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5. 마르쿠스의 분노 >
225.
민회는 전 선거구에서 만장일치로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에게 흉노토벌의 전권을 위임한다는 조항을 통과시켰다.
심지어 여기엔 원로원에서 그토록 막으려고 했던 병력의 추가 편성권도 포함됐다.
20만의 군사를 지휘하는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는 추가로 각각 5개 이상의 군단을 더 편성할 수 있게 됐다.
이 한 번의 전쟁에 로마의 거의 모든 국력이 투입되는 것이다.
이렇게 전력을 쏟아부었다가 실패라도 한다면 제아무리 로마라고 해도 단숨에 휘청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민들은 카이사르의 연설에 진심으로 공감했다.
흉노와 국경을 마주하고 수십, 수백 년을 불안에 떠느니 차라리 한 번의 전쟁에 모든 걸 투입해 결판을 내는 게 차라리 낫지 않겠는가.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도 이 마지막 전쟁에 참가하겠다며 나서는 사람들이 속속 나왔다.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만이 아니었다.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속주에서도 입대 신청이 쏟아졌다.
그들의 목적은 나라를 지키겠다는 게 아니었다.
현재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는 흉노에게 가족이나 친지를 잃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을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다.
당연히 복수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이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런 흐름은 그리스에서도 이어졌다.
그리스에 거주하는 속주민들과 로마 시민들은 줄을 지어 마르쿠스의 군단에 합류했다.
물론 모두가 복수심만을 가지고 추가 편성군에 합류하는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소아시아와 동맹국 군단 자격으로 참가하는 병사들은 생각이 조금 달랐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당분간은 이제 그 어떤 곳도 로마에게 대항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시민권을 얻을 기회는 이게 마지막일지도 몰라.'
속주민들이 로마의 시민이 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군에 입대해 공적을 쌓는 것이다.
로마가 총력전으로 나가는 만큼 승산 역시 충분해 보였다.
곧 다가올 대전쟁의 징후가 슬슬 여러 곳에서 포착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8만의 추가 병력이 그리스와 달마티아 방면에 배치됐다.
엄청난 보급품을 실은 수레가 줄지어 국경 부근으로 흘러들어갔다.
마르쿠스는 특히 장비의 생산과 보급에 박차를 가했다.
흉노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그는 소아시아의 시설을 총동원해 강철 장비의 생산과 보급을 서둘렀다.
지금까지는 삼두의 균형이 어긋나지 않도록 의도적인 조정을 거쳤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양의 갑옷과 무기를 실은 수레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런 움직임이 흉노 측에 포착되지 않을 리 없었다.
바야투르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정찰병들을 최대한 투입해 국경 부근에 집결 중인 로마군의 움직임을 세세히 보고받았다.
로마군은 자신들의 동향을 숨길 마음이 없어 보였다.
사실 40만이 넘는 대군을 움직이며 적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로마군이 침공할 경로를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한 바야투르는 즉각 선우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바트자르갈과 알탄, 오트곤바야르와 쿠블라이가 모두 회의에 참석했다.
그리스에서 한 차례 굴욕을 맛본 알탄은 당장이라도 전투를 하고 싶다는 듯 두 눈을 전의로 불태우고 있었다.
"천태선우님, 로마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이쪽으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장이라도 나가 그들을 쳐죽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반면 바트자르갈은 이번에도 신중을 기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번에 투입되는 로마군은 최소로 잡아도 40만 이상입니다. 이 정도의 대군과 정면에서 싸우면 제아무리 우리의 정예들이라고 해도 엄청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겁니다."
시네가챠르로 돌아온 흉노는 예비 전사들을 전부 투입해 다시 20만의 전력을 복구한 상태였다.
하지만 역시 새로 들어온 신병들은 이전의 병사들보다 경험과 전투력이 부족한 게 사실이었다.
로마군 역시 그건 별다를 바 없겠지만, 흉노는 로마군보다 전사 개개인의 실력과 기마술에 의존하는 정도가 더 컸다.
오트곤바야르와 쿠블라이도 바트자르갈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전면전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우리가 굳이 먼저 가서 공격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놈들을 끌어들인 뒤에 우리의 영역 안에서 전투를 하는 게 상책 아니겠습니까. 물론 너무 후방에서 전투를 하면 일이 여의치 않았을 때 물러날 공간이 없으니 적당한 지역을 물색하도록 하죠. 아, 그런데 놈들이 어느 쪽으로 올지는 이미 정해진 겁니까?"
쿠블라이의 물음에 바야투르가 커다란 지도를 탁자 위에 펼쳐놓았다.
엉성하긴 해도 대략적인 지역을 알아보는 데는 지장이 없는 지도였다.
