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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3. 로마의 미래 (244/326)

  < 243. 로마의 미래 >

  243.

  카이사르는 커다란 밀랍 서판 위에 철필로 글씨를 써 내려가며 입을 열었다.

  "지금까지 여러분들에게 정말 많은 시간을 드렸습니다. 제가 이렇게나 오래 법안 통과를 미룬 건 중요한 사안일수록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보아하니 이제 소모적인 논쟁을 제외하면 더 나올 말도 없어 보이더군요. 해서 오늘을 마지막으로 토론을 끝내고 이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합니다. 반대하는 분이 계시다면 마지막으로 합당한 논거를 가지고 지금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카이사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토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는 암살자들이 오늘 계획을 실행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그토록 따끔하게 말했으니 말도 안 되는 암살 같은 생각은 머릿속에서 지워버렸을 거라 믿었다.

  어제 카시우스가 접촉했을 때도 그는 카토에게 암살에 관한 말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저 카이사르의 속내를 폭로해 그를 정치적으로 고립시키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말만 했을 뿐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카토도 이견이 없었기에 흔쾌히 승낙했다.

  어차피 이 법안이 통과되면 귀족파가 원하는 원로원의 순수성을 지키는 건 불가능해진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원로원의 정족수 확대만큼은 저지해야 했다.

  "제가 이 법안에 반대하는 건 카이사르, 당신의 의도가 매우 수상하기 때문입니다. 원로원은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없이 역할을 수행해 왔습니다. 베르킨게토릭스나 수레나스처럼 로마에 지대한 공헌을 세운 이들을 원로원에 들이는 것까지라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체 어째서 원로원 의원들의 수를 수백 명이나 늘릴 필요가 있단 말입니까."

  "했던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게 만들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충분히 설명을 드렸습니다. 로마는 이제 더 이상 지중해에만 묶여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북쪽으로는 브리타니아에서 남쪽으로는 쿠시와 악숨, 동쪽으로는 옛 파르티아 령과 보스포루스까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광활한 땅이 전부 로마의 영역이란 말입니다. 역사상 이보다 광활한 영토를 자랑한 제국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제가 정복한 영토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단 말입니다.

  "

  선조들과 자신들이 이룩한 어마어마한 업적에 원로원 의원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서렸다.

  카이사르는 그런 의원들의 얼굴을 한 차례 둘러본 뒤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원로원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그건 인정하지요. 하지만 이제 로마의 귀족들만으로 꾸려나가기엔 우리가 다스리는 영토가 너무 광대하고 문화와 제도가 복잡하게 얽혀있습니다. 우리가 이룩한 영광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현지의 다양한 목소리를 원로원으로 들여올 필요가 있단 말입니다."

  "그건 속주 총독이 충분히 해줄 수 있는 사안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일종의 교화책이기도 합니다. 원로원은 로마의 정치를 상징하는 핵심기구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입니다. 여기에 현지의 지배층을 넣어준다면 로마의 관용과 포용력을 널리 알릴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속주 출신들이 대량 들어오면 지금껏 지켜온 원로원의 전통이 흔들릴 수 있단 말입니다. 원로원 의사당 내에서 야만족들의 언어가 들린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수많은 귀족들이 얼마나 불쾌해하겠습니까. 카이사르, 당신은 이런 사람들에 대한 배려책을 생각해두었습니까?"

  "지당한 지적입니다. 당연히 원로원 의석은 라틴어를 완벽히 구사할 수 있고, 로마의 문화에 능통한 이들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로마에 왔으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지요. 이건 이 자리에서 확실히 못을 박아두겠습니다."

  카이사르의 명쾌한 대답에 카토가 더 반박하지 못하고 키케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있지 말고 뭔가 말해보라는 신호였다.

  키케로가 목청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발언권을 요청했다.

  "카이사르, 당신의 말은 듣기에는 다 이치에 맞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이 내건 정책들이 로마의 이익과 부합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언제나 로마에 이득을 안겨주면서 교묘하게 자신이 챙길 수 있는 것들을 많이 가져갔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끼워 맞춘 억측에 불과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장 이번 법안만 해도 카이사르 당신이 가장 큰 이득을 취한다는 건 명백합니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 거기에 게르마니아에서 임명된 의원들이 뭘 알겠습니까.

  남쪽이나 동쪽의 왕조들에서 임명될 의원들은 그래도 이미 문명화가 진행된 국가에서 자란 이들입니다. 각자의 주관이 뚜렷하고 이해관계를 냉철히 살피겠지만 북쪽에서 오는 이들은 다릅니다. 아마 카이사르가 찬성하는 의견은 찬성하고, 반대하는 의견은 반대하겠죠.

