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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6. 천조질서의 균열 (257/326)

  < 256. 천조질서의 균열 >

  256.

  로마가 더 이상 비단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그만한 충격을 대동했다.

  로마는 최근 몇 년 동안 한의 비단을 사가는 가장 큰 시장이었던 까닭이다.

  그들이 차와 비단에 지불하는 액수는 그야말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현재 재정이 풍족하지 않은데 로마가 비단의 수입을 끊어버린다면 이는 심각한 사태를 야기할 수 있었다.

  게다가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워낙 황급하게 보고가 올라와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지만 로마가 중단한 건 비단 수입만이 아니었다.

  차까지 절반 이상 수입을 줄여버렸다.

  안 그래도 재정으로 골머리를 썩고 있는 유석이 세금과 양곡을 관리하는 대사농에게 시선을 돌렸다.

  현대로 치면 재무장관에 해당하는 그의 낯빛은 이미 까맣게 죽어 있었다.

  "로마 놈들이 수입을 줄인다면 황실 재정에 타격이 어느 정도나 가겠는가?"

  "···폐하, 그것이······."

  "괜찮으니 바른 대로 말해보아라."

  다른 고관들도 초조해하며 대사농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이내 머릿속으로 얼추 계산을 끝낸 대사농이 몇 번이나 입술을 깨물며 간신히 말을 토해냈다.

  "굉장히···좋지 않사옵니다. 선제께서 계실 때부터 로마는 비단과 차를 가져가는 대가로 황실에 적지 않은 금과 은을 주고 있었습니다. 때로는 그에 상응하는 양의 설탕을 주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재정이 늘어난 만큼 소비 역시 몇 년에 걸쳐 꾸준히 늘어났습니다. 지금 이걸 줄여버린다면······."

  그 뒷말은 듣지 않아도 대충 다 짐작이 됐다.

  자연스레 관원들을 통솔하는 환관에게 유석의 날카로운 눈빛이 쏘아졌다.

  "로마에서이런 움직임을 보일 때까지 경들은 대체 무엇을 했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질책에 홍공과 석현은 거의 동시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전쟁의 결과에 시선이 쏠려 마땅히 살펴야 할 바를 제대로 살피지 못했습니다. 송구합니다!"

  "즉시 사신을 보내 내막을 알아내겠습니다."

  몸을 움츠린 이들은 딱히 환관들만이 아니었다.

  전쟁의 승패를 완벽하게 반대로 예측해 버린 군부의 장수들도 혹여나 자신들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싶어 몸을 떨었다.

  유석은 그런 신하들을 둘러보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가 원하는 건 지금 시시비비를 가려 부하들을 처벌하는 게 아니었다.

  일의 경중이 크지 않았다면 그럴 기회로 삼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전쟁의 예상치 못한 종결과 로마의 이후 행보는 유석이 보기엔 간단하게 짚고 넘어갈 수준의 사안이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책임을 회피할 수 있을지 생각하지 말고 이 국면을 타개할 수 있을지 의견을 말해보게. 지금까지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말해두지. 하지만 몸보신만 하다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한다면 그 손해에 대한 추궁은 확실히 져야 할 것이야."

  유석의 불호령이 떨어지자 대사농이 가장 먼저 의견을 개진했다.

  "우선 로마의 진의를 헤아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볼 수 있는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수입 중단이 일시적인 것인지, 아니면 항구적인 것인지."

  "일시적으로 수입을 끊을 이유가 딱히 있을까?"

  "비단과 차는 엄연히 사치품에 들어갈 것입니다. 지금 로마는 전쟁이 막 끝난 시기이니 사치품의 소비를 줄이고 재건에 힘쓰겠다는 상황일지도 모릅니다. 비단과 차를 하나도 아니고 둘 모두를 양산에 성공했다고 하는 건 조금 현실성이 떨어지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군. 그런 경우일 수도 있겠어."

  로마와 한 사이는 거리가 워낙 떨어져 있으니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는다.

  만약 이번 수입 중단이 일시적인 조치에 불과하다면 타격이야 크겠지만 그리 걱정할만한 일은 아닐지도 몰랐다.

  "물론 그들이 개발과 양산에 성공했을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앞으로도 쭉 이 상황이 이어진다는 것이니 예산을 다시 예전 상태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놈들이 수입을 끊겠다면 우리도 마찬가지로 수입을 끊어버리는 건 어떠한가? 로마 상인들도 우리 쪽에서 가져가는 돈이 상당할 텐데?"

  신하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옵니다."

  "어째서?"

  "로마에게서 들여오고 있는 설탕은 조공에 대한 하사품으로 지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부여 같은 경우 조공품을 더 많이 진상할 테니 설탕의 지급을 늘려달라는 부탁까지 해왔습니다."

  "그런가······."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옵니다. 폐하."

