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9. 로마의 역습 >
219.
마르쿠스가 전 병력을 이끌고 아테네에 상륙했을 무렵, 로마의 분위기는 전에 없는 불안감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아무리 저 먼 그리스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해도 20만의 군대가 전멸당했다는데 충격이 없을 리가 없다.
로마의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던 그리스가 이민족의 손에 떨어졌다는 건 특히 충격의 강도가 남달랐다.
갈리아를 빼앗겼을 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당연히 패장인 섹스투스를 성토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위대한 아버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도 모자라 로마를 말아먹은 역적이라고 소리 높여 비난하는 이들도 있었다.
원로원의 분위기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귀족파 의원들은 평소 같았으면 민중파를 강하게 성토하고 책임을 지라 요구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모두가 이 믿기지 않는 패배 소식에 한동안 머리를 싸매고 말없이 침묵을 지킬 뿐이었다.
오래도록 원로원 의석을 지켰던 피소나 키케로도 맹세코 원로원 회당이 이렇게나 긴 침묵에 빠져 있는 걸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침묵만 지키고 있을 겁니까? 대책을 세워봐야지요."
카토가 쥐어 짜내듯 포문을 열자 수많은 의원들의 한숨 소리가 사위를 가득 메웠다.
민중파 의원들은 눈치를 보느라 여전히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고, 같은 귀족파인 비불루스가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뾰족한 방법이 있습니까? 카이사르가 달마티아 방면을 수비하기 위해 군대를 움직였으니 그가 잘 막아주기만을 바랄 수밖에요."
다른 의원 한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막을 수 있겠습니까? 라인강을 수복할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다를 텐데요."
"···짜증이 나긴 해도 카이사르의 능력을 믿어봐야지요. 만약 그마저 뚫린다면··· 그때는 외교로 해결을 보거나 기병인 놈들이 쉽사리 오지 못할 곳으로 피할 수밖에요."
"허허··· 대체 어째서 이런 상황이."
외교로 해결을 보겠다는 건 사실상 항복에 가까운 협정을 맺겠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 굴욕적인 발언에 화를 내거나 반대를 하는 의원이 없다는 게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라 할 수 있었다.
"섹스투스 그자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그냥 가만히 버티고만 있으면 이길 수 있는데 왜 굳이 나가서 싸워줬다는 말입니까."
같은 민중파 의원들조차 섹스투스의 경솔함을 비판하며 목소리에 날을 세웠다.
물론 이들도 섹스투스가 어째서 적의 도발에 응해 회전을 걸었는지 이유를 모르진 않았다.
삼두 중 유일하게 이번 전쟁에서 눈에 띄는 공적을 세우지 못했으니 마음이 조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문을 걸어 잠그고 수비만 하고 있는 건 성벽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다른 도시들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아직 어린 파트로네스로서 클리엔테스들의 성화를 무시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그렇게 버틴다고 해도 결국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본대와 함께 적을 밀어낼 테니 공적을 독식할 수도 없다.
떠밀리듯이 나가 전투에 임하는 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20만을 거의 모조리 전멸시킨 참패를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패전에 가혹한 책임을 묻지 않는 게 로마의 방식이기는 했으나 이건 정도를 넘었다.
사실상 섹스투스와 관련된 인물들은 앞으로 로마 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그나이우스는 추방당했고, 섹스투스는 전사했으니 실질적으로 타격을 입을 사람이 없었지만, 폼페이우스 가문의 명성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남은 건 분명했다.
어쨌거나 민중파와 귀족파는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궁리했으나 뾰족한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도출된 결론은 어쨌든 그리스는 무조건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시민들과 동맹국들의 민심을 달래줘야 한다는 두 가지였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첫 번째는 지금의 원로원이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카이사르와 마르쿠스가 어떻게든 잘해주기만을 빌어볼 뿐이었다.
그래도 시민들을 안정시키는 건 여전히 원로원의 역할이긴 했다.
게다가 마침 딱 좋게 마르쿠스가 보낸 서신이 원로원에 도착했다.
자세한 작전의 내용까지는 적혀 있지 않았으나, 섹스투스에게 인계받은 함대를 이용해 그리스를 탈환하겠다는 일종의 출사표였다.
믿어달라거나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거창한 말 따위는 적혀 있지 않았다.
이 점이 오히려 한층 더 신뢰감을 주었다.
