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4. 숨고르기 (215/326)

  < 214. 숨고르기 >

  214.

  현재 마르쿠스가 관리하고 있는 동방 속주는 로마 본토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흉노의 침입은 어쨌거나 저 먼 갈리아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그마저도 정리가 되었다고 하니 속주민들은 빠르게 안정감을 되찾았다.

  마르쿠스가 흉노와 스키타이의 선봉대를 전멸에 가깝게 토벌한 것도 한몫을 했다.

  로마를 공포에 떨게 만든 무리라고 했는데 정작 6만이나 되는 대군이 마르쿠스의 작전에 걸려 허무하게 쓸려나간 것이다.

  물론 동방에서 전멸한 기병들은 무장도 빈약했고, 절반 이상이 흉노족이 아니라 스키타이였으나 일반 시민들은 그런 세세한 사항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동방 속주는 로마 본토와는 달리 안전한 장소라는 믿음이었다.

  이는 자연히 마르쿠스에 대한 지지로 이어졌으며, 안 그래도 동방의 왕처럼 군림하고 있던 그의 입지를 더 단단하게 해주었다.

  다시 활기를 되찾은 안티오키아의 거리에서 사람들은 예전처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쟁이 생각보다 쉽게 끝난 것 같다고 하는 이들도 있었고, 아직 판단하는 건 시기상조라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도 있었다.

  "흉노의 위협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마르쿠스 총독의 임기는 지속되어야 한다!"

  현지 귀족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과 상인들까지 공공연히 이런 이야기를 하며 돌아다녔다.

  사실 이건 이견의 여지가 없는 주장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미 갈리아 재건과 북부 방어를 명목으로 갈리아 총독의 임기를 10년 더 연장했다.

  섹스투스 역시 현재 그리스 방어를 위해 정식으로 총독의 자리를 받은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방의 주민들이 마르쿠스의 임기가 끝나는 걸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마르쿠스는 여기서 굳이 자신의 임기를 연장해 달라는 요청을 넣지 않았다.

  대신 흉노의 별동대를 전멸시킨 보고서를 상세하게 적어 원로원에 제출했을 뿐이다.

  효과는 그것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안 그래도 카이사르의 인기가 감당 불가능할 정도로 치솟고 있던 걸 경계하던 카토는 이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기로 마음먹었다.

  "흉노의 본대는 물러갔으나 이들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릅니다. 지금은 갈리아가 공격을 받았으나 다음에는 어디가 공격받을지 알 수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흉노를 격퇴한 마르쿠스가 자신의 자리를 비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없었다면 동방 속주 또한 갈리아처럼 흉노의 말발굽 아래에 짓밟혔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해서 저는 그에게 카이사르와 대등한, 아니 그 이상의 권한을 부여해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당연히 반대하는 시민들은 없었다.

  카토가 마르쿠스의 총독직을 연장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는 삼 일도 채 걸리지 않았다.

  이로써 마르쿠스는 흉노의 위협이 다 사라질 때까지 동방에 계속해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사실 말이 좋아서 흉노의 위협이 끝날 때까지지 이건 무기한이나 마찬가지였다.

  흉노가 완전히 절멸당하지 않는다면 아직 위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구실로 계속 눌러앉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귀족파 역시 그 사실을 알았으나,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마르쿠스를 믿어서이기도 했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귀족파의 권위를 세울 필요가 있어서였다.

  어차피 로마의 권력 구도상 마르쿠스의 총독직이 끝나도 동방 속주는 그의 영역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총독 자리를 계속 유지해 주는 형식으로 카이사르와 균형을 맞추는 게 더 좋아 보였다.

  현재 카이사르는 베르킨게토릭스를 앞세워서 갈리아를 이전보다 더 효율적으로 통치하려 하고 있었다.

  갈리아는 예전부터 사분오열되어 서로 대립하면서 자신들의 잠재력을 깎아 먹고 있었다.

  그러나 로마와의 전쟁과 이어진 흉노의 습격으로 기존의 강자였던 대부족들이 대부분 힘을 잃었다.

  게다가 흉노에게 쫓겨 고향을 버리고 여기저기 흩어진 군소 부족들도 많았다.

  이들은 서로 연합해 함께 싸우고 작전을 수행하며 서로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키워나갔다.

  흉노가 물러간 이후 로마는 갈리아를 재건하기 위해 자신들 식으로 여러 요지에 대도시를 건설하고, 기존에 하던 토지 경작을 빠르게 재개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갈리아는 원 역사보다 훨씬 더 빠르게 통합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더욱이 베르킨게토릭스라는 확실한 구심점까지 있으니 이런 흐름에도 한층 더 탄력을 받았다.

  카토와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이런 행보에 점점 걱정이 많아졌다.

  로마의 위기를 구원하기 위해 힘을 몰아주기는 했는데 그게 너무 지나친 게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계속 들었던 것이다.

  '이대로 가면 카이사르가 정말로 왕이 되고자 했을 때 그를 막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예전부터 가지고 있던 불안감이 스멀스멀 현실이 되어가는 느낌이었다.