  지금까지 조용히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홍공이 끼어들었다.

  유석이 듣기가 겁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또 무엇인가?"

  "정말로 로마가 비단을 만드는데 성공했다면 이는 우리 기술이 유출됐다는 말밖에 되지 않사옵니다. 차야 어떻게 잎을 구했다고 하더라도 비단의 유출은 정말로 심각한 문제입니다.

  폐하께선 이미 일어난 일은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하셨지만 비단에 관한 것만은 이야기가 다르옵니다. 어디서 어떻게 유출되었는지 경위를 따지고 유출자는 대역죄에 준하는 형을 내려야 할 것이옵니다. 그리고 전반적인 관리 수준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사옵니다.

  "

  다른 신하들도 홍공의 말에 동의했다.

  유석 역시 어느 정도는 공감하는 바였다.

  비단의 제조법은 타국에 절대 유출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는 비밀 중의 비밀이었던 까닭이다.

  한편으로는 로마가 대체 이 비법을 어떻게 빼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홍공의 말대로 로마에만 국한지어 생각할 문제가 아니로군. 다른 오랑캐들에게도 비단이 유출되었을 가능성을 점검해봐야겠어."

  고려해야 할 게 너무 많다 보니 절로 골이 지끈거렸다.

  천자의 자리에 오르면 모든 걸 할 수 있을 줄만 알았는데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는 걸 매해 몸으로 느끼는 중이었다.

  문득 현재 로마를 이끌어가고 있다는 두 명의 황제는 어떤 처지일지 궁금했다.

  그들도 자신처럼 연일 터지는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을지 아니면 태평성대에 취해 별 고민 없이 살고 있을지 알고 싶었다.

  '고민이 없진 않겠지. 중원의 천자인 나조차 이리 신경 써야 할 거리가 많으니.'

  로마는 안 그래도 흉노와 전쟁까지 벌였으니 나라 안팎으로 문제가 심각할 것이다.

  그래서 비단이나 차를 소비할 여유가 사라진 것이리라.

  그 이유가 틀림없다.

  반드시 그래야만 했다.

  '두 오랑캐의 싸움에서 어부지리를 취하려 한 선택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대규모 전쟁을 겪은 놈들이 사정이 우리보다 나을 리가 없어. 그런 관점에서 접근을 해본다면 의외의 방향에서 돌파구가 생길지도 모르지.'

  희망이 과하게 섞인 유석의 바람이었으나 유석은 그 사실조차 제대로 깨닫고 있지 못했다.

  때로는 진실을 모르는 게 행복한 경우도 있는 법이다.

  지금의 유석과 한나라 조정의 상황이 바로 그러했다.

  ※※※

  한은 로마의 진의를 떠보기 위해 최대한 빠르게 사신단을 꾸려 보냈다.

  사신단의 책임자는 무려 황실을 장악하고 있는 환관 중 한 명인 석현이었다.

  유석은 물론 환관들조차 이번 일을 그만큼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한나라에서 로마까지의 거리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멀다.

  수도 로마까지는 직접 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여정이 아니었다.

  그래도 사신들은 다행히도 안티오키아가 아닌 파르티아의 수도였던 크테시폰에서 짐을 풀 수 있게 되었다.

  마르쿠스 대신 동방 속주를 책임지고 있던 푸블리우스가 신도시 건설을 위해 크테시폰에 거점을 마련해두고 있었던 덕분이다.

  마르쿠스는 안티오키아가 대지진으로 쇠퇴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안티오키아에 시설을 집중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인근의 여러 도시들로 안티오키아의 영향력을 분산시키고 있었다.

  다마스쿠스, 크테시폰 등으로 이미 많은 부를 이동시켰고, 입지가 좋은 곳에는 신도시를 건설해 토지의 균형발전을 꾀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건 바로 바그다드 지역이었다.

  바그다드는 원 역사에서 압바스 왕조의 수도로서 당나라의 장안과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번영을 구가한 도시였다.

  지금 메소포타미아의 중심도시는 크테시폰이 맡고 있었지만 마르쿠스는 바그다드 유역을 번성시켜 자연스럽게 그쪽을 견제할 마음이었다.

  게다가 입지상으로도 이곳은 중동의 그 어떤 도시보다도 우월했다.

  우선 티그리스 강이 시내를 직통하고 유프라테스 강에도 바로 인접해 있어 운하를 통해 바로 당도하는 게 가능했다.

  지리적으로도 동방 속주의 중앙에 위치해 대표성을 띠기도 좋았다.

  안티오키아의 역할을 이어받는 곳으로 이보다 최적인 곳은 그리 많지 않았다.

  푸블리우스는 일단 임시로 이 도시를 마르코 폴리스라고 부르기로 했다.

  한나라의 사신들이 도착한 건 한창 신도시 건설이 진행되는 도중이었다.

