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초강대국의 저력 >
208.
"함정이다. 이런 수준 낮은 유인책이라니 동제도 명성만 못한 것 같군."
다각도로 검토해본 결과 카이두는 로마군의 퇴각이 자신들을 유인하려는 속임수라고 결론 내렸다.
마우에스 역시 카이두와 같은 의견이었다.
"아마 회군하는 척하면서 우리가 추격하려고 하면 곧바로 다시 공격하려는 계략일 겁니다. 여기서 성급하게 움직이면 적의 노림수에 걸려드는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그렇다고 아예 손 놓고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일단 병력을 두 개로 나눠서 움직이도록 하지."
마르쿠스가 정말로 카렌과 수렌을 포기해버릴 가능성은 한없이 0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의 경우를 고려해야 했다.
마르쿠스가 자신의 피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흉노의 계획을 망치려는 시도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적인 행동을 할 리는 없다고 생각했으나 카이두는 스스로 그런 걸 판단할 입장이 아니었다.
어쨌든 천태선우 바야투르의 명은 무슨 일이 있어도 동제를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바야투르는 공을 세운 부하들에게는 엄청난 명예와 전리품을 하사했으나, 실패한 부하들에게는 냉혹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참수를 한다거나 과도한 굴욕을 주는 건 아니었다.
사형을 당할 정도의 중죄를 지었다면 그렇게 하지만 임무를 실패했다고 그 정도의 벌을 내리지는 않았다.
다만,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을 해내지 못한 부하들에게는 더 이상 어떠한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무런 중책도 맡기지 않고, 출세의 기회는 완전히 가로막힌다.
누구에게나 능력을 증명할 기회를 주지만, 능력이 없는 자들은 절대로 중용될 수 없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카이두이기에 그 어떠한 변수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선우의 자리를 노리고 있는 마우에스 또한 이번 작전을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스키타이 부족이 앞으로 흉노 제국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아니면 단순한 노예에 가까운 피지배층으로 전락하게 될지는 전부 마우에스에게 달려 있었다.
바야투르가 인정할 만한 공을 세워 선우의 자리에 오른다면 스키타이의 입지는 한층 더 단단해지게 된다.
이제 더 이상 몰락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카이두와 마우에스는 긴급회의를 마치고 행동을 개시했다.
두 사람의 전략은 간단했다.
우선 마우에스가 스키타이 기병대를 이끌고 마르쿠스의 본대와 일정 거리 이상을 유지하며 추격을 계속한다.
그 사이에 카이두가 이끄는 흉노 기병들이 수렌 왕국의 변방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불태우는 것이다.
자신의 봉신이 처절하게 짓밟히고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군대를 물릴 수는 없는 법이다.
카이두는 '이래도 그냥 회군하겠다고?'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잔인하게 변경을 유린하고 다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거 사람들의 수가 급격히 적어진 것 같은데······."
처음 수렌 왕국에 침입했을 때보다 눈에 띄는 마을과 사람들의 수가 현격히 적어졌다.
이상하다 싶어서 조사를 해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상당수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터전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도망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심지어 흉노가 약탈을 하지 못하도록 식량과 물자를 전부 불태워버리기까지 했다.
이러면 현지 보급을 하지 못하는 흉노는 장기간 임무를 수행하기가 곤란해진다.
보급을 받기 위해 한 번쯤은 실크로드 쪽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놈들이 청야 전술을 쓴다고? 대체 어째서?"
청야전술은 민간 물자까지 모조리 파괴하는 것인 만큼 전쟁이 끝나도 그 후유증이 심각했다.
방어자가 엄청나게 불리한 게 아니라면 사용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 단기간에 효과를 보는 전술도 아니었다.
어쨌거나 침공한 적의 식량이 떨어질 때까지 버텨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전술을 사용하는 이들도 장시간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다시 말해 정말로 다른 방법이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 최후의 수단이 바로 청야전술이었다.
"설마 동제는 진심인 것인가? 정말로 수렌 왕국을 비워 버리고 군대를 물릴 속셈이라면······."
상황이 너무 예상과 다르게 돌아가자 자연스레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변방 지역을 더 돌아다녀 봤으나, 어딜 가도 별다른 소득을 얻을 수가 없었다.
주민들은 이미 촌락을 다 불태우고 요새화된 도시로 들어가 버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을 죽이고 마을을 태우긴 했지만, 이건 그리 큰 효과를 주지 못했다.