섹스투스가 이끄는 군단이 전멸했어도 완전히 절망까지 하지 않았던 건 아직 그들이 믿는 진정한 군단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키케로와 카토는 불안으로 술렁이는 로마를 안정시키기 위해 다시 연단에 올라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뼈아픈 패배를 당하고 그리스를 흉적들에게 넘겨주게 되었지만 그 무엇도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옛날 우리의 선조들이 한니발에 맞서 싸웠던 전쟁을 떠올려보십시오.
굴욕적인 패배를 몇 번이나 당했어도 마지막에 승리하는 건 우리 로마였습니다! 우리 로마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처하더라도 언제나 위대한 영웅들이 목숨을 걸고 로마를 수호해왔습니다.
한니발을 무릎 꿇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그러했고, 게르마니아의 침략을 막아낸 마리우스가 그러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갈리아에서 흉노를 쫓아낸 카이사르가 달마티아를 수호할 것이고, 동방의 영웅 마르쿠스가 그리스를 탈환하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위대한 로마의 영웅들과 자랑스러운 우리 시민들은 이번에도 하나로 똘똘 뭉쳐 이 위기를 이겨낼 것입니다!
"
키케로의 뜨거운 연설은 시민들의 입을 타고 로마 곳곳에 퍼져 나갔다.
카이사르와 함께 마르쿠스까지 움직였다는 말에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되찾았다.
몇몇은 마르쿠스마저 패하면 로마는 정말로 더 여력이 없는 것 아니냐 걱정하기도 했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르쿠스를 믿었다.
로마의 동맹국들과 모든 시민들, 그리고 원로원 의원들은 한마음으로 그가 이 위기를 타파해주기를 바랐다.
만약 마르쿠스가 성공적으로 그리스를 되찾는다면 누가 감히 그가 섹스투스의 유산을 손에 넣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섹스투스의 유언대로 그리스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악숨과 쿠시까지 전부 마르쿠스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지금까지 균형이 유지되고 있던 권력의 추가 단숨에 한쪽으로 기울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로원 의원들조차 지금은 앞으로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았다.
어떤 최악의 사태가 오더라도 흉노와의 전쟁에서 져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뭐가 됐든 좋으니 제발 이겨만 다오.'
이것이 현재 로마의 모두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생각이었다.
※※※
아테네에 상륙한 마르쿠스는 로마 시민들의 간절한 바람이 자신에게 집중되고 있음을 잘 알았다.
호기롭게 출전하긴 했지만 긴장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전쟁을 치렀으나 지금처럼 압박감이 심했던 적은 없었다.
엄밀히 말해서 지금까지 그가 치른 전쟁은 사실 언제나 물러날 구석이 있었다.
파르티아전도, 아라비아 원정도 처참하게 패배만 하지 않는다면 대승적인 차원에서 물러나도 뒷수습이 가능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수 없다. 여기서 물러나면 지금까지 쌓아놓은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반대로 승리를 거둔다면 단숨에 승천해 모든 걸 거머쥘 수 있게 된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르쿠스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마음을 다잡았다.
'서두르지 말자. 이제 와서 조급해한다고 바뀔 건 없으니.'
그의 도착으로 초상집 분위기이던 아테네는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성을 포위하고 있던 바야투르의 군대도 바로 뒤로 물러나 도시와 거리를 두었다.
그러면서도 정찰병들을 풀어 계속 도시의 동향을 파악하는 움직임이 포착됐다.
마르쿠스는 바야투르의 의도를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현재 흉노의 전력 중 절반은 달마티아로 향하는 진입로를 뚫기 위해 에페이로스에서 서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3만의 군대로 트리키아를 점령한 알탄이 3개의 대도시에 병력을 주둔시키고 현지 안정화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는 보고도 들어왔다.
이런 움직임만으로도 바야투르가 어떤 구상을 그리고 있는지는 짐작이 갔다.
트라키아의 대도시들은 대부분 흑해와 접해있는 항구들이었다.
보스포루스를 손에 넣고 있는 흉노가 이 도시들까지 안정화 시키면 흑해가 흉노의 앞바다가 돼버릴지도 모른다.
마르쿠스로서는 반드시 저지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군함을 이끌고 상륙작전을 하려고 하면 당연히 바야투르의 본대가 이끄는 부대에게 방해를 받을 것이다.
이 시대의 배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기에 흉노의 기병들을 따돌리기란 사실상 무리였다.