  게르마니아와 갈리아가 초토화에 가까운 피해를 입어 카이사르의 세력이 약화될 거라 내다보았던 건 너무 안일한 예상이었다.

  이번 전쟁으로 카이사르가 얻은 걸 냉정하게 헤아려 본 카토는 그 자리에서 육성으로 욕설을 내뱉을 뻔했다.

  우선 20만의 흉노족을 밀어내면서 로마를 구원한 영웅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안 그래도 원래부터 민중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카이사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라 할 수 있었다.

  여기에 앞선 섹스투스와의 내전에서 승리를 거둔 것까지 더해져 카이사르는 완전히 민중파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베르킨게토릭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만들어 다른 속주 출신 의원들이 탄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었다.

  이렇게 되면 민중파와 귀족파 외에 제3의 파벌이 생기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앞으로 이런 신참 의원들이 정계에 들어온다면 당연히 카이사르와 베르킨게토릭스를 중심으로 뭉칠 터.

  귀족파로서는 세력의 열세에 처하게 되는 미래가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그래서 카토는 지금까지 늘 그랬듯 다시 한번 마르쿠스를 전면에 내세워 카이사르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마르쿠스가 원로원이 어떻게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커버린다고 해도 카이사르의 독주 체제보다 백배는 더 나았다.

  게다가 마르쿠스를 따르는 수레나스를 원로원 의원으로 만들면 베르킨게토릭스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생기게 된다.

  안타깝지만 이제 원로원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로마가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는 동안 마르쿠스는 한 가지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다름 아닌 이전에 명령을 내린 대규모 수송 작전에 관한 건이었다.

  셉티무스에게 기대 이하의 보고를 받은 그는 자신의 참모들을 소집했다.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정확한 결정이 필요한 시기였다.

  안티오키아 왕궁의 회의실에 푸블리우스와 수레나스, 그리고 안토니우스가 자리를 잡았다.

  대화의 포문은 마르쿠스가 열었다.

  "저번에 말했듯 내가 구상하고 있던 작전은 흑해를 타고 올라가 흉노의 본거지를 직접 타격하는 것이었다. 한데 충분한 배가 확보될 때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군."

  예상과는 다른 말에 수레나스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 작전을 구상한 건 최근이기는 해도, 배의 확충은 이전부터 명령한 게 아니셨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는 건 의외로군요."

  "갈리아 쪽에서 치러졌던 대규모 작전을 지원하느라 생각보다 물자를 확충하지 못했다는군. 뭐, 최우선적으로 협조를 하라는 명령을 내린 건 나였으니 누구를 탓할 문제는 아니지."

  "어쩔 수 없는 문제였군요. 그때는 그게 우선도가 더 높았을 테니 정확한 판단을 한 거라고 봅니다."

  마르쿠스도 동감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동방 속주는 라인강 북상작전에 직접 군대를 보내지는 않았으나 대신 상당한 양의 군량과 물자를 수송해주었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가 가지고 왔었던 상당수의 식량이 도로 로마 쪽으로 흘러들어갔다.

  그러니 당연히 배의 제작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고 비축된 물자도 풍족하지 않았다.

  푸블리우스가 얼굴을 굳히며 수많은 숫자가 적혀있는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그러면 아무리 빨라도 2년 이상은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거로군요."

  표정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동방 속주의 위치상 흑토 평야를 치려면 바다를 통해 가는 게 최선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카프카스 산맥을 넘거나 카렌 왕국을 통해 빙 돌아가야 했다.

  하지만 중무장을 한 기병들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카렌 왕국을 우회해 가는 건 터무니없이 시간이 길어졌다.

  설령 그렇게 공격을 간다 쳐도 기습을 할 수가 없으니 흉노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 버리면 그만이다.

  어느 쪽도 썩 달가운 선택지는 아니었다.

  "그러면 일단 동원 가능한 병사들이라도 확실히 추려놔야겠군요. 어쩌면 흉노 놈들이 먼저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 놈들의 본거지를 타격할 만한 병력은 나르지 못해도 다른 지역이 공격받으면 지원을 갈 수는 있겠지. 게다가 국경에도 어느 정도의 병력은 상주시켜 둬야 하고."

  마르쿠스는 물론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흉노가 잠잠히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시민들은 풀어져 있어도 되지만, 위에 있는 사람들은 한시도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된다.

  가능성은 한없이 낮겠지만, 흉노의 본대가 아예 방향을 틀어서 카렌이나 수렌 왕국 쪽으로 들어오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당장 그리스나 갈리아보다 공격당할 확률이 적어 보인다고 현지 방비를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마르쿠스가 푸블리우스와 안토니우스를 한 번씩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국경 방어는 두 사람이 수고를 좀 해줘야겠어. 흉노의 본대가 내려올 가능성은 적겠지만 이전처럼 미끼를 보내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맡겨 주십시오."

  "만약 적들이 온다면 이전처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않겠습니다."

  두 사람이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답했다.

  마르쿠스는 별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의 군사적인 재능은 뛰어난 편이었고 의외로 호흡도 꽤 잘 맞았다.

