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0. 대회전 >
230.
알탄은 빠르면서도 유연했다.
그는 바야투르가 총애하는 선우답게 입만 산 자가 아니었다.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로마군의 정예에게 일반적인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사전에 숙지하고 있었다.
노리는 건 격살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낙마.
말 위에서 곡예에 가까운 몸놀림으로 움직이며 베르킨게토릭스의 공격을 유유히 피하고 반격까지 섞었다.
"카앗!"
알탄이 괴성을 내지르며 만곡도를 휘둘렀다.
횡으로 후려치는 칼날이 사선으로 내려치는 창대에 튕겨 나갔다.
알탄이 슬쩍 고개를 틀어 이어지는 찌르기를 흘려내며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겁쟁이 갈리아인치고는 아주 제법이로구나. 복수하겠다고 칼을 갈 만해."
베르킨게토릭스는 대놓고 빈정거리는 도발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원수의 입에서 갈리아라는 말이 나왔으니 어떤 의미인지 대강 알았을 텐데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살의를 불태우는 눈에 한층 더 힘이 실렸을 따름이다.
공격을 이어가는 베르킨게토릭스의 기세가 한층 더 사나워졌다.
미친 듯 날아드는 창날에 알탄의 몸이 위태롭게 뒤로 밀렸다.
사실 이게 말 위에서 벌어진 싸움이 아니었다면 진즉 끝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평생을 말 위에서 보낸 알탄은 기마 위에서 하는 싸움만큼은 흉노 최고라 할 수 있는 실력자였다.
베르킨게토릭스 역시 갈리아 출신으로 말을 다루는 데에는 능숙했으나 기술만 놓고 보자면 알탄에 미치지 못했다.
방어에만 급급한 듯 보였던 알탄이 마침내 한줄기 기회를 잡았다.
휘둘러오는 상대방의 창을 흘려내고 그 힘을 역이용해 자세의 균형을 무너트렸다.
몸이 한쪽으로 기운 베르킨게토릭스의 표정이 급변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기회다.
알탄은 필사의 힘을 쥐어짜내 베르킨게토릭스의 갑옷 위를 검으로 연타했다.
기우뚱. 하고 갑옷의 거체가 넘어간다.
베르킨게토릭스의 몸이 말 아래로 떨어져 땅바닥을 굴렀다.
"됐다! 이 멍청한 갈리아놈. 성난 황소마냥 달려들기만 하더니."
이제 쓰러진 저놈을 말발굽으로 짓밟기만 하면 제아무리 단단한 갑옷을 입었어도 무사하지 못할 터.
알탄은 승리감에 취해 연신 비웃음을 흘리며 쓰러진 베르킨게토릭스를 조롱했다.
"흐흐, 이것이야말로 평생을 말 위에서 보낸 우리들과 어설픈 네놈들의 격차다. 네놈의 가족들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네놈도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저승으로 보내줄 테니 너무 억울해 말거라."
알탄이 그대로 말을 전진시키려 말고삐를 잡았을 때다.
등줄기를 타오르는 오싹한 느낌이 그에게 위기감을 불러일으켰다.
휘익!
갑작스레 몸을 일으킨 베르킨게토릭스가 손에 쥐고 있던 철창을 내던졌다.
알탄의 말이 막 앞으로 발을 내딛으려 할 때와 정확히 겹친 타이밍이었다.
알탄이 다급하게 몸을 틀어 날아오는 창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베르킨게토릭스는 처음부터 알탄이 아닌 그가 탄 말을 노린 것이었다.
날아온 철창이 기마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꿰뚫고 지나갔다.
말이 달려오던 기세 그대로 앞으로 처박히고 알탄의 몸도 자연스레 위로 튕겨 나갔다.
백전노장의 전사답게 곧바로 낙법을 취하고 눈으로 베르킨게토릭스의 움직임을 쫓았다.
'젠장 뒤인가!'
앞에 적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동시에 절대로 듣기 싫은 소리를 들었다.
자신의 몸이 꿰뚫리고 뼈와 살이 파열되는 소리를.
촤악!
뜨거운 무언가가 배를 뚫고 나왔다.
알탄이 더듬더듬 자신의 복부를 손으로 막아보았다.
하지만 무심하게 쏟아지는 핏물이 삽시간에 그의 발아래에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우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배를 뚫고 나온 창날이 옆으로 회전하며 빠져나왔다.
"쿨럭···."
동시에 등 쪽에서 진한 통증이 느껴졌다.
베르킨게토릭스의 글라디우스가 알탄의 무방비한 등 위로 냉혹한 궤적을 그려냈다.
그가 휘두르는 무기에는 억울하게 희생당한 모든 갈리아인들의 분노가 집약되어 있었다.
알탄은 필사적으로 등을 돌려 반격을 해보려 했으나 마음뿐이었다.
현실은 발끝과 손에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았다.
퍼억!
