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0. 변혁 >
250.
"그때 나는 해야 할 일을 했다고 생각했네. 아무리 친한 친우들이라고 해도 그릇된 행동을 방조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렇게 믿었단 말일세. 배신 따위가 아니다. 나는 옳은 일을 하고 있는 거라고 수백 번도 더 넘게 되뇌었단 말일세."
"맞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렇게 몇 번이나 말씀드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브루투스 님도 그렇게 믿고 계시니 그 날 그렇게 실감 나는 연기를 하신 게 아닌가요. 저는 그 현장에 있지 않아서 모르지만 마르쿠스 님이 말씀하시길 본인마저 깜빡 속을 정도였다고 하시더군요."
브루투스의 얼굴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그들은 내가 배신했다고 바로 눈치챈 것 같았네. 나는 잡아떼긴 했지만 내 밀고가 그들을 파멸로 몰아갔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지. 그게 사실이니까."
"보통은 말입니다."
옥타비우스가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간식거리를 풀어놓으며 말했다.
"중대한 범죄행위를 고발한 걸 배신이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치하받을 만한 일이죠."
"하지만 카시우스는 가족인 날 믿고 자신의 계획을 이야기한 거였네. 난 그걸··· 자네에게 말한 것이고."
"실로 영웅적인 행동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절친한 사이라고 해도 그릇된 길로 간다면 제지할 수밖에 없죠. 과연 브루투스의 피를 이은 분다운 결단이었습니다."
옥타비우스의 연달은 극찬에 브루투스의 다 죽어가던 얼굴에 약간이나마 생기가 돌아왔다.
"카토 외삼촌과 다른 사람들은 내가 억울하게 배신자로 몰렸다면서 분개하고 있더군. 아무리 암살이 옳지 못하다고 해도 내가 나서서 카이사르 님에게 이익이 되는 행동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 모양이야."
"굳이 그걸 밝힐 이유는 없겠죠. 지금 암살자들에 대한 여론이 최악인 걸 고려하면 상관없겠지만 그렇다고 굳이 대놓고 드러내는 건 좋은 판단이 아닐 겁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시민들이야 잘했다고 해주겠지만 귀족파에서는 좋은 시선을 보낼 것 같지 않거든."
이제 완전히 안정을 되찾은 것 같기는 했으나 그래도 여전히 안색이 좋지는 않았다.
"마르쿠스 님도 브루투스 님의 결단을 높이 사고 계십니다. 브루투스 님의 행동은 결코 카이사르 님을 위한 게 아니지 않습니까. 로마의 미래를 위한 것이었죠. 그러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역시 자네와 이야기하길 잘했어. 그럼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는 거라고 보면 되겠나?"
"물론입니다. 아마 늦어도 다음 달 중으로는 개혁이 처리되기 시작하는 걸 보실 수 있을 겁니다."
"나는 자네 말을 믿고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을 모두 쳐냈네. 그러니 제발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게."
"저를 믿으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백 마디 말을 하는 것보다는 행동으로 보여드리는 게 신뢰감을 주는 방법일 테니까요."
옥타비우스가 경쾌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의 얼굴과 눈빛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브루투스는 문득 자신이 아직 어린 청년을 노회한 정치인을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닫고 쓴웃음을 머금었다.
왜 이렇게 종종 까먹는지 모르겠는데 눈앞에 있는 이는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더 어린 청년이었다.
총명하고 지적인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아직 정치 경험도 없는 애송이 중의 애송이일 뿐이다.
거짓말을 말하고 있는 거라면 이미 진즉에 티가 났을 게 분명했다.
'요즘 일이 너무 많아서 과민해졌던 모양이로군.'
브루투스는 이제 옛 친우들에 관한 추억을 기억 저편에 묻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세상을 떠난 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자신의 선택에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만큼 마르쿠스의 저택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은 충격적이었다.
'진정한 공화정이란 무엇인가.'
마르쿠스가 던졌던 화두는 줄곧 브루투스의 머릿속에서 끝없이 맴돌며 질문을 던졌다.
