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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로마의 역습 (219/326)

  < 218. 로마의 역습 >

  218.

  라리사 회전에서의 패배는 단순한 전투의 패배가 아니었다.

  이는 그리스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이 완전히 상실되었음을 의미하는 뼈아픈 패배였다.

  수없이 많은 전쟁을 치른 로마 역사에서 굴욕적인 패배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가 한니발과 벌인 칸나이 전투다.

  이 전투에서 무려 8만 6천 이상을 투입한 로마군은 5만 명 남짓한 한니발의 카르타고군에게 몰살에 가까운 패배를 당했다.

  사망한 인원만 해도 최소 4만 5천에서 최대 6만까지 추산되는 최악의 대패였다.

  150년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이후로 단일 전투에서 로마가 저 정도로 처참한 패배를 겪은 일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 라리사 회전의 참패는 칸나이 전투보다 무려 3배 이상의 사망자가 나왔다.

  20만의 군단병 중 목숨을 건지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은 2만이 채 되지 않았다.

  이런 처참한 결과가 나온 건 회전이 벌어진 장소 때문이었다.

  라리사 평원은 가장 가까운 로마의 도시인 데메트리아스와 무려 100km 가까이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지형 자체도 수십 km가 넘게 사방으로 탁 트인 장소라 보병들이 기병의 눈을 피해 달아날 수가 없었다.

  그나마 이 정도의 인원이 목숨을 건진 것도 섹스투스가 필사적으로 주의를 끌고, 아군의 퇴각을 도왔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수백밖에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전투에서 승리한 바야투르는 이제 거칠 게 없다는 듯 유유히 그리스의 도시들을 함락시켜 갔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일단 로마군의 장비 중 쓸 만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들을 수거하고, 부하들에게 휴식을 줄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다.

  "질 좋은 장비들이 제법 있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지는 않군. 역시 남제의 군대가 가장 수준이 떨어졌던 것인가."

  예상했던 바이긴 해도 전과가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게르마니아에서 로마군에게 노획한 신형 장비와 동급의 무기들로 자신의 정예들을 전부 무장시키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여전히 그 정도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사실 섹스투스군의 장비는 마르쿠스는 물론 카이사르에 비해서도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쿠스는 자신이 만든 장비 중 편전과 판금갑옷은 아예 유출을 하지 않았고, 판갑인 로리카 세그멘타타 정도만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에게 공급해주었다.

  그것도 면밀한 계산을 거쳐 그들이 상대할 적들을 무난하게 이길 수 있는 수준으로만 공급량을 제한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서 무력충돌을 벌이게 되는 최악의 경우까지 염두에 둬야 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적들과 주로 부딪칠 전열의 병사들만 신장비를 입어도 일반적인 야만족들은 상대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교환비는 거의 10 대 1이 나온다.

  이 정도면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고, 그게 사실이었다.

  흉노가 미리 쳐들어올 걸 알고 있었다면 마르쿠스도 다른 선택을 했겠으나, 이 부분은 그 역시 어쩔 수 없는 영역이었다.

  마르쿠스가 아닌 그 누구라 해도 신이 아닌 이상 이 정도의 역사적 개변을 읽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섹스투스가 물려받은 폼페이우스의 군단은 그나이우스, 카이사르와 연이은 내전을 거치며 상당수의 장비를 손실했다.

  그러니 당연히 바야투르가 건질 만한 최고급 장비의 수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병기의 수거가 모두 끝났다는 부하의 보고를 끝까지 들은 바야투르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저들의 장비가 훨씬 더 좋았다면 그만큼 아군의 피해도 커졌을 테니. 일단 이만큼이라도 쓸 만한 무기들을 손에 넣은 것으로 만족해야겠군."

  거의 무혈입성으로 데메트리아스에 들어온 그는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 된 항구에 짜증 섞인 눈빛을 한 번 던졌다.

  보고를 올리는 수하는 위대한 승리를 거둔 천태선우의 심기가 편치 않은 걸 이해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무언가 마음에 드시지 않는 점이라도 있으신지요?"

  "로마 놈들이 전투에서 패하긴 했어도 주도면밀함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 놀라워서 말이다. 최우선적으로 항구와 군함부터 손에 넣으려고 했는데 아주 꼼꼼히도 부숴 놓았어."

  흉노에게 있어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건 바로 군함과 그걸 다루는 항해술이었다.

  유목민족은 평지에서는 무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하지만, 바다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배에 타기만 해도 부들부들 떨거나 구역질을 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아니, 아예 배라는 걸 타고 나가면 저주를 받아서 죽는다고 믿는 이들까지 있었다.

  바야투르도 군함을 얻어서 로마와 해전을 벌이겠다거나 하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군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가지고 있지 않은 건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난다.

  당장 배를 타고 가면 그리스에서 소아시아까지 단 3km만 항해를 하면 되지만, 배가 없다면 수천 km를 빙 돌아서 진입해야 한다.

