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3. 마르쿠스의 분노 >
223.
바아투르의 회군은 한창 달마티아를 공략 중이던 흉노군의 사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안 그래도 로마군의 신속한 방어태세 덕분에 진로를 뚫지 못하고 있었던 세 선우는 천태선우의 퇴각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스 지역을 이대로 완전히 포기하는 겁니까?"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지역은 지킬 방도가 없었다."
바야투르의 지낭 바트자르갈은 이 상황을 그 누구보다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달마티아를 통해 로마 본토로 들어가려는 시점에서 그리스를 빼앗긴 건 단순히 지역 하나를 넘겨준 걸로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천태선우님, 그리스를 빼앗긴 이상 에페이로스 역시 지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후방이 완벽히 차단된 이상 여기서 전방의 로마군을 계속 공격하는 건 위험합니다. 로마 놈들이 당장 시네가챠르로 기병 3만 정도만 올려보내도 저흰 거점을 북쪽이나 동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습니다."
알탄이 그게 뭐가 문제가 되냐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럼 옮기면 그만이지. 애초에 성에 눌러앉아 수비하는 건 우리 적성과 맞지 않아. 잠시 물러났다가 로마 놈들을 쫓아내고 다시 자리를 차지하면 그만인데 뭐가 문제인가."
"후··· 생각을 하게 이 사람아. 그 로마 놈들을 쫓아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병력을 뒤로 물려야 하거나 최소한 이쪽의 병력을 분단해야 하는데 그러면 달마티아 공격을 어떻게 계속 지속하겠나. 어차피 앞뒤로 수십만의 로마 대군을 끼고 있으니 이 이상 작전을 계속하는 건 의미가 없어."
"그러면 이대로 그냥 시네가챠르로 돌아가자고?"
"그게 최선이다. 트라키아까지 모조리 빼앗긴 이상 흑해도 적의 세력권에 들어갔다고 봐야 하니 더 여유가 없어. 보스포루스 따위로는 로마에게서 제해권을 뺏어올 수 없으니."
트리키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찔리는 게 있는 알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번에는 바야투르도 딱히 알탄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전투에서 지는 건 차라리 일방적으로 패배하지만 않는다면 만회할 구석이 생긴다.
그러나 전략에서 완전히 밀린다면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고사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전술로 반격해 보려고 해도 유리한 고지를 점한 입장에선 당해주지만 않으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현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해 나가는 바트자르갈의 목소리에 점점 비통한 기색이 서렸다.
"천태선우님, 하다못해 트라키아라도 조금 버텼다면 전력을 집중해 로마 본토로 향하는 길을 뚫어볼 시간이라도 벌 수 있었을 겁니다. 하지만 점령지 부족장들의 말도 안 되는 판단으로 트라키아조차 그렇게 넘어간 이상 이제 원정을 더 지속하는 건 의미가 없습니다. 퇴각하시는 게··· 옳은 판단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리스만이 아니라 이곳에서도 퇴각해야 한다는 말인가······."
바야투르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어제 올라온 보고 때문인지 지금은 진노할 기운조차 없었다.
바트자르갈의 말대로였다.
테살로니카가 넘어간 순간부터 마케도니아를 지키지 못하는 건 결정된 사실이었다.
트라키아의 함락 역시 결국 시간문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군을 물려서 달마티아 방면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트라키아의 도시들은 시간을 버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쪽에서 시간을 조금만 벌어주면 바야투르가 이끄는 본대가 충분히 유의미한 결과를 창출해 낼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바로 어제 도착한 전령의 보고는 충격적이었다.
트라키아의 항구 도시들을 방비하고 있던 각 부족이 로마군과 싸워보지도 않고 북쪽으로 도주해버렸다는 것이다.
로마군이 북상해 진로를 차단하자 포위당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수성전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기라도 했다면 내 이렇게 어이없진 않았을 것을······."
부하들의 손실을 그 무엇보다 꺼려하는 바야투르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부하들의 추태는 한심했다.
자신들의 이야기가 아님에도 다른 선우들이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다른 부족장들과 별다른 판단을 보이지 않은 알탄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얼굴이었다.
바야투르의 혈압을 한계 이상으로 솟구치게 만든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테살로니카가 함락당하고 흉노의 군대가 서쪽으로 빠져나가자 로마군은 당연히 동쪽의 대도시들을 탈환하기 시작했다.
첫 대상은 바로 테살로니카와 가장 가까운 항구도시 카발라였다.
카발라를 지키던 흉노의 부족장은 태어나서 공성전이라는 걸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이였다.
항구에 상륙하는 로마군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던 그는 성내에서 싸우기엔 적이 너무 많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익숙하지 못한 성내 전투는 아군의 피해가 너무 막심할 수 있다. 수성을 포기하고 밖에서 적들과 일전을 벌이겠다. 충분한 타격을 입힌 뒤 군대를 물려 퇴각할 것이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수성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 병사들이다.
