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4. 개선 >
234.
이번 개선식은 지금까지 로마의 그 어떤 개선식과도 달랐다.
단순히 규모가 크다거나 화려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단순한 규모나 화려함만으로 치면 폼페이우스의 개선식도 그에 못지않았다.
오히려 로마의 국고에 기여한 측면만 보자면 오히려 폼페이우스가 더 큰 공을 세웠다.
이번 전쟁은 어쨌거나 침공해 들어온 적을 격퇴한 것이지 그 지역을 완전히 정복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이 점까지 고려해 보스포루스를 완전히 병합하고 흑토 지대를 로마의 땅으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면 일단 백성들에게 선전할 거리가 필요하다.
전대미문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것도 좋지만, 역시 피부로 느껴지는 이득을 가져다주는 것도 중요한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쟁의 성과는 원로원과 시민들도 모두 만족할 만한 정도는 됐다.
흉노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긴 했어도 딱 한 가지 그들이 도움이 된 점이 있었다.
흉노가 게르마니아 동쪽부터 흑토 지대에 이르는 광활한 영역을 전부 밀어둔 덕분에 점령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던 것이다.
해당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나라들은 이미 흉노의 손에 멸망당한 상태였고, 지배당하던 소수민족들은 로마를 해방자라고 여기며 환영했다.
덕분에 흉노에게 초토화되어 있던 다키아는 순식간에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고, 게르마니아 동부 지역의 재편도 빠르게 이루어지는 중이었다.
이 시대의 로마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마르쿠스는 흑토 지대가 얼마나 풍요로운 땅인지 잘 알았다.
현대에는 체르노젬이라고도 불리는 이 일대는 비옥한 토질을 유지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춰진 곳이다.
조금 과장하면 씨만 뿌려놔도 이탈리아 반도보다는 농사가 더 잘 되는 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지력의 회복력도 어마어마해 아무리 농사를 지어도 토지의 비옥도가 거의 떨어지질 않는다.
국경선을 여기까지 앞당기는 게 부담된다면 그냥 괴뢰정권을 세우는 식으로 식민지를 건설하면 된다.
마르쿠스가 원로원에 올린 보고서에는 이 점이 크게 강조되어 있었다.
보스포루스에서 확보한 수십만의 노예들과 새롭게 얻은 곡창지대.
이 두 가지 요소만 합쳐져도 로마가 이번 전쟁에서 겪은 손실을 만회하고도 한참이나 거스름돈이 남을 것이다.
브루투스 역시 원로원 의원이었기 때문에 이 보고서의 내용을 누구보다 빠르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정확히 어느 정도로 풍족해진다는 겁니까?"
"마르쿠스 총독이 간단히 예시를 들어놨지 않습니까.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토지가 완벽히 개간되고, 흑토 지대에서 정상적으로 식량이 생산된다면 로마 전체 인구가 2배가 더 늘어나도 식량이 풍족할 거라고요."
"이거 참···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 한 일이로군요. 한편으로는 식량이 이렇게 썩어날 정도로 넘쳐나게 되면 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도 듭니다."
"하긴 그 정도면 빈민층만이 아니라 그냥 모든 시민에게 밀을 무상으로 뿌리라는 요구가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이 점은 다 함께 의논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걱정거리를 하나씩 늘어놓으면서도 의원들의 표정은 그저 밝기만 했다.
로마의 인구가 급격히 늘어난 이후 식량문제는 언제나 모두의 골머리를 썩게 했던 문제였다.
그러나 언제부터 그런 걸로 걱정할 필요가 사라졌다.
이것 역시 전적으로 마르쿠스의 공이라는 건 모두가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그가 개발한 신농법과 시비법이 완전히 자리를 잡으면서 식량생산의 효율이 급등했다.
거기에 메소포타미아 유역까지 차지하면서 곡창지대가 확장된 덕도 톡톡히 보았다.
이제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지역을 개간해 여기에 신농법을 적용하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 해도 행복할 지경이었다.
키케로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띠운 채 보고서를 쭉 읽어 내려갔다.
"마르쿠스 총독의 보고서에는 인구가 폭증하는 건 예정된 미래니 지금부터 미리 준비를 해둬야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원로원의 지혜를 모아 새로운 로마에 맞는 제도를 구상해 달라는 말도 있습니다. 마르쿠스 총독이 얼마나 원로원을 중시하는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대목이 아닌가 싶습니다."
