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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5. 개선 (236/326)


  < 235. 개선 >



  235.


  "이번 전쟁에서 수많은 로마인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여기 노부인의 아들처럼 용감하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음에도 찬사가 아닌 조롱을 받은 이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유족들 가운데는 너무 심한 비난을 이기지 못하고 로마를 뜬 사람들까지 있습니다."


  마르쿠스가 뒤편을 향해 손짓하자 젊은 여성 한 명이 쭈뼛쭈뼛 걸어 나왔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눈을 크게 떴다.


  섹스투스의 누이이자 폼페이우스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


  로마 시민들에게 거의 쫓겨나다시피 그리스로 떠났던 폼페이아 마그나였다.


  여전히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지만 얼굴에는 예전과 달리 떨쳐내지 못한 수심이 한가득 들어앉아 있었다.


  가문의 장남은 내전에서 패해 쫓겨났고 차남은 전쟁에서 사망했다.


  거기에 남편 역시 동생과 함께 전장에서 사망했으니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비극적인 삶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동생과 남편을 한꺼번에 잃었음에도 그녀에게 돌아온 건 일방적인 비난과 멸시였다.


  폭도들에 의해 저택이 난장판으로 변하기도 했고 대놓고 내부까지 들어와 재물을 약탈당한 적도 있었다.


  그녀가 그리스로 떠난 건 단순히 정신적으로 힘들어서가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금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덕분에 시민들의 분노도 많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양식 있는 시민들 중에는 내심 당시 자신들이 너무 과하게 반응한 게 아닐까 찔려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리스에서 목숨을 바친 로마 장병들의 수는 15만에 달합니다. 이는 동맹국의 병사들을 제외한 수치입니다. 여기에는 귀족이나 평민, 부자와 빈자의 구분이 없습니다. 모두가 로마의 승리를 위해 열심히 싸웠으나 전술과 능력의 부재로 패전의 고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들의 죽음이 정말로 무의미했다고 여기는 분들이 계십니까?"


  마르쿠스가 큰소리로 외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몇몇은 휙휙 고개를 저었고, 또 몇몇은 그와 시선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간의 고생이 생각난 폼페이아는 충혈된 눈을 훔치며 코를 훌쩍였다.


  "희생된 장병들의 목숨은 결코 의미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필사적으로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달마티아와 소아시아에서 흉노를 요격할 수 있는 군단을 편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휘관인 섹스투스는 아테네를 수비할 병력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의 적절한 판단으로 그리스의 모든 함대가 제게 인계되었고 이 함대는 흉노의 숨통을 끊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


  군중들 사이에 있던 시민 한 명이 쭈뼛거리며 손을 들었다.


  "제 동생이 그리스에서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남들은 로마에게 패전을 안겨준 무능력한 병사들이라고 조롱했었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동생은 누구보다도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용감한 의지는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계승되었습니다. 이는 먼 옛날 우리 선조들이 한니발에게 승리를 거두었을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로마는 단 한 번도 한니발에게 이기지 못하고 계속 패배했습니다. 하지만 선조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언젠가 찾아올 승리를 위해 기꺼이 자신들의 목숨을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 유지를 이어받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마침내 한니발을 무너뜨리고 카르타고의 목에 비수를 꽂은 것입니다.


  "


  시민들은 어느새 숨을 죽이고 마르쿠스의 연설에 빠져들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에 관한 일화는 로마 시민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었다.


  전쟁의 규모야 이번에 벌어진 흉노전쟁과 비교가 되지 않지만, 확실히 양상 자체는 비슷했다.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하던 로마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반격에 돌아섰고, 결국 적들의 본거지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전쟁을 마무리 짓는다.


  이런 과정만 놓고 보면 거의 판박이라고 해도 좋았다.