기어코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창날을 바라보는 알탄의 눈동자가 흐릿하게 변했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는지 가슴을 뚫고 나온 창대를 잡고 비틀거리던 그의 입에서 피 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비겁한 새끼··· 기절한 척이나 하면서 야비하게 투창을··· 이러니까 성안에 숨어서 농사나 짓는 새끼들··· 특징은··· 크크크······."
무덤덤하게 다가온 베르킨게토릭스가 검을 휘둘러 알탄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는 알탄의 몸이 완전히 허물어지는 걸 보고서야 한줄기 신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야만족 새끼가 죽기 전에도 입은 더럽게 나불거리네. 재깍 죽어버릴 것이지."
곧바로 자신의 기마로 오르려던 베르킨게토릭스는 은은하게 몸을 타고 올라오는 통증에 눈을 찌푸렸다.
이기긴 했어도 예상외의 타격을 받았다.
'처음부터 놈의 말을 집중적으로 공격했어야 하는데 복수를 하겠다는 일념 때문에 흥분해 있었다. 나도 아직 멀었군.'
일단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해 체력을 회복하는 게 나아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바야투르가 남겨두고 간 전사들이 있었을 텐데 묘하게 조용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놀랍게도 두 다리로 서 있는 적 기병은 아무도 없었다.
"훌륭한 승부였습니다."
솔직한 감상을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 아래로 깔려있는 적군의 시체가 한가득 눈에 들어왔다.
"대결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기병들은 다 정리했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스파르타쿠스를 바라보았다.
'로마 최강의 검투사라더니 과연······.'
"도망치는 적의 기병 몇은 일부러 보내주었습니다. 적장의 죽음이 알려지면 저쪽에서도 동요가 심해질 테니."
"적의 수괴는 쫓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무리하게 추적하진 않아도 된다는 말을 사전에 들었으니 따라야지요. 이미 멀어진 그자를 쫓는 것보다는 다른 부대 쪽을 지원하는 게 나아 보입니다. 그럼 전 먼저 가볼 테니 조금 쉬시다가 합류하십시오."
스파르타쿠스는 그 말을 끝으로 그대로 말을 몰아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적군의 한가운데로 달려 들어갔다.
등에 아퀼라(독수리)의 날개를 단 중장기병.
마르쿠스는 이들을 보이는 그대로 아퀼라누스라고 칭했다.
스파르타쿠스를 필두로 한 아퀼라누스는 이후로도 전장의 곳곳을 들쑤시며 종횡무진 활약했다.
그들이 개입하는 곳마다 전선의 균형이 무너지고 학살당한 흉노 전사들의 시체가 즐비하게 땅 위를 굴러다녔다.
아퀼라누스의 창은 일반 전사와 부족장들을 가리지 않았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들의 눈에 띈 흉노군은 그대로 기다란 창에 꿰뚫려 생을 마감할 뿐이었다.
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오트곤바야르와 바트자르갈은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아군이 무너지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선우시여! 저 날개 달린 놈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피하셔야 합니다! 저놈들과 싸우는 건 자살 행위입니다."
"크윽!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버티지 못한다면 천태선우님께서 위험해지신다."
"하지만 여기 있다가는 천태선우님이 적진을 돌파하기 전에 우리가 전부 죽습니다!"
바트자르갈은 오트곤바야르 쪽을 힐끔 돌아보았다.
말은 안 해도 빨리 몸을 피하고 싶어 안달이 난 표정이었다.
"크윽! 물러날 수밖에 없는 건가."
여기 계속 있으면 개죽음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날개 달린 놈들은 지금 흉노의 전력으로는 도저히 공략이 불가능했다.
그들만 따로 뭉쳐 다니면 모를까 날개 달린 놈들이 지나갈 때면 로마군의 사기가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게 훤히 보였다.
완전히 불이 붙은 로마군과 날개 달린 기병들을 상대하는 건 아무리 봐도 무리다.
게다가 우회한 바야투르의 상황은 어떤지 확인조차 불가능했다.
결국 바트자르갈은 피눈물을 머금고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전군! 뒤도 돌아보지 말고 전선을 이탈해라! 우리 씨족들만이라도 살아남아야 초원의 부활을 도모할 수 있다! 모두 퇴각하라!"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흉노 기병들은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평원에서 무적을 자랑한다는 흉노 전사들의 자긍심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날개를 쭉 펼치고 달려오는 아퀼라누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서늘해지는 느낌이다.
맨 처음 날개 달린 기병들과 충돌한 쿠블라이 선우의 씨족이 삽시간에 갈려나가는 건 충격과 공포였다.
그들이 여기서 후퇴하면 바야투르가 이끌고 선회한 별동대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래도 그 누구도 바트자르갈에게 천태선우를 버리는 거냐고 묻지 않았다.
여기서 계속 싸우고 있으면 바트자르갈의 말대로 흉노가 전멸해버릴 수도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자신들만이라도 살아가는 게 초원의 재건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렇게 자신들을 합리화하며 후방의 전사들은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 시네가챠르로 귀환했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 뒷모습이 초원의 왕으로 군림해왔던 폭군의 허무한 몰락을 예감케 하고 있을 뿐이었다.
