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 로마의 역습 >
221.
예상외의 사태에 혼란에 빠진 알탄은 바야투르가 내렸던 명령을 다시 한 번 떠올려보았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테살로니카를 방어하라.
테살로니카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전력상 요충지이기에 절대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래서 선우 중 한 명인 알탄이 직접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목숨을 걸고 수성하는 게 맞았다.
그러나 원래 유목민족은 성을 수비하거나 거점을 지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시에서 싸우면 그들의 장기인 기동력을 발휘하는 것조차 힘들어진다.
평원에서 싸우면야 1만 5천의 정예 전사들로 5만의 적 보병과 능히 싸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서 싸우면 5만은커녕 3만과 싸워도 이길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아무리 봐도 여기서 싸우면 개죽음 같은데······.'
알탄의 눈이 바다 저편을 바라보았다.
항구로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는 로마의 대군이 보였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왔는데, 어떤 결정도 내리기가 쉽지 않았다.
바야투르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곳은 이곳과 그리 멀지 않았다.
전력으로 말을 달리면 하루도 못 가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여기서 농성전을 벌이고 천태선우님을 모셔오면··· 그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천태선우님은 로마 놈들과 싸우고 계실 텐데 군대를 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쩌지?'
아무리 계산을 해봐도 며칠 이상 버틸 견적이 나오질 않았다.
적은 로마군만이 아니다.
사태가 흉노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판단한다면 테살로니카의 주민들은 주저 없이 성문을 열어버릴 것이다.
내부의 적까지 신경 쓰며 공성전을 벌일 만큼 흉노는 수성전에 능하지 못했다.
부하들 역시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결국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굴려 봐도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였다.
수비는 불가능.
억지로 지키려고 하면 귀한 기병 1만 5천을 헛되이 죽게 할 뿐이다.
사실 필사적으로 성벽을 끼고 방어만 하면 며칠 정도는 막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경험이 일천한 알탄은 그걸 해낼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깔끔히 수비를 포기하고 도시를 비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 어차피 지킬 수 없는 도시 막겠다고 부하들을 죽이는 지휘관이 될 수는 없지. 차라리 이 병력을 그대로 보전한 채 천태선우님과 합류하자. 바트자르갈 그놈만 머리를 굴릴 수 있는 게 아니지. 나도 이 정도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알탄은 내심 완벽히 상황을 통찰한 자신의 판단력에 감탄하며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지금 당장 전군을 집결시키고 북쪽 성문을 개방해라. 그리로 빠져나가겠다."
"농성을 포기하고 밖으로 나가 로마군의 뒤를 치는 겁니까?"
"아니! 당장 천태선우님과 합류하겠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으니 모두 따라오도록!"
"······예?"
부하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반문했으나 알탄은 이미 말 위에 올라 저 멀리 달려가고 있었다.
결국 결정권이 없는 부하들도 명령대로 말 위에 올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쉽게 도시를 포기해도 되나 싶었으나 어쩌겠는가.
알탄의 말대로 여기 있으면 의미 없이 몰살당할 가능성이 높은 것도 사실이긴 했다.
문제가 생겨도 어차피 책임은 알탄이 질 터.
1만 5천의 기병들은 이내 머리를 비우고 한창 공성전 준비를 하고 있는 로마군을 남겨둔 채 저 멀리 달아나 버렸다.
흉노가 이렇게 쉽게 사라져 버리니 황당해진 쪽은 안토니우스였다.
공성을 위한 장비들을 분해해 몇 척이나 되는 배에 싣고 왔건만, 이걸 제대로 활용해볼 기회조차 사라졌기 때문이다.
푸블리우스나 수레나스와 달리 회전에 참가할 기회를 얻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이번 도시 공략에서라도 눈에 띄는 전과를 올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아예 전투조차 하지 않고 도시에 무혈 입성했으니 기쁘긴 했지만 어딘가 찝찝한 기분이 공존했다.
"도시를 비운 척하고 뒤통수를 치려는 계책인가···아니, 그럴 수는 없겠지. 도시를 버렸는데 무슨 수로 뒤를 치겠어."
그나마 떠올릴 수 있는 가능성은 수성전을 할 자신이 없어서 그냥 도시를 포기하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테살로니카 같은 전략의 요충지를 그냥 버리는 게 말이 되나 싶지만, 승산이 없다면 병사들이라도 살리는 게 최선이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움직임이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 버렸는데 어쩌겠는가.
결국 테살로니카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과 함께 도시에 입성한 안토니우스는 아직 전투태세를 풀지 않은 부하들을 둘러보았다.
피와 살이 튀는 전투가 이어질 거라 그렇게 강조를 해 뻘쭘하긴 했지만 임무를 완수한 건 완수한 것이다.
안토니우스가 검을 번쩍 들어 올리며 승리의 함성을 내질렀다.
"위대한 마르쿠스의 명을 받아 나 안토니우스가 테살로니카를 탈환하였다!"
"오, 오오오!"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던 병사들이 뒤늦게 반응해 안토니우스를 따라 무기를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승리를 자축하는 병사들 틈으로 전령이 슬쩍 다가와 물었다.