  그는 먼 길을 온 사신을 적어도 겉으로는 융숭히 대접해 주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았소. 지금 대규모 공사가 한창이고 수도에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점을 사죄드리오."

  "아닙니다. 오히려 사막을 횡단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저희로서는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석현은 푸블리우스가 과거 한나라에 사절단의 책임자로 왔던 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조사해두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비단의 개발과 양산에 드는 시간을 고려해 봤을 때 만약 유출되었다면, 푸블리우스가 방문했을 때 밖에는 기회가 없었다.

  물론 그 추론을 입에 담는 무식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봐야 잡아떼면 그만이고 정치적으로 불리해지는 건 근거 없이 남을 의심한 자신이 될 뿐이니까.

  "이번에 무역에 관련된 건으로 오셨다고 들었소만, 안 그래도 이쪽에서도 전할 말이 있었는데 이렇게 와주셔서 수고를 덜었소이다."

  "혹시 비단 수입을 재개하신다는······?"

  "아아, 미안하지만 그건 아니오. 오히려 앞으로는 점점 수입 양을 줄여갈 것 같소. 이쪽도 몇 년 전 우연히 비단을 제조하는데 적합한 누에를 발견했소. 지금은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질이 확보되어 충분히 자급자족이 가능하다오."

  아예 대놓고 누에를 언급한 이유는 비단은 이미 비밀거리조차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드러낸 것이다.

  석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누에를 발견하셨다고요? 그것 참···엄청난 우연이로군요."

  "그렇소. 저기 아프리카 남쪽에서 살고 있었다고 하더군. 귀공께서는 아프리카 남쪽이라고 해도 잘 모르겠지만 대충 여기라오."

  푸블리우스가 지도를 가져와 남아프리카의 초원 지대를 대충 손가락으로 짚었다.

  마르쿠스의 주도하에 만들어진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세계지도다.

  생전 처음 보는 정교한 세계지도를 본 석현의 눈이 크게 떠졌다.

  처음에는 당연히 과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얼핏 보니 한나라의 동쪽과 북쪽에 해당하는 나라들까지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지도는 대체······."

  "아아, 그쪽은 처음 볼 수도 있겠군. 로마인들이라면 흔히 보고 있는 세계 지도라오."

  넉살좋은 거짓말에 석현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물들었다.

  보통 정교한 지도라면 그것만으로도 군사기밀이 되기 때문에 절대로 타국에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푸블리우스는 슬쩍이긴 했어도 너무 자연스럽게 석현이 지도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로마와 한나라의 기술이 차원이 다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슴속을 스쳐지나갔다.

  어쩌면 비단도 유출이 된 게 아니라 정말로 우연히 누에를 발견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로마가 한보다 기술이 훨씬 더 앞서 있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당장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수많은 종이만 해도 석현의 눈길을 끌기엔 충분했다.

  아직 중원은 종이가 나오지 않아 문자를 기록할 때 대나무나 비단의 위에 글씨를 썼다.

  이렇게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양국의 격차가 여기저기서 눈에 띠었다.

  중화의 자존심으로 가득한 석현에게 이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든 굴욕이었다.

  기를 쓰고 자신들이 더 나은 점을 찾아보려 하는 그의 귀를 푸블리우스의 미안해하는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먼 길을 와주신 손님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하나 전해야 할 것 같소."

  "예? 그것이 무슨······."

  "다름이 아니라 로마가 한에게 설탕을 독점으로 공급한다는 계약 말인데 얼마 뒤면 기간이 끝나지 않소? 본국은 그 계약을 연장하지 않으려고 하오."

  석현은 순간 자신이 이곳에 온 목적을 잊은 채 입을 크게 벌렸다.

  그가 마른 침을 삼키며 간신히 목소리를 입 밖으로 내 물었다.

  "그, 그게 무슨···그러니까 설탕의 공급을 끊겠다는 것입니까?"

  "물론 아니오. 최근 워낙 자신들에게도 설탕을 직접 공급해 달라는 동방국가들이 늘어서 말이오. 원로원에서 세심하게 토론을 한 결과 그들에게도 기회를 부여해주기로 했소. 물론 그쪽에게도 이전처럼 설탕을 팔 테니 공급이 끊길 일은 없을 거요."

  그야말로 혹을 떼러 왔다가 하나 더 붙이게 생긴 꼴이다.

  석현이 감정을 다 추스르지 못하고 외쳤다.

  "마, 말도 안 됩니다! 이건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푸블리우스가 진심으로 의문이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받아들이지 않으면···뭐 어쩌겠다는 말이오?"

  뭐라고 말을 쏟아내려던 석현의 입이 딱 닫혔다.

  그 말대로였다.

  로마가 물건을 팔든 말든 그들이 무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무력으로도,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도, 그들이 로마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256. 천조질서의 균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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