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로마 >
257.
딱딱하게 굳어진 석현을 아랑곳하지 않고 푸블리우스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나갔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그쪽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하오."
"우리 쪽에 책임이 있다니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전쟁 때 그쪽이 보인 미적지근 한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오. 원로원은 귀국이 다분히 어떤 의도를 가지고 사태를 관망했다고 보고 있소."
"의도라니요, 그건 너무 과한 추측입니다. 당시 본국은 천자께서 붕어하셔서 귀국을 도울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불만이 나올 수도 있다는 건 석현이 이미 사전에 예상했던 바다.
그리고 이런 대답을 할 거라고 푸블리우스 역시 꿰뚫어 보고 있었다.
"물론 직접적인 원조를 바랐던 건 아니오. 그쪽이 흉노의 뒤를 쳐주면 훨씬 쉽게 이길 수 있었겠지만, 거리가 거리이니 군대를 일으키긴 쉽지 않았겠지. 하지만 지금까지 숱하게 흉노와 싸워본 경험과 정보를 제공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텐데?"
"저희도 가능하면 제공하려 했는데······."
"누구나 다 피치 못할 이유 한 두 개쯤은 있겠지.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정성을 보여야 신뢰가 쌓이는 법 아니겠소. 그런 점에서 귀국은 우리의 신뢰를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저버린 것이오. 그래서 원로원에서 이런 결정이 내려온 것이니 양해해 주길 바라오."
양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어쩔 것인가.
석현은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어차피 처음부터 선택권은 전적으로 로마쪽에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도 이제 완벽하게 짐작이 갔다.
'치졸하게 도와주지 않았다고 경제보복을 하다니.'
석현이 여기에 와서 듣기론 로마는 흉노 전쟁에서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다.
믿기지는 않지만 회전에서 흉노의 기병을 박살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 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그것이 진실이었다.
한나라도 흉노를 정면에서 이긴 적이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성기의 흉노가 아니었다.
모든 흉노를 통합하고 거기에 추가로 다른 유목민들까지 흡수한 대군이라고 한다면 정면승부로는 답이 없었다.
한의 군부는 그렇게 판단했기에 로마가 질 거라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로마는 20만의 군사를 잃었음에도 그 직후 벌어진 회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는 현재 로마의 국력이 한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다.
국력도, 기술도, 전반적인 수준도 전부 로마에게 밀린다.
석현은 문득 이 사실이 주변국에 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 보았다.
'안 돼. 그런 일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 중화의 질서가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도 모름이야.'
어쩌면 로마가 그걸 노리고 주변국들과 직접 무역을 트겠다고 나서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건 너무 과한 억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마가 아무리 강대한 대국이라 해도 결국 서방의 오랑캐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이 어찌 중원의 질서를 유지하는 중화의 사상에 박식하겠는가.
그들이 천자의 권위를 실추시키기 위해 이런 행동을 했다고 보는 건 너무 나간 비약이었다.
오히려 그런 티를 내는 게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는 악수로 이어지는 법이다.
석현은 필사적으로 표정관리를 하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다시 한 번 재고해 주실 마음은 없으신 겁니까?"
"이건 제 뜻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원로원의 총의가 모아진 이상 저는 그에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곳의 총독이 아니라 총독 대행에 불과할 뿐이니까요."
"···잘 알겠습니다. 귀국의 뜻을 천자께 잘 말씀드리도록 하지요. 하지만 양국의 우호가 금이 간다면 이는 서로에게 득은커녕 실이 되는 일일 뿐이라는 걸 꼭 다시 되새겨 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총독님과 원로원에 잘 전달 드리겠습니다."
푸블리우스는 생글생글 웃으며 사신들을 배웅했다.
석현은 더 매달리지 않고 바로 채비를 갖춰 크테시폰을 떠났다.
어차피 지금 로마의 태도를 보아하니 자신들을 견제하기로 마음 먹은 건 확실해 보였다.
이곳에 머물며 더 구질구질하게 구느니 조금이라도 빨리 귀환해서 대책을 마련하는 게 좋아보였다.
그는 건장한 말과 실력 좋은 기수를 추려 최대한 빠르게 장안으로 돌아가 사태를 전하라는 명을 내렸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로마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단순히 빈정이 상했기 때문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어느 정도는 자업자득인 면도 있었기에 석현으로서도 대놓고 불만을 표해진 못했다.
그래도 로마가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행동에 나선 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수확은 있었다.
석현이 이런 착각을 하게 된 이유는 다른 데에 있지 않았다.
그가 본 대로 푸블리우스 역시 마르쿠스가 어째서 이런 결정을 내렸는지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형님께서는 한을 그리 좋게 보시지 않는 듯 한데···이유가 짐작이 가지 않는단 말이야."
푸블리우스가 사신들이 남기고 간 선물을 대충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어차피 지리상 너무 멀리 떨어진 지역이라 교역의 대상은 돼도 경쟁의 대상은 되지 않을 텐데······."
보통 한나라에서 얻고 있는 이득을 고려하면 오히려 교역의 양을 늘리는 게 이득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물론 동방의 타국가들과 거래를 틀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맞겠지만, 그들과 거래하려면 실크로드를 더 확장해야 했다.