  굳이 해전을 벌이지 않더라도 배를 이용해 상륙하려는 모양새만 취해져도 로마로서는 고민거리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바야투르는 부하들에게 도시를 최대한 빠르게 점령하고, 최우선으로 항구와 군함들, 그리고 배를 만드는 장인들과 항해사들을 확보하라 일러 놓았었다.

  하지만 로마는 순순히 당해주지 않았다.

  회전에서 군대를 모조리 잃은 이상 도시를 넘겨줄 수밖에 없게 됐지만, 배는 단 한 척도 남겨두지 않았다.

  군함에 장인들과 항해사들을 되는 대로 실어서 얼마 남지 않은 수비병력을 전부 아테네로 집결시킨 것이다.

  이건 섹스투스가 죽기 전에 내린 마지막 명령이기도 했다.

  "데메트리아스가 이 모양이면 테살로니카도 별다를 바 없겠군. 비잔티온이나 트라키아의 주요 도시들도 마찬가지일 테고."

  "그래도 도시를 피해 없이 손에 넣은 게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절반 이상의 성공은 거두었다고 봐야지. 로마의 경제에 치명타를 주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바야투르는 갈리아 때와는 다르게 자발적으로 항복한 그리스 도시들은 약탈을 최소화했다.

  신전에 쌓여 있는 보물들 정도나 가져갔을 뿐이지 일반 시민들을 건드리는 행동은 극도로 피했다.

  이번에는 최대한 빠르게 현지를 정복하고 안정화를 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흉노의 악명에 공포에 떨고 있던 그리스의 도시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데에 안도하며 일단 흉노의 밑으로 들어갔다.

  진짜로 항복한 건 아니었으나 일단 이렇게 흉노가 도시를 점령하는 것만으로도 로마에게는 적잖이 부담이 될 터.

  바야투르는 여기서 하나의 커다란 구상을 그렸다.

  에페이로스를 공격하게 한 세 선우에게는 그대로 달마티아까지 진격해 로마로 통하는 길을 확보하라 지시했다.

  트라키아를 점령한 알탄은 그곳의 주요 도시들을 지키라고 일러두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은 그리스에서 마지막으로 저항을 이어가고 있는 아테네를 포위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다.

  아테네를 점령하지 않는다면 펠로폰네소스 반도로는 진입이 불가능하기에 로마는 현재 남은 모든 수비군을 이곳에 집중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생존병력이 너무 적어 수비가 어려웠지만 타이밍이 좋게도 마르쿠스가 보낸 안토니우스의 부대가 아테네에 도착했다.

  예정과 달리 워낙 급하게 오느라 4만이 아닌 5개 군단, 3만 명밖에 오지 못했으나 아테네를 수비하기엔 충분한 숫자였다.

  카이사르가 보내려던 지원군도 그리스로 오는 대신 다급하게 방향을 틀어 달마티아 쪽에 방어선을 피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바야투르는 이런 정황을 다 보고 받고도 유유히 아테네를 포위하고 적의 동향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공성전을 벌이려는 생각에서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런 마음은 먼지 한 톨만큼도 없었다.

  안토니우스의 병력이 아테네를 지키고 있긴 해도 필사적으로 수성을 하고 있을 뿐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오지 못한다.

  나오면 그 순간 바야투르가 이끄는 흉노의 정예기병들에게 몰살당하는 미래밖에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군함을 이용해 다른 도시를 탈환하는 것 역시 무리였다.

  이 시대의 배의 속도는 흉노 기병들의 기동성을 따라갈 수 없었다.

  해안선으로 주로 다니는 갤리선의 특징상 은밀하게 다른 도시를 탈환하는 건 불가능했고, 설령 가능하다 쳐도 많은 병력을 빼는 순간 아테네가 함락당한다.

  즉, 아테네의 로마군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바다를 통해 보급을 받으며 도시에서 버티고 있는 것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와 트라키아 전 지역이 초토화됐는데 로마가 이 상황을 계속 두고 볼 수는 없다.

  몇 년 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지중해 경제가 회생 불가능할 정도의 타격을 입게 되는 까닭이다.

  로마군은 반드시 그리스 탈환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주체는 당연히 가장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마르쿠스가 될 터.

  바야투르는 이 그리스에서 마르쿠스의 군대와 승부를 벌여 이 전쟁의 승리를 확실히 결정지을 작정이었다.

  만약 그가 회전을 피하고 성에 틀어박혀 방어전만 할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상관없다.

  그러면 전 병력을 달마티아로 쏟아부어 방어선을 뚫고 로마로 진격할 뿐이다.

  섹스투스의 군단이 전멸한 이상 로마가 기존에 쓰려고 했던 세 방향에서 흉노를 압박하는 전술은 이제 사용하지 못한다.

