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6. 그리스 전역 >
216.
섹스투스의 지원 요청을 받은 마르쿠스와 카이사르는 곧바로 지원군을 편성해 보내주었다.
소아시아에서 출발한 구원군은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4만.
갈리아에서 출발한 군단은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3만으로 도합 7만의 대군이다.
섹스투스가 동원한 20만에 7만이 더해지면 흉노가 그리스를 함락하는 건 거의 불가능해진다.
여기에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본대가 천천히 포위망을 좁히면 흉노는 무조건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구원군 파병이 역으로 섹스투스가 나가서 싸울 마음을 굳히게 해버렸다.
섹스투스는 곧 도착할 7만의 군사에게 아테네를 지키게 하고, 본인은 전 병력을 이끌고 테살로니카를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다.
'적은 분산되어 있고 이쪽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20만의 대군.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싸운다면 질 리가 없다.'
도발에 걸려 무작정 뛰쳐나온 게 아니다.
사실 섹스투스의 입장에서는 이런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나 마르쿠스와 달리 그가 이번 전쟁에서 세운 공적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좋았다.
슬라브나 사르마티아족을 막은 건 다른 두 사람이 세운 공에 비하면 자랑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카이사르는 흉노의 20만 대군을 몰아내고 갈리아를 되찾았고, 마르쿠스는 아예 6만의 적 기병을 몰살시키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섹스투스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틀어박혀서 그리스 전역이 유린당하든 말든 방관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얼마 남지 않은 클리엔테스들의 민심도 잃어버릴 테고,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혼자 힘으로 흉노 기병을 밀어낸다면 또 모르겠으나, 방어 계획의 골자는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힘을 빌리게 되어 있다.
즉, 섹스투스가 단독으로 눈에 띌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이 보란 듯이 군사를 쪼개 행동하고 있으니 나가서 싸우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당장 테살로니카와 에페이로스 쪽에서 섹스투스가 출병하는 그날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구원군을 요청하는 배가 날아들었다.
그러나 전 병력을 끌고 나오긴 했어도 섹스투스는 결코 조급하게 무작정 전진하지는 않았다.
휘하의 지휘관들은 하루라도 빨리 테살로니카로 가서 적의 수장을 죽여야 한다고 했으나, 이게 속임수일 가능성도 고려해야만 했다.
"적의 목적이 우리를 끌어들여 협공하는 것이라면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습니다. 정찰병을 넓게 운용하면서 천천히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괜히 그러다가 적군이 돌아올 시간만 벌어주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테살로니카에 있는 적의 수괴만 최단시간으로 처치하면 이번 전쟁은 끝입니다. 그리고 섹스투스 님이야말로 이번 전쟁에 종지부를 찍은 위대한 영웅으로 길이길이 기억되실 겁니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가비니우스와 폼포니우스의 조바심에도 섹스투스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옛날의 경험 없는 초보 지휘관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회전을 벌이러 나왔어도 상정할 수 있는 위험은 최대한 피하고 볼 생각이었다.
만약 에페이로스에 있는 적의 10만 기병이 회군하는 낌새를 보이면 즉시 기지로 퇴각할 작정이었다.
적이 방심해서 군대를 나눴다면 응징을 해줄 테지만, 이게 함정이었다면 굳이 걸려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저들이 처음부터 우리를 끌어내기 위한 계책을 세운 것이었다면 우리가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제때에 맞출 수 없습니다. 전원이 기병으로 이루어진 적과 아군의 속도 차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빨리 테살로니카로 향해도 적에게 뒤를 잡힐 수밖에 없어요."
"···그렇긴 합니다만."
"그러니 최대한 안전하게 가겠습니다. 어차피 저들도 성벽으로 둘러싸인 대도시를 단시간에 점령하진 못할 테니 조급해할 필요는 없겠지요."
섹스투스의 말이 구구절절 이치에 맞았기에 지휘관들도 더 반박을 하진 못했다.
사실 그들이야 에페이로스로 간 10만이 돌아와 봐야 한꺼번에 같이 격퇴하면 되지 않느냐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섹스투스는 마르쿠스가 절대로 적과 정면에서 맞서지 말라고 강조했던 서신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전에 카이사르와 절대 정면에서 싸우지 말라던 말을 듣지 않아서 한 번 제대로 매운맛을 보지 않았던가.
이번에는 그의 충고를 귀담아들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르쿠스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전원 기병으로 이루어진 적의 유목민 대군이 얼마나 강력할지 대강 예상이 되긴 했다.
20만 대 20만으로 정면에서 맞붙는다면 아무리 강력한 로마군이라고 해도 위험할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인 폼페이우스도 언제나 기병의 중요성을 강조하곤 했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면 모든 걸 가질 수 있을 테지만, 반대로 지면 모든 걸 잃게 된다. 절대로 질 수는 없음이야.'
섹스투스는 할 수 있는 최대한 정찰병을 풀어 적의 세세한 동태를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군이 흉노의 움직임에 신경을 집중하는 동안 정작 바야투르는 지금까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움직임을 보였다.