"마르쿠스 님에게 도시를 탈환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자네가 지금 당장 가서··· 아니, 내가 직접 가지."
안토니우스는 군단장들에게 도시를 안정화하라고 명한 뒤 말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지금쯤 그의 보고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마르쿠스와 합류하기 위해 도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예상보다 훨씬 쉽게 임무를 완수한 그의 얼굴은 의기양양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
테살로니카 수복 작전이 예상외로 진행되는 동안 바야투르와 스파르타쿠스가 벌인 세기의 대결은 결국 끝까지 결판이 나지 않았다.
체력이 거의 방전된 두 사람은 내일 다시 승부를 겨루기로 합의하고 일단 자리를 파했다.
기지로 돌아가는 두 사람은 승부를 내지 못한 데에 언짢은 기색이었으나, 따지고 보면 바야투르 쪽이 훨씬 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천태선우님께서 이기셨을 겁니다!"
"놈은 체력이 거의 바닥났으니 하루 만에 다 회복하지 못할 겁니다. 보나 마나 천태선우님의 승리입니다!"
부하들이 위로인지 아첨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해댔으나 바야투르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그대로였다.
'내가 놈보다 우세했던 건 체력의 이점 하나였다니··· 이 무슨 굴욕이란 말이냐.'
검을 쥔 손은 아직도 감각이 다 돌아오지 않고 저릿한 느낌이었다.
체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수없이 검을 주고받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아마 상대방도 비슷한 상태일 거라 확신했다.
문제는 그러고도 자신이 우세를 잡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놈은 이미 한참 전에 군을 퇴역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일 텐데···아직도 그 정도의 기량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바야투르가 파르티아 전쟁에서 처음으로 스파르타쿠스의 전투를 봤을 때도 그는 중년에 가까운 나이로 보였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전성기가 지나갔을 무렵이었을 테니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반면 바야투르는 지금이 무력과 기술이 최고조에 달한 전성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로마 최강의 검투사와 비등한 대결을 벌였다고 뿌듯해할 일이 아니란 것이다.
오히려 일방적으로 압도를 하지 못한 사실을 부끄러워해야 할 판이었다.
만약 스파르타쿠스가 전성기의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면 어떠했겠는가.
굳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답이 뻔히 나오는 문제였다.
그때였다.
착잡한 기분에 잠겨 있는 바야투르에게 전령 한 명이 다급하게 달려와 보고를 올렸다.
"큰일입니다! 상당수의 로마 놈들이 바다를 통해 테살로니카로 상륙한 움직임이 포착되었습니다!"
"뭐라고?"
일대일 대결이 가져다준 여운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 정도의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바야투르가 전령에게 다가가 상세한 사항을 캐물었다.
"어느 정도의 규모가 상륙한 것이냐."
"목격된 배의 숫자로 봐서는 최소가 4만, 많으면 6만까지도 갈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후방의 병력을 방어용으로 남겨둔 게 아니었던 건가··· 이제야 놈들의 의미심장한 움직임이 이해가 되는군."
황급히 막사 밖으로 나온 바야투르가 로마군이 있는 평원 저편을 노려보았다.
전투가 고착 상태에 빠졌음에도 태연자약하기 그지없는 모습이 뭔가 이상하다 싶었다.
"테살로니카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겁니다. 천태선우님,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점령지를 포기하고 달마티아 방면으로 회군하라 이를까요?"
"알탄에게는 무조건 도시를 지키라 명령해 놓았다. 공성전에 이골이 났다고 하는 로마 놈들의 공세에서 성을 지키긴 힘들 테지만,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아직 로마 놈들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까지 전부 수복해야 하니 오히려 급한 건 저쪽이지 우리가 아니야. 일단 로마 놈들과 대치하는 척하면서 병력을 우회해 테살로니카로 보내겠다."
로마군을 압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병력을 분단하면 힘의 균형이 맞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이쪽은 전원이 기병이니 로마군이 전투를 벌이려고 하면 그냥 전속력으로 뒤로 후퇴해도 무방하다.
최대한 들키지 않게 야음을 틈타 기병들을 뒤로 빼내면 될 것이다.
그렇게 로마군의 감시를 피할 최적의 시기를 찾고 있을 찰나, 부하 한 명이 반대쪽 지평선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천태선우님! 저기 알탄 선우님의 깃발이 보입니다!"
"···뭐라고? 설마 알탄이 직접 구원군을 청하기 위해 온 건 아니겠지?"
설마하니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는 아닐 거라 믿고 싶었던 바야투르는 차마 눈을 돌려 부하가 가리킨 방향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가까워지는 기마병들의 발소리는 아쉽게도 일이백 정도의 인원으로 낼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화룡점정으로 깃발을 휘두르며 호탕하게 외치는 알탄의 목소리가 바야투르의 평정심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천태선우님! 로마 놈들이 사방에서 포위하기 전에 제가 먼저 도시를 탈출해 병력을 온존했습니다."