게다가 바야투르 정도의 지휘관이라면 마르쿠스가 항구를 탈환하려 할 거라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어떤 식으로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을 테니 안일한 전략을 썼다가는 바로 역공을 당할 터.
'역시 일단은 부딪쳐 봐야지. 최소한의 힘의 균형조차 맞추지 못한다면 어떤 전략도 쓸 수 없을 테니까.'
당장 바야투르의 움직임만 봐도 그는 기회만 된다면 당장이라도 마르쿠스의 부대와 회전을 벌일 기세였다.
이미 섹스투스의 군단을 전멸시켰으니 그 정도의 자신감을 보이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마르쿠스 역시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마음이 없었다.
20만의 흉노 기병과 평야에서 싸우는 건 미친 짓이겠지만, 바야투르의 군대는 아직 7만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섹스투스와의 전투로 어느 정도 피해를 봤겠지만, 알탄의 부대에서 추가 인원을 차출해 공백을 메운 듯 보였다.
아마 7만 정도가 자신 혼자서 지휘할 수 있는 최적의 규모라고 판단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리고 바야투르가 회전을 원하고 있는 만큼 마르쿠스 역시 이걸 내심 기회라고 여겼다.
마르쿠스가 이끄는 군단은 1차로 온 안토니우스의 부대를 빼더라도 보병이 10만에 기병이 5만으로 다른 로마군에 비해 기병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 중의 상당수는 마르쿠스가 심혈을 기울여 육성한 정예들이며 다른 로마군들보다도 훨씬 더 우월한 장비로 무장하고 있다.
적의 부대도 흉노의 전사들 중 고르고 고른 정예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해볼 만할 것이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양측의 지휘관 두 명이 전부 지금을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라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자신감은 양군의 움직임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바야투르는 아테네에서 군사를 빼고 테살로니카 인근의 평원까지 물러났다.
그리고 트라키아에 있는 알탄에게 1만 2천의 군사를 데리고 테살로니카로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곳을 기점으로 로마군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숨기지 않고 드러낸 것이다.
마르쿠스도 이에 응해 15만의 병력을 이끌고 북상했다.
그러면서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5만의 군사는 아테네를 방어한다는 명목으로 후방에 배치해 놓았다.
모든 밑준비가 끝나자 마르쿠스는 천천히 군단을 이끌고 아테네를 떠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진군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일부러 흉노 정찰병들에게 보란 듯 느릿느릿 움직였다.
물론 혹시라도 바야투르가 추가 병력을 불러 급습할지 모르니 정찰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다.
바야투르 역시 마르쿠스가 자신을 꾀어내려는 속셈일지도 모른다고 판단하고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양쪽의 군대는 아주 천천히 싸움이 벌어질 테살로니카 평원 앞에서 맞닥뜨리게 됐다.
바야투르는 이번에는 라리사 회전 때처럼 곧바로 돌격하지 않았다.
한 번 사용한 전술로 다시 이길 정도로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평원 너머에 있는 로마군의 대열로 향했다.
내리쬐는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장비를 입고 길게 늘어선 군대가 당당하게 버티고 있었다.
섹스투스처럼 안 그래도 부족한 기병 전력을 반으로 나누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마르쿠스는 5만의 기병을 한 곳으로 뭉치고 최전열에는 회심의 병기인 중무장 기병을 배치했다.
수가 적고 연사를 하긴 힘들어도 사거리에서 확실하게 우위를 잡을 수 있는 편전 사수들도 자리를 잡았다.
전투의 순간이 다가오자 적을 보는 로마군단의 눈빛도 한층 더 강렬함을 더했다.
말들조차 곧 이어질 혈전을 감지했는지 발을 구르고 투레질 소리를 냈다.
평원에서 대치하고 있는 22만이나 되는 대인원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거칠어졌다.
푸블리우스도, 수레나스도 내심 긴장했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은 스파르타쿠스 정도였다.
그는 차분한 기색으로 자신의 창과 검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태도는 침착했으나 두 눈에는 숨겨지지 않는 전의가 이글거리며 불타오르고 있었다.
완벽히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마르쿠스가 무기를 뽑아 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가자! 오늘 우리는 저 흉적을 토벌하고 우리의 긍지와 땅을 되찾을 것이다!"
거기의 동시에 바야투르도 로마군을 향해 자신의 만곡도를 겨누며 뛰쳐나갔다.