달라진 거라고는 트라키아로 보낸 5만의 군사 중 2만을 도로 회군시킨 것 정도였다.
에페이로스에 있는 10만은 여전히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여러 도시들을 약탈하고 다니기만 했다.
트라키아로 건너간 알탄 역시 무역 도시 비잔티온을 공략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고 있었을 뿐, 바야투르와 합류하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오만한 군사 운용이 로마군의 분노를 더욱 솟구치게 만들었다.
"저 오만한 개자식들을 철저하게 응징해줘야 합니다."
"우선 테살로니카를 치고 있는 적의 수괴를 무너뜨리고 곧장 비잔티온으로 향하도록 하죠. 거기서 적의 장수를 쫓아내면 에페이로스에 있는 떨거지들이 뭘 더 어떻게 하겠습니까."
"가비니우스 님의 말이 옳습니다. 운이 좋게도 적은 지금 방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여기서 승기를 굳히고 로마를 구한 영웅이 되실 차례입니다."
적이 이렇게까지 빈틈을 보이는 이상 섹스투스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니, 사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 역시 적이 괘씸한 게 사실이었다.
감히 무적의 로마군을 앞두고 저런 광오한 태도를 보이는 이가 지금까지 얼마나 있었던가.
소수로 다수를 맞서는 건 지금까지 언제나 로마의 역할이었다.
예외라면 한니발에게 패배했던 전투들이 있겠지만, 로마군의 그 누구도 야만족의 수괴를 한니발에 버금가는 장수라 생각하지 않았다.
"이쪽의 전력은 군단 보병 13만에 동맹국 보병 4만, 궁기병 2만에 동맹국 기병이 1만으로 도합 20만. 저쪽은 대략 7만 정도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쪽이 패배할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결국 회전을 하기로 마음먹은 섹스투스는 정찰병들을 계속 에페이로스 방면을 감시하게 한 뒤, 병력의 진군속도를 올렸다.
이 소식은 곧장 테살로니카에 포위진을 펴고 있는 바야투르의 귀에도 들어갔다.
"로마군이 북상해 오고 있다고?"
"예, 모든 게 천태선우님의 계획대로입니다."
"그래, 드디어 때가 됐군."
바야투르의 냉막한 얼굴에 한 줄기 살의 어린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그로서는 손뼉을 치며 반길만한 일이었다.
로마군이 계속 틀어박혀서 수성전을 벌인다면 아무리 흉노군이라고 해도 돌파하는 건 거의 불가능이었다.
보통이라면 성을 포위하고 말려 죽이는 방식을 취하겠으나, 그리스의 대도시는 거의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거의 모두가 항구였다.
삼면을 포위해 봐야 바다를 통해 물자를 조달받으니 적을 아사시키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러니 이렇게 적이 기어 나오지 않으면 커다란 피해를 줄 수가 없다.
바야투르가 딱히 오만으로 가득해서 군사를 이런 식으로 운용한 게 아니었다.
아퀼라를 노획하고 로마군을 도발하는 것부터 에페이로스와 트라키아를 동시에 공격하는 것까지, 전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한 구상의 일부였다.
하지만 역시 염려하는 목소리가 아예 나오지 않는 건 아니었다.
네 명의 선우들이 모두 자리를 비웠고 바야투르가 이끄는 건 20만의 기병 중 고작 7만에 불과하다.
부족장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의견을 개진했다.
"천태선우시여, 하다못해 비잔티온을 공격하고 있는 알탄 선우라도 불러들이셔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불안한가?"
"아, 아니옵니다. 제가 어찌 감히 천태선우님의 행사에 불안을 가지겠습니까. 그저 적을 더 확실히 격파하기 위해서는 이쪽도 병력을 더 동원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옵니다."
"그러면 놈들이 전투를 포기하고 도로 회군할 우려가 있다. 그리고 3배 정도의 격차야 전혀 걱정할 거 없다. 본래 알탄에게 있는 2만의 군대조차 데려올 생각이 없었으니까. 다른 선우들이 하도 걱정을 해서 그들을 안심시킬 겸 데려온 것일 뿐."
바야투르의 자신감에 부족장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얼굴에는 놀라움 대신 신뢰의 빛이 떠올랐다.
바야투르가 누구이던가.
여러 개로 나뉘어져서 대립하던 흉노의 모든 부족을 최단시간에 통일하고, 다른 유목민들까지 모조리 무릎 꿇려 유례없는 초원의 전성기를 연 지도자다.
그런 그가 가능하다고 한다면 가능한 것이다.
전의를 다지는 모두의 얼굴을 한 번 둘러본 바야투르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야투르라는 이름을 쓰는 이상 이 이름에 걸맞은 위업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 모두 알고 있겠지? 선대께서는 한고조가 이끄는 32만의 대군을 단 4만으로 가볍게 격퇴해 버렸다.
로마는 한고조의 군대보다 훨씬 더 강력하겠지만, 그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 지금 내가 이끄는 이들은 흉노 역사상 다시는 나오지 않을 최강의 전사들이다. 자네들이 내 기대만큼 활약해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
"맡겨만 주십시오!"
