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3. 개선 >
233.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는 로마에서 누구나가 인정하는 최고의 명문가 자제였다.
단순히 가문만 뛰어난 게 아니라 유쾌하면서도 강직하고, 뛰어난 지적 능력을 갖춘 우수한 젊은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유일한 단점은 군사적인 능력이 처진다는 것.
숭무적인 기상이 강한 로마에서 이는 작지 않은 결점이었지만 브루투스의 장점은 단점을 상쇄할 만큼 컸다.
아직 나이가 40살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주요 요직을 경험하며 점점 평판을 불려 나가고 있었다.
귀족파도 민중파도 그를 자신들 쪽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다.
브루투스는 열렬한 공화주의자로 귀족파와 가깝긴 했으나 민중파와 연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인 세르빌리아가 누구던가.
카토의 이부누이이면서 반쯤 공인된 카이사르의 연인이었다.
세르빌리아는 카이사르가 고작 15살이던 시절부터 그와 교제하며 관계를 이어나갔다.
이 연인관계는 서로가 결혼을 한 뒤에도 쭉 이어졌다.
심지어 현재 카이사르의 아내인 칼푸르니아마저 두 사람의 관계를 뻔히 알고 있었다.
이쯤 되면 이제 밀회라고 하기도 곤란하다.
실제로 세르빌리아는 칼푸르니아와 사이가 제법 괜찮았고, 카이사르의 딸인 율리아와도 친밀한 사이였다.
브루투스는 어렸을 적에는 내심 율리아에게 마음이 있기도 했다.
당연히 첫사랑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의 연인인 카이사르와의 관계도 가까웠다.
외삼촌인 카토와 가깝게 지내면서 카이사르와도 친하다.
게다가 키케로나 마르쿠스와도 친분이 있다.
이렇게 진영을 막론하고 로마의 주요 인사들과 두루 친한 그는 확실히 모든 진영에서 탐을 낼 수밖에 없는 인재였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인간관계에 대한 고민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카이사르와 관련된 문제였다.
카이사르는 브루투스가 세르빌리아의 아들이라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유별나게 그를 챙겨왔다.
이 정도가 너무 과해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로 그는 카이사르의 총애를 듬뿍 받아왔다.
브루투스는 어렸을 때는 자신을 신랑감 후보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은 달랐다.
"브루투스의 친아버지는 사실 카이사르가 아닌가?"
"세르빌리아가 결혼한 뒤에도 계속 카이사르와 잤을 텐데 브루투스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조금만 생각해도 분명하지 않을까?"
브루투스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소문을 끊임없이 감당하며 살아야 했다.
그래도 두 사람의 관계는 사적으론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쨌든 카이사르는 지속적으로 브루투스의 편의를 봐주었고, 세르빌리아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신경을 써주었다.
사람인 이상 자신과 어머니에게 수십 년간 변치 않는 호의를 쏟아주는 사람에게 적의를 품긴 어려운 법이다.
그리고 원 역사와는 달리 지금의 브루투스는 내전에서 폼페이우스의 편에 서지 않았다.
본래 열렬한 공화주의자인 그는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폼페이우스의 명분에 동감해 그의 뒤를 따랐다.
사적인 관계보다는 공적인 대의를 더 중시하는 브루투스의 성향이 잘 드러나는 사례였다.
그런 그였어도 현재 시대에서는 섹스투스의 편에 붙지 않았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하나였다.
섹스투스와 카이사르의 내전은 공화정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권력 다툼에 가까웠던 까닭이다.
세르빌리아는 아예 카이사르의 편에 서라고 브루투스를 종용하기까지 했었다.
그녀의 안목대로 섹스투스는 카이사르에게 처절하게 패배했고, 이내 그리스에서 흉노족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승자가 된 카이사르는 누구도 제지할 수 없는 강대한 힘을 가지고 로마로 금의환향했다.
브루투스는 바로 어제 카이사르와 가진 만찬 때문에 지금 더 골머리를 썩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니?"
어머니 세르빌리아가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며 포도주를 홀짝였다.
"그이의 제안은 너에게 전혀 나쁠 게 없는데 뭘 망설이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다른 가문의 사람들은 지금 그 사람의 눈에 띄지 못해서 안달인데."
"제 입장을 아시잖아요. 전 그렇게 쉽게 누군가의 편에 서기 곤란하단 말입니다."
가슴이 답답한 건 브루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이사르는 로마와 귀환해 가족들을 만난 뒤 바로 다음 차례로 세르빌리아를 찾아왔다.