자연스레 마음이 급해진 카이두는 말머리를 돌려 로마군을 쫓고 있는 마우에스와 합류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마우에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저들이 수렌 왕국을 포기한 것 같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상식적으로 그럴 리가 없는데요. 이곳의 왕이 마르쿠스의 대장군 수레나스의 조카인데 대체 어째서······."
"그러니 나도 혼란스러운 걸세. 놈의 속내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해 미칠 것 같군."
"혹시 이런 게 아닐까요? 마르쿠스는 정말로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지원하려는 겁니다. 그동안 수렌 왕국은 일단 어떤 피해를 감수하더라도 버티고 있고··· 저들의 본거지에서 추가로 군단 편성이 이루어지는 대로 이쪽에 다시 병력을 보내려는 거죠."
"그러려면 시간이 상당히 많이 소요될 텐데? 수렌 왕국이 잿더미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인가?"
"어차피 로마는 이 왕국을 방파제 정도로 취급하고 있을 겁니다. 피해가 생겨도 자신들이 나중에 복구해 줄 테니 일단 따르라고 하면 수렌의 왕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겠죠. 로마인 입장에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카이두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듣고 보니 나름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 시민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면 마르쿠스도 외면하기 힘들었겠지만, 수렌 왕국은 로마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냥 힘들어도 너희가 좀 참으라는 식으로 나가도 수렌으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아예 수렌 왕국을 버린다면 후폭풍이 거세겠지만, 전쟁 이후 지원을 해준다고 하면 어떻게든 수습할 수는 있을 테니까.
"미치겠군. 이렇게나 극단적으로 나갈 거라고는 예상 못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그냥 이렇게 된 이상 수렌 왕국을 초토화시키는 쪽으로 계획을 수정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비단길에 있는 물자를 가지고 와서 적의 수도를 포위하도록 하죠. 천천히 저들을 말려 죽이면 결국 로마군의 추가 병력이 편성되기 전에 항복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수렌 왕국 따위를 복속시켜봐야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이곳이 아예 가치가 없는 땅은 아닙니다. 수렌을 점령하면 페르시아 남부로의 진입로도 확보할 수 있으니까요. 이곳을 거점으로 카렌 동부와 페르시아의 남부를 휘저으면 천태선우께서도 용납하시지 않을까요?"
이 역시 일리가 있는 말이었기에 카이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가 아는 바야투르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임기응변을 발휘해 기존 임무와는 다른 결과를 내도 그 공적을 인정해 주었다.
그가 신임하는 네 명의 선우 중 한 명인 알탄이 좋은 예였다.
흑해 북동부에 위치한 보스포루스 왕국을 멸망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던 그는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을 개시했었다.
현대의 러시아 남부와 우크라이나에 위치해 있는 흑토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 위해서였다.
로마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였던 보스포루스는 초기에는 저항을 하려 했으나 알탄이 이끄는 흉노 정예 기병을 이길 수 없다는 걸 빠르게 깨달았다.
결국 그들은 로마와 손을 끊고 흉노에게 복종하겠다는 뜻을 밝혔고, 알아서 곡물을 바치겠다는 서약서까지 준비했다.
보스포루스를 아예 멸망시키는 것보다는 이들을 이용해 위장 공작을 피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알탄은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나중에 보고를 들은 바야투르는 알탄의 판단이 옳았다는 걸 인정하고 모든 부족장들의 앞에서 그의 공을 극찬했었다.
마우에스는 바로 이런 사례를 들어 자신들도 독자적인 판단으로 움직이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하지만 카이두가 잘 생각해보니 지금은 저때와는 경우가 달랐다.
바야투르가 알탄에게 내렸던 명령은 어쨌거나 보스포루스를 제압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 차이가 멸망을 시키느냐, 아니면 살려둔 채로 이용하느냐였을 뿐이다.
그리고 카이두와 마우에스가 받은 명령은 마르쿠스의 발목을 묶어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가면 결국 바야투르가 내린 핵심적인 명령은 실패로 끝나게 된다.
수렌 왕국을 초토화시키고 페르시아 남부를 들쑤셔본들 그 결과는 변하지 않으리라.
게다가 페르시아 남부로 간다고 해봐야 동방 속주로 아예 치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동방속주의 핵심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야 한다.
당연히 전원이 기병인 흉노군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르쿠스를 이대로 보내버리는 것과 로마에게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변방 지역을 들쑤시는 것.