  "

  "옳소! 그들은 카이사르가 하자고 하는 대로 하는 거수기가 될 뿐이오."

  귀족파 의원들이 키케로의 의견에 찬동해 소리를 높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여기저기서 고성이 솟아나자 카이사르가 철필로 서탁을 두드리며 외쳤다.

  "조용! 정숙하시오! 정말 어처구니없는 모함이지만 그래도 성실히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지금 키케로의 의견은 심각한 우월감에 젖어 타민족을 무시하는 발언입니다.

  갈리아의 경우 남쪽은 이미 예전부터 로마화가 진행되어 문명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하고 있는 자들이 많습니다.

  특히 현지 부족장들의 자녀 중에는 로마에서 교육받은 이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경향은 브리타니아와 게르마니아까지 확장될 겁니다. 한데 이들이 스스로 판단할 머리가 없이 남의 의견에 따르기만 할 거라고요? 이는 로마의 교육을 무시하는 폭언입니다.

  "

  "로마의 교육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카이사르 당신의 수완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겁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 어린 부족장들의 자제를 구워삶는 것쯤이야 당신에게는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허어··· 그러니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반대를 하겠다는 거로군요. 애초에 제가 그럴 이유가 어디 있다는 겁니까."

  기회를 잡았다고 판단한 카토가 다시 한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왜냐하면 당신은 왕이 되려고 하니까! 카이사르 렉스! 그게 바로 당신이 원하는 바가 아니오."

  "또다시 그 지겨운 중상모략입니까, 카토. 나는 지금까지 그런 우스꽝스러운 아첨을 하는 이들을 언제나 만류하고 다녔습니다. 우리 로마에 왕은 필요치 않습니다. 그건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연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들의 위업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행위니까요."

  장내가 웅성거리는 가운데 트레보니우스가 카토의 곁에 서서 외쳤다.

  "거짓말입니다! 카이사르가 왕위에 욕심이 있다는 심증은 이미 차고 넘칠 정도로 많습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예시를 들어보죠."

  그가 호흡을 고르는 척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계획대로 지금 의사당에는 릭토르들이 없었다.

  오늘의 회의를 주재해야 할 집정관 루키우스는 지금쯤 콜로세움에서 발목이 잡혀 있을 터.

  다른 법무관들도 긴급 법정을 소집했기 때문에 자리에 오는 게 한참이나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즉, 원로원에서 무기를 가지고 있는 이들은 스무 명이 넘는 암살자들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호를 보낼 준비를 마친 그가 격정적으로 소리쳤다.

  "저걸 보십시오! 카이사르는 신발부터 다른 원로원 의원들과 구별되는 장화를 신고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보랏빛이 감도는 장화만을 신었는데 이는 알다시피 왕을 상징하는 색이기도 합니다. 카이사르는 직접 드러내진 못하니 이런 식으로 간접적으로나마 자신의 욕구를 드러내고 다녔던 겁니다."

  "태어나서 들었던 말 중 가장 멍청하고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트레보니우스의 말대로 보랏빛이 감도는 장화를 신고 다닌다고 왕이 되려는 야심을 감추고 있다면, 로마의 역대 모든 최고 신관들은 왕이 되려는 야심가여야겠군요."

  "그것 하나만이 아닙니다! 당신은 지속적으로 원로원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자신의 세력을 불리려 했습니다. 로마의 이득을 위해서 그랬다고요? 웃기지 마십시오. 당장 당신 이상으로 로마에 공헌한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는 원로원의 권위를 배려하면서 일을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그러지 않았지요. 어째서? 원로원을 해체하는 게 궁극적인 목표였으니까!"

  회의장의 분위기가 눈에 띄게 어수선해졌다.

  귀족파가 지금까지 카이사르에게 이렇게 대놓고 비난을 퍼부은 적은 없었다.

  무슨 근거라도 있으면 모를까 지금 그들이 하는 말은 오롯이 추측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런 무모한 정치공세가 카이사르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줄 수 있을 리가 없다.

  카이사르의 얼굴에 떠오른 짜증 섞인 표정이 그 사실을 방증했다.

  "소설을 쓰고 싶다면 집에 가서 쓰십시오. 더 이상 헛소리를 늘어놓는다면 의사 진행을 방해하겠다는 뜻으로 간주하고 제게 주어진 권한으로 당신을 퇴장시키겠습니다."

  이쯤 하면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는 게 보통이었지만 오늘의 트레보니우스는 달랐다.

  그는 핏기가 가신 창백한 얼굴로 모의를 끝마친 동료들과 시선을 교환했다.

