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마르쿠스의 분노 >
224.
흉노가 자신들의 터전으로 물러갔다는 소식은 당연히 로마에 최우선적으로 전해졌다.
로마 시민들은 이 소식에 열광하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위협에서 벗어났다는 데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라리사 회전의 패배로 로마의 힘에 의구심을 가질 뻔했던 동맹국들의 혼란도 잦아들었다.
원로원도 혼란과 불만을 최소화하기 위한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다.
로마의 체제가 굳건하기 위해서는 로마를 향한 신뢰는 결코 흔들려서는 안 된다.
전투에서 대패한 것은 어디까지나 섹스투스가 잘못된 지휘를 했던 탓으로 굳어졌다.
그 증거로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는 흉노에게 패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끊임없이 회자됐다.
특히 마르쿠스는 섹스투스보다도 더 적은 병력으로 회전을 벌였음에도 오히려 흉노를 밀어냈다는 게 강조됐다.
마르쿠스가 섹스투스의 명예가 필요 이상으로 실추되지 않도록 편지를 썼음에도 이 흐름을 바꿀 수는 없었다.
로마의 안정을 위해서 섹스투스의 명예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한 것이다.
시민들도 이 비극을 그냥 누구 한 사람의 탓으로 돌려버리고 욕하는 게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섹스투스로서는 다소 억울한 면도 있었지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는 것을 어쩌겠는가.
섹스투스의 명예를 위해 목소리를 높여줄 수 있는 가족이라고 해봐야 이제 그의 누이인 폼페이아 정도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폼페이아는 남편인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마저 라리사 회전에서 섹스투스와 함께 전사해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잠시 열이 식을 때까지 그리스로 와있는 게 어떻겠냐는 마르쿠스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어쨌거나 로마는 빠르게 안정되기 시작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보니 슬슬 다른 불만이 속속들이 튀어나왔다.
원래 사람의 마음이란 화장실에 갈 때와 나올 때가 또 다른 법이다.
처음에는 흉노를 쫓아내기만 해도 소원이 없겠다는 말을 했던 이들이 점점 추가 대책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놈들이 언제 다시 쳐들어올지 모르지 않나?"
"이번에도 20만 장병들의 목숨이 사라졌는데 다음에 쳐들어오면 피해 없이 막을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흉노는 이제 로마에서 최우선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최악의 위협이 됐다.
원로원 의원들은 로스트라 연단에서 연설할 때마다 위와 같은 질문을 받았으나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이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음 같아서야 시원하게 흉노 놈들의 뿌리를 뽑아버리겠다고 외치고 싶었으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되려 역풍을 맞을 뿐이다.
원로원 의원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대답을 회피하고 있던 찰나, 구원이자 또 하나의 커다란 위협이 로마에 나타났다.
달마티아 방면에 있던 카이사르가 직접 민회에 출석해 이후의 방침을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이 소식이 퍼지자 로마의 분위기는 걷잡을 수 없이 달아올랐다.
원로원 역시 불안 반 기대 반으로 카이사르의 행보를 지켜보았다.
"임페리움을 가진 지휘관이 로마로 돌아오는 건 전쟁이 끝났을 때뿐이거늘··· 저 자는 이제 아주 대놓고 전통을 무시하는군요."
카토를 선두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있었지만, 이는 실질적인 대책을 원하는 로마인들의 성원에 간단히 묵살됐다.
결국 카이사르의 연설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원로원 의원들이 질문을 던지고 카이사르가 답변하는 식의 형태로 확정되었다.
카이사르는 아직 전쟁이 다 끝나지 않았음을 감안해 개선식처럼 화려한 행렬을 이끌진 않았다.
하지만 딱히 그럴 필요는 없었다.
카이사르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도 시내가 마비될 정도로 가득 찼기 때문이다.
이미 어지간한 개선식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환영인파였다.
제대로 된 개선식을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카이사르는 눈앞의 광경에 묘한 감상을 느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반드시 제대로 된 개선식을 치러야겠군.'
