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 로마의 미래 >
248.
카시우스의 비명소리에 모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바닷물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고?"
"배에 구멍이라도 뚫렸나?"
트레보니우스와 데키무스도 미친 듯이 손으로 땅바닥을 어루만져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손바닥 가득 느껴지는 차가운 바닷물의 감촉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어째서 물이 들어오고 있는 거야? 배가 암초에라도 부딪쳤나?"
"그러고 보니 아까 무슨 큰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허겁지겁 초에 불을 붙인 카시우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으로 확인해 보니 이미 한쪽 구석에서 계속해서 물이 밀려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단 위로 올라가자. 우리가 탄 배 말고도 한 척이 더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로 옮겨 타면 되겠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데키무스는 아직 완전히 공황에 빠지진 않았다.
전장에서 있으면 사소한 사고나 문제는 언제나 일어나는 법.
그때마다 혼란에 빠진다면 어떻게 군단장을 할 수 있었겠는가.
냉정을 되찾은 그는 동료들을 통솔해 배의 갑판 위로 올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조차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이런 개 같은! 위로 올라가는 통로가 잠겨 있어!"
"뭐라고? 그럴 리가!"
가장 앞장서서 올라간 동료들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자 아래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초조함이 감돌았다.
이미 바닷물은 발목이 잠길 정도로 차오르는 중이었다.
여기에 계속 있으면 진짜로 위험할지도 모른다.
주변을 둘러보던 데키무스가 포도주를 담아두었던 통을 가져와 위쪽에 있는 의원들에게 넘겨주었다.
"막혀 있다면 부숴! 어차피 나무로 만든 문이니까 충분히 부술 수 있어!"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의원들이 포도주 통의 뚜껑이나 의자 등 단단한 물체를 손에 들고 통로를 막은 문을 내려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열려라! 제발 좀 열려!"
쾅쾅쾅!
다급한 상황일수록 사람들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을 보여줄 때가 있다.
지금이 딱 그랬다.
여러 가지 가구로 미친 듯이 문을 내려찍은 암살자들은 기어코 입구를 막고 있던 문의 절반쯤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조금만 더 힘을 주자! 이거만 부수면 위로 올라갈 수 있어!"
카시우스가 젖 먹던 힘까지 끌어내 발길질을 해댔다.
이미 위엄을 지킨답시고 배에서도 두르고 다니던 토가는 벗어둔 지 오래였다.
갑작스레 힘을 써서 그런지 여기저기 긁힌 곳도 있었고 손가락에서도 피가 흘렀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이런 곳에서 죽을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모두가 힘을 쏟아부었다.
콰자작!
육중한 무언가가 완전히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모두의 입가에 안도의 미소가 걸린 것도 그쯤이었다.
"모두 올라가자! 빨리 옆의 배로 옮겨 타야 한다!"
데키무스가 소리 지르지 않아도 이미 암살자들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배 위로 달려 나가는 중이었다.
사고가 있긴 했어도 잘 해결됐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데키무스는 가슴속을 파고드는 찝찝한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 어째서 병사들이 내려와 보지 않은 거지? 암초에 부딪쳤다면 상황을 설명하러 왔어야 할 텐데. 배의 밑에서 물이 새는 줄 몰랐던 건가?'
뭔가가 이상했다.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는 걸 모를 리도 없을뿐더러 문을 부수려고 난동을 부리는 소리가 위에까지 들리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다.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그건 카이사르의 수법이 아니야.'
순간 머릿속에 끔찍한 가능성이 하나 떠올랐지만 이내 머리를 털어 부정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하려고는 했어도 그는 오랜 시절 카이사르의 밑에서 그를 관찰해왔다.
카이사르는 적어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상대방이 상상도 하지 못한 전략으로 허를 찌른 적은 많아도, 자신이 한 말을 뒤집는 식으로 뒤통수를 후려친 적은 한 번도 없다.
카이사르가 살려주겠다고 했다면 살려주는 것이다.
갈리아나 게르마니아 야만족들과도 했던 약속을 지킨 그가 로마 시민과 한 약속을 어길 리가 없다.
하지만 불안한 예감일수록 적중률이 높기 마련이다.
위로 올라온 암살자들은 큰 소리로 병사들을 부르며 안쪽의 상황을 알렸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배의 밑바닥에 구멍이 뚫렸다!"
"지금 느긋하게 있을 때가 아니다! 당장 다른 배로 식량과 물을 옮기고 갈아타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사람들은 때아닌 적막에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갑판 위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경계를 서고 있어야 할 병사들도, 배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확인해야 할 항해사들도 보이지 않았다.
"뭐야, 다들 자고 있는 건가?"
"그러니까 배가 암초에 부딪쳤는데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거였나 보군. 허참 군기가 이렇게 빠져서야······."
카시우스는 맥빠진 목소리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일말의 불안감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배 위에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 게 말이 되는가.
합리적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도 없기 때문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라고 보는 게 맞다.
그럼 왜 병사들이 자신들끼리 배를 비운 것일까?
암살자들이 밑에서 자고 있다는 걸 몰라서?
아니면 너무 긴급 상황이라 그만 깜빡 잊었기 때문에?
어느 쪽도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위로 올라오는 문이 잠겨 있었다는 사실도 이 불안한 추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나오는 대답은 하나였다.
이건 계획적인 움직임이었다.
'카이사르··· 설마 이렇게 우리를 제거하려고······.'
시간이 조금 흐르자 카시우스와 데키무스 외에도 현 상황을 파악한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이들이 사태를 늦게 깨달은 건 딱히 지성이 딸려서나 이성적이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사실 누구나 다 머리 한쪽 구석에 최악의 결말을 그려보고는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 가정이 사실로 드러나는 게 두려웠기에 애써서 외면하고 있었을 뿐.