  데키무스와 카시우스 역시 긴장한 티가 역력한 얼굴로 조금씩 앞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다른 이들이 봤다면 의심스러운 그들의 행동을 의아하게 여겼을 테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계획대로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부채꼴 형태로 둘러싸게 자리를 잡았다.

  모두가 위치에 섰음을 확인한 카시우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모두 보십시오! 대체 언제부터 집정관도 아닌 자가 자신의 마음대로 원로원 의원을 회의 중에 내쫓을 수 있었단 말입니까!

  여러분들 모두 카이사르가 얼마나 무례하고 거만한 인간인지 보셨을 겁니다. 지금까지 모두가 했던 말 중 틀린 구석은 하나도 없습니다.

  카이사르는 언제나 은연중 자신은 다른 의원들과는 다르다는 의식을 드러냈고 이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입니다.

  그는 왕이 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로마는! 그 어떤 왕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일어나는 일은 불법적인 살인이 아닌 자유를 위한 항거입니다.

  "

  그가 토가 자락에 숨긴 단도를 꺼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다른 암살자들도 일제히 무기를 뽑아 들고 카이사르를 포위했다.

  키케로는 그들에게 합류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당연히 의사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직감한 평의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러나 무기를 들고 있는 암살자들을 제지할 엄두를 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카토는 귀신에 홀린 듯한 표정으로 키케로에게 달려와 그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당신들 미쳤나? 원로원 회의장에 칼을 가지고 들어와? 이 신성한 공간을 모욕할 셈인가?"

  "······."

  "심지어 몰래 숨겨 들어온 칼로 암살을 한다니! 이건 공화정을 위한 일이 아니야! 공화정을 더럽히는 최악의 범죄라고!"

  카토의 힐난에도 암살자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천천히 카이사르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사실 그들의 귀에 이미 카토의 말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이라고 이게 로마와 원로원의 전통을 해치는 행위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더 큰 대의를 위해 작은 더러움은 감수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죄책감을 다 떨쳐내진 못했다.

  그 정도로 원로원 회의장에서 칼을 꺼내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카시우스는 카이사르를 향해 단검을 겨누었다.

  카토와 브루투스가 손에 땀을 쥐며 저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무도한 행위를 지켜보았다.

  뒤편에 앉아 있는 마르쿠스만이 아무런 표정의 미동도 없이 사태를 주시하는 중이었다.

  "어리석은 짓을 하는군."

  놀랍게도 카이사르의 신색은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순간 가슴이 철렁해진 암살자들은 눈에 띄게 당황해하며 서로를 둘러보았다.

  데키무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동료들을 진정시켰다.

  "허세다! 속지 마라! 지금이 압제자를 죽일 최고의 기회다!"

  카이사르는 그런 데키무스를 빤히 바라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가. 데키무스 브루투스, 자네마저 이 바보 같은 계획에 가담해 있던 건가."

  "바보 같은 계획이라니. 이는 로마의 해방을 위한······."

  마치 친척이 방문하기라도 한 듯 평온한 카이사르의 태도에 암살자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째서 저렇게 태연하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허세라고 하기엔 너무 꺼림칙했다.

  "상관없다! 빠르게 죽이고 포로 로마노로 가서 연설을······."

  트레보니우스의 다급한 외침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암살자들이 발걸음을 채 떼기도 전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박차고 수백 명의 병사들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고위 정무관이 대동하고 다니는 릭토르가 아니었다.

  갑옷과 활로 무장한 정식 군인들이었다.

  병사들은 순간 몸이 굳어버린 암살자들을 향해 활을 겨누었다.

  "무기를 버려라!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는 즉시 활을 쏘겠다."

  정예병들의 실력과 암살자들과의 거리를 고려하면 실수로라도 활을 잘못 맞출 일은 없었다.

  "서, 설마 이 모든 계획이 이미 새어나가 있었던 건가······."

  카시우스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그토록 비밀 엄수를 했는데 대체 어째서라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감돌았다.

  카이사르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암살자들이 간신히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소리로 중얼거렸다.

  "돌발사태가 일어나도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하더니 이런 뜻이었나 보군."

  "······?"

  카이사르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한 카시우스와 데키무스는 멍하니 눈을 깜빡일 뿐이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한 가지 있었다.

  누군가가 암살 계획을 알고 돌발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다고 카이사르에게 주의를 준 것이다.

  암살을 모의한 이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이 자리에 있었다.

  그들 중 배신자가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후보는 단 한 명.

  카시우스가 두 눈을 부릅뜨고 뒤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브루투스를 향해 소리쳤다.

  "배신했구나! 브루투스!"

  브루투스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떡 벌렸다.

  "···배신이라니?"

  < 243. 로마의 미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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