  둘의 능력을 모은다면 국경을 완벽히 지킬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동맹들에게서 최대한 많은 원조를 받을 필요가 있어. 이집트야 두 파라오가 모두 여기에 있으니 문제없겠지만, 나바테아 쪽은 아무래도 이쪽에서 누군가 한 명 갈 필요가 있어 보여. 내가 볼 땐 수레나스, 네가 적임자 같은데."

  "나바테아에 가서 아라비아의 지원군과 식량까지 얻어내면 되는 것입니까?"

  "그래. 그쪽에서 탐탁지 않아 하는 것 같으면 네가 이번에 얻은 지위를 상기시켜주면 될 거야. 그러면 대충 내 말뜻을 이해하겠지."

  "샤킬라빌이라면 아마 지금쯤 그 소식을 들었겠지요. 애타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마르쿠스는 이전에 아라비아의 최고 귀족과 나바테아의 실세인 샤킬라빌에게 원로원 의석을 한 자리씩 약속해주었다.

  그때는 아직 때가 아니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지만, 이제는 속주 출신의 유력자가 원로원에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니 그 당사자이기도 한 수레나스가 직접 가는 게 효과가 더 좋을 거라 판단한 것이다.

  수레나스 역시 마르쿠스의 의중을 짐작하고 기꺼이 역할을 받아들였다.

  "이집트와 나바테아, 그리고 아라비아의 추가 지원을 받아낸다면 추가 군단을 더 편성하면서 대규모 원정에 필요한 물자까지 확보할 수 있을 거야. 2년 정도 시기가 더 늦춰진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겠지."

  제아무리 흉노의 군세가 강력해도 갈리아와 그리스, 그리고 시리아 속주를 단기간에 무너뜨리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니 결전의 시기가 온다면 내후년.

  마르쿠스의 머릿속에서 앞으로의 전쟁에 관한 청사진이 구체적인 형태를 띠어가기 시작했다.

  ※※※

  흉노가 서쪽으로 오면서 시작된 혼돈의 바람은 거센 풍랑이 되어 주변의 모든 지역을 휩쓸었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역시 게르마니아와 갈리아였다.

  그러나 그들보다 앞서서 흉노에게 자신들의 터전을 빼앗긴 이들이 있었다.

  바로 원래부터 게르마니아 동쪽에 거주하고 있던 슬라브족과 사르마티아족이었다.

  유목민족인 사르마티아는 스키타이처럼 대다수가 흉노에게 굴복해 밑으로 들어갔으나, 복속을 거부한 이들은 고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원 역사에서도 사르마티아를 완전히 멸망시킨 이들이 훈족이라는 걸 고려하면 꽤나 서글픈 말로라 할 수 있었다.

  정처 없이 우왕좌왕하던 슬라브와 사르마티아 난민들은 처음에는 게르마니아로 들어가려 했으나, 로마군의 방어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로 흉노가 게르마니아를 침공하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들은 부리나케 진로를 틀어 그리스로 향했다.

  그러나 그리스라고 이들이 손쉽게 정착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스의 총독으로 있는 섹스투스는 대규모 난민이 몰려오면 속주 통치가 불안해질 것을 염려해 이들의 진입을 불허했다.

  사실 흉노의 세력권에서 내려온 이들이라 무턱대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들 중 적의 첩자가 얼마나 섞여 있을지 알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결국 점점 더 갈 데가 없어지는 난민들은 무력으로라도 그리스를 차지하기 위해 전투를 벌였다.

  섹스투스는 졸지에 두 난민 부족을 동시에 막아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래도 카이사르와의 전투를 거치며 성장한 그에게 무장도 빈약한 난민들은 그리 어려운 상대가 아니었다.

  치열했지만 일방적으로 끝난 전투 뒤 슬라브와 사르마티아인들은 그리스로 진입하는 걸 포기하고 또다시 방향을 틀었다.

  섹스투스는 자신의 클리엔테스들을 총동원해 방어병력을 충원하면서도 그들을 더 쫓지 않았다.

  이때가 카이사르가 라인강 북상작전을 펴 흉노의 본대를 몰아내기 시작했을 때였다.

  결국 이제 정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슬라브와 사르마티아는 막 왕국을 건립하고 중흥기에 들어간 다키아 왕국을 침공했다.

  현대의 루마니아 지역에 위치한 다키아 왕국은 강력한 전사들이 많은 강국이었으나, 슬라브와 사르마티아 부족들 역시 이제는 더 물러날 곳이 없었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어느 한쪽으로 전세가 확 기울지 않았다.

  그래도 전쟁이 길어지면 결국 수성을 하는 쪽이 더 유리해지기 마련이다.

  이곳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로마도 그렇게 생각하려던 찰나.

  그런 모든 예상을 부질없게 만드는 변수가 개입했다.

  바야투르가 직접 이끄는 흉노 기병대 10만이 다키아 왕국을 침공한 것이다.

  그리스 전선. 제 2막의 도화선이었다.

  < 214. 숨고르기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