밋빛 미래에 취해있던 것도 잠시.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을 때 게르에 도착한 전령이 직접 듣고도 믿기지 않는 보고를 올렸다.
"부족장님! 감시병으로 나가 있는 부대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로마군이 갑자기 전원 회군하고 있다고 합니다."
흥겹던 술판의 분위기가 돌연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천천히 술잔을 내려놓은 카이두가 귀를 후비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내가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환청이 들리는 것인가··· 뭐가 어쩌고 어째? 로마군이 뭘 어떻게 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로마군이 회군하고 있다는 감시병의 보고가 있었습니다."
"뭐라고!"
카이두와 마우에스가 천천히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상식을 벗어난 보고에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의 얼굴이 석고상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 207. 초강대국의 저력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