당연히 성 밖으로 그냥 나간다는 부족장의 판단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따랐다 로마군이 성 밖으로 나와 싸우지 않으면 어쩌냐는 생각은, 도시 밖으로 나갈 생각밖에 없는 그들의 머릿속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자신만만하게 성 밖의 넓은 공터로 나온 그들은 진형을 갖추고 로마군이 따라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자, 밖으로 나오는 로마 놈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자!"
밖에서 우렁차게 사기를 끌어 올리고 있는 흉노군을 힐끗 본 카발라 탈환군의 지휘관 푸블리우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관에게 물었다.
"저놈들은 왜 밖에 나가서 저러고 있는 것이지?"
"그러게요. 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주제에 저런 식으로 함성을 지르는 놈들은 또 처음이군요."
"공짜로 성을 넘긴 게 분통이 터졌던 걸까? 그래서 저렇게 욕이라도 하면서 자신들의 기분을 달래야 하는 걸지도?"
"···그럴 수도 있겠군요."
푸블리우스는 어이없어하면서도 해야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로마군은 카발라의 성문을 전부 닫아걸고 성벽 위로 궁수들을 배치했다.
그제야 사태 파악을 한 흉노 부족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뿔싸! 놈들이 우리를 따라 밖으로 나올 리가 없구나!"
"비겁한 로마 놈들아! 성에 틀어박혀 있지 말고 나와서 싸울 생각은 없느냐!"
흉노 기병들이 아무리 소리를 높여도 돌아오는 건 로마군의 군대가 아닌 화살뿐이었다.
결국 그냥 로마에게 도시를 들어다 바친 꼴이 된 부족장은 어정쩡한 자세로 말을 돌렸다.
"이, 이렇게 된 이상 천태선우님께 돌아간다! 맞서 싸우려 했으나 로마놈들의 수가 감당 못 할 정도로 많았다고 하면 문책당하지는 않겠지!"
이 보고를 처음 들었을 때 바야투르는 부하들이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철 지난 연극이라도 하는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칼리오폴리스에서 올라온 보고조차 별반 다르지 않은 내용이라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그래도 이곳의 부족장은 카발라를 지키던 자처럼 무작정 도시를 비우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도시를 지키며 한족 놈들이 그토록 목을 매던 수성전이라는 걸 해볼 마음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어이, 저쪽 성벽이 좀 허술해 보인다. 보강해라."
"예. 그런데 성벽 보강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그냥 돌 좀 쌓아놓으면 되는 거 아니냐? 한족 놈들은 대충 그렇게 하는 거 같던데."
"그런 걸까요?"
성벽이란 걸 쌓아본 적이 없던 병사들은 그냥 대충 무거워 보이는 돌을 날라 성벽 근처에 쌓아두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 안토니우스가 이끄는 병력이 칼리오폴리스의 항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 부족장님! 놈들이 상륙하려 합니다. 얼핏 봐도 이쪽의 몇 배는 될법한 숫자입니다."
"당황하지 마라 멍청한 녀석들아! 그럴 때는 재깍 항구를 봉쇄해 놈들의 상륙을 막으면 될 것 아니냐!"
"아,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그런데 항구는 어떻게 봉쇄하면 되는 겁니까?"
"그러니까 쇠사슬로······! 어떻게 밑에 넣어서 대충 하면 된다던데?"
지휘관인 부족장이 모르는데 말 타고 화살만 쏘아대던 다른 부하들이 알 리가 없다.
답답해진 부족장이 가슴을 치며 그리스인들을 몇몇 잡아 오라고 소리치는 사이 안토니우스의 군단은 속속들이 항구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결국 칼리오폴리스를 지키던 부족장도 특단의 선택을 내렸다.
"이렇게 된 이상 전군 모두 밖으로 나가 로마 놈들을 유인한다. 놈들이 자존심이 있다면 밖으로 나와 우리와 싸우려 하겠지."
하지만 병력을 수습해 밖으로 나온 흉노군의 눈에 비친 건 코앞에서 비정하게 닫히는 성문과 저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 세례였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바야투르가 예상했던 바였다.
이건 애초에 수성전을 해본 적이 없는 자들에게 도시를 지키라고 한 알탄의 처참한 인사배치가 불러온 참극이었다.
문제는 바야투르가 직접 성을 지킬 장수를 임명한 비잔티온이었다.
이곳의 전략적 가치를 꿰뚫어 본 그는 중원의 태수에게 용병으로 고용된 경험이 있는 부족장 한 명에게 직접 방어를 일임했다.
한나라의 용병으로 산악 지형에서 여러 번의 수성을 겪은 보기 드문 인재였다.
그는 바야투르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비잔티온을 수비 중이었다.
이미 카발라가 로마군의 손에 떨어졌다는 보고를 받았음에도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수성의 묘미란 원래 적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상대하는 데 있다. 내가 지휘하는 5천의 군대라면 5만의 대군조차 능히 막아낼 수 있으니 두려워 말라. 여기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 로마 놈들의 발목을 잡으며 구원군을 기다리겠다."