"로마 놈들을 모조리 이전에 쳐죽인 저들의 동포에게로 보내주자. 나를 따르라!"
거친 함성과 말발굽 소리가 평원을 뒤흔들었다.
흉노군의 기동은 이전의 라리사 회전과는 아예 달랐다.
파르티아 전쟁에 용병으로 참여하고 거기서 많은 걸 보고 들은 바야투르는 마르쿠스의 군단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이다.
파르티아의 합성궁보다도 훨씬 더 긴 사거리를 자랑했다는 정체불명의 화살.
그리고 아무리 창으로 찌르고 활을 쏴도 뚫을 수 없는 괴상한 갑옷으로 중무장한 기병들.
바야투르는 지금까지 부하들이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을 저 병기들을 이미 확실하게 인지시켜주었다.
그래서인지 흉노의 기병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순식간에 넓게 산개했다.
몇몇이 날아오는 편전에 맞아 피를 뿜으며 낙마했으나 당황하는 전사들은 없었다.
이미 바야투르가 미리 언질을 주었을 뿐더러 편전사수의 수는 1천 남짓이었기 때문에 이들만으로는 흉노군에 큰 피해를 주긴 힘들었다.
편전에 당한 최전열의 선봉이 낙마하자마자 흉노군은 그대로 크게 우회기동하여 로마군의 측후면을 노렸다.
그러자 상대가 이렇게 나올 거라 에상한 마르쿠스는 중기병을 제외한 로마군의 5만 궁기병 전원을 투입했고, 흉노는 측면 돌파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로마군의 기병을 끌어들일 목적으로 일부러 뒤로 선회해 보았지만, 이번에도 로마군 기병은 철저히 보병진과 일정거리 이상 떨어지지 않고 대열을 유지하는 것으로 응대하였다.
결국 흉노군은 7만이나 되는 궁기병으로도 로마군에 이렇다 할 피해를 입히는데 실패했다.
로마군 또한 기동력에서 앞서는 저들이 거리를 좀처럼 좁히지 않아 피해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고착화 되어가는 전투를 끝낼 결정병기는 결국 중무장 기병이었다. 이번에는 스파르타쿠스가 직접 말을 타고 중무장 기병을 이끌어 달려오는 흉노군과 맞섰다.
하지만 흉노군은 당연히 로마의 중무장 기병들과 정면에서 싸워주지 않았다.
바야투르는 아예 중무장 기병들을 전담할 별동대를 따로 꾸려놓고 철저하게 그들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게 했다.
근접 거리를 주지 않고 끊임없이 활로 견제하면서 우월한 기동력을 살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반복한다.
흉노 정예들 중에서도 가장 기마술이 뛰어난 이들이었기에 보일 수 있는 신기였다.
그마저도 말이 지치지 않게 하기 위해 언제라도 갈아탈 수 있는 여분의 말까지 준비해 두었다.
말들에게까지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힌 중무장 기병들은 상대적으로 속도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만큼 자유롭게 전장을 헤집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방어력이 좋아도 적의 정예들을 아예 무시하고 뒤를 보이기엔 역시 불안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중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활을 쏴대는 적의 심장을 향해 제대로 투창을 꽂아 넣었다.
놀라운 기량을 보여주는 건 스파르타쿠스 혼자만이 아니었다.
바야투르 역시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로마군의 기병 한 명을 가뿐하게 말에서 낙마시켰다.
무기로 적을 찔러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달리는 말에서 낙마하면 그 충격은 고스란히 전해지게 된다.
그렇게 서로의 무력을 뽐내듯 전장을 휘젓던 두 사람이 마침내 정면에서 마주쳤다.
무릇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
한 차례 시선을 마주친 두 사람의 몸이 우뚝 멎었다.
가타부타 별다른 말은 오고 가지 않았다.
그저 시선을 교환한 것만으로도 양자 간의 의지는 충분히 전해졌다.
바야투르의 입꼬리가 쭉 위로 치솟았다.
스파르타쿠스 역시 크릭수스 이후로 처음으로 마주한 강적의 출현에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바야투르."
"스파르타쿠스다."
서로 간의 언어와 풍습은 달랐어도 입에서 나온 단어가 이름을 의미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동방과 서방.
자신들의 지역을 대표하는 무를 지닌 이들이 마침내 단 하나의 정점을 가리기 위한 사투에 몸을 던졌다.
< 219. 로마의 역습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