"로마 놈들의 피로 온 평원을 물들이겠나이다!"
전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린 바야투르는 테살로니카의 포위를 풀고 남하하기 시작했다.
한고조와 선대 바야투르의 일화를 되새긴 그들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었다.
바야투르가 했던 말들 중 거짓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한의 고조 유방은 과거 묵돌선우라 알려진 바야투르에게 엄청난 대패를 당하고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
말이 화친이지 실상은 한나라 공주를 흉노의 대선우에게 바치고 매년 엄청난 양의 비단과 음식을 제공하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번에 로마에게 승리를 거둔다면 이전에 한에게 그랬듯 한층 더 승리에 가까워질 수 있다.
흉노 전사들은 로마 여인들을 첩으로 삼아서 여러 가지 재미를 볼 거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며 희희덕거렸다.
반면 바야투르는 부하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차분하게 자신의 전략을 점검해보았다.
부하들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옛 고사를 들려주긴 했으나, 그가 행동의 근거로 삼은 건 당연히 케케묵은 옛날이야기 따위가 아니었다.
현재 바야투르가 이끄는 군사들은 그의 말대로 흉노가 지닌 최강의 전력이었다.
모든 전사들 중에서도 최고의 정예로만 고르고 고른 기병들이었으며, 장비도 가지고 있는 최고의 것들로 무장시켰다.
말이 좋아 7만이지 이 중 바야투르가 원래 지휘하기로 한 5만의 기병만으로도 사실상 10만 이상의 힘을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되는 로마군은 지금까지 바야투르가 본 로마군들 가운데 가장 약한 이들이었다.
최강은 두말할 나위 없이 파르티아 전쟁에서 본 마르쿠스의 로마군이다.
이때 바야투르가 보았던 이들의 장비는 평범한 로마군과는 수준이 달랐다.
반면 섹스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게르마니아에서 부딪쳐 본 카이사르의 군단병만도 못했다.
이런 조건을 전부 세심하게 계산해 보고 7만이면 충분하겠다는 결과를 도출한 것이다.
결코 대략적인 감이나 근거 없는 자신감만으로 행동에 나선 게 아니었다.
"가자, 나의 전사들이여! 오만한 게 누구였는지 적들에게 똑똑히 알려주도록 하라."
총기를 잃은 독수리는 날카로운 늑대의 이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양군이 마주치는 장소는 아테네와 테살로니카의 중간 지점인 라리사 인근의 대평원.
그리스의 운명을 결정지을 대승부는 이곳에서 결정되리라.
※※※
"뭐라, 섹스투스가 전군을 이끌고 북상하기 시작했다고?"
원군을 보내자마자 연이어 들려온 충격적인 소식에 마르쿠스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그렇게 전면전을 피하고 내 지원을 기다리라고 했는데 말을 듣지 않았단 말인가."
"저, 그것이 상황이 상황인지라······."
섹스투스가 보낸 전령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마르쿠스는 분노와 짜증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바야투르가 친 덫에 섹스투스가 보기 좋게 걸려든 것이다.
마르쿠스였다면 클리엔테스들이 뭐라고 하든 전부 묵살하고 원군이 올 때까지 방어를 굳혔을 테지만, 섹스투스는 평야에서 유목민이 얼마나 강해지는지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다.
'젠장. 더 강하게 말을 해놨어야 했는데.'
이제 곧 필승의 전략이 완성되려고 하는데 아군에게 발목이 잡힐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충고를 무시한 섹스투스보다는 오히려 그를 제대로 묶어두지 못한 자신에게 더 화가 났다.
'적을 살피기에 앞서서 아군부터 철저하게 단속을 해놨어야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던 내 방심이 화를 부른 거야.'
잠깐 동안 자책하고 있던 마르쿠스는 이내 그런 생각을 빠르게 털어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백날천날 후회하고 있어 봐야 상황이 바뀌지는 않는다.
지금은 최악의 결과를 가정하고 움직여야 할 때였다.
그리스는 로마의 지중해 경제를 책임지는 핵심지역이다.
이곳이 넘어가기라도 한다면 경제가 파탄 나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했다.
다 이겼다고 생각한 전쟁이 기울어버릴지도 모른다.
'섹스투스가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서 회군을 해주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지만··· 흉노의 바야투르가 그걸 허락하진 않을 거다. 초원을 순식간에 통일한 수완으로 봤을 때 그자는 지금의 섹스투스가 감당할 그릇이 아니야.'
최악의 상황은 전투 한 번으로 그리스의 모든 항구가 적에게 넘어가는 것이다.
그리스와 소아시아 속주는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이에 있다.
배로 단 3km만 가도 상륙이 가능할 정도로 지근거리였다.
흉노가 대규모의 배를 운용할 가능성은 없겠지만, 여차하면 넘어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협이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르쿠스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휘하의 모든 막료들을 소집해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달네스 해협에 방어선을 구축해라. 그리고 사용 가능한 모든 군함과 병력을 집결시켜라."
"예? 그 말씀은······."
"준비가 갖춰지는 대로 내가 직접 그리스로 간다."
< 216. 그리스 전역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