그리고 함께 식사를 하며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에는 당연히 브루투스의 장래 진로에 관한 화제도 포함되었다.
"수도 법무관을 한 뒤에 갈리아에서 총독 대행직을 할 수만 있다면 너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거란다. 갈리아를 야만족들의 소굴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이 아니라 미래를 봐야지."
"그건 저도 알아요. 갈리아는 로마와 가깝기도 하고 실제로 가본 사람들 말로는 토지가 말도 못 하게 비옥하다고 하니까요. 십 년만 지나도 지금과는 위상이 완전히 달라지겠죠."
"그래. 그러니까 거기서 네 영향력을 미리미리 확보해 놔야지. 어차피 이제 법무관을 하든 집정관을 하든 총독으로 부임할 수 있는 속주는 몇 개 되지도 않는데."
"그런데 그게 언제까지고 지속될 리는 없잖아요. 두 사람의 총독 임기가 끝나면 다시 예전처럼 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들을 바라보는 세르빌리아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그 한심하다는 시선에 브루투스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냥 해본 말일 뿐이지 그도 앞으로의 공화정은 지금까지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걸 잘 알았다.
대표적인 게 바로 총독직의 유명무실화였다.
원래 로마는 매해 두 명의 집정관과 여덟 명의 법무관을 속주의 총독으로 파견했다.
예전에는 이 모든 인원들을 총독으로 보내도 될 만큼 자리에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여러 특수 상황을 거치며 점점 총독을 보낼 자리가 사라지게 됐다.
당장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그리고 히스파니아 전 지역은 카이사르가 확보하고 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 전체와 그리스, 소아시아와 시리아는 마르쿠스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상황이 이러니 총독을 보내고 싶어도 보낼 자리가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원로원은 총독직이 아닌 총독 대행이라는 자리를 만들어 이들을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밑으로 보냈다.
당연히 실제 권한은 총독보다 훨씬 작았고, 그마저도 어떤 일을 할 때는 두 사람의 재가가 필요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예전처럼 부유한 지역으로 가고자 하는 분위기가 많이 사라졌다.
가봐야 어차피 부정 축재는 꿈도 꾸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일만 하다가 와야 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임기가 끝나면 속주 총독직이 전부 공백 상태로 돌아가게 될까.
냉정하게 생각해 봤을 때 그럴 일은 없었다.
흉노와의 전쟁은 승리로 마무리됐어도 아직 뒤처리가 완벽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흉노군은 20만 중 고작 8만이 조금 안 되는 수가 살아 돌아갔다고 하는데 사실 8만만 해도 상당히 위협적인 숫자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들이 아예 자신들이 왔던 곳으로 돌아갔다면 모를까 그 전까지는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아직 그리스나 게르마니아는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은 상태라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고 싶어 했다.
설령 두 사람이 물러나려고 해도 여러 지역들에서 절대 놔주지 않을 것이다.
세르빌리아는 물론이고 브루투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얘야, 잘 생각해보렴. 현재 로마의 실세가 누구더냐.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로마에 체류하는 시간보다는 안티오키아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길지.
그리고 듣자 하니 이미 시리아 쪽에 기반을 완전히 다져놓은 것 같더구나. 그러니 로마에 더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카이사르가 될 수밖에 없단다. 당장 물리적인 거리만 봐도 갈리아와 안티오키아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까.
"
"저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역시 귀족파 사람들과의 관계도 있고··· 마르쿠스 님을 만나서 이야기도 들어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은데요."
"마르쿠스가 뒤를 봐준다고 하면 넌 그쪽으로 갈 의향이 있는 거니?"
"그래도 카이사르 님보다는 마르쿠스 님 쪽이 공화정의 가치에 더 충실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은 있습니다."
"또 카토가 너한테 쉰 소리를 늘어놨나 보구나. 그 양반은 질리지도 않는지."
세르빌리아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잔에 남아있는 포도주를 한 번에 비웠다.
그녀는 브루투스와는 달리 이부동생인 카토와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세르빌리아 쪽에서 카토를 일방적으로 조롱하는 사이라 봐야 옳았다.
상식적으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틈만 나면 헐뜯고 비난하는 동생이 기꺼워 보일 리가 없다.
무엇보다 자신의 아들을 완전히 골수 공화주의자로 세뇌하다시피 교육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께서는 그러면 마르쿠스 님보다 카이사르 님의 편에 서는 게 더 좋아 보인다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말은 하지 않았다. 굳이 두 사람 중 한 명을 고르라면 그냥 너에게 더 잘해주는 쪽으로 가는 게 낫겠지. 그런 점에서 본다면 나는 당연히 카이사르 쪽을 추천할 수밖에 없고."
