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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그리스 전역 (218/326)

  < 217. 그리스 전역 >

  217.

  바야투르가 이끄는 7만의 기병과 섹스투스가 지휘하는 20만의 군단은 라리사 인근의 테살리아 평야에서 맞닥뜨렸다.

  수십 km가 뻥 뚫려 있어 얼마나 많은 대군이 몰려오더라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장소였다.

  바야투르는 저 멀리 보이는 로마군의 웅장한 위용을 보면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평원을 가득 메운 로마군의 진형을 본 그는 내심 쾌재를 불렀다.

  딱 봐도 적이 아군의 3배에 가까울 정도로 많아 보인다는 사실이 그를 즐겁게 만들었다.

  로마군이 많다는 이야기는 곧 이 전투에 그리스를 방어하는 대부분의 병력이 집결되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적을 박살 내면 농성전을 벌이고 있는 그리스의 대도시들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이다.

  바야투르는 상당한 거리를 두고 넓게 진형을 펼친 로마군을 보자마자 바로 돌격명령을 내렸다.

  이미 적의 진영을 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이 전투의 흐름이 완벽하게 그려졌다.

  "잘 따라와라! 내 꽁무니만 안 놓치면 이 전투는 이긴다!"

  그가 벼락처럼 말을 몰아 튀어나가자 7만의 기병이 일제히 돌격을 개시했다.

  "우아아아아! 가자!"

  흉노 전사들의 말발굽이 초록의 녹지를 밟고, 그들이 내지를 함성이 평야를 뒤흔들었다.

  대열을 갖추고 적의 동태를 지켜보려던 로마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진형조차 갖추지 않은 채 나타나자마자 냅다 돌격을 하는 모습은 그들이 지닌 상식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저 무식한 야만족 놈들! 적이 온다! 모두 전투 준비!"

  진지 구축은커녕 진형도 꾸리지 않고 들어오는 건 정말 상상도 못 했기에 어어 하는 사이 적과의 거리가 너무 많이 좁혀졌다.

  놀랍게도 흉노의 정예들은 중구난방으로 돌격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새 일정한 대열이 잡혀 있었다.

  로마 궁기병들이 부랴부랴 활을 쏘았지만, 거리 문제로 두 번 이상 시위를 당긴 궁수가 없었다.

  로마군이 중구난방으로 쏜 활을 가뿐하게 흘려낸 흉노 경기병 6만이 일제히 쏜 화살이 로마군 좌익의 기병들에게 일제히 쏟아졌다.

  "크아악!"

  "놈들의 전 병력이 좌익으로 파고든다!"

  정석 그대로의 진을 짜고 있던 섹스투스와 막료들은 그제야 자신들의 실수를 알아차렸다.

  전통적인 횡진 대 횡진의 구도에 익숙해져 평상시처럼 병사들을 배치한 게 최악의 실수였다.

  게다가 동맹군 기병까지 합쳐봐야 3만밖에 되지 않는 기병을 좌우로 나눠 양 끝에 배치하기까지 했다.

  이러니 아차 하는 사이 순식간에 좌측으로 밀고 들어온 적의 기병대를 제지할 수단이 없었다.

  심지어 단 한 번 화살을 주고받은 것만으로도 양측의 숙련도 차이가 극단적으로 갈린다는 게 그대로 드러났다.

  바야투르가 이끄는 기병들은 투쟁이 일상이던 초원에서 성장하고 줄곧 전장에서 뒹군 정예 중의 정예였다.

  반대로 섹스투스의 군대는 태반이 흉노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급하게 끌어모은 병사들이었다.

  원래부터 그를 따르던 정예병들을 그나이우스, 카이사르와 벌인 연이은 내전에서 절반 이상 잃어버린 게 너무나도 뼈아팠다.

  그래서 아군의 사기를 위해 전투경험이 있는 병사들을 전열에 배치해 놓았던 것이었는데 이게 너무 큰 패착이 되어버렸다.

  이건 섹스투스의 능력이 딸려서라기보다는 순수하게 경험의 부재에서 비롯된 비극이었다.

  유목민족과 제대로 된 전투를 벌여본 적이 없는 그는 당연히 정석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별다른 경험 없이 최적의 진형을 갖출 수 있는 사람은 기껏해야 카이사르 정도이리라.

  "적의 좌익이 흔들리고 있다! 그대로 돌파해 사정없이 도륙하라!"