그가 트라키아 쪽에서도 흑토 평야로 들어오는 경로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입을 열었다.
"아마 놈들은 이 근방에서 병력을 합쳐 최단 거리로 이쪽으로 진격해 올 거다."
"40만이나 되는 군대가 몰려오면 병참선을 확보하는 것도 상당히 힘들어질 겁니다. 별동대를 꾸려서 보급로를 타격하는 건 어떨까요?"
"나도 그 생각을 해보았는데 놈들이 강 쪽에 상당수의 군함을 배치한 정황이 포착됐다. 아마 이 강변을 따라 우리의 영역까지 진군해 올 생각일 것이다. 놈들이 배로 보급을 하는 이상 육지에 보급품을 내릴 때가 아니면 우린 공격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겠지."
"확실히 우리가 공격할 지점이 뻔하다면 도리어 적의 매복에 당할 위험도 커지겠군요. 그렇다면 천태선우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로마 놈들의 공격을 정면으로 맞받아치실 겁니까?"
바트자르갈이 천태선우의 의도를 물었다.
다른 선우들이 아무리 왈가왈부해도 결국 결정권을 쥔 사람은 그였다.
40만 대군이 쳐들어온다고 해도 바트자르갈은 물론 다른 선우들은 그다지 동요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답을 내놓는 바야투르의 안색도 마찬가지로 여전히 침착했다.
"저쪽에서 올라온다니 이쪽도 싸워줘야지. 어차피 놈들의 전력은 기병보다 보병이 훨씬 많다. 그렇게 느려터진 움직임으로는 우리를 잡을 수 없어."
알탄이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그리스에서도 느꼈는데 로마 놈들은 유목민들과 전투를 해본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차라리 한족 놈들의 대응이 더 위협적일 때가 있었지요."
대부분의 전력이 말을 타고 다니는 유목민들은 정주민들과는 방어 전략이 근본적으로 달랐다.
이들은 설령 전투에서 지더라도 훨씬 더 빠르게 퇴각이 가능해 전력을 온존하기 용이했다.
그뿐만 아니라 특정한 도시를 거점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얼마든지 거주지를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는 게 가능했다.
병력 구성의 대다수가 보병인 로마는 절대 흉노를 끝까지 추적하는 게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최악의 경우 전투에서 밀린다고 해도 물러나는 게 가능한 것이다.
바야투르는 아예 여기서 자신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방안까지도 고려해보았다.
'로마 놈들의 힘이 내 예상보다도 훨씬 강하다. 놈들도 우리를 끝장낼 수 없고, 우리도 놈들을 정복하지 못한다면 교착 상태를 이어갈 수밖에 없다는 건데··· 이런 상태가 지속돼서는 좋을 게 없다.'
전 흉노를 통일했을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수의 유목민들을 통합한 건 분명 고무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이를 영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결과를 꾸준히 낼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그리스와 갈리아만이라도 점령한 상태였다면 충분히 생색을 낼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눈에 보이는 전공이 너무나 부족했다.
이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면 문제 될 건 없다.
이쪽이 다소 피해를 입더라도 로마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는다면 항복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패했을 때다.
다른 선우들이야 병력을 최대한 온존한 상태로 도망가면 별문제 없다고 여길 테지만 바야투르만은 이야기가 달랐다.
여기서 또 한 번 밀리고 도망간다면 그 이후로 재기가 가능할 것인가.
적어도 다시 한 번 로마와 자웅을 겨루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터.
그때까지 실추된 천태선우의 위엄을 수복하기 위한 방안이 딱히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로마 놈들 대신 한나라를 정벌하는 것도··· 아니, 그것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겠군.'
지금 흉노의 전력이라면 서쪽에서부터 밀고 들어가 한의 영토를 유린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바야투르가 거대한 유목민 집단을 통합하는데 내세운 명분은 한나라보다 훨씬 더 부유한 로마를 정복한다는 것이었다.
이제 와서 어려울 것 같으니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 한나라나 공격하자고 하면 위엄이 설 리가 없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번에 쳐들어오는 로마군을 요격해 소기의 성과를 낼 필요가 있다.
항복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해 식량과 가축, 여자들을 제공 받는다면 최소한의 구색은 맞추는 게 가능하다.
'특히 부족장 놈들은 로마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니 좋은 안정제가 되어주겠지.'
바야투르는 갈리아와 그리스에 있는 신전을 공격할 때 사로잡은 신녀들을 배분할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대다수의 신관들과 신녀들은 이미 도주한 뒤였으나 남아있는 사람들을 걱정해 끝까지 남아있던 소수의 신녀들이 있었다.