"부족장님! 적입니다!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당황할 것 없다. 내가 일러준 대로 궁수들은 각자 자기 위치로 가서 대기하라! 활에 능통한 우리 자랑스러운 흉노군이라면 멍청한 중원놈들보다도 더 철벽의 방어진을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예! 그런데 바다에서 오는 적들은 어떻게 대처하면 좋겠습니까?"
"···바다?"
부족장의 시선이 천천히 도시 뒤편으로 향했다.
대평원의 초원처럼 한눈에 시야에 담기지 않는 드넓은 공간 위로 로마군의 대함대가 물밀 듯이 밀려오는 게 보였다.
"함대로 항구에 상륙하는 것이로군. 그러니까 이럴 때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해하던 그의 머릿속이 일순 새하얘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중원에서는 바다를 낀 전투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곧 놈들이 배에서 내릴 겁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지시를 내려주십시오!"
"···어, 음······."
"부족장님! 놈들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빨리 명령을!"
"이··· 이 개 같은 그리스, 로마 새끼들은 대체 왜 주요 도시들을 바다에 세우고 자빠져 있는 거냐!"
기껏 보수해 놓았던 정면의 성벽에 사정없이 침을 뱉은 부족장은 이를 갈며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런 제기랄 평생 산악지형에서 싸운 나에게 바다를 막으라고 하면 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야. 모두 잘 들어라! 이건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다. 군마와 보물들을 챙겨라. 북쪽으로 퇴각한다!"
그렇게 항구를 끼고 있는 주요 도시들은 로마군에게 화살 단 한 대조차 쏴보지 못하고 모조리 퇴각하게 됐다.
바로 어제 이 기나긴 보고를 들은 바야투르의 심정은 언어로 형용이 불가능했다.
분노, 어이없음, 황당함, 초조, 자괴감, 살의, 그 어떤 단어의 조합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그의 가슴 안을 맴돌았다.
혼란스러운 심정이었으나 그와 반대로 지금 해야 할 일 자체는 명확했다.
바트자르갈의 조언이 옳았다.
원정의 실패를 포기하고 물러나야 할 때였다.
그래도 로마군의 대군을 궤멸시킨 건 사실이니 표면적으로는 성공적인 원정이었다고 둘러대기로 결론을 내렸다.
바야투르는 인선의 실책을 인정했다.
그리고는 앞으로는 무조건 전투로 성과를 보리라 다짐했다.
※※※
흉노군이 전부 물러가자 카이사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흡족한 기분을 만끽하고 있었다.
전쟁 중반에 터졌던 섹스투스군의 전멸로 크게 골머리를 썩었지만, 마지막 끝마무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흉노군을 다시 밀어냈을 뿐만 아니라 달마티아 쪽의 방어선도 자신의 영역으로 삼을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민중파의 의원들을 완벽히 자신의 세력으로 일원화에 성공했다.
게다가 마르쿠스가 폼페이우스의 모든 기반을 흡수했다는 것도 더없는 호재였다.
이제 이대로 전쟁이 마무리되면 로마의 권력은 완벽하게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로 양분된다.
세력 균형상 마르쿠스 쪽이 60에서 65 정도로 더 앞설 테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건 그저 구실일 뿐 하나의 원대한 계획은 막힘없이 흘러가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던 찰나 마르쿠스의 심복인 수레나스가 직접 달마티아 방면으로 카이사르를 찾아왔다.
이후에 취할 대전략의 구상을 함께 나누고 행보를 맞추기 위해서였다.
작전 제안서를 읽어본 카이사르는 흠잡을 데 없는 계획에 솔직한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마음에 드는군. 이 작전은 자네가 입안한 것인가?"
"큰 구상은 마르쿠스 님이 그리셨습니다. 전 거기에 구체적인 색을 더했을 뿐입니다."
"그림이란 밑그림도 중요하지만 색감에 따라 명화가 흉작이 될 수도 있는 법이지.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자네의 수완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는군."
"과찬이십니다."
수레나스는 천하의 카이사르 앞에서도 전혀 기죽지 않고 당당했다.
확실한 예의범절과 몸에 밴 기품, 그리고 그 이상으로 눈에 띄는 대전략가로서의 자질.
카이사르로서도 이루 말할 수 없이 탐이 나는 인재였다.
만약 마르쿠스의 부하가 아니었다면 당장이라도 포섭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 계획에 딱히 불만이 있는 건 아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문제 아닌가? 적당히 타격을 주기만 하고 국경을 긋는 게 정치적으로는 더 활용할 여지가 많을 것 같은데."
"마르쿠스 님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으신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역시 받은 만큼 돌려주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쪽이 20만의 피를 흘렸으니 저쪽에는 최소한 그 두 배의 피해를 입힌다. 이게 바로 이번 작전의 핵심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했다면 본인은 피눈물을 쏟아야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선동 어구였다.
이번 행동으로 얻게 될 실익과 전후의 형세를 저울질해본 카이사르가 이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기꺼이 동참하도록 하겠네. 놈들에게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해주지."
< 223. 마르쿠스의 분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