생각해 보면 폼페이우스와 마르쿠스는 전부 개선식을 했었는데 자신만 아직까지 개선식 횟수가 0이었다.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브리타니아 정벌은 셋을 각각 따로 떼어놔도 개선식을 하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전과였다.
여기에 흉노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4일 연속으로 이어지는 대규모 개선식을 열어도 누구도 불만을 제기하지 못하리라.
'그래도 카토 같은 이는 분명 징징대긴 하겠지만.'
연단 위에 올라선 카이사르는 바로 아래에 자리를 잡은 원로원 의원들을 힐끗 둘러보았다.
기대와 동경, 적의와 분노, 여러 가지 시선들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분명 이번 그의 행보는 파격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역대 로마의 그 어느 장수도 이런 식으로 전쟁 중에 로마로 돌아와 자리를 가진 전례가 없었다.
카토 같은 원리·원칙주의자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카이사르가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철저히 계획된 행보였다.
'마지막으로 화끈하게 악역 역할을 수행해달라니··· 참 바라는 것도 많은 사위로군.'
카이사르는 지금쯤 느긋하게 로마에서 날아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마르쿠스의 반응을 상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수레나스를 통해 건네받은 서신에 적힌 내용은 그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자네는 여기 무슨 말들이 써 있는지 알고 있나?"
그때 카이사르의 질문을 받은 수레나스는 담담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짐작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카이사르 님께서 주저하는 듯한 기색이 느껴지면 이렇게 말하라고 하셨습니다."
"······?"
"사랑하는 따님과 손주분들이 다가올 모든 영광을 거머쥘 수 있도록. 아낌없는 지원을 부탁드린다고 전하라고 하시더군요."
"이거 참 사위도 많이 뻔뻔해졌군. 그러니까 모든 악평을 내 쪽에서 전부 가져가 달라는 거 아닌가."
"그런 말씀을 하신다면 이미 익숙한 역할이 아니냐··· 라고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하하, 하하하하!"
카이사르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마르쿠스의 제안이 마음에 든 것이다.
"좋네. 마지막까지 확실히 어울려주지."
카이사르는 그렇게 단언하고 곧장 로마로 건너왔다.
자신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그가 우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친애하는 의원 여러분들과 시민 여러분. 참으로 오랜만에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감개가 무량합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입니다."
"우와아아아!"
"카이사르! 카이사르! 카이사르!"
카이사르의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시민들의 폭발적인 환호가 포로 로마눔을 뒤흔들었다.
이 아찔한 환호의 도가니에 원로원 의원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설령 카토라고 해도 카이사르에게 부정적인 질문이나 발언을 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이후 별다른 미사여구나 장황한 설명을 건너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가 이 자리에 선 것은 현재 로마의 시민 여러분들이 가장 알고 싶어 하는 사항을 설명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최전선에서 로마 시민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는 지휘관인 만큼 여러분들에게 한 치의 거짓 없는 정보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부관을 보내지 않고 직접 온 데에 의구심을 가질 분들도 계신 걸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직접 설명드리고 원로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사안들이 있어 제가 직접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
카이사르의 말은 청산유수처럼 이어졌다.
그는 보고서에 미처 적지 못했던 여러 가지 사실을 가감 없이 풀어냈다.
소문만 무성하던 흉노군의 실제 규모와 전투력, 그리고 그들의 행동 양식 등 수많은 정보가 풀려 나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민들이 가장 알고 싶어 했던, 이 위협적인 적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마침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대신 그리스 방면을 책임지게 된 마르쿠스 총독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덕분에 한 가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저들을 격퇴하긴 했으나 흉노의 위협은 완전히 종식된 게 아닙니다.
저들을 광대한 흑토 평야에 계속 거주하게 둔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들의 위협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갈리아나 게르마니아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겁니다.