지성과 미모, 거기에 기품까지 겸비해 로마에서도 고귀한 대우를 받은 여인들이다.
당연히 바야투르와 네 선우들도 마음에 드는 여인들로 한 명씩 신녀들을 취했다.
하지만 부족장들에게 전부 나눠줄 정도로 포로의 수가 충분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비를 뽑아 당첨자를 가리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반발이 터졌다.
부족장들은 대제국에서 가장 고귀한 축에 속하는 여인을 취하거나 노예로 삼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급기야는 신녀들의 소유권을 건 결투를 벌이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어떻게든 그 촌극을 진정시키기는 했어도 바야투르는 부족장들을 구슬릴 좋은 수단을 한 가지 더 알게 됐다.
결정을 내린 그가 단호하게 로마군이 들어올 거라 예상되는 넓은 평야를 검으로 가리켰다.
"로마 놈들이 이곳을 통과할 때 한 차례 전투를 벌여보겠다. 그리고 이후의 방침은 전투의 결과를 보고 결정하도록 하지."
"예!"
"로마 놈들의 머리통을 모조리 박살 내버리겠습니다."
"당장 전사들을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럼 저는 로마군의 포진을 예상해보고 그에 따른 전술적인 움직임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네 선우들이 한 마디씩 늘어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마다 반응은 달랐어도 한껏 투지를 불사르는 것만큼은 모두가 같았다.
바야투르의 입에서 몇 가지 이야기가 계속 흘러나왔다.
주로 로마군을 상대로 어떻게 전투를 펼칠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선우들은 계속 질문을 던지고,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했다.
밤이 깊어가고 전사들의 준비가 끝날 때까지 회의는 쭉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군의 진군이 시작됐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바야투르가 이끄는 20만의 흉노 기병은 로마군을 요격하기 위해 출병했다.
어느 쪽이 지고 이기더라도 역사에 남을 만한 대전투가 되리라 확신하며.
※※※
카이사르가 이끄는 35만이 넘는 대군은 바야투르가 예상한 그대로 움직였다.
물론 너무 뻔한 움직임만 보이지는 않았다.
마르쿠스의 명령을 받은 2개의 로마군단이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보스포루스 왕국으로 북상해 들어갔다.
이 보고를 받은 바야투르는 순간 고민했지만, 보스포루스를 구하기 위해 따로 병력을 나누진 않았다.
2개 군단 정도라면 보스포루스의 전력으로도 충분히 방어가 가능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요격은 불가능하더라도 그냥 성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기만 하고 있으면 그리 쉽게 함락되진 않는다.
게다가 보스포루스로 들어온 적을 상대하기 위해 병력을 나누는 거야말로 상대가 원하는 노림수라는 생각에서였다.
만약 기병들을 보낸다고 해도 로마군이 다시 카프카스 산맥으로 들어가면 흉노군으로서는 그들을 잡을 방도가 없었다.
고작해야 2개 군단이다.
보스포루스가 함락되기 전에 로마 본대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바야투르가 미처 간파하지 못한 점이 한 가지 있었다.
보스포루스가 북상해오는 로마군을 막기 위해 수성을 취한 탓에 흑해를 방어하는 감시망이 완전히 기능을 상실한 것이다.
그 틈을 타고 로마군의 대함대가 유유히 흑해를 가로질러 흉노의 본거지가 있는 흑토 평야의 이남지역인 크림 반도에 상륙했다.
강을 통해 보급하는 작전은 사실상 눈속임이었다.
마르쿠스의 진정한 목적은 카이사르가 이끄는 대군으로 바야투르의 본대를 유인하고, 정예 별동대로 그들의 본거지를 급습하는 것이었다.
그 수는 대략 8만.
얼핏 보면 적다고 보일 수도 있었지만, 그 구성원은 전원이 기병이었다.
마르쿠스가 이끄는 기병 5만에 동맹국 소속의 기병 3만이 더해졌다.
로마군이 지금껏 이렇게 완전히 기병으로만 이루어진 부대를 이끌고 적의 후미를 타격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바야투르 역시 정주민족인 로마가 이런 전술을 쓸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흑토의 대지를 밟고 선 마르쿠스는 자신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기병들을 슥 둘러보았다.
지상에 강림한 악귀로 변모할 준비가 완전히 끝난 그들을 향해 마르쿠스의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부상자에게도, 여자에게도, 노인에게도 자비를 베풀지 마라. 지금부터 눈에 띄는 모든 자들을 죽인다. 로마에게 칼을 들이댄 자들을 용서치 마라. 흉노를, 로마의 적을 이 땅 위에서 완전히 지워버려라."
< 225. 마르쿠스의 분노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