공화정이야말로 로마가 걸어야 할 길이라는 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브루투스의 정치적인 신념이기도 했고 자신의 자존감을 드높여주는 요소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어떤 형태의 공화정이 진정으로 이상적인 체제인지는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지금과 같은 제도를 그대로 고수하는 게 좋은 것인지, 아니면 더욱 발전된 형태의 체제로 가야 하는지.
여러 가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리스 같은 민주정은 허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건 역사적인 사실이 증명했다.
그리스는 쇠락했고 공화정을 선택한 로마는 승승장구하며 세계의 패자가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로마의 체제가 절대적이며 유일무이한 최고의 제도일까?
예전에는 그랬다고 확신했지만, 최근에는 그걸 확신할 수 없게 됐다.
아무리 우수한 공화정의 체제라고 해도 여러 가지 사회 문제는 해마다 터져 나왔다.
귀족파라고 해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당연히도 귀족파는 여러 이해관계로 뭉쳐있는 집단이라 하나의 통일된 해결책이 나올 수 없었다.
앞장서서 제도를 악용해 뱃속을 불리는 이들도 있었고, 그런 이들을 경멸하면서도 한 걸음 떨어진 채 사태를 관망만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런 그들도 이런 문제를 이유로 원로원을 개혁하려고 하는 이들에게는 철퇴를 내려야 한다는 것만큼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니 개혁이 이뤄질 수도 없고, 개혁을 시도할 때마다 유혈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브루투스는 어린 시절 이런 광경들을 보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었다.
회의감을 느낀 적도 있지만 어쩔 수는 없다고 여겼다.
그의 정치적인 멘토였던 카토의 영향이 컸다.
구역질이 나는 인간들이 많다고 해도 세상에 완벽한 제도는 없다.
부작용과 사건 사고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며 그 점은 고쳐나가야 하겠지만, 원로원이 주도하는 공화정의 질서는 흔들려서는 안 된다.
이것이 카토의 지론이었고 브루투스는 질릴 정도로 이런 말을 들으며 유년기 시절을 보냈다.
자연스럽게 청년이 된 이후로는 그도 이런 관점으로 로마를 보게 되었다.
그때가 되도 고쳐지지 않은 문제들은 결국 세상 어디에서나 있는 문제라고 반쯤은 포기하게 됐다.
사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느 나라, 어느 문화를 보더라도 로마보다 더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곳이 대다수였다.
몰락한 그리스, 망해가고 있는 이집트.
야만족들에 불과한 갈리아와 게르마니아.
어디로 시선을 돌려봐도 로마만 한 곳이 없다는 확신만 깊어질 뿐이었다.
그런 그의 믿음을 뒤흔든 게 바로 마르쿠스의 존재였다.
자신과 동년배에 불과한 그는 로마가 지금까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뿌리 깊은 병폐들을 가볍게 해결해나갔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쉽게 풀리는 문제들을 보며 브루투스는 원로원의 문제 해결력에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가 없었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가 두각을 드러낼수록 그런 불안감은 점점 커져만 갔다.
로마는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이전보다 더 좋게 변했고, 발전했으며 시민들의 얼굴에도 활력이 넘치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어쩌면 원로원 주도의 공화정은 슬슬 한계가 드러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다고 독재 체제를 옹호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지만, 만약 그게 아닌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정치체계가 나온다면 어떨까.
지금보다 더욱 정교한 형태의 공화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 나온다면 그쪽으로 마음이 쏠리지 않을 거란 장담을 하기 힘들었다.
카시우스가 카이사르를 치겠다고 했을 때 불안감을 느꼈던 것도 그들이 말하는 공화정에 강렬한 의구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가 사라진다고 정말로 공화정의 순수성이 회복될까.
어렸을 때의 브루투스라면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브루투스는 카시우스의 의견에 동감하기 힘들었다.
카이사르가 없어지면 오히려 로마는 커다란 혼란에 빠질 것이다.
아무리 봐도 지금의 원로원은 그 혼란을 수습할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결국 어떤 그림으로 흘러가게 될지는 빤히 보였다.
혼란에 빠진 귀족파는 마르쿠스에게 매달릴 테고 언제나처럼 마르쿠스가 비상시국을 바로잡을 터.
그렇게 되면 자연히 모든 권력은 마르쿠스 한 사람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다.