  "기대되는군. 과연 동제가 어떤 식으로 나올지.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다면 좋겠는데."

  군대를 정돈한 바야투르는 위태롭게 서 있는 아테네의 성벽을 바라보며 조소를 흘렸다.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축 가라앉은 도시의 분위기가 손에 잡힐 듯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바람결에 날려 오는 씁쓸한 냄새에는 죽음의 향기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바야투르는 이 또한 하나의 길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벌어질 대전을 생각하면 죽음의 향기야말로 그 광경에 더없이 어울리지 않겠는가.

  진정으로 싸울 가치가 있는 상대를 마주할 때야말로 정복자로서의 피가 들끓는 느낌이다.

  생애 최고의 사냥감을 맞이할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결전의 시간을 기다릴 뿐이었다.

  ※※※

  안토니우스를 선발대로 보낸 마르쿠스는 최대한 빠르게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전군을 소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스에서 도착한 전령이 그를 찾았다.

  전달받은 사실은 예상대로였다.

  20만에 달하는 대군이 거의 전멸당했다는 건 시작일 뿐이었다.

  아테네를 제외한 거의 전 지역이 흉노의 손에 넘어갔고, 신전에 비치된 엄청난 양의 문화재와 보물을 빼앗겼다.

  무엇보다 역사에 남을 정도의 대패를 겪은 여파가 그리스 전역을 넘어 로마 본토에까지 미쳤다.

  로마가 패닉에 빠졌고, 동맹국들은 의심해 마지않던 로마의 힘에 의문을 품었다.

  이대로 놔둔다면 경제와 사회, 정치 모든 분야로 균열이 펴져 나갈 것이다.

  "역시 내가 직접 그리스로 가는 수밖에 없겠군."

  마르쿠스는 씁쓸한 표정으로 전령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었다.

  섹스투스의 최후를 들었을 때는 말로 표현 못 할 안타까운 감정이 가슴을 가득 메웠다.

  '죄송하게 됐습니다, 폼페이우스 님.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했군요.'

  그는 지긋이 눈을 감고 한동안 눈을 뜨지 않았다.

  복받쳐 오르려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다시 눈을 뜬 그는 셉티무스에게 병력의 준비 상황을 물었다.

  대답은 얼마 전과 같았다.

  15만의 병력이 완전히 준비를 마쳤으나 딱 한 가지, 그들을 전부 태울 만한 군함이 아직 다 완성되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의 도우심인지, 섹스투스의 유언이 마르쿠스에게 활로를 뚫어주었다.

  섹스투스가 가진 모든 권한과 클리엔테스들을 마르쿠스에게 양도하겠다는 유서가 정식으로 공개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비니우스가 그리스에서 끌어모은 모든 군함이 비티니아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마르쿠스가 지금까지 건조한 배들을 합치면 너끈히 15만을 수송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비록 크나큰 실수를 범하긴 했지만, 섹스투스는 그걸 바로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마르쿠스는 섹스투스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원로원에 그런 내용으로 시작하는 보고서를 보냈다.

  물론 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자신이 섹스투스를 대신해 그리스를 수복하고 이 혼란을 수습하겠다는 것이었다.

  답장은 당연히 기다리지 않았다.

  이건 허락을 구하는 게 아닌 통보였다.

  그리고 일종의 선언이기도 했다.

  "전군은 항구에 집결하라. 지금부터 우리는 아테네로 가 그리스 전역을 흉노의 손아귀로부터 되찾아올 것이다!"

  20만의 로마군을 몰살시킨 적과 싸우러 간다는 말에도 병사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눈은 동포의 복수를 하겠다는 굳은 의지와 투지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들은 마르쿠스의 군대였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고, 눈앞에 선 적들을 무릎 꿇리지 못한 기억이 없다.

  마침내 바다를 가득 수놓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배가 줄지어 항구를 떠나 이동을 개시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바야투르의 군대는 저 바다 너머에서 끝도 없이 밀려오는 군함들이 아테네의 항구로 들어가는 모습을 똑똑히 관찰할 수 있었다.

  두꺼운 성벽으로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에 흉노군이 딱히 방해 공작을 펼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마르쿠스가 이끄는 15만의 대군은 마치 보란 듯 당당하게 아테네에 상륙을 마쳤다.

  당연하게도 양군의 지휘관은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할 마음이 없었다.

  바야투르의 입장에서는 마르쿠스를 꺾으면 사실상 소아시아까지 손에 넣을 수 있고, 마르쿠스의 입장에서도 7만의 별동대만을 이끌고 있는 바야투르를 여기서 죽이면 바로 전쟁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라리사 회전이 뼈아프다 하나 초강대국 로마는 아직 반격할 여력이 충분했다.

  이제는 빼앗긴 것을 수복하려는 로마에 맞서 여지껏 빼앗기만 했던 흉노가 지켜야할 차례였다.

  < 218. 로마의 역습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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