어느 쪽으로 추가 기울어질지는 굳이 계산해 보지 않아도 쉽게 결론지을 수 있었다.
"놈들을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 어떤 변명을 대더라도 동제가 로마로 가는 순간 천태선우께서는 우리가 임무를 실패했다고 여기실 테니."
"그럼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이제 곧 수렌 왕국을 넘어서 로마의 속주에 진입하게 됩니다. 이건 너무 깊이 쫓아가는 게 아닐지······."
"일단 이제 동제가 직접 다스린다는 속주까지 왔으니 놈의 반응을 더 보기 쉬워졌다. 우리가 이 지역을 약탈해도 놈이 군을 돌리지 않는다면 그 의지가 확고하다고 봐야겠지."
마지막으로 마르쿠스의 의중을 떠보기로 한 카이두는 페르시아 남부의 몇 군데 마을을 약탈해 보았다.
그러나 분명 보고가 갔을 텐데도 마르쿠스는 계속해서 병력을 뒤로 물리기만 했다.
로마군이 회군을 멈추지 않자 속된 말로 똥줄이 타기 시작한 카이두는 초조함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이대로 자그로스 산맥까지 가게 된다면 이제 더 이상 로마군을 추격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슬슬 로마군을 한 번 공격해 퇴각을 방해하고, 자신들도 정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마치 카이두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로마군이 돌연 회군 속도를 올렸다.
거의 한계에 가까운 속도로 로마군이 물러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카이두는 이제 더 볼 것도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여기서 저놈들을 저지하지 못하면 그대로 놓칠 수밖에 없다. 우리도 최대한 빠르게 놈들에게 접근해 산맥의 초입 부근에서 한 번 전투를 치러야겠어."
"일단 고립당하지 않게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저희의 장비로는 동방 로마군과 정면으로 싸워서는 승산이 없으니까요."
"당연한 소리. 그냥 강행군으로 도망가는 놈들의 뒤를 쳐서 발목을 붙잡아두기만 할 걸세."
마우에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의 한 부분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제대로 된 지형은 표시되지 않은 조잡한 지도였으나, 앞에 뭐가 있는지는 대강이나마 알 수 있었다.
"마침 산맥에 들어가기 전에 넓게 펼쳐진 평야가 있다고 합니다. 로마군은 여기를 지나갈 수밖에 없을 테니 저희도 이곳에서 한 번 저들을 찔러 보도록 하죠."
"좋은 생각이네. 자네의 의견을 채택하도록 하지."
로마가 갑자기 속도를 올린 만큼 흉노 역시 평소보다 더 빠르게 말을 몰아 마르쿠스의 뒤를 쫓았다.
너무 신속하게 움직이느라 척후를 제대로 운용하지 못했으나, 흔적을 보아하니 로마 역시 꽁지에 불이 붙은 새처럼 다급해 보였다.
안심해도 좋겠다고 판단한 카이두와 스키타이는 마침내 로마군을 쫓아 라옌 평원에 진입했다.
평야 지대는 양옆이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고 앞뒤로만 뻥 뚫려 있는 신기한 지형이었다.
"로마군이 우리와 전투를 하려고 하면 곧바로 퇴각할 것이다. 그러니 언제라도 뒤로 군을 물릴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어라."
아니나 다를까 흉노군이 거리를 좁히자 로마군은 자리에서 멈추고 대열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방향을 바꾼 로마군은 평원에 진입한 흉노를 향해 다가오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예상대로의 움직임에 코웃음을 친 카이두는 즉각 병력을 뒤로 물리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호쾌하게 뒤로 질주하는 말발굽 소리 대신 경악에 가득 찬 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최전방에 있어서 후방의 상황을 제대로 보지 못한 카이두가 급히 마우에스를 찾았다.
"이게 대체 무슨 소란인가!"
"크, 큰일 났습니다. 후방에 적의 대군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뭐라고? 대체 어떻게······."
순간 카이두의 뇌리에 한 가지 가능성이 번뜩였다.
"이런 제기랄! 갑작스런 강행군은 병력을 따로 빼서 매복시키기 위한 눈속임이었구나."
흉노군의 기준에서 북쪽과 남쪽은 험준한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었고, 유일하게 뚫린 길은 서쪽과 동쪽이었다.
그러나 이미 양방향에서는 미리 나눠놓은 로마군이 천천히 거리를 좁히며 다가오고 있었다.
