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9. 로마의 미래 >
249.
"이번 일은 자네도 알고 있었나?"
카이사르는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바로 본론을 꺼냈다.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마르쿠스가 한 치의 미동도 없이 여유롭게 차를 따라 카이사르에게 건넸다.
잔을 받아든 그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이제 와서 모른 척을 할 이유는 없지 않나. 어떻게 된 건가? 난 그렇게까지 할 거란 말은 듣지 못했는데."
"이번에 있던 사고에 대한 걸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사고?"
"예. 불행한 사고였다는 말이 파다하더군요. 얌전히 추방을 받아들였으면 됐을 걸 어째서 그런 그릇된 선택을 벌였는지."
마르쿠스의 하고 있는 말은 현재 대다수의 로마 시민들이 느끼고 있는 심경이었다.
권세 있는 파트라키들이 떼죽음을 당한 대사건이었음에도 누구도 동정을 표하지 않았다.
로마의 최고 영웅인 카이사르를 원로원 회의장에서 암살하려다가 현행범으로 체포.
그 이후에도 병사들을 매수해 호송선을 탈취해 도망치려 했다는 사실까지 더해지니 욕을 바가지로 먹는 게 당연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게 사고가 아니라는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사실 자네도 딱히 숨길 생각은 없지 않았나. 내 앞에서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딱히 드러내려고 한건 아니고 그렇다고 감추려고 한 것도 아닙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저 역시 이번 계획에서는 방관자에 가까웠으니까요."
"자네가 주도하지 않았다는 말은 저번에도 들었네. 그런데 정말로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고, 보고도 듣지 않았다는 말인가?"
"암살자들 중에는 잘 아는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정에 이끌려서 봐주게 되는 것도, 그럴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냉정하게 쳐내는 것도 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카시우스는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고 다른 이들도 모두 여러 번 얼굴을 봤던 익숙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처리를 깔끔하게 옥타비우스의 손에 일임한 것이다.
물론 옥타비우스의 수완을 점검해 보려는 의도도 있었다.
마르쿠스의 속내를 짐작한 카이사르가 혀를 내둘렀다.
"그러면 지금 로마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론몰이도 전부 그 어린 친구의 작품이라는 소리로군."
"예. 개인적으로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운 일처리라고 생각합니다."
"기대 이상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이제 막 성인이 됐다고 하지 않았나?"
"맞습니다. 그래서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 인재죠."
카이사르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뛰어난 판단력과 이성을 갖추고 있다고 내심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카이사르도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때는 여러모로 미숙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과거의 자신과 견주어 봐도 옥타비우스가 별로 밀릴 것 같진 않아 보였다.
오히려 더 위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을까 싶었다.
카이사르가 주목한 건 무엇보다도 옥타비우스의 냉철한 결단력이었다.
보통 그 나이대의 청년이라면 선택권이 오롯이 자신에게 있을 때 망설일 수밖에 없다.
머리로는 다 정리해야 한다는 걸 알지 몰라도 그걸 막상 실행하긴 꺼려지기 마련이다.
만약 잘못된다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배경이 그리 만만하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카시우스는 옥타비우스가 신세를 지고 있는 마르쿠스의 친구였고, 데키무스는 카이사르의 먼 친척이었다.
아무리 살인미수범들이라고 해도 이제 막 성인이 된 평민 출신의 청년이 호락호락하게 볼 만한 이들은 절대 아니었다.
그래도 옥타비우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깔끔하게 그들을 처리해버렸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치기어린 행동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기엔 전후의 일처리나 여론의 조성이 너무나도 부드럽게 치러졌다.
일을 주관한 게 옥타비우스가 아닌 마르쿠스일 거라고 느꼈던 게 바로 그 증거였다.
"뒤처리는 어떻게 했나? 이런 일에서 실행 이상으로 중요한 게 바로 사후처리인데. 만약 꼬리가 밟히기라도 한다면 이건 심각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알고 있겠지?"
"그것도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끝내놓았더군요."
"어떻게? 병사들의 입은 어떤 식으로 막을 거라고 하던가."
"로마로 귀환시킨 소수의 병사들은 이미 예전부터 수족으로 부리던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소아시아 속주에서 안락한 삶을 보낼 예정이니 로마에서 찾긴 힘들 겁니다.
나머지 병사들은 이미 다른 지역에서 토지를 받아 지내는 중입니다. 물론 신분 세탁까지 완전히 끝마쳤으니 찾아내기란 불가능할 거고요.
무엇보다 로마로 귀환한 심복들을 제외한 병사들은 일을 사주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귀족파와 원한 관계가 있는 자들이 뒤에 있다고 알고 있을 겁니다.
"
이야기를 들을수록 카이사르는 옥타비우스라는 청년이 탐이 났다.
원 역사에서 옥타비우스가 로마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 건 그가 서른을 막 넘겼을 무렵이었다.
군사적인 재능은 전무한 대신 정치력만큼은 이미 그 전부터 카이사르 이상으로 완성되어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이다.
거기에 지금의 옥타비우스는 훨씬 어렸을 때부터 마르쿠스의 바로 옆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완성된 기량을 갖추는 게 원 역사보다도 더 빠를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옵티마테스를 완전히 찍어내면 자네에게도 부담이 가지 않을까? 세간에서의 자네 인식은 귀족파의 수장인데."
"전 이번 사건과 철저하게 거리를 뒀으니까요. 그리고 이번 일을 구실로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었던 옵티마테스를 개혁하려고 합니다. 누구도 반대하지 못할 거고 오히려 살아남기 위해서 찬성할 수밖에 없을 테죠. 어차피 이제 아무런 힘도 없는 그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긴 사실 시민들은 이제 자네를 옵티마테스보다는 나와 더 가까운 사이라고 인식하고 있을 테니···별 문제는 없을 것 같군. 그러면 안티오키아로는 언제 돌아갈 생각인가?"