※※※
"전군 돌파하라! 적장의 목을 취하면 이 전투는 아직 희망이 있다!"
전세가 기우는 와중에도 바야투르의 무위는 군계일학이라 할 만했다.
그가 이끄는 최고의 정예들은 몇 배가 넘는 로마군의 벽을 돌파해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이대로 전진하면 본대가 궤멸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적의 후방으로 침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직접 북제와 동제의 목을 치겠다! 너희는 혼란에 빠질 로마군을 도륙하며 본대와 합류하라."
설령 이 전투를 이기더라도 흉노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는 없다.
그래도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를 죽일 수만 있다면 후일을 도모해볼 수는 있다.
'스파르타쿠스는 알탄이 목숨을 걸어서라도 잡아놓고 있겠지. 지금쯤은 아마 녀석도 죽었겠지만 날 쫓아오기엔 시간이 여의치 않을 터.'
이번 기회를 살리기 위해 그토록 아꼈던 측근의 목숨까지 미끼로 바쳤다.
이제는 더 물러설 곳이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나아가던 바야투르는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돌파하는 것 자체는 괜찮았는데 이상하게도 너무 쉽게 로마군이 뚫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상식적으로 이쯤 됐으면 바야투르의 의도를 로마군이 모를 리가 없다.
자신들의 총대장을 노리고 오는데 이렇게 쉽게 길을 열어주는 게 말이 되는 것인가.
능력이 안 되면 몸으로 막아서라도 길을 막아야 한다.
그게 지금까지 바야투르가 싸워온 로마군의 행동양식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함정인가?'
냉정한 이성을 되찾은 그가 재빠르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주변에 위치한 적군의 전반적인 움직임과 저 멀리 보이는 흉노군의 상황이 대략적으로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든 찰나, 로마군의 움직임이 급변했다.
"제기랄! 처음부터 우릴 고립시킨 뒤 각개격파할 심산이었구나."
아까까지만 해도 허둥지둥 길을 열어주었던 로마군이 자연스럽게 흉노군의 후방과 측면을 차단하며 벽을 만들고 있었다.
졸지에 적의 한가운데에서 포위되어 버린 바야투르는 당혹감보다는 솔직한 감탄을 먼저 느꼈다.
이건 어쩌다가 이렇게 된 게 아니다.
바야투르가 중간에 눈치를 챘음에도 이렇게 포위당한 것을 보면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해 놓은 덫이 틀림없었다.
"처음부터 이런 흐름으로 갈 거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다 이 말인가··· 과연 누구의 머릿속에서 나왔는지 알겠다."
바야투르의 시선이 저 멀리 보이는 총사령관의 깃발 아래를 응시했다.
그곳에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는 두 명.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마 계획대로라는 심정이리라.
"함정에 몰아넣었다고 생각하겠지. 하나, 고작 이따위 벽으로 날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 마라!"
어차피 여기서 군을 물려봐야 빠져나가기는 틀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계속 앞으로 나가 처음 계획대로 적장의 목을 치는 게 최선이다.
완전히 포위되었음에도 굴하지 않고 앞으로 나오는 그의 모습에 멀리서 지켜보던 마르쿠스의 눈도 이채를 띠었다.
"볼수록 대단한 자입니다. 적의 수괴만 아니었다면 어떻게든 포섭할 방법이 없을까 고민해 봤을 텐데 아쉽군요."
카이사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리아나 게르마니아의 부족장 중 저런 인재가 있었다면 나 역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하로 만들었을 걸세.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저자의 죽음이야말로 이 전쟁이 로마의 승리로 끝났음을 알려주는 가장 확실한 증표가 될 테니까."
"그나저나 역시 장인어르신의 혜안은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전개될 거라고 사전에 전부 예측하고 계셨던 겁니까?"
"적장의 수준을 나나 폼페이우스 정도로 생각하고 계획을 짜두었네.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력을 이끌고 승리할 수 있는 방법이란 그리 많지 않으니까. 남은 건 적절하게 역공을 취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 두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의 능력에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탄했다.
커다란 전략의 틀을 구상하는 건 자신이나 폼페이우스가 더 나을 수도 있겠지만, 역시 세세한 전술적 움직임에서는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바야투르의 패인도 결국 그런 이유에서였다.
커다란 전략의 구상은 마르쿠스가.
그렇게 유리한 상황에서 벌어진 회전의 지휘는 카이사르가.
제 아무리 뛰어난 맹장이라도 로마가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전력을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해하에서 홀로 분투하다가 패했던 초패왕이 저런 모습이었을까.'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며 장렬하게 전투에 임하는 바야투르의 모습을 바라보는 마르쿠스의 눈이 일말의 씁쓸함을 머금었다.
차례차례 덮쳐오는 죽음이 바야투르의 정예병들을 덮어내렸다.
초원을 통일하고 대유목민의 제국을 만들려던 그 원대한 야망이, 덧없는 꿈으로 전락하는 광경이었다.
< 230. 대회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