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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 대회전 (229/326)

  < 228. 대회전 >

  228.

  "천태선우님!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다시 회군해야 합니까? 아니면 이대로 승부를 봐야 합니까?"

  부하들의 아우성에 바야투르는 머리가 어질어질한 기분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음 같아서는 그 역시 누군가에게 답을 달라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여기서 약한 모습을 보이면 모든 게 끝이다.

  어떤 상황에서라도 최고 책임자는 냉철하고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야 한다.

  바야투르는 수차례나 심호흡을 하고 냉정하게 현 상황을 되짚어 보았다.

  "후방에서 난리를 피우고 있는 적의 기병은 그리 숫자가 많지 않다고?"

  "예. 도망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의 말로 미루어 보면 1만이 채 안 되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 숫자로는 저 넓은 평원에 퍼져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는 게 쉽지 않을 텐데······."

  바야투르는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때는 불같이 화를 냈었다.

  하지만 후방에 배치한 로마군의 기병대가 소수라는 사실에 이내 평정심을 되찾고 마르쿠스의 그릇된 판단을 비웃었다.

  유목민들은 정주민들과는 생활양식도, 반경도 완전히 다르다.

  거대한 도시에 밀집해 살아가는 정주민들과 달리 유목민들은 드넓은 초원에 골고루 퍼져 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미 8만의 기병들이 잔뜩 들쑤시고 다닌 탓에 흉노의 부락들은 대부분 초토화된 상태였다.

  듬성듬성 남아있는 소수의 생존자들을 고작 소수의 별동대가 발견해 죽일 수 있을 리가 없다.

  처음에 습격을 보고한 이들은 정말 운이 지독하게 나빠서 발각된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로마 기병에게 습격당했다는 생존자들이 우후죽순 흉노의 진지를 찾아왔다.

  "노수호 부족 출신입니다. 로마 놈들에게 대부분의 부족원이 학살당하고 가축들도 모두 빼앗겼습니다!"

  "천태선우님! 로마 놈들이 매일 같이 사람들을 습격하고 촌락을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말도 안 되는···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소수의 병력으로는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여러 부족을 침략해 학살을 벌일 수가 없다.

  '설마 1만이 채 되지 않을 거라는 건 생존자들의 착각인가? 사실 훨씬 더 많은 병력을 뒤에 남겨놨다고?'

  혼란스러워진 바야투르는 신속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떠오르는 가능성이 너무 많아 도저히 확신을 가질 수 없었던 까닭이다.

  우선 마르쿠스가 적어도 수만의 기병들을 뒤에 남겨놨다는 가정은 조금 어폐가 있었다.

  그렇다고 하기엔 현재 로마군의 진영에 보이는 기병의 수가 너무 많았다.

  저 정도 기병이 본대와 합류했는데도 뒤에 여전히 수만의 기병이 남아있다면, 대체 로마군은 얼마나 많은 기병을 이 전쟁에 동원했단 말인가.

  '아니. 하지만 무작정 아니라고 할 수도 없나. 로마 놈들이 총력전으로 나왔다고 한다면 기병만 10만 이상을 끌고 나왔다고 해도··· 제길, 혼란이 가시질 않는군. 그게 아니라면 설마 배신자가 있는 건가?'

  두 번째 추론은 상당히 말이 됐다.

  여러 부족의 위치를 아는 배신자가 로마에게 붙었다고 하면 대략 납득이 간다.

  그래도 정보가 부족한 이상 어느쪽으로도 쉽사리 결론을 낼 수 없었다.

  만약 잘못된 확증에 기반해서 계획을 짠다면 어디서 어떻게 걸려 넘어질지 모른다.

  이럴 때일수록 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야투르가 침착하려 해도 주변에서는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천태선우님! 오늘도 촌락 두 곳이 습격당했다고 합니다. 전사들 사이에서 동요가 점점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이런 멍청한! 누가 생존자들을 전사들과 접촉시키라고 했느냐!"

  "그, 그것이 부족장들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있는지라······."

  바야투르는 처음에는 철저하게 정보를 차단하려고 했다.

  적어도 로마군의 본대를 쓰러뜨리기 전까지는 전사들의 귀에 괜한 정보가 들어가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어차피 적은 소수.

  감수해야 할 피해는 조금일 테고 여기까지 당도하는 생존자들도 얼마 없을 테니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리라 보았다.

  착각이었다.

  로마군의 움직임은 한 명도 놓치지 않고 꼼꼼히 섬멸작전을 수행한 저번과는 달랐다.

  한 명 이상의 생존자들을 일부러 놓아주는 게 틀림없었다.

  흉노의 본진에는 거의 매일같이 습격을 알리는 생존자들이 도착해 눈물로 로마군의 만행을 호소했다.

  이러니 정보가 차단될 리가 없다.

  바야투르는 이것 역시 마르쿠스의 계획이라 확신했다.

  "끝까지 치졸하고 더러운 술수만 쓰는구나. 전투를 벌이기 전에 이쪽의 신경을 최대한 많이 긁어놓겠다는 것인가."