그러나 잔혹한 현실이 눈앞에 들이닥치면 이제 더 이상 부정할 수조차 없다.
"아무도··· 없다. 구석구석을 샅샅이 뒤져봤지만,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아."
트레보니우스의 한탄에 카시우스는 피가 나올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며 눈을 감았다.
"안개가 자욱해 확인하기 어렵지만··· 아마 우리 뒤를 따라오던 배에 옮겨 타고 자리를 피한 거겠죠."
"카이사르 그놈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것인가?"
"이상합니다. 제가 아는 카이사르는 절대로 이렇게 피도 눈물도 없는 계획을 세울 이가 아닌데······."
완전히 얼이 빠진 데키무스의 넋두리에 트레보니우스의 얼굴이 휴지조각마냥 일그러졌다.
"카이사르가 아니라면 그럼 누가 이딴 짓을 기획했다는 말인가!"
"그··· 모르죠. 그에게 과잉충성을 바치는 누군가가 뒤에서 사주를 했을지도. 하여튼 이건 카이사르의 수법이 아닙니다. 뭔가 이상해요!"
데키무스가 지금까지 어느 정도 이성을 유지할 수 있던 건 그가 카이사르를 잘 알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절대로 같은 로마인을 합당한 이유 없이 죽이지 않는다.
그 대원칙을 깔고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은 것이다.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른 암살자들은 카이사르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악을 쓰고 있었지만 데키무스는 달랐다.
하지만 생각이 짧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굳이 카이사르가 아니더라도 그를 따르는 이들이 뭔가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건 염두에 뒀어야 했다.
'역시 카이사르 본인이 그런 생각이 없더라도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무리가 있는 게 확실하다. 나는 잘못되지 않았어.'
빠지지직 콰앙!
물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차오르자 간신히 버티고 있던 배가 굉음을 내며 한쪽으로 기울었다.
"으아아아! 유피테르시여!"
"넵튠이시여 저 간악한 카이사르의 손에서 제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암살자들이 갈라진 목소리로 신들을 찾으며 흐느껴 통곡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사방이 탁 트인 망망대해.
도움의 손길은 전혀 없고 배는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는 중이다.
그나마 아직 완전히 희망을 놓지 않은 이들은 바다 위에서 둥둥 뜰 만한 물건을 찾았다.
그러나 그런 물건으로 구사일생하는 건 신화에나 등장할 법한 이야기다.
더욱이 지금 이 일대는 뿌옇게 안개가 낀 상태라 고기잡이 배조차 얼씬거리지 않는다.
병사들은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거라고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조차 의심스럽다.
아마 십중팔구 지금 이 배가 있는 위치는 내륙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바다 한가운데일 것이다.
모든 게 처음부터 완벽히 계획된 짜고 치는 도박판이었던 것이다.
"이 정도의 일을 벌일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이는 최소로 잡아도 법무관 이상······."
이제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범인을 추려 나가던 카시우스의 몸이 일순간 우뚝 멈췄다.
'잠깐. 그렇다면 포도주도 우리를 취하게 만들려는 계획의 일환이었던 건가.'
확실히 포도주의 양이 너무 많다 싶긴 했다.
모두가 포도주를 마시고 곯아떨어진 상황이 아니었다면 병사들이 배를 떠나는 걸 사전에 눈치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듣기로 이 포도주를 반입하게 해준 사람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카시우스의 추론은 그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배가 두 쪽으로 갈라지며 대다수의 사람들이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갔기 때문이다.
잔혹한 바다는 그 사람이 고귀한 귀족 출신이든 평민 출신이든 개의치 않고 가차 없이 집어삼켰다.
제아무리 대단한 권세를 누린 이들일지라도 대자연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할 뿐이다.
거칠게 일렁이는 지중해 파도는 스무 명이 넘는 귀족파의 거두를 쓸어 삼키고도 언제나와 같았다.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며 위로 떠오르려고 하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잔혹하게 내리꽂히며 저 아래로 매다꽂았다.
거칠게 날뛰던 바다는 몇 시간 뒤 다시 잠잠해졌지만, 수면 위에는 그 누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잠잠하게 일렁이는 바다 위에 보이는 배의 잔해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짐작하게 해줄 따름이었다.
※※※
추방자들을 호송하던 배가 난파됐다는 사실은 비교적 빠르게 로마에 당도했다.
가까스로 몸을 빼서 로마에 도착한 병사들이 여럿 있었던 덕분이다.
그들의 증언은 한결같았다.
"추방자들이 배를 탈취해 이집트가 아닌 그리스 쪽으로 도주하려 했습니다. 해서 배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던 중 배에 구멍이 뚫렸고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저희는 옆에 있던 배로 옮겨 탔지만 추방자들의 안위까지는 살피지 못했습니다."
"배 안에는 추방자들이 매수한 병사들도 여럿 섞여 있었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작정하고 탈출을 생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요?"
실제로 로마까지 귀환한 병사들의 수는 절반이 채 되지 않았다.
이 소식이 퍼지자 시민들은 격분했고 안 그래도 쪼그라들고 있던 귀족파는 완전히 결정타를 맞게 됐다.
사형이 아닌 국외추방이라는 관대한 처분을 내렸음에도 도주하려 했다는 건 선을 넘은 행동이었다.
불똥은 암살자들만이 아닌 반카이사르파 전체에까지 튀었다.
시민들 모두가 카이사르의 성명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평소보다도 더 신중히 움직여야 할 때라는 걸 판단한 그는 로마의 미래가 중대한 기로에 놓여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런 카이사르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마르쿠스가 그의 관저로 찾아왔다.
< 248. 로마의 미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