"천태선우님의 말대로 더욱 조심했어야 했는데······."
카이두는 피가 새어 나오도록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부주의함을 탓했다.
"죄송합니다. 위대한 천태선우이시여··· 명을 이행하지 못한 무능력함은 죽음으로 속죄하겠습니다."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 카이두는 바야투르가 있는 저 먼 북서쪽을 향해 한 번 고개를 숙이고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반면 어떻게든 퇴로를 찾아보려던 마우에스는 사방이 로마군으로 뒤덮인 걸 보고 절망에 휩싸여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까마득하게 덮어오는 로마군에 의해 전혀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달려봐도 역시 까마득하게 뒤덮은 로마군이 시야에 보이는 전부였다.
지휘관들의 심리상태는 당연히 병사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기세등등하게 약탈과 파괴를 일삼은 침략자들은 그저 망연자실한 채 다가오는 로마군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저 멀리서 당황하는 흉노군의 움직임을 보고 있는 마르쿠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한숨 돌릴 수 있겠군. 멋진 계책이었네, 수레나스. 자네가 이곳 지형을 훤히 알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전략은 감히 사용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걸세."
"과찬이십니다. 마르쿠스 님의 냉철한 판단이 아니었다면 제 구상을 제대로 펼쳐볼 수 없었을 겁니다."
"그래··· 놈들을 유인하기 위해 피해가 너무 컸어. 수렌 왕국에 보상해줘야 할 금액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리니까. 저놈들을 씹어 삼키는 걸로 조금이나마 울분을 달랠 수밖에."
수레나스가 제안한 작전은 흉노를 페르시아 남부까지 깊이 끌어들여 지형을 이용한 포위작전을 펼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조심성 많은 흉노군이 그리 쉽게 덫에 걸릴 리는 없었다.
그래서 수렌 왕국에는 청야전술을 펼쳐 흉노를 물러나게 하려는 연기까지 주문했다.
물론 이로 발생할 모든 피해는 이자까지 확실히 붙여서 로마가 보상해주겠다는 약속을 덧붙였다.
마르쿠스의 밑에 이 근방의 지역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수레나스가 있다는 것도 하늘의 도우심이었다.
수레나스가 없었다면 적에게 들키지 않게 수만의 군대를 빼서 매복시키는 일 따위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저들은 생소한 지역에 들어온 주제에 너무 설쳤습니다. 저라면 그 어떠한 경우에도 매복당할 상황 따위는 만들지 않았을 겁니다. 자업자득이지요."
"그렇게 되도록 끊임없이 심리전을 걸었으니까. 어쨌든 이걸로 적들의 우두머리에게 가져갈 아주 좋은 선물이 생겼군. 자네의 공이 아주 크니 전쟁이 끝나면 원로원의 의원직을 맡을 수 있도록 내가 힘을 써주겠네. 이 정도의 공을 세웠으니 반대할 의원도 나오지 않겠지. 이제 라틴어 실력도 어지간한 로마인보다도 더 자연스러우니까."
농담처럼 덧붙인 한 마디에 수레나스가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하하··· 저도 이제 로마의 지휘관이니까요."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동자에는 수렌 왕국을 짓밟은 흉노에 대한 증오가 깃들어 있었다.
그 들끓는 분노를 익히 헤아린 마르쿠스가 지휘봉을 들어 병력을 수습하기 위해 애쓰는 카이두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가리켰다.
"그럼 임페라토르로서 로마의 지휘관에게 명령을 내리지. 감히 주제도 모르고 로마의 사령관인 수레나스의 가문을 건드린 저놈들을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도록."
"임페라토르의 명을 받듭니다!"
마르쿠스의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말을 몰아 앞으로 박차고 나온 수레나스가 무기를 뽑아 들었다.
분노가 축적되어 있던 사람은 수레나스만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발 빠른 흉노의 기병대에 휘둘렸던 로마군은 일거에 분노를 표출하듯 함성을 지르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윽고 로마군이 일으킨 붉은 파도가 필사적으로 자리를 벗어나려 애쓰는 흉노군을 완전히 뒤덮어 버렸다.
곧 로마에 라옌 회전으로 알려질 흉노전쟁 최초의 승전에서, 사방이 차단된 흉노와 스키타이의 별동대 6만은 전멸당했다.
포위섬멸을 완성시킨 12만 로마군의 피해는 고작 2천에 불과했다.
< 208. 초강대국의 저력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