  흉노 기병들의 집중사격으로 혼란에 빠진 그 틈을 바야투르가 이끄는 1만의 중기병이 밀고 들어갔다.

  동시에 활을 집어넣고 만곡도로 무장을 바꾼 경기병들까지 그 뒤를 따라 돌격해 들어왔다.

  푸욱 퍼억!

  "끄아악!"

  "무, 물러나라! 다른 부대는 뭐 하는 거야! 빨리 이쪽으로 지원을 와달라고!"

  우왕좌왕하는 로마의 좌측 기병을 손쉽게 녹여버린 바야투르는 무장이 빈약한 적의 후열을 집중적으로 타격하기 시작했다.

  경험이 적은 신병들과 질이 낮은 장비를 입은 동맹국 병사들이 주요 타겟이었다.

  20만 대 7만이라고 해도 7만의 기병이 20만의 군사들과 동시에 싸우는 게 아니다.

  횡대로 쭉 늘어서 20만의 병사들 중 적에게 제대로 대응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좌측과 허겁지겁 방향을 전환한 중앙의 군단이었다.

  게다가 바야투르가 집요하게 동맹군과 후열의 신병들만을 공격하자 병사들은 아비규환에 휩싸였다.

  바야투르는 마치 본능적으로 상대의 취약한 곳이 어디인지 알아채고 물어뜯는 늑대 같았다. 그가 헤집는 곳은 어김없이 진형이 무너지고 길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정신 차려라! 진형을 무너뜨리지 말고 침착하게 맞서라!"

  중앙에 있다가 황급히 건너온 섹스투스가 병사들을 지휘하려 했지만 늦었다.

  전열에 배치한 정예병들은 적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흉노에게 공격당하고 있는 동맹군이 완전히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한 존재가 된 동맹군 병사들 때문에 대열이 걷잡을 수 없이 허물어진 것이다.

  "으아악! 살려줘! 죽기 싫어!"

  "후방에서 안전하게 지원만 해주면 된다고 했잖아. 이건 약속이랑 다르다고!"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흉노의 칼에 맞아 죽는 병사 수만큼이나 같은 편 병사들에게 밟히고 찔려 죽는 수가 속출했다.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가는 피해에 섹스투스는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이전의 그였다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선이 붕괴되는 걸 지켜보았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동맹국 병사들은 이미 도움이 안 된다. 차라리 저들을 그냥 포기한 채로 전열을 재정비하는 게······.'

  생각을 정리한 그는 군단장들에게 빠르게 명령을 내려 무너져가는 진형을 다잡았다.

  그러는 사이 우익에 있던 기병대가 자신들의 독단으로 흉노군의 꼬리를 잡으러 달려갔다.

  무너지는 좌익의 기병대를 구하려는 다급한 마음이 냉철한 판단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멍청한 놈들! 누가 멋대로 움직이라고 했나! 명령을 기다려!"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기병대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저 멀리 나아가는 중이었다.

  로마군의 좌익과 후방을 유린하던 바야투르는 우익의 기병이 자신들을 향해 오는 걸 보자마자 바로 병력을 뒤로 물렸다.

  섹스투스는 머리에 잔뜩 열이 오른 로마 기병들이 뒤를 쫓아가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의 기병이 보병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고 판단한 바야투르는 도주를 멈추고 갑작스레 방향을 선회했다.

  그의 뒤를 따르던 흉노 기병들 역시 삽시간에 세 갈래로 나뉘며 부채꼴 모양으로 돌진해오는 로마 기병을 둘러쳤다.

  차원이 다른 기마술과 병력 운용이다.

  뒤늦게 함정에 빠진 걸 알고 고립된 로마 기병들은 너무나 허망하게 목숨을 잃어버렸다.

  기병 전력이 완전히 무력화되자 제아무리 섹스투스가 이끄는 로마군이라 해도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다.

  바야투르의 명령에 6만의 경기병들이 일제히 넓게 산개 기동하며 활을 퍼부었다.

  그러는 와중에 바야투르가 이끄는 중기병들은 적의 방어가 취약한 곳만을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며 대학살을 펼쳤다.

  이 시점에서 이미 경험이 적은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공포에 잠식당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자신들의 수가 더 많았는데 사방에서 날아오는 건 적군의 화살과 창칼이다.

  병사들의 눈에 서서히 짙은 공포감이 서렸다.

  전장에서 군대가 무너지는 건 대부분 적의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기가 떨어진 아군의 패주에서 비롯된다.

