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1. 변혁 >
251.
"카토와 키케로인가······."
한숨처럼 새어나오는 마르쿠스의 말에 옥타비우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르쿠스 님께서 허락만 내려주신다면 제가 두 사람을 치겠습니다. 이미 계획은 세워두었습니다."
이번에는 마르쿠스도 선뜻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침묵이 길어지자 조용히 그의 답을 기다리고 있던 옥타비우스가 냉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고민되시는 겁니까?"
"솔직히 말하면 다른 방법은 없을까 생각하는 중이네. 그 두 사람에게는 이것저것 신세진 게 제법 있어서."
"귀족파 중에서도 두 사람은 특히 유용했으니 가깝게 지내신 건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제 슬슬 정리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건 마르쿠스 님이 가장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만."
옥타비우스의 말은 냉정하긴 했어도 정론에 가까웠다.
앞으로의 정국에서 카토와 키케로는 마르쿠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옥타비우스는 차분하게 두 사람을 찍어내야 하는 이유를 계속해서 설명해 나갔다.
"카토와 키케로는 브루투스와는 다릅니다. 마르쿠스 님이 설득하려고 해봐도 그 둘은 절대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을 겁니다. 지금 와서 생각을 바꾸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을뿐더러 신념도 지나치게 확고합니다. 의원이 된 지 수십 년간 원로원 위주의 체제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한 이들이니 절대로 포섭되지 않을 겁니다."
마르쿠스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옥타비우스를 응시했다.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차분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원 역사의 초대 황제를 보는 건 그 자체로 재미가 있었다.
"흐음··· 계속해 보게."
"예. 제 생각엔 앞으로 굳이 그들의 힘을 빌릴 상황은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귀족파를 허울만 남겨둘 거라면 카토와 키케로의 존재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둘이 있는 한 귀족파는 언제나 잠재적인 위험을 품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어정쩡한 상태로 뒀다가는 나중에 더 큰 숙청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최소한의 피로 최대한의 효율을 달성하는 게 사회 안정에도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
옥타비우스는 철저하게 권력의 안전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귀족파의 핵심층이 싹 갈려 나간 이상 이제 당분간 개혁을 방해할 만한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카토와 키케로가 영원히 잠자코 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만약 카이사르가 현 공화정의 제도를 완전히 뒤바꾸려는 시도를 한다면 카토 같은 이는 분명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막아서려 할 것이다.
문제는 카토는 이번에 밑천을 보인 암살자들과는 달리 정말로 신념을 위해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이라는 점이다.
원 역사에서도 카이사르에게 패하고 충분히 사면받을 수 있음에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이다.
그러면서도 카이사르에게 같은 로마인을 사면할 권리 따위는 없다는 참으로 고지식한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이런 이가 앞으로의 개혁을 잠자코 지켜볼 리가 있겠는가.
만약 카토가 목숨을 던져서 발목을 붙잡고 늘어진다면 키케로도 이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눈치만 보고 있던 다른 귀족들도 차례차례 그들에게 합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원래 시위란 게 앞에서 끌어주는 이가 분위기만 잡아주면 순식간에 군중심리가 퍼져나가는 법이다.
인간 본연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옥타비우스는 불안의 싹을 남겨둘 마음이 없었다.
그는 잠시 말을 끊고 마르쿠스의 표정을 살폈다.
그 정도의 정치가가 옥타비우스의 뜻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별다른 감정을 내비치지 않은 채 묵묵히 자신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옥타비우스가 말을 이었다.
"이미 준비는 완벽히 해두었습니다. 키케로는 암살자 일행과 공모를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 바로 잡아넣을 수 있습니다. 카토의 경우도 적당히 증거를 조작하면 어렵지 않게 엮을 수 있을 겁니다."
로마엔 이미 카토나 키케로 둘 중 한 명은 이번 암살미수 사건과 엮여있지 않겠냐는 의심이 파다했다.
물론 이는 옥타비우스가 사전에 공작해 놓은 소문이었다.
여기서 조사결과 카토와 키케로가 연루되어 있었다는 발표가 나온다면 모두는 그럴 줄 알았다며 납득할 터.
남은 건 속전속결로 두 사람을 처리해버리기만 하면 된다.
이미 암살자들에게는 자비를 베풀 필요가 없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으니 후폭풍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흠잡을 데 없는 치밀한 계획이로군."
