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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7. 마르쿠스의 분노 (228/326)

  < 227. 마르쿠스의 분노 >

  227.

  로마와 흉노군의 대치는 갑작스레 끝이 났다.

  원래대로라면 곧바로 회전이 벌어졌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바야투르는 로마군이 자신 있게 평원으로 들어온 만큼 전투에 응할 거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공병들을 총동원해 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 흉노군의 돌격을 막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적군의 행동에 바야투르는 고민에 빠졌다.

  정찰병을 동원해 적군의 상황을 살피려 해도 숙영지에 틀어박혀 나오지를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혹시 뭔가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여기서 버티고 있는다면 사실 흉노군으로서는 별로 나쁠 게 없었다.

  어쨌거나 장거리 원정을 나와 있는 건 로마군이다.

  바야투르는 그다지 급하게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쭉 대치하고 있으면 어차피 로마군은 숙영지에서 기어 나올 수밖에 없다.

  '설마 우리가 저런 요새에 기병들을 들이받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북제와 동제가 그렇게 어수룩한 판단을 할 것 같지는 않은데······.'

  흉노군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매일같이 로마군의 진영을 향해 큰 소리로 욕설을 퍼붓고 겁쟁이들이라 놀렸다.

  로마군이 나오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라도 이런 상태가 유지될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오늘도 신나게 로마군을 향해 조롱을 던지라고 부추겨야 할 흉노군의 수뇌부가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

  네 선우들이 당황과 분노, 초조함과 경악이 가득한 얼굴로 한자리에 모였다.

  바야투르도 지금껏 보여주지 않았던 창백한 표정으로 그들을 맞았다.

  명령이 떨어지지 않자 흉노 전사들은 의아해하며 진영에서 대기했다.

  이런 상황에 저렇게 심각하게 논의할 사안이 대체 뭐가 있다는 말인가.

  아직 십대 중반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 소년이 선우들의 앞에서 파르르 떨리는 입술로 로마군의 대학살을 알렸다.

  그의 입에서 흑해를 통해 돌아 들어온 로마군이 어떻게 흉노의 본토를 유린하고 있는지 상세하게 흘러나왔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마찬가지인 소식이었다.

  본대가 빠진 틈을 비집고 들어와 민간인을 학살하고 있다니.

  세상에 이럴 수는 없다.

  과거 흉노라면 치를 떨던 한나라조차 이런 방법을 쓰진 않았다.

  아니, 쓰지 못했다고 하는 게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으드득.

  분노에 가득찬 선우들이 소리가 흘러나올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특히 알탄은 다른 이들보다도 한층 더 격노했다.

  가까스로 도망치는 데 성공한 소년은 알탄이 다스리는 부족에 속한 이였기 때문이다.

  그의 시선이 자연히 바야투르에게 향했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시간은 절대 흉노의 편이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결정을 내려야 했다.

  로마군을 쳐서 바로 전멸시키고 북쪽으로 올라가 별동대를 추격할 것인지, 아니면 로마의 본대를 놔둔 채 그대로 군을 물릴 것인지.

  바야투르는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결론을 내렸다.

  "···여기선 물러날 수밖에 없다. 숙영지에 틀어박혀 있는 로마 놈들을 공격하는 건 자살행위에 가깝다. 설령 이긴다고 해도 이쪽의 병력 역시 남아나질 않을 거다. 설령 이긴다고 해도 후방이 완전히 초토화된다면 이 전투는 의미가 없다."

  아무도 반대하는 이는 없었다.

  완전히 바보처럼 농락을 당한 게 억울했지만, 자식들과 아내의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바트자르갈도 바야투르의 의견에 찬동했다.

  "부족장들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간다면 그들은 당장이라도 회군을 하자고 할 겁니다. 억지로 싸우려고 해봐야 군의 사기만 떨어지고 불만만 높아질 뿐이죠. 싸우더라도 후방에 들어와 있는 놈들을 쫓아내고 싸워야 합니다."

  만약 부족원들의 목숨을 등한시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그토록 공고한 부족장들의 충성심에도 금이 갈 수밖에 없다.

  물론 다른 선우들도 자신이 이끄는 부족들의 안위가 걱정되긴 마찬가지였다.

  한 번 결정이 떨어졌으면 바로 실행에 옮기는 게 흉노군의 특징이다.

  시네가챠르로 돌아간다는 명령은 곧바로 전군에 하달되었다.

  "모두 서둘러라! 지금 즉시 회군해야 한다!"

  처음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며 당황해하는 전사들의 귀에 자세한 자초지종이 전해졌다.

  당연히 반응은 극적이었다.

  말에 올라 후퇴하는 자들의 눈이 완전히 뒤집혔다.

  당장 가족들의 안위를 확인해야 한다며 군을 이탈하려 하는 자들까지 나왔다.

  질서나 대열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조급한 회군이 시작되었다.

  기세 좋게 로마군을 향해 조롱을 퍼부었거늘 실로 황망한 퇴각이었다.