  이제 선택의 시간은 그리 길게 남아있지 않았다.

  늦어도 오늘 내로는 결정을 내려줘야 전사들의 불만이 폭발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가족을 잃은 부족들은 당장이라도 로마군과 싸우자고 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반면 아직 가족들이 무사하단 걸 확인한 부족들은 소수의 병력만이라도 뒤로 빼 후방의 안전을 도모하자고 주장하는 중이었다.

  상식적으로 언제 가족들이 습격당할지 모르는데 마음 편하게 적과 전투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바야투르도 1만 정도의 군사를 뒤로 빼는 방안을 검토해 보았다.

  후방에 있는 로마군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병사들의 심신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접었다.

  후방에 있는 로마군의 정확한 규모에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서였다.

  지금 저들이 휩쓸고 다니는 속도를 봐서는 도저히 1만 미만의 군사들로는 보이지 않았다.

  배신자가 붙었다는 추론이 틀렸다면?

  마르쿠스가 그저 2만, 3만의 별동대를 남겨둔 거였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거기에 1만 정도의 기병을 보내봤자 역으로 전멸당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전사들의 동요가 심한데 후방으로 보낸 기병들이 전멸이라도 하면 그땐 진짜 끝장이다.

  그렇다고 이쪽에서 3만 이상의 병력을 빼버리면 출혈이 너무 컸다.

  후방으로 병력을 파견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결론이 나온 이상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지금 즉시 로마의 본대와 결판을 짓고 전군을 다시 시네가챠르로 물려 재정비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다.

  결판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전사들의 불만을 더는 통제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게 마르쿠스가 노리는 바였을 테지만 더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네 선우와 부족장들을 집결시킨 바야투르는 결연한 목소리로 결전의 시기가 왔음을 알렸다.

  "로마 놈들과 일전을 벌이겠다. 모두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바트자르갈이 진한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결코 최선의 선택은 아니었지만,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알탄이 비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드디어 확실하게 결판을 짓는 겁니까? 바로 이곳에서?"

  "그렇다. 승부의 시기는 바로 내일 동이 트는 즉시. 이 평원에서 모든 걸 끝내겠다!"

  다행히도 대치한 시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고 로마군도 북상 중이었기에 이전처럼 요새화된 숙영지를 짓고 있지는 않았다.

  충분히 회전을 벌일 수 있다.

  일단 평야에서 전투만 벌인다면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투에서 패한 적은 없다.

  네 선우들과 부족장들은 이번에도 그럴 거라 믿었다.

  아니,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

  "놈들이 제대로 한 판 해보려는 모양이로군."

  초조함과 분노로 흔들리는 흉노군과 달리 로마군의 진영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우리에게 나쁠 건 없지요. 군의 움직임에서 벌써 초조한 티가 확 나고 있지 않습니까. 저런 식으로 전투가 시작되면 이전처럼 정밀한 기동이 가능할 리가 없지요."

  마르쿠스가 카이사르의 말을 받으며 탁자에 앉아 있는 좌중을 쭉 둘러보았다.

  최고 지휘관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배치는 카이사르가 오른쪽, 마르쿠스가 왼쪽이었다.

  카이사르의 양옆에는 라비에누스와 베르킨게토릭스가 자리하고 있다.

  마르쿠스의 옆에는 안토니우스와 수레나스가 있었다.

  푸블리우스는 기병대의 장비를 최종점검하느라 자리하지 못했다.

  베르킨게토릭스는 자리에 앉은 뒤로 연신 수레나스 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로마에 존재하는 유이한 이민족 원로원 의원이었으니 신경이 쓰였던 것이리라.

  수레나스도 마찬가지로 베르킨게토릭스를 유심히 살피는 기색이었다.

  카이사르는 그런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앞으로 벌어질 전투로 화제를 고정했다.

  "우리가 바라는 구도가 나왔지만 전투가 그리 순탄할 거란 보장은 없네. 자넨 흉노와 한 번 회전을 벌여보았으니 대강 그들의 강함을 이해하고 있겠지? 어떻던가?"

  "순수 기마술만 놓고 보면 당연히 저들이 우리보다 위입니다. 등자도 사용하고 있고 합성궁의 성능도 우리에게 근접해 있으니 무서운 전력이라 봐야겠지요. 하지만 이번엔 이쪽도 철저하게 준비한 만큼 저번과는 다를 겁니다."

  "그렇겠지. 그리스에서 전투가 끝난 뒤 쉬지 않고 신형 장비들을 생산하는 데 모든 자원을 투자했으니까."

  그리스에서 회전을 벌였던 바야투르의 부대는 흉노군에서도 가장 전투력이 뛰어나고 장비가 충실한 이들이었다.

  반면 로마군은 그때보다 훨씬 더 충실한 장비를 갖추고 있어 비교가 불가능했다.