마르쿠스도 옥타비우스의 수완을 인정했다.
하지만 가성비와 효율에만 치우쳐 있는 이 모습은 약간의 교정이 필요해 보였다.
마르쿠스의 방식은 그 사람이 이용당한다는 자각조차 없이 스스로 따르게 만드는 것이었다.
목숨을 뺏어버리는 건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
이미 스무 명도 넘게 죽인 이상 추가적인 살생은 피하는 게 대국적으로 봤을 때 더 좋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죽여야만 한다면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지만, 옥타비우스의 말과는 달리 아직 저 둘은 쓸모가 있을 거라는 계산도 한몫을 했다.
"마르쿠스 님, 그러면 계획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좋아. 그러면 방침을 정하도록 하지. 쳐내는 건 한 명이면 충분하네. 죽일 필요까진 없고 죽이지도 살리지도 않은 상태로 썩혀두도록 하지. 좋은 생각이 하나 떠올랐거든."
"아직 써먹을 곳이 있다··· 그런 뜻이로군요."
"그래. 그러니 이번 일은 내가 직접 처리하도록 하지."
옥타비우스는 별다른 이견을 제기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마르쿠스가 단순한 온정으로 그릇된 판단을 내렸을 리는 없다고 본 까닭이다.
오히려 그의 눈은 스승이 또 얼마나 흥미로운 광경을 보여줄까 하는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
옥타비우스에게 일단 대기하라는 명령을 내린 마르쿠스는 홀로 키케로를 찾았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편찮은 곳은 없으시죠?"
키케로의 몰골은 몇 달 전에 봤을 때와 비교하면 눈에 띄게 초췌해져 있었다.
눈이 완전 퀭하게 죽은 것만 봐도 그가 심적으로 얼마나 시달렸는지 익히 짐작이 갔다.
저택 바깥을 두리번두리번 살피던 키케로가 빠르게 들어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누군가 했더니 자네였군. 요새 하도 저택 주변을 이상한 사람들이 돌아다녀서······."
"시내에 퍼진 소문 때문에 그렇습니까?"
"그렇다네. 분노한 군중들이 매일같이 와서 진실을 밝히라고 소리 지르지 않나, 내 클리엔테스들도 불안해하며 해명을 요구하지 않나. 미쳐버릴 지경이라네."
"그렇군요. 고생이 많으십니다."
키케로는 마르쿠스에게 자리를 권하고 기대감에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이 암울한 상황을 개선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저번에 카이사르를 찾아갔다고 들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나?"
"이번 일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호송선이 가라앉은 불행한 사고는 지금 로마에서 가장 뜨거운 화제니까요."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네. 카시우스는 분명 나를 찾아와 아라비아에서 조용히 있을 테니 자신들의 구명 활동을 위해 힘써달라는 부탁까지 했단 말일세. 그런 그가 어째서 갑자기 병사들을 매수해 호송선을 탈취하려 한다는 말인가. 내가 볼 땐 증언을 한 이들을 먼저 철저히 조사해 진상을 밝혀야 하네."
"안타깝지만 이미 조사는 끝났습니다. 카이사르 님과 제가 번갈아 가면서 신문을 했고 진술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게다가 명확한 증거도 있는지라 무턱대고 음모론을 펼치면 역풍이 더 거세게 불 겁니다."
증거도, 증언도 전부 옥타비우스가 조작한 것이었지만 그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이는 현재 로마에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키케로나 카토가 직접 조사를 한다고 해본들 진실에는 한 발자국도 가까워질 수 없으리라.
결정적으로 키케로는 이 사건이 카이사르의 자작극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카이사르도 보고를 받기 전까지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니 백날 카이사르 쪽을 파봐야 수상한 정황이 나올 리가 없는 것이다.
키케로의 표정이 점점 더 참담함으로 물들어갔다.
마르쿠스는 여기서 고삐를 늦추지 않고 결정타를 꽂아넣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카이사르 님이 조금 믿기 힘든 말씀을 하시더군요."
"응? 믿기 힘든 소리라니 그자가 또 무슨······."
"키케로 님이 그분의 암살미수에 연루되어 있단 향간의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더군요. 이미 증거와 증인까지 전부 확보했다고 하셨습니다."
"뭐라고! 그런 말도 안 되는······."