  물러나려는 흉노군의 등 뒤로 이번에는 로마군의 고성이 쏟아졌다.

  "멍청한 놈들! 자기들 집이 불타는 줄도 모르고 신나서 날뛰더니."

  "꼴좋다 이 새끼들아! 가서 너희 가족들이나 잘 묻어주고 다시 와라!"

  초상집이 된 흉노군과는 달리 전략이 제대로 먹혔음을 확신한 로마 진영의 분위기는 정반대였다.

  숙영지에서 나온 로마군은 퇴각하는 흉노군을 따라 다시 진군을 재개했다.

  전원 기병인 흉노군을 추격해 추가적인 피해를 주지는 못했지만, 자신들이 원하는 지형까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진격할 수 있게 됐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창 흑토 평원에서 흉노인들을 쫓아 학살을 벌이고 있던 마르쿠스는 곧 바야투르의 본대가 들이닥칠 걸 예상하고 물러났다.

  공격해 들어왔을 때처럼 배를 타고 돌아가면 흉노군으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들을 잡을 수 없다.

  "임페라토르시여, 북동쪽 방면에 아직 공격하지 않은 흉노의 부락들이 꽤 많이 남아있습니다. 위치는 확보해 놨는데 저곳들이라도 마지막으로 공격하고 돌아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지휘관 한 명이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한 듯 물었다.

  그는 마르쿠스의 명령대로 흉노민들이 거주하는 장소만을 파악해 놓았을 뿐, 직접적으로 그들을 공격하진 못했다.

  넓고 넓은 초원에서 어렵게 위치를 찾아냈는데 그냥 물러나는 게 조금 억울했던 것이다.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라. 네 수고는 결코 헛된 게 아니었으니. 놈들 중 태반은 살아남지 못할 거다."

  흑해 연안에 도착한 마르쿠스는 미리 대기시켜둔 군함에 동맹군 기병 5천을 제외한 전군을 탑승시켰다.

  7만 5천의 기병은 이대로 흑해 서쪽으로 빠져나가 북상하고 있는 카이사르의 본대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따로 빼놓은 5천의 기병을 위해서 이들이 퇴각할 수 있는 군함과 보급품을 어느 정도는 남겨두었다.

  마르쿠스는 동맹군 기병을 이끌 장수에게 다시 한번 계획을 상기시켜 주었다.

  "명령한 대로 우리가 빠져나간 뒤 충분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움직임을 재개해라. 너무 빨라도, 늦어서도 안 된다."

  "알겠습니다."

  "위치는 지도에 표시해두었다. 계속 움직이는 놈들의 특성상 완전히 부합하진 않을 수 있겠지만, 그리 큰 오차는 없을 테니 마음껏 분노를 표출하도록."

  그 말을 끝으로 마르쿠스의 기병을 태운 군함들은 유유히 흑해 연안을 가로질러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갔다.

  조금 더 길게 머물 수 있었으면 좋았겠으나 성과는 충분히 거두었다.

  고귀한 신녀들을 포함해 납치당했던 포로들을 대부분 풀어주었고, 흉노의 눈이 뒤집히기에 충분한 피해를 입혔다.

  지금까지 받았던 수모를 그대로 돌려준 병사들의 얼굴에는 더없이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흉노 놈들이 그 광경을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생각만 해도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야."

  "지금까지 우리가 느낀 분노를 놈들도 맛보게 되겠지."

  길길이 날뛸 흉노 전사들의 반응을 떠올리며 병사들은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군단장들의 눈치가 보여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기쁜 게 하나 더 있었다.

  이제 더 이상 고기만 먹지 않아도 된다.

  드디어 원래의 식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데에 로마군은 들뜬 기대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그 점이 가장 기뻤다.

  ※※※

  로마군이 여유롭게 배를 타고 떠나버린 걸 모르는 흉노군은 밤낮으로 기마를 달렸다.

  겁도 없이 쳐들어온 로마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사방으로 기병을 퍼트려 탐색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로마군과 맞닥뜨리지 못했다.

  신출귀몰한 적들의 움직임에 완벽히 농락당한 셈이다.

  싸울 상대를 찾지 못한 흉노군은 결국 철저하게 파괴당한 부락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머물던 장소로 귀환한 흉노 전사들은 다시 한번 분노를 터트렸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건 오롯이 철저한 파괴의 잔해뿐이었다.

  하늘보다 더 푸르렀던 풀밭은 불에 타 새까맣게 그슬려 있었고, 가축들은 도살당했다.

  게다가 로마군은 악랄하게도 초원은 불태웠으면서도 사람들의 시체와 게르는 그대로 두었다.

  이유는 뻔했다.

  흉노군에게 조금이라도 더 강한 정신적인 충격을 가하기 위해서였다.

  아예 시체를 줄줄이 십자가에 매달아 버린 곳도 있었다.

  날이 상당히 지났기 때문에 시체는 이미 부패해 있거나, 들짐승들에게 잡아먹혀 온전한 형태조차 유지하지 못했다.