"
"하지만 이번엔 성공적으로 놈들을 격퇴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이미 충분히 많은 자원을 투자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한 지원을 쏟아붓는 건 여러모로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어요."
카토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먼저 선수를 쳤다.
아무리 전시라고 해도 이제 카이사르에게 이 이상의 군단이나 지위를 부여할 마음은 없었다.
만약 추가적인 병력을 요구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을 거라는 강력한 의지를 내비쳤다.
카이사르는 카토와 그에게 동조하는 의원들의 적대적인 시선에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깨를 한번 으쓱해 보이고는 태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연히 여기서 추가 병력을 모집하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전선에 집중되어 있는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놈들을 막을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계속 방어만 하는 건 효율적인 대칙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국경은 터무니없이 넓습니다. 갈리아와 그리스, 그리고 소아시아 방면을 모조리 틀어막아야 하는데 그렇게 넓은 국경에 끊임없이 자원을 퍼붓는 건 장기적으로 부담이 너무 커집니다. 십 년을 넘어 이십 년, 아니 백 년까지 이런 대치상태가 지속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인력과 자원이 흉노를 견제하는 데 소모되겠습니까.
"
"그럼 무슨 별다른 대안이 있습니까? 흉노 놈들을 뿌리째 뽑아버리기라도 하시려고요?"
"바로 그렇습니다. 놈들이 다시는 로마를 넘보지 못하도록 확실히 손을 보는 게 최선의 방법입니다."
시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들이 가장 원하는 대답이 나왔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원로원 의원들은 난색을 지으며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키케로가 미심쩍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듯 보이시는데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저보다 훨씬 더 군에 해박하신 카이사르 님이라면 유목민을 상대로 공격해 들어가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실 것 같은데요."
"물론입니다. 당연히 지금까지의 전쟁과는 차원이 다른 준비가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이미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와 긴밀한 논의를 거쳐 완벽한 작전을 수립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확실히 단언하겠습니다. 저를 믿고 이 중책을 맡겨주신다면 우리 로마는 영원히 저 야만족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오오오! 카이사르! 카이사르!"
시민들은 이제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카이사르의 이름을 연호하며 발을 쿵쿵 굴렀다.
원로원도 이를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병력의 추가 증원 없이 흉노를 토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와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가 이끄는 병력은 각각 20만으로 도합 40만의 대군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놈들을 뿌리 뽑을 수 있습니다. 추가로 저희들에게 확실한 권리만 부여해주시면 됩니다."
"···어떤 권리를 원하는 겁니까?"
"모든 권리를 부여해 주십시오. 흉노와 그들에게 협조한 부족, 나라에 대한 처분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권한을 원합니다."
"그거야 뭐 원래 전통적으로 원정 사령관이 자의적으로 처리하고 사후보고를 하는 식으로 하는 게 관례··· 아니, 설마 사후보고조차 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카이사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카토가 그건 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이기 전에 카이사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단순한 전쟁이 아닙니다! 로마의 존속을 위한 모든 걸 건 투쟁이자 지금까지 죽어간 로마 시민들의 원한을 달래기 위한 복수이기도 합니다.
그리스에서 우리의 동포 20만이 저들에게 무자비하게 살해당했습니다. 게르마니아를 방어하던 용맹한 3개 군단 역시 저들에게 도륙 당했습니다.
저와 마르쿠스 총독은 반드시 저들에게 이 대가를 치르게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고개 숙여 부탁드리겠습니다. 이 전쟁의 관한 모든 권한을! 저들에 대한 절대적인 처벌권을 맡겨주십시오.
"
"그 말은··· 단순히 저들을 격퇴하겠다는 말로는 들리지 않는데 우리가 제대로 이해한 겁니까?"
흔들리는 키케로의 시선을 응시하는 카이사르의 눈이 오싹할 정도의 살의를 품었다.
그가 다시 한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습니다. 저는 저들을 이 땅 위에서 아예 지워버릴 겁니다."
< 224. 마르쿠스의 분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