  "제가 흉노와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건 그리스에서 로마가 겪은 패배를 면밀히 분석하고 적의 수법을 읽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도 참담하고 목이 메는 패배였지만 결코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를 빌려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목숨을 바쳐 조국 로마를 위해 헌신한 장병들에게 질책 대신 애도를 보내주십시오. 비탄에 빠진 유족들에게 조롱 대신 위로를 건네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


  엄밀히 말해서 섹스투스가 제대로 된 판단을 했다면 흉노와의 전쟁을 더 쉽게 이길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지금 와서 그를 탓하고 싶지 않았다.


  어쨌거나 전쟁은 승리했고, 결과적으로 마르쿠스에게는 지금이 최고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던 건 아니지만 섹스투스의 죽음으로 막대한 이득을 얻게 됐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하다못해 폼페이우스의 가문의 명예만큼은 원상복구 시켜주고 싶었다.


  그리고 불행하게 과부가 된 폼페이아가 다시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생각이었다.


  마르쿠스는 이 사실을 숨기지 않고 공개적으로 사람들 앞에서 선포했다.


  그리스에서 사망한 병사들의 유족들에게는 적절한 보상금이 지급될 것이라는 발표가 잇따랐다.


  누구도 상종하지 않으려고 했던 폼페이아에게도 마르쿠스 자신이 직접 혼처를 구해주겠노라 약속했다.


  아들을 잃고 오열하던 노부인에게는 직접 자신의 상징이 새겨져 있는 깃발을 건네주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군중들은 일제히 박수를 치며 마르쿠스의 말을 따르겠노라 외쳤다.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 지은 지금 자신들끼리 갈라져서 싸울 필요가 없다고 여긴 까닭이다.


  열렬한 환호가 쏟아지는 군중들의 행렬 속에서 브루투스는 가슴속에 얹혀 있던 고민이 깨끗이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았다.


  '역시 저 사람밖에 없다.'


  진정으로 로마를 사랑하고 공화정의 가치를 이어나갈 수 있는 사람을 쭉 찾아왔다.


  카이사르는 하늘이 내린 영웅이었으나 그와는 별개로 브루투스에게는 확신을 주지 못했다.


  사적으로는 가까운 사이였어도 그의 행보를 보고 있으면 마음에 괜한 불안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고민한 끝에 결국 그는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저 사람에게 걸어보자.'


  개인으로서의 출세 속도는 늦어지겠지만 그따위 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앞으로 대격변을 맞을 로마에서 흔들리지 않고 중심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마르쿠스밖에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는 이전에 카이사르에게 들었던 충고를 떠올렸다.


  한 번 결정을 내렸으며 누구보다 빠르게 행동에 옮기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카이사르와 정치적으로 뜻이 맞지는 않았지만, 그의 가르침은 누구보다 충실하게 따르는 이가 브루투스다.


  그는 그대로 마르쿠스가 막사를 친 마르스 평원으로 걸음을 돌렸다.



  ※※※



  시민들에게 한 차례 연설을 하고 돌아온 마르쿠스는 브루투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내심 놀랐다.


  아마 그쪽에서 먼저 접촉해 올 거란 생각을 하긴 했지만 개선식 이후에나 그러지 않을까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에서 수많은 개혁을 추진하고 있을 때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기에 그는 흔쾌히 손님을 받아들였다.


  보관하고 있는 가장 좋은 포도주와 간단한 요기 거리를 내온 뒤 손수 자리를 권했다.


  "오랜만에 보는군. 원로원에서 활약하고 있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네. 얼마 전에 안찰관직을 훌륭히 수행했다지?"


  "마르쿠스 님이 남긴 업적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임기였습니다. 제 능력의 한계를 통감하는 시간만 됐다고 할까요?"


  "무슨 그런 말을. 타협 없는 강직한 일처리였다는 호평이 내 귀에까지 들려왔는데."


  브루투스가 멋쩍게 웃으며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음식을 집어먹었다.


  오랜만에 만나는지라 걱정이 들기도 했었지만 마르쿠스는 예전처럼 브루투스를 친밀하게 대했다.


  그 덕분에 말을 이어가는 브루투스의 목소리에도 긴장의 빛이 눈에 띄게 옅어졌다.