"···어머니야 그렇게 생각하실 수밖에 없죠."
"내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사실이 그렇지 않느냐. 카이사르에게 너는 사랑하는 연인의 아들이자 어렸을 때부터 줄곧 봐온 조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마르쿠스에게 넌 아무리 잘 봐줘 봐야 조금 친한 동생에 지나지 않잖니. 그나마 접점이랄 게 네가 옛날에 그 사람의 아내를 짝사랑했다는 건데 그건 별로 내세울 만한 장점이 되지 않지."
"아니, 율리아 이야기가 왜 여기서······."
율리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브루투스가 어쩔 줄 몰라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세르빌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너 설마 아직도 그 아이를······?"
"아닙니다! 저는 이미 부인이 있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결혼을 해도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가지는 게 로마에서 어디 드문 일이더냐. 만약 네가 아직도 그런 마음이 있다면 조금 문제가 될 수도 있겠구나. 카이사르가 됐든 마르쿠스가 됐든 절대 네 마음을 드러내지 마렴."
"아니라니까요! 물론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 그냥 인간적인 호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남녀 사이에 인간적인 호감은 무슨. 어쨌든 네가 그런 감정을 드러낼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하니 알아서 잘 처신하리라 믿는다. 카이사르는 이번 달 이두스까지 답을 달라고 했으니 현명한 결정을 내리렴."
이두스까지라면 남은 기간은 열흘도 채 되지 않는다.
브루투스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자리를 떠났다.
그는 주섬주섬 몸을 추슬러 이번에 새로 건립된 도서관으로 향했다.
마르쿠스가 주도해 새롭게 건립된 도서관은 로마의 많은 석학들이 애용하는 휴식처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다.
'오늘도 책이나 보면서 머리를 식혀야겠구나.'
브루투스의 요새 일상은 로마의 뜨거운 오후를 도서관에서 피하고, 날이 서늘해질 즈음 집으로 귀가하는 것이었다.
밤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채 돌아오는 게 그가 선호하는 몇 안 되는 취미중 하나였다.
'그러고 보면 로마의 요새 청년들은 문제야. 지식을 쌓고 정신을 수양할 생각을 하기는커녕 오롯이 정복과 지배밖에 머릿속에 없으니.'
그는 로마에 팽배한 숭무적인 분위기를 혐오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너무 무력에만 치중해 다른 여러 가치를 소홀히 하는 게 싫었을 뿐이다.
당장 이번 전쟁만 해도 그렇다.
흉노를 물리치고 로마에 영광을 가져다준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는 지금 로마에서 무소불위의 존재가 됐다.
그들을 따라 전장에서 종군한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로마로 돌아온 병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떠받들어졌다.
브루투스 역시 그런 대우를 해줘야 마땅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승자에 대한 영광만이 조명된 탓에 그리스에서 패전한 이들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라리사 회전은 분명 로마 역사상 독보적인 최악으로 꼽힐 수밖에 없는 패전이었다.
수치스러운 기억이자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였다.
그래서일까.
라리사 회전에 참가해 패배한 병사들은 그 사실조차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유족들은 가족이 용맹하게 싸우다가 전사했다는 걸 자랑이 아닌 수치로 여겼다.
'이런 흐름은 온당치 않다. 어쨌거나 그들도 로마를 위해 싸우며 목숨을 바친 이들인 것을.'
섹스투스의 누이인 폼페이아가 사람들의 등쌀에 못 이겨 그리스로 도망가 버리다시피 로마를 등진 건 충격적인 일이었다.
'과연 그 두 사람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라리사 회전에서 전사한 지휘관들 중에는 그와 친한 이들도 상당수 있었다.
그들 모두가 로마를 위해 기꺼이 심장을 내놓겠다고 전장으로 향한 자랑스러운 친우들이었다.
역사에 남을 대패를 했다고 그 의기마저 무시해서는 안 되지 않은가.
브루투스는 어제 카이사르에게 이 질문을 던지지 않은 걸 뒤늦게 후회했다.
아마 누군가에게 붙게 된다면 이 문제에 관해 그가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내놓는 쪽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의외로 그 해답은 빠르게 나왔다.
브루투스가 고민에 잠긴 지 이틀 아침.
원로원의 서신을 받고 안티오키아를 떠난 마르쿠스가 마침내 브룬디시움에 상륙한 것이다.
< 233. 개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