"당연하지요. 로마의 토대를 만드는 건 우리 원로원이 아닙니까. 본질을 아는 것이지요."
"그토록 높은 위치에 올라가면 사람이 흔들릴 법도 한데 여전히 초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한 겁니다."
기회만 엿보고 있던 카토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마르쿠스 총독이 없었다면 이미 카이사르가 야욕을 드러냈을 겁니다. 내 장담하지요."
"음··· 그거야 뭐······."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니······."
다수의 의원들이 난색을 표하며 말을 흐리자 카토가 코웃음 치며 언성을 높였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물론 카이사르의 공을 깎아내릴 마음은 없습니다. 그가 이상한 행동을 할 거라는 것도 아니고요."
"어차피 마르쿠스 총독이 건재하고 카이사르보다 나이도 더 어린데 그런 가정을 늘어놓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지금은 경사스러운 개선식을 앞두고 있으니 자제하시지요."
피소의 정중한 만류에 카토도 더 뭐라 하지 못하고 불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브루투스는 논쟁에 끼어들지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카토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고 보았다.
본래 개선식을 하는 장수는 개선식 당일까지 신성경계선을 넘어오면 안 된다.
이건 지금까지 로마인이라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철칙이었다.
그 위대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도, 그리고 삼두의 일원인 폼페이우스도 이 법을 준수했다.
비록 여러 가지 꼼수를 부린 적은 있어도 이 원칙을 대놓고 무시한 이는 지금까지 없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이번에 너무 자연스럽게 로마 시내로 들어왔다.
당연히 개선식을 포기해서가 아니었다.
이번 개선식은 종래와는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준비할 거리가 많아서라는 게 그 이유였다.
지금도 카이사르는 원로원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을 뿐 자신의 관사에서 유유히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카토는 격분해 카이사르를 비토했으나 누구도 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내심 이를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은 있었지만 굳이 트집을 잡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다.
그만큼 카이사르의 위세는 지금 압도적이었고, 그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관례를 입맛에 맞게 변경하고 있었다.
사실 카이사르가 막무가내로 자신의 결정을 밀어붙이는 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실용적인 측면을 내세워 자신의 의견을 뒷받침했다.
이번 개선식 건도 마찬가지였다.
이전과는 달리 행진하는 군사들만 수십만에 달하고 몰려드는 인파도 종래의 몇 배로 추산됐다.
자연히 신경 써야 할 점도 많아졌고 개선장군이 경계선 바깥에서 계속 머무는 것도 여러모로 비효율적이었다.
애초에 세르빌리우스 성벽을 허물어버렸기에 더 이상 신성경계선을 나누는 게 의미가 있냐는 말도 나오는 실정이었다.
그러니 이 낡은 관습을 계속 유지할 필요가 없다는 카이사르의 주장은 타당했다.
논리적으로 그가 옳으니 카토도 그저 카이사르를 전통의 파괴자라는 식으로 비판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아무리 비효율적이라고 해도 사람은 무릇 자신들이 지키고 있던 전통을 파괴하는 데 거부감을 느끼는 법이다.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의 이런 파격적인 복잡한 감상을 느꼈다.
남자답고 호쾌하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동경심이 들기도 했지만, 공화정의 질서를 중시하는 측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었다.
이렇게 계속 가다가는 효율성이라는 가치를 내세워 원로원 주도의 질서를 뒤엎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이미 카이사르가 로마로 들어온 이상 마르쿠스 역시 같은 논리로 신성 경계선 바깥에 머물지 않아도 된다.
자신이 알던 로마가 로마가 아니게 되어가는 느낌은 분명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카토도 그걸 알기 때문에 저렇게 핏대를 세우고 있었던 것이리라.
'아니면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일까.'
나라는 태평성대인데 정작 본인은 점점 더 고민이 많아지니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어머니 세르빌리아는 물론 민중파와 귀족파 모두가 그에게 편을 정하라고 종용하고 있으니 더욱 미칠 지경이었다.
'카이사르 님이 공화정의 핵심 가치를 계속 지켜나갈 거라는 맹세만 해주셔도 고민 없이 그쪽에 붙을 수 있을 텐데.'
하지만 브루투스는 막상 카이사르에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없었다.
만약.
어디까지나 만약의 일이지만 카이사르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려주지 못한다면?
카토의 말대로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왕이 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브루투스는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건립한 유니우스 씨족의 후손이다.
그때가 되면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맞서는 공화정 수호의 상징처럼 떠받들어질 것이다.