  "생각해 보니 카시우스도 데려왔으면 좋았겠군요. 그쪽도 마르쿠스 님을 보고 싶어 했는데 제가 너무 급하게 온 듯싶습니다."


  "기회야 앞으로도 있으니 차차 만나보면 되겠지. 그러고 보니 공화정을 수호하기 위한 모임은 아직도 가지고 있나?"


  "이제는 더 이상 청년이 아니니 이전처럼 활발하게 모이진 못합니다. 모두가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들이 됐으니까요."


  마르쿠스가 피식 웃었다. 그가 과일을 까먹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도 마음만은 아직 그때 그대로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고 하더군요. 진짜로 젊은 사람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통렬한 일침이로군."


  마르쿠스의 유쾌한 반응에 브루투스도 마주 웃었다.


  그는 마르쿠스가 마음은 청년 시절 그대로라고 한 대답에 주목했다.


  공화정을 수호한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뭉쳤던 그 시절.


  마르쿠스의 신념이 그때와 변한 게 없다는 확신이 재차 들었던 것이다.


  "방금 전 마르쿠스 님이 폼페이아를 대동하고 연설했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 자네가 볼 때는 어땠나?"


  "훌륭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봐주니 고맙군. 그런데 자네는 여기까지 어쩐 일인가? 고작 연설의 감상을 말하려고 여기까지 오지는 않았을 텐데."


  브루투스는 잠시 말없이 포도주만 홀짝이며 마르쿠스의 눈치를 보았다.


  심상치 않은 화제를 꺼내려 한다는 걸 직감한 마르쿠스는 잠자코 그가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브루투스는 이내 희석한 포도주를 연달아 세 잔이나 비운 뒤, 탁자 쪽으로 상체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마르쿠스 님은 카이사르 님과 이야기를 해보셨습니까?"


  "너무 질문이 모호한데 무슨 이야기를 말하는 건가?"


  "공화정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공화정의 미래?"


  마르쿠스가 짐짓 모르는 척 되묻자 브루투스가 순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된다는 눈치였다.


  만약 자신이 헛다리를 짚은 거라면 괜한 사람을 역적 취급하는 거라 보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로마의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 그런 화제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없는 건가 해서······."


  "변할 수밖에 없겠지. 자넨 실감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앞으로 로마는 자네가 알던 로마와는 크게 달라질 걸세. 사회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그리고 기술적으로도 엄청난 발전이 이어질 수밖에 없을 테니."


  "예, 그거야 그렇겠죠. 저도 머리로는 알고 있습니다."


  "아니, 지금 로마에서 앞으로 다가올 변화를 제대로 짐작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네.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주자면 지금까지 로마가 수백 년 동안 이룩한 발전보다 앞으로 이십 년에 걸쳐 이뤄질 발전이 훨씬 더 크게 다가올 걸세. 어느 정도의 변화가 일어날지 예상할 수 있겠나?"


  브루투스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입을 벌리고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러면 공화정은··· 공화정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자네는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공화정은 로마의 근간입니다. 아무리 발전과 변화가 지속된다고 해도 뿌리를 잃어버리면 결국 쇠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무가 아무리 웅장하게 자라도 뿌리가 허술하다면 썩어 문드러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일리가 있는 말이야. 그럼 자네는 역시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이야말로 로마가 앞으로 유지해야 할 체제라고 보는 거로군."


  "물론입니다. 마르쿠스 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제가 너무 안일하게 현실을 보고 있는 걸까요?"


  "글쎄······."


  마르쿠스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천천히.


  "저 먼 동방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하더군. 뿌리가 굳건한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아주 천천히 말이 이어졌다.


  "아무리 싹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게 중요하다고 해도 뿌리를 돌보는 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되겠지."


  원했던 답을 들은 브루투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덧붙인 한마디에 그의 표정이 새까맣게 죽어버렸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모양이지만."


  < 235. 개선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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