  로마군 역시 다를 건 없었다.

  본래 인간은 공포가 전염되는 생물이다.

  혼자 있을 때는 철통같은 정신력으로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도 주변의 모두가 두려움에 떨기 시작하면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으으으! 사, 살려줘! 난 죽기 싫어!"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상대는 그냥 야만족 놈들 아니었냐고."

  동맹국 병사들이 가장 먼저 전선을 이탈하고 뒤이어 군단병들마저 하나둘 등을 보였다.

  사실상 전투는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크아악!"

  여기저기서 비명이 솟구치고 백인대장들마저 하나둘 피를 쏟으며 쓰러져갔다.

  흉노 기병들은 살인에 능숙한 기계들처럼 착실하게 로마군을 도륙했다.

  도망치는 보병들을 추격해 사살하는 데에는 이미 이골이 난 전사들이다.

  게다가 테살리아 평야는 몸을 숨길 구석도 없이 수십km나 쭉 펼쳐져 있는 대평원이었다.

  7만의 기병이 작정하고 추격한다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일이······."

  폼포니우스와 가비니우스는 마치 악몽을 꾸는 기분이었다.

  필승을 장담하고 가장 자신 있는 구도에서 수적으로 3배나 우위를 잡아 시작한 전투였다.

  그런데 순식간에 기병들이 무력화되고 진형이 완전히 허물어져 버렸다.

  이미 지휘고 뭐고 싸움을 지속할 상황이 아니었다.

  싸움의 승패가 아닌 전멸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다.

  "섹스투스 님, 일단 피하셔야 합니다!"

  "일단 가장 가까운 데메트리아스로 몸을 피하고 후일을 도모하셔야 합니다!"

  두 사람의 필사적인 설득에도 섹스투스는 말머리를 돌리지 않았다.

  다만 붉게 충혈된 눈으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자신의 부하들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미친 듯이 뛰고 있는 자신의 심장을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마르쿠스가 어째서 그토록 평야에서 회전을 벌이지 말라고 강조했는지 이제야 확실히 이해가 됐다.

  방어만 굳히면서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본대를 기다리기만 했어도 적을 몰아낼 수 있었는데 자신의 과욕이 전쟁을 망쳤다.

  클리엔테스들이 뭐라고 하든 중심을 잡고 냉정함을 유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다른 지휘관들이야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었으니 패전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리스 전 지역의 방어를 책임져야 했던 그는 다르다.

  이 패배로 그리스의 모든 도시가 흉노에게 넘어가면 로마와 소아시아까지 위험해진다.

  자신을 믿고 따라온 20만의 목숨은 또 어떻게 책임져야 좋다는 말인가.

  '이 패배는 그 무엇으로도 속죄할 수 없다. 그러니······.'

  마음을 굳힌 섹스투스는 흩어진 잔존 기병들을 모조리 긁어모으는 한편 전군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다.

  "전군 모두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쳐라. 데메트리아스로 향할 여력이 되는 부대는 모두 그쪽으로 피신하고 나머지는 적 기병들이 쫓아오기 힘든 산과 숲으로 들어가라!"

  이미 무너지고 있는 부대에 명령 하달이 제대로 되진 않았지만, 대충 그 뜻만큼은 모두에게 전해졌다.

  그러나 정작 섹스투스 본인은 다른 장교들처럼 말을 타고 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총사령관을 상징하는 깃발을 등에 매고 필사적으로 후위에서 병사들을 독려하며 적의 추격을 막았다.

  폼페이우스 시절부터 충성을 바친 정예병들도 그의 의지를 읽고 함께 자리를 지켰다.

  섹스투스는 그들에게 피하라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가비니우스와 폼포니우스도 자신들의 주군을 더 말릴 수 없음을 직감했다.

  섹스투스는 함께 남겠다는 두 사람을 만류하며 자신의 검을 풀어 가비니우스에게 넘겨주었다.

  폼페이우스로부터 물려받은, 목숨처럼 소중하게 아꼈던 검이었다.

  "무적을 상징하는 이 검을 저놈들의 손에 들어가게 둘 수는 없습니다. 부디 이 검을··· 마르쿠스 님에게 전해주십시오. 대신 가비니우스, 당신의 검을 빌릴 수 있겠습니까?"

  가비니우스는 목이 메는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허리춤의 검을 풀러 넘겨주었다.

  담담히 검을 받은 섹스투스는 자신의 마지막 말이 될 유언을 전달했다.