과연 그때가 되면 마르쿠스가 독재를 원치 않는다고 해도 상황이 그걸 허락해줄까.
브루투스는 절대 그렇지 않을 거라 확신할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죽음이 몰고 올 파장을 고려하면 최소한 1년에서 2년은 독재관으로 취임해 로마를 다스려야 한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의 양대 축으로 유지되는 균형이 부서지고 모든 질서가 한 명의 권력자에게 맞춰 재편될 것이다.
이건 오히려 공화정을 망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카시우스는 이런 브루투스의 불안감을 기우라 일축했다.
'너무 부정적으로만 보는군. 마르쿠스라면 술라처럼 원로원의 권력을 강화하고 깔끔하게 자리에서 내려올 걸세.'
술라의 개혁이 어떻게 대실패로 끝났는지 전혀 고찰되지 않은 안일한 예측이었다.
이 암살에 미래나 희망 따위는 없다.
브루투스가 마르쿠스의 구상을 들은 건 그렇게 결론을 내린 직후였다.
충격이었다.
브루투스는 몇 번이나 물었다.
이게 정말로 가능한 것이냐고.
마르쿠스는 답했다.
언젠가 반드시 오게 될 미래라고.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던 놀라운 구상과 제도에 브루투스는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고민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브루투스는 그렇게 일말의 고민도 없이 카시우스의 계획을 옥타비우스에게 모조리 털어놓았던 것이다.
그로 인해 카시우스를 비롯한 암살자들이 불행할 결말을 맞이하게 됐지만, 후회는 하지 않았다.
마르쿠스가 약속한 로마의 미래를 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다.
그들이 살아있는 동안은 오지 못할 미래일 수도 있다고 했지만, 상관없었다.
설령 자신이 보지 못하더라도 그 미래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다면 충분하다.
그게 한 치의 거짓도 없는 브루투스의 속마음이었다.
※※※
"브루투스 쪽은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 같더군요."
"그래? 조금 흔들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군."
"그만큼 마르쿠스 님의 계획에 매료된 거겠죠. 제가 볼 땐 격무에 시달릴 불쌍한 희생양 하나가 늘어난 걸로만 보였습니다만."
옥타비우스가 넉살 좋게 웃으며 마르쿠스에게서 건네받은 서류 더미를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뼈가 있는 감상에 마르쿠스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크흠, 누가 보면 내가 사람을 험하게 굴리는 줄 착각하겠군."
"지금도 맹렬하게 문서를 처리하고 있을 셉티무스 님이나 푸블리우스 님이 듣는다면 할 말이 조금 많을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 브루투스가 합류한다고 하면 두 사람은 오히려 좋아하겠지. 자네도 그렇지 않나?"
"···부정할 수가 없군요. 타인의 불행은 자신의 행복이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슬플 뿐입니다. 인간은 악한 천성을 타고 났다는 말이 사실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나저나 카이사르 님에게 가셨던 일은 잘 풀렸습니까?"
"물론."
마르쿠스가 목소리를 약간 낮추었다.
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옥타비우스는 예상했다는 듯 담담한 신색을 유지했다.
"역시 그분께서는 이해를 해주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조금 더 적극적으로 악역을 연기해 달라는 부탁을 해도 될 것 같군요."
"자네는 역시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하나?"
"당연합니다. 고삐를 틀어쥐었을 때 계속 몰아쳐야 완벽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완전히 숨통을 끊으려 하면 쥐도 고양이를 물 수 있으니 완전히 끝장내는 건 피해야겠죠. 궁지에 몰아넣고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고 끊임없이 공격하면 됩니다."
옥타비우스는 마르쿠스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냉정하고 자비가 없었다.
그의 방식은 카이사르나 마르쿠스와는 전혀 달랐다.
굳이 따지자면 비정함이 하늘을 찔렀던 술라와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술라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치밀한 방법을 구사했기에 다른 이들이 그 사실을 느끼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대충 짐작은 가지만 자네가 생각하는 다음 목표는 역시······."
"예. 마르쿠스 님께서 짐작하고 계시듯이, 그 두 사람입니다."
< 250. 변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