지금 찾아온 잠깐의 평화는 순식간에 박살 날 것이고 다시 한번 내전의 시기가 도래할 수도 있다.
마르쿠스와 카이사르가 부딪친다면 그 피해는 흉노 전쟁보다도 훨씬 더 심각할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장인과 사위 관계였으나 정치적인 견해 차이로 가족이 갈라서는 건 로마에서 흔한 일이니 가능성은 충분하다.
아니,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날이 바로 로마 공화정의 종말이다.
마르쿠스와 카이사르가 손을 잡는다면 공화정을 부수고 왕정을 여는 건 손쉬울 테니 말이다.
어느 쪽도 별로 상상하고 싶은 미래는 아니었다.
'일단 마르쿠스 님이 돌아오면 한번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마르쿠스가 브룬디시움에서 출발해 로마로 오고 있다는 소식은 이미 원로원에 당도했다.
로마 시민들은 모두가 영웅의 귀환을 반기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아예 그의 도착을 기다리지 못하고 브룬디시움에까지 내려가서 함께 로마로 돌아오는 행렬이 생길 정도라는 말도 들렸다.
이건 단순한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 마르쿠스가 로마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뒤를 따르는 인파가 점점 늘어났다.
그런데 브루투스는 물론 원로원조차 예상하지 못하던 일이 일어났다.
그대로 로마로 들어올 줄 알았던 마르쿠스가 신성경계선 외곽에 위치한 마르스 평원에 눌러앉은 것이다.
"개선식의 준비는 여기서 해도 충분하니 그때까지는 여기서 머물겠습니다."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는 않았지만 로마의 전통을 중시하겠다는 선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지지자들을 위해 날마다 성문 근처까지 걸음 하는 모습도 보였다.
브루투스는 마르쿠스의 행보에 가슴속에 꽉 막혀 있던 무언가가 단숨에 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원로원 회의에 불참하면서까지 마르쿠스의 얼굴을 보러 나섰다.
예상대로 오늘도 마르쿠스의 얼굴을 보기 위해 시민들이 바글바글 몰려 있었다.
"오오, 저기 온다. 마르쿠스 님!"
"이번에는 로마에 오래 머물러 주십시오!"
"집정관 선거에 나가실 마음은 없으십니까!"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함성 소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르쿠스의 얼굴을 잘 보기 위해 얼굴을 내밀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의 앞길을 막는다거나 하는 무례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든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얼굴에 잔뜩 수심이 드리운 노부인이 기습적으로 행렬에서 튀어나와 마르쿠스의 앞을 가로막고 무릎을 꿇었다.
"마르쿠스 님! 제 이야기를 제발 들어주십시오!"
"어허! 이게 무슨 무례한 짓인가! 당장 나오게!"
"누구는 그러지 못해서 보고만 있는 줄 아는가!"
당연히 사방에서 고성이 쏟아지며 시민들이 당장이라도 노부인을 끌어내려고 움직였다.
마르쿠스가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하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억울한 일이라도 당하셨습니까?"
"제 아들이··· 그리스에서 변을 당했습니다. 로마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군에 지원한 아이였는데··· 시신은 물론이고 변변찮은 유품 하나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노부인이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걸음을 멈추고 묵묵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비록 패전하긴 했어도 그토록 용감히 싸운 아이였는데··· 돌아온 건 로마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는 야유였습니다. 저는 그게 너무 억울해서······."
노부인의 절규에 군중들의 분위기가 일순 숙연해졌다.
지금 이 자리에만 해도 분위기에 휩쓸려 그리스에서 패전한 사람들을 조롱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틈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브루투스는 마르쿠스가 어떤 대답을 할지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았다.
"제가 어떤 말을 드려도 상심한 부인의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을 거라는 걸 압니다. 그래도 아직 병사들의 시신과 유품을 식별하는 작업이 다 끝난 건 아닙니다. 아드님을 가족의 품으로 돌려드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잠시 우물쭈물하던 노부인이 용기를 내서 말을 이었다.
"제 아들의 죽음이 정말로···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헛된 죽음이었습니까? 한심한 싸움으로 로마를 욕되게 한··· 그런 의미 없는 패전에 불과했던 걸까요?"
마르쿠스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자리에 모인 시민들은 침을 삼키고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마르쿠스가 한 차례 사람들을 둘러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이 자리에 모시고 싶은 분이 계셨는데 마침 잘 됐군요. 이번 기회에 이 문제에 관해 확실히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234. 개선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