  게다가 현재 흉노군은 필요 이상으로 복수심을 불태우는 자들과 가족의 안위로 초조해하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지휘관들이 아무리 냉정하게 있으려고 해도 이런 부하들을 완벽히 통솔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저놈들의 머릿속에 최대한 빨리 우릴 격퇴하고 돌아갈 생각밖에 없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 나올지 뻔히 예상이 되니 대응하는 것도 어렵지 않겠죠."

  "흉노군이 후방의 별동대를 타격하기 위해 따로 군대를 빼지 않은 건 확실합니까?"

  두 임페라토르의 대화를 듣고 있던 라비에누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르쿠스가 여유로운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부터 그럴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네. 저들로서는 자신들의 뒤에 있는 병사들의 수가 어느 정도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으니까."

  수레나스가 진지한 목소리로 한 마디를 거들었다.

  "그래서 따로 조사대를 운용해 흉노 촌락의 위치를 확인만 해두었던 겁니다. 나중에 별동대를 운용해 위치를 파악해둔 곳을 우선적으로 습격하면 되니까요."

  "그러면 흉노 놈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놈들에게는 우리가 최소 2만에서 3만 정도는 남겨둔 채 부대를 여러 개로 나눠서 동시에 운용하고 있는 걸로 보일 테니까."

  "그렇군요. 그러니 섣불리 요격대를 편성할 수 없던 거였군요."

  "하지만 그만큼 불안감은 더 커질 수밖에 없네. 뒤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게 몇 만의 군사인지 모르니 어느 정도의 피해를 추가로 입을지 예상이 되지 않거든.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쪽을 어떻게 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차 있을걸?"

  라비에누스와 베르킨게토릭스의 얼굴에 감탄이 서렸다.

  특히 흉노에게 시달렸던 경험이 많은 두 사람은 통쾌하다는 심정마저 들었다.

  카이사르도 흥미롭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이렇게 배를 이용해 적의 후미를 타격하는 건 로마에선 쓰이지 않은 방식인데 꽤나 색다른 느낌이로군. 철저하게 적의 짜증과 분노를 유발하는 전법도 그렇고. 어디에서 영감을 얻은 것인가?"

  "예전에 지인이 그런 말을 한적 있습니다. 전략 싸움은 상대를 열받게 만들려고 하는 거라고요."

  카이사르가 피식 웃었다.

  그가 한마디 하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거참 공감이 되는 말이로군. 자네의 지인도 성격이 꽤나 뒤틀려 있던 모양일세."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데에만 골몰하던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지라."

  마르쿠스는 이재훈이던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 풍족한 삶을 살지 못했던 그는 친구들과 놀 때도 자연스레 돈이 그리 들지 않는 pc방 같은 곳으로만 갔다.

  그런데 전략게임을 함께 하던 친구 중에 정말 집요할 정도로 병력을 수송선에 실어 후방의 기지만 타격하는 놈이 있었다.

  그런 애들과 게임을 하면 이겨도 짜증이 나고 지면 키보드를 부숴버리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그런 반응을 보이면 보일수록 그 친구는 오히려 더 즐거워할 뿐이었다.

  '게임은 상대를 열받게 하려고 하는 거다'라는 요상한 말을 지껄이던 녀석이었다.

  그런데 막상 비슷하게 플레이를 해보니 상대방의 반응을 보는 맛이 아주 쏠쏠했다.

  이번 전략도 사실 거기에서 착안한 것이다.

  전쟁은 게임과는 다르지만 상대방의 화를 돋우면 돋울수록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는 점은 똑같다.

  분노와 조급함으로 시야가 좁아진 적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꼭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전보다 훨씬 더 단순하게 전투에 임하게 된다.

  이미 로마군은 달려드는 흉노군을 무너뜨릴 준비를 사전에 다 끝내놓았다.

  "카이사르 님, 그리고 마르쿠스 님. 흉노의 네 선우 중 알탄이라는 놈은 제가 목을 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혹시라도 놈이 포로로 잡힌다면 꼭 너에게 인계를 해주도록 하지. 자, 그럼 가볼까?"

  이미 로마군은 달려드는 흉노군을 무너뜨릴 준비를 사전에 다 끝내놓았다.

  대열을 갖춘 40만이 넘는 로마 군단의 위용은 실로 장관이었다.

  임페라토르가 말에 오르는 것이 곧 개전의 신호가 됐다.

  뿌우우우우 나팔 소리에 맞춰서 사방에서 깃발이 일제히 올라갔다.

  "전열은 앞으로! 모두 진형을 유지하라!"

  스파르타쿠스의 우렁찬 목소리에 맞춰 나팔 신호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원 저편으로 적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축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당장이라도 로마군을 뒤덮을 것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호쾌한 적군의 진격에도 겁을 먹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전군 전투 준비!"

  지휘관들의 신호에 맞춰 전열에 위치한 궁수들이 화살을 조준했다.

  적군이 사정거리 내로 접근하자 마침내 로마군의 진영에서 수만 발의 화살이 일제히 발사됐다.

  대초원의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던 흉노의 전설을 지워버리기 위해, 새로운 신화를 만들기 위한 로마군이 마침내 싸움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 228. 대회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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