"으아아! 이 멍청한 새끼가!"
바야투르의 노성이 메마른 테살로니카 평원을 쩌렁쩌렁 울리며 퍼져나갔다.
흉노군의 진영에서 그렇게 소란이 일어나고 있을 즈음, 마르쿠스는 자신의 막사에서 적들의 세세한 움직임을 전부 보고받고 있었다.
"척후병에게서 방금 연락이 들어왔습니다. 1만 이상의 적 기병이 멀리서 우회해 적의 진영에 합류했다고 합니다."
푸블리우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트라키아 쪽에서 추가로 병력을 빼내 온 걸까요? 놈들이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는 거라면 당장이라도 방비를 해야······."
"문제없어. 1만 정도로는 이 대치 상태를 깨지 못하니까. 오히려 놈들이 여기에 전력을 집중해주고 있으면 우리야 좋지."
"하지만 안토니우스가 테살로니카 수비군을 쉽게 돌파할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습니까. 저들이 작정하고 버티면 공성전이 몇 날 며칠을 끌지 알 수 없을 텐데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수레나스가 자신 있게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절대로 얼마 버티지 못할 겁니다. 원래부터 유목민족들은 회전에 비해 공성전에 능숙하지 못합니다. 성을 지켜야 하는 수성전이면 더 말할 것도 없고요. 게다가 내부의 주민들은 전황이 할만하다 싶으면 바로 우리에게 붙어 내부에서 호응해 줄 겁니다. 제가 볼 땐 아무리 늦어도 사흘 안에······."
"마르쿠스 님! 안토니우스 님이 진영에 도착하셨습니다."
수레나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막사 안으로 들어온 병사가 그의 말을 끊었다.
순간 전령의 보고를 이해하지 못한 마르쿠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안토니우스가 보낸 전령이 도착했다고?"
"아닙니다. 안토니우스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이리로 오실 겁니다."
"아니, 한창 도시를 공략하고 있어야 하는 사람이 어째서······."
"설마 다른 군단장들에게 지휘를 맡기고 자신은 돌아온 것인가?"
푸블리우스와 수레나스가 어이없다는 어조로 한 마디씩 말을 늘어놓았다.
뒤이어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막사로 들어선 안토니우스가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영웅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작전은 대성공입니다! 테살로니카는 성공적으로 함락했고 마르쿠스 님의 명령대로 곧바로 다음 작전에 착수하라고 병사들에게 명령을 해두었습니다."
"···도시를 함락했다고? 하루 만에?"
"물론입니다. 제가 선봉에 서서 테살로니카를 구하자! 마르스 신의 위업이 우리와 함께하리라! 라고 외치자 저의 포효에 겁을 먹은 적들이 모두 도망쳐버렸습니다."
"······."
"······."
순간 회의실 안이 침묵에 휩싸였다.
안토니우스는 이 미묘한 분위기에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치며 소리를 높였다.
"정말입니다! 못 믿겠으면 가서 병사들에게 확인해 보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적의 지휘관이 그 정도로 기행을 저질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마르쿠스가 안토니우스와 함께 온 병사들에게 사실을 물었으나 그들의 대답은 모두 한결 같았다.
"저희가 상륙을 마치고 공성병기 조립을 전부 끝냈을 때는 이미 적들은 모두 도망치고 없었습니다."
"아마 저희가 항구에 내리는 걸 보자마자 북쪽 성문으로 전부 도주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한 번 침묵이 지휘관들의 주변을 맴돌았다.
모두의 시선이 총사령관인 마르쿠스에게 집중되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일어났을 땐 본능적으로 누군가가 해명해주길 바라는 법이다.
한 번 헛기침을 한 마르쿠스가 최대한 태연한 어조를 가장해 입을 열었다.
"···예, 상한 대로군. 수성에 자신 없는 적이 도시를 버리고 도주하는 것도 사전에 고려하고 있던 경우의 수 중 한 가지였다. 성공적으로 테살로니카를 탈환했으니 이는 우리의 전략적 승리다."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푸블리우스와는 반대로 재빠르게 분위기를 읽은 수레나스가 태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부 계획대로입니다! 그리스 수복의 서막은 성공적으로 열어젖혔군요. 이제는 그대로 트라키아를 탈환할 차례입니다."
방금까지만 해도 테살로니카 탈환에 사흘 정도 걸릴 거라는 말을 하지 않았느냐고 지적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예상외의 쾌거에 당황한 군단장들은 뒤늦게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승리를 자축했다.
"···대, 대단한 승리입니다! 마르쿠스 님이 나선 이상 이렇게 될 건 자명했습니다!"
"테살로니카를 하루··· 아니 한 시간도 안 되어 탈환하다니. 엄청난 전략이었습니다!"
마르쿠스는 부하들의 감탄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면서도 아직 축배를 들긴 이르다고 일러두었다.
그리스 탈환의 반격작전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길고 길었던 굴욕의 순간은 이제 끝이다.
지금부터는 자신들이 받았던 모든 걸 그대로 돌려줄 시간이었다.
< 221. 로마의 역습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