"당분간은 눌러앉아 있을 계획입니다. 마침 적당한 핑계거리가 생겼으니 최대한 활용해야죠."
마르쿠스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잘 우려낸 차의 향이 오늘따라 더욱 향긋하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안티오키아로 갈 마음이 없었던 게로군."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는 건 무한 서류처리 작업인데 당연히 최대한 늦게 돌아가고 싶은 법이죠."
마르쿠스의 대답에 카이사르가 자신의 옆에 놓인 엄청난 양의 서류더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르쿠스는 카이사르의 얼굴에 떠오른 쓴웃음을 짐짓 못본 채 하며 차를 홀짝거렸다.
카이사르의 지적대로 마르쿠스는 바로 안티오키아로 돌아갈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돌아갈 거라는 티를 계속 내고 다녔던 건 암살자들에게 부담감을 줘서 그들을 움직이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마침 그리스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마르쿠스가 가야한다는 좋은 핑계가 있었기 때문에 암살자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그리스 쪽은 이미 한참 전에 조치를 끝내놓았지만 암살자들이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옥타비우스가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면 안티오키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겠지만, 마르쿠스는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과 한 치도 다를 바 없이 나왔다.
"최근 들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 율리아를 자네와 결혼시킨 거라는 확신이 점점 강해지고 있네."
"저도 율리아와 결혼한 게 인생 최고의 행운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네와 나만이 아니라 로마에게도 최고의 행운이겠지. 덕분에 때를 놓치지 않고 개혁에 착수할 수 있겠어."
"그럼 믿고 맡기겠습니다. 이다음의 개혁은 장인어르신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니까요."
"앞으로 수백 년을 버틸 토대를 마련하는 작업이라···부담스러우면서도 더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지. 지켜보고 있게. 실망할 일은 없을 테니."
카이사르가 새로운 잔에 포도주를 따르며 마르쿠스에게 건넸다.
마르쿠스가 받아든 잔을 하늘 위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왕 이렇게 됐으니 최고 신관께서 축복의 말씀을 내려주시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카이사르가 웃으며 잔을 부딪쳐 건배했다.
"로마의 미래를 위해."
마르쿠스가 마주 웃으며 답했다.
"로마의 미래를 위해."
※※※
마르쿠스가 카이사르와 앞으로의 일로 열띤 이야기를 주고받는 동안, 옥타비우스는 기다리고 있던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슬슬 방문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던 찰나입니다."
옥타비우스의 시원시원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환영을 받는 대상의 얼굴은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어 보였다.
완전히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맞은편에 앉은 사내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줄곧 땅이 꺼져라 한숨만 토해는 중이었다.
"브루투스 님, 아직도 죄책감에 시달리고 계신 겁니까?"
"···내가 어떻게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있겠나."
"마땅히 하셔야 할 일을 한 겁니다. 그 이후의 일은 브루투스 님의 잘못이 아니고, 책임질 이유도 없지요."
"나도 알고 있네. 하지만···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렇게 딱 잘라 나뉘는 게 아니지 않은가."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워하는 브루투스와는 달리 옥타비우스의 신색은 차분하기만 했다.
스무 살 이상의 나이 차이와 신분의 격차가 무색할 정도로 두 사람 사이의 주도권은 옥타비우스에게 있는 게 훤히 보였다.
"분명히 저번에 오셨을 때는 어떤 일이 있어도 후회 따위는 하지 않을 거라고 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때는 그랬지. 그때는 국외추방만으로 끝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로마의 미래를 위해서는···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했네. 그 정도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이라고 볼 수 있었네. 하지만 그런 사고가 일어날 줄이야······."
"불행한 사고였습니다. 아니, 사실 사고가 아니라 그들의 과욕이 불러온 참사였죠. 그런 일로 브루투스 님이 심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브루투스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옥타비우스의 말은 언제나 이치에 맞고 객관적이었다.
이번 일은 결코 브루투스의 책임이 아니었다.
대체 어떻게 그토록 어리석은 결정을 내려 생명만이 아니라 명예까지 시궁창에 내다버릴 수 있단 말인가.
브루투스는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쯤 되면 공화정의 미래를 위해 칼을 들었다는 그들의 말도 의심이 가네. 진심으로 로마와 공화정의 안위를 염려했던 이는 나밖에 없었고, 그들은 그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공화정의 미래를 구실로 삼은 게 아니었을까? 이런 의심까지 든다네."
"의심이 아니라 사실입니다. 설마 정말로 그들이 어떤 위대한 신념을 가슴에 품고 일을 저질렀다고 여기십니까?
그럴리가요. 정말로 그랬다면 어째서 국외추방으로 끝내주겠다는 제안에 덥석 응했을까요. 정말로 굳은 결의가 있었다면 목숨을 던져 저항했을 겁니다.
실제로 과거 우리의 선조들과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런 위인들과 비교를 해보면 명백합니다. 암살자들에게 신념 따위는 없었어요.
"
"아직도 믿기지가 않네. 그토록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이들인데······."
"브루투스 님도 사실은 알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저에게 찾아와서 진심을 털어놓으신 것이고요. 그날 브루투스 님은 하셔야 할 일을 하신 겁니다. 그건 결코 배신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로마의 미래를 위한 숭고한 결정이었다고 봐야겠죠."
브루투스는 옥타비우스의 인자한 눈빛을 차마 마주 받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3월의 이두스.
그 날의 충격적인 진실이 마침내 브루투스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249. 로마의 미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