  "펠로폰네소스 산맥 방어선은 지금 병력으론 지킬 수 없습니다. 데메트리아스에서 계속 막을 생각은 하지 말고 바로 아테네로 가 수성하세요.

  아테네에 도착하는 즉시 함대를 동원하여 아직 함락당하지 않은 그리스의 모든 도시들에 물자를 지원하며 수성을 도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에게 반드시 이 말을 전하십시오. 그대들의 파트로네스인 섹스투스의 마지막 유언이다. 내 능력이 부족하여 그대들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그러나 로마는 결코 그대들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버텨내고 다시 일어서라. 로마는 지지 않는다. 지금 이 시간부로 그 대들의 파트로네스는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다.

  "

  "섹스투스 님··· 그 말씀은······."

  "마르쿠스 님과 만난다면 염치없지만 뒤를 잘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십시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섹스투스는 부하들을 이끌고 퇴각하는 아군의 최후미로 이동했다.

  단순히 패전의 책임을 목숨으로 사죄하려는 게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많은 부하들을 살려 마르쿠스에게 인계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시간을 벌면 벌수록 무사히 함대를 소아시아까지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난다.

  목숨을 바쳐 훗날을 기약할 수 있는 불씨를 사수한다.

  그게 섹스투스가 자신의 실수를 책임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로마의 긍지를 저들에게 똑똑히 보여주자!"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한 정예병들은 자신들이 입고 있던 신장비마저 벗어서 다른 병사들의 장비와 교환했다.

  조금이라도 적들에게 이로운 전리품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각오의 발로였다.

  검을 뽑아 들고 나아가는 섹스투스는 순간 다시는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로마의 전경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없더라도 누님이 불편함을 겪지 않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걸 잊었군.'

  아쉽지는 않았다.

  자신이 선택했고 그 결과가 빚어낸 운명을 피하지 않고 마주하리라 마음먹은 까닭이다.

  조금 무책임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으나, 로마의 미래는 마르쿠스와 카이사르가 어떻게든 해줄 것이라 확신했다.

  오히려 자신의 모든 걸 마르쿠스에게 넘기는 게 로마의 미래를 위해서는 더 좋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수십 년의 미래를 내다보면 이게 오히려 긍정적인 선택이 될지도 모른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아버지의 이름에 누를 끼치게 됐다는 것.

  '그래도 함께할 이들이 있으니 외롭지는 않겠군.'

  아쉽고도 안타까운 게 많은 삶이었으나 후회는 하지 않는다.

  새롭게 전의를 다진 섹스투스와 그의 부하들은 최후의 최후까지 물러서지 않고 흉노의 추격을 저지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아무리 목숨을 불사르며 싸움에 임해도 한계는 오기 마련이다.

  데메트리아스로 향하는 협곡의 입구에서 도주하는 로마군은 결국 흉노의 추격을 더 뿌리치지 못하고 접근을 허용했다.

  "절반도 채 남지 않았나······."

  마지막까지 아군의 후퇴를 도우며 활약한 자랑스러운 부하들의 수도 이제 몇백 남짓.

  점차 가까워져 오고 있는 바야투르의 모습을 바라보는 섹스투스의 입가에 호기로운 미소가 걸렸다.

  죽음을 앞두고도 전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 듯 그가 앞으로 나서며 검을 빼 들었다.

  "나는 위대한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들 섹스투스다! 네놈들에게 로마의 긍지를 보여주마!"

  어차피 이제 적을 뿌리치고 퇴각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으로 보여줄 건 의기밖에 없다.

  바야투르 역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수백의 병력만으로 자신들을 향해 오고 있는 데서 그 의도를 충분히 이해했다.

  "총사령관이 마지막까지 후미에 남아 부하들의 활로를 여는 것인가··· 그 뜻만큼은 높이 사 그 목숨은 내가 직접 거두어주마."

  바야투르의 신호에 기병들은 활 대신 만곡도를 꺼내 들었다.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힌 바야투르의 검은 섹스투스의 눈으로는 제대로 쫓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쩌엉!

  불똥이 튀는 소리와 함께 섹스투스의 몸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중심을 잃고 말에서 떨어졌다.

  "커헉!"

  떨어진 바닥이 푹신한 잔디이긴 했어도 온몸에 격통이 내달리고 목에서 피가 울컥 흘러나왔다.

  그래도 섹스투스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자세를 잡고 무기를 휘둘렀다.