반사적으로 일단 부정하려고 보던 키케로는 이미 증거가 있다는 말에 마른침을 삼켰다.
카이사르 정도의 인물이 아무런 확증도 없이 섣불리 그런 말을 뱉었을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사실 키케로가 암살자들과 함께 처벌을 받지 않은 건 단순히 그가 직접 무기를 빼 들고 습격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암살자들에게 배신자라고 매도 받아도 할 말이 없었다.
암살자들이 키케로도 공범이라고 하지 않은 건 편을 들어줄 영향력 있는 의원이 한 명이라도 더 있는 게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키케로가 사전에 그렇게 주장한 영향도 컸다.
이 과정에서 정보가 카이사르에게 새어나갔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정말로 브루투스가 모조리 불었다는 말인가.'
후자의 경우라면 발뺌을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굳이 카이사르가 공권력을 투입하는 수고로움을 거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적당한 정무관을 시켜서 포로 로마노에서 연설을 하기만 하면 된다.
키케로는 암살자들과 한패면서도 비겁하게 혼자서만 빠져나가 거짓으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었다고.
이 한마디만 하면 그걸로 상황은 끝이다.
키케로는 그 즉시 분노한 군중들에 의해 거리로 끌려나와 돌에 맞아 죽을 것이다.
이미 한 번 이성을 잃고 폭주하는 시민들이 얼마나 무서운 존재가 되는지 경험해본 적이 있는 그였다.
그때 겪었던 생생한 공포가 다시 가슴속에서 되살아났다.
"그··· 카, 카이사르가 자네에게도 그 증거를 보여주었나?"
"신뢰할 수 있는 증인을 확보했고 제가 원한다면 대면시켜 주겠다고 하더군요. 그전에 키케로 님의 말씀을 듣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 찾아온 겁니다."
"만약··· 카이사르가 그렇게 발표를 한다면 자네가 나를 지켜줄 수 있나?"
조금 고민해 보던 마르쿠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리겠지요. 적어도 로마에서는 제가 지켜드릴 수 없습니다."
"그 말뜻은 로마가 아닌 곳에서라면 가능하다는 말이로군."
"예. 아마 이집트에서라면 가능할 겁니다. 이집트는 일단 명목상 로마의 속주가 아닌 동맹국이니 조금 더 운신의 폭이 넓습니다. 거기서 칩거하신다면 제가 로마의 눈이 미치지 않게 신경 쓰는 건 가능하겠죠."
"이집트라······."
키케로가 벌떡 일어나 응접실 주변을 빙빙 돌며 인상을 찡그렸다.
지금 이 반응만으로도 사실상 자신의 범죄를 실토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이라면 되도록 빨리 떠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 그래도 지금 민심이 흉흉한데 언제 이 사실이 새어나갈지 모르니까요."
"하지만 지금 떠나면···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지 않나."
"여기서 미적거리고 있다가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나중에 시국이 진정되면 기회를 엿볼 수도 있을 테고요."
키케로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원로원 최고의 논객을 자처하던 그가 어쩌다가 이런 신세가 되었는지 한탄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 봐도 도피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
사실 도피조차 마르쿠스의 도움이 없다면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다.
"어쩔 수 없지··· 자네가 나 대신 좀 배편을 알아봐 주게. 그리고 파라오들에게도 내 처지를 좀 잘 봐달라는 부탁을 해줄 수 있겠나?"
"그 정도야 어렵지 않지요. 현지의 어느 귀족 못지않게 윤택한 삶을 누리실 수 있을 겁니다."
"불행 중 다행인 소리로군. 그런데······."
머리를 긁적이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던 키케로가 괘씸하다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밀고한 그 빌어먹을 인간의 신상을 알 길은 없나? 복수하려는 생각은 딱히 없네. 뭐라고 해봐야 오히려 내 처지만 곤란해질 뿐이니까. 그냥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지 알고 싶어서 묻는 걸세. 브루투스인가?"
키케로의 물음에 마르쿠스가 곤란하다는 듯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 망설이던 그가 결국 곤혹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믿기 힘들 수도 있으시겠지만 제가 카이사르 님에게 듣기로는··· 카토 님이라고 하셨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이름이 나오자 키케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황망함으로 가득한 한탄이 응접실에 메아리쳤다.
"카토··· 카토가··· 허허······."
< 251. 변혁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