  전사들은 저마다 가족의 이름을 외치며 시신이라도 수습하기 위해 황망히 돌아다녔다.

  "···피해 규모가 너무나도 큽니다. 죽은 사람들과 가축들의 규모를 추산하기가 힘들 정도입니다."

  바트자르갈이 비탄에 잠긴 목소리로 보고를 올렸다.

  바야투르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번 습격의 참사는 설령 선우의 가족들이라 해도 피하지 못했다.

  네 명의 선우 가운데 두 명.

  바트자르갈과 알탄은 자신의 처자식을 잃었다.

  바야투르 역시 수많은 친지들의 시신을 목도하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다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이 개자식들··· 이렇게나 야비한 방법을 써오다니."

  "전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면 좋겠습니까."

  "···이번 전투에 한해서라면 그건 어렵지 않다. 복수심을 부채질해야겠지. 너와 알탄이 수고를 해줘야겠다."

  일반 전사들과 똑같이 가족들을 잃은 선우가 나선다면 분명 전사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 것이다.

  증오와 복수심으로 똘똘 뭉친 흉노군의 힘은 분명 이전보다 강하면 강했지 약해질 일은 없을 터.

  북상하고 있는 로마군을 향해 이 끓어 넘치는 감정을 모두 발산하면 그뿐이다.

  바야투르의 의도를 이해한 바트자르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래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로마군과의 전투는 그렇게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후폭풍을 감당하긴 쉽지 않을 겁니다."

  "그건 각오해야겠지."

  설령 로마군을 이기더라도 후방의 피해가 너무 심각했다.

  그리고 전면전을 벌이는 이상 피해 없이 로마군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으니 설령 전투를 이긴다고 해도 그들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았다.

  전투의 승리는 있을지 몰라도 이제 이번 전쟁을 만족스러운 결과로 마무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제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바야투르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통곡 소리를 애써 떨쳐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이번 전투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올라오는 로마 놈들을 어떻게 하지 못한다면 흉노는 이제 두 번 다시 일어날 수 없을 테니."

  대초원을 통일하고 유례없는 유목민의 제국을 건설한다는 야망이 이렇게 좌초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바야투르는 바트자르갈과 알탄을 내세워 무너져가는 전사들의 사기를 다시 한번 다잡았다.

  로마군의 비열한 행동을 다같이 한목소리로 성토하고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주자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거기에 이번 습격으로 가족을 잃은 전사들을 주로 선봉에 세웠다.

  타격은 막대했으나 그만큼 전사들의 투지는 높아졌다.

  이번에야말로 필승의 각오를 다진 흉노군은 북상하고 있는 로마군을 치기 위해 다시 한번 출격했다.

  로마군의 본대와는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마주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본대에 마르쿠스의 기병마저 합류하자 이전에 보았던 것보다 적의 규모가 한층 더 불어나 있단 게 바로 실감이 됐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군대를 전부 합치면 보병만 35만에 기병은 10만에 달한다.

  20만에 가까운 기병을 이끌고 있는 흉노 측으로서도 상당한 압박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번에 새로 합류한 기병들의 무장이 신경 쓰였다.

  멀리서 로마군의 기병을 살펴본 바야투르는 척봐도 그들의 무장이 그리스에서 싸웠을 때보다 훨씬 더 수준이 올라갔다는 걸 파악했다.

  저번에만 해도 그리 수가 많지 않았던 판금갑옷을 입은 기병들이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굳이 기병들뿐만이 아니라 보병들의 장비도 더 보강됐다는 게 티가 났다.

  전쟁을 준비한 수개월 동안 쉬지 않고 장비를 찍어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도 새롭게 생산된 장비들이 흑해를 통해 로마군의 진영에 보급되고 있었다.

  바야투르의 눈이 뒤쪽으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로마군을 향해 달려들고 싶다는 부하들의 기색이 역력히 전해져왔다.

  '투지가 들끓는 건 좋지만 너무 과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예상보다 놈들이 더 강해보이니 일단 신중을 기하는 게······.'

  여기에 올 때만 하더라도 바로 돌격을 감행하려던 바야투르의 머리가 다시 이성을 되찾았다.

  전투에 앞서서 감정을 앞세워 서두르는 건 패전으로 향하는 지름길인 법.

  들끓는 분노는 가슴에 묻고 머리로는 냉철한 이성을 품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그의 결심을 무너뜨리는 보고가 곧바로 이어졌다.

  "천태선우님께 아룁니다."

  황급히 달려온 전령이 거의 말에서 굴러 떨어지듯 보고를 올렸다.

  "로마 놈들의 소규모 기병대가 또다시 뒤에서 촌락을 공격해 사람들을 학살하고 있습니다. 후퇴하면서 소규모의 별동대를 남겨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던 바야투르가 피가 새어 나올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치졸한 싸움법도 정도가 있기 마련이다.

  이건 해도 해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아무리 참아보려 해도 다 억누르지 못한 울화가 결국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이 개자식들이 끝까지!"

  < 227. 마르쿠스의 분노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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