  일견 우스꽝스럽게도 보일 수 있었지만 바야투르는 그를 비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 역시 말에서 내려 섹스투스의 각오에 제대로 응해주었다.

  카앙!

  단 일검을 나눈 것만으로도 섹스투스의 몸이 저 멀리 날아갔다.

  우수한 제철 기술로 만든 검이 아니었다면 이미 갑옷과 함께 두 동강이 났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바야투르는 최고의 전략가이기에 앞서서 초원에서도 상대를 찾아볼 수 없는 최강의 전사다.

  처음부터 섹스투스가 그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릴 가능성은 아예 없었다.

  "크흐··· 괴물 같은 놈이로구나."

  검을 마주 댄 것만으로도 양팔의 근육이 끊어질 듯 꼬이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마치 옛날에 검투 경기에서 본 스파르타쿠스가 떠오르는 압도적인 힘이었다.

  그래도 섹스투스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양자의 기량 차이는 몇 초 만에 승부가 갈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섹스투스는 갑옷으로 가리지 않은 부위가 피투성이가 되고, 추하게 땅바닥을 굴러가며 싸움을 이어나갔다

  "나를 죽이지 않으면! 이곳을 넘어가지 못한다! 도망치지 마라, 침략자들이여!"

  눈을 부릅뜨고 일갈하는 섹스투스의 포효에 바야투르의 얼굴에도 미미한 감탄이 서렸다.

  굳이 통역을 부탁하지 않아도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는 명확하다.

  아무리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고 왔다고 하더라도 이 정도로 한계를 넘어선 모습을 보이는 건 누구도 쉬이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무엇으로도 메울 수 없는 힘과 기술의 차이는 쉽사리 좁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쩡!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섹스투스의 검이 부러져 허공을 날았다.

  촤악!

  동시에 바야투르의 만곡도가 섹스투스의 가슴을 꿰뚫었다.

  "···커흑!"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섹스투스의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결판이 났음을 확신한 바야투르가 검을 빼내려는 그때, 섹스투스가 최후의 힘으로 왼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고 오른손으로 반쪽 밖에 남지 않은 검을 휘둘렀다.

  스각!

  가볍게 몸을 뒤로 젖힌 바야투르의 머리카락 한 가닥이 잘려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고작 머리카락 한 올, 고작 그뿐인 결과임에도 섹스투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 능력이 아버지 위대한 폼페이우스에 미치지 못한 게 한이구나. 그··· 분이 아직까지 살아계셨다면 감··· 히 네놈들 따위가··· 설칠 수 있었겠느냐."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감은 섹스투스의 독백 중 '폼페이우스'라는 말을 알아들은 바야투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폼페이우스 아구유크. 위대했던 대제의 핏줄에 걸맞은 최후로다."

  담담하게 감상을 내뱉은 그는 땅에 쓰러진 섹스투스의 시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몸을 돌렸다.

  "시신을 수습해 로마 놈들에게 보내주어라. 마지막까지 전사답게 싸웠으니 그 정도의 예우는 해줘야겠지."

  "그럼 추격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죽일 만큼 죽였다. 그리고 놈들의 시체에서 쓸 만한 장비를 수습해야 하니 이쪽도 슬슬 정비할 시간을 가지도록 하지."

  "명을 따르겠습니다."

  대승을 거두고 잔뜩 들뜬 부하들과 달리 바야투르는 여전히 냉정한 시선으로 현 상황을 고찰하고 있었다.

  사실 이번 회전은 처음부터 이기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전투였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이제 이다음의 행보다.

  그리스라는 핵심 경제권을 로마가 순순히 흉노에게 넘겨줄 리가 없다.

  이번 전투 이후론 로마도 국운을 건 총력전으로 나올 것이 뻔했다.

  바야투르는 다음에 상대하게 될 적수가 누구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갈리아를 포기하고 시네가차르로 잠시 돌아갔을 때 들었던 별동대의 전멸 소식은 아무리 그라 해도 뼈아팠다.

  자신이 원하던 시간을 벌지 못한 이상 이제 곧 로마의 최고전력과 마주하게 될 터.

  '바라던 바다. 여기서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 결정지어주마.'

  과거 미숙했던 자신에게 손쓸 도리조차 없는 완벽한 패배를 안겨준 유일한 상대.

  설욕의 때를 기다리는 그의 눈에서 다 억누르지 못한 투쟁심이 진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 217. 그리스 전역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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