그나마 지금 당장 거래를 틀 수 있는 건 인도 주변의 왕국들 정도일 것이다.
"하긴 형님이 단순히 한나라가 싫어서 그러셨을 리는 없겠지. 분명 수년 후의 미래를 내다보고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 걸 거야."
지금은 이해가 가지 않아도 결국 시간이 지나면 마르쿠스의 판단이 다 옳았다고 밝혀질 것이다.
푸블리우스는 형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엔 아직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이제 며칠 뒷면 시작하겠군. 가족 중에서는 나만 참가하지 못하는 건가?"
아쉬워 보이는 그의 시선이 로마가 있는 먼 서쪽을 훑었다.
이미 율리아를 비롯한 다른 식솔들은 몇 달 전에 시리아를 떠나 로마로 가는 배를 탔다.
심지어 이번에는 클레오파트라나 아르시노에도 함께였다.
타국의 왕은 로마 시내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불문율 따위는 이미 효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그도 그럴 게 그 영역을 구분하는 신성경계선 자체가 이제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백 년간 줄곧 회자될 역사적인 순간을 보지 못하는 건 아쉽지만···어쩔 수 없지. 이 도시의 건설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거니까."
푸블리우스는 못내 아쉬움을 떨쳐내며 새롭게 올라가고 있는 총독관저의 으리으리한 위용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앞으로의 수십 년은 지금까지 로마가 걸어온 수 백 년보다 더욱 급격한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이전에 마르쿠스가 했던 말이 이제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로마와 동방에서 끊이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
로마인들은 언제나 축제에 열광하고 즐길 거리를 찾아다닌다.
특히 모든 게 풍족해지고 있는 이탈리아 반도에 사는 시민권자들은 더욱 그랬다.
하루 일과를 끝내면 목욕탕에 가서 체스를 두거나 술집에 모여앉아 카드 게임을 하는 게 보통 로마인들의 일상이었다.
그렇게 여러 행사가 익숙한 로마인들에게도 특별한 날이 몇 개 있었다.
바로 검투사들의 경기였다.
특히 일반적인 경기가 아니라 타이틀을 건 커다란 시합 같은 경우 콜로세움, 마르쿠스 캄프누스를 가득 채울 정도의 인파가 몰렸다.
이번에 열리는 대형 경기도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이 나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지금까지 본 적이 없을 정도의 흥분이 로마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곧 있으면 열릴 경기는 단순한 타이틀 경기가 아니었다.
바로 각 지역의 챔피언들이 부딪치는 왕중왕전.
4년을 주기로 단 한 번 열리는 이 시합을 보러 수많은 사람들이 로마로 몰려들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단순히 시합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와 마르쿠스에게 영광스러운 칭호를 수여하는 장소로 대경기장을 낙점했다.
역대 그 어느 행사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몰릴 테니 이곳에서 수여식을 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서였다.
카이사르는 당연히 이를 흔쾌히 수락했다.
마르쿠스도 딱히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결국 다가올 검투 경기는 로마 역사상 다시는 없을 대행사의 전야제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동맹국들은 물론이고 속주의 유력자들에게까지 초대장이 발송되었다.
마르쿠스가 지은 대경기장으로도 구경꾼들을 다 수용할 수 없어서 임시 망루가 몇 개나 세워졌다.
그렇게까지 했음에도 자리가 충분치 않아 긴급 경기를 더 추가해 어거지로 행사일을 늘렸다.
날짜가 다가오자 속속들이 각구의 귀빈들이 로마에 도착했다.
마르쿠스는 이들이 로마로 입성하는 걸 하나의 이벤트로 삼기로 기획했다.
시민들은 각지에서 모이는 권력자들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구경하며 신기해했다.
가장 먼저 도착한 이들은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족장들이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인들의 환호를 끌어낼 목적으로 일부러 인기 있는 영웅인 베르킨게토릭스를 행렬에 포함시켰다.
로마식의 갑옷을 입고 갈리아 족장들과 나란히 들어오는 베르킨게토릭스를 향해 시민들은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보내주었다.
그 다음으로 북아프리카와 쿠시, 악숨, 나바테아 순으로 왕족들이 입장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하나같이 자신들의 복식을 입었으면서도, 옆에는 로마 원로원에 들어간 의원들을 대동했단 점이다.
이는 카이사르의 의도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자신들이 로마의 친우라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서 사람들의 환영을 이끌어내려는 의도였다.
반면 로마인들은 콧대 높은 타국의 왕족들이 자신들의 전통 복장을 입고 있는 모습에 자부심을 느꼈다.
그야말로 로마의 위상이 만천하에 드리웠다는 걸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대미는 이집트가 장식했다.
이집트의 파라오로서 눈이 돌아갈 정도의 화려한 복장을 입은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수많은 로마인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제 완전히 절정에 올라 있는 두 사람의 미모도 큰 몫을 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마르쿠스의 입장을 고려해 일부러 자신의 아이들은 행렬에 참가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에는 이미 이집트의 파라오는 마르쿠스의 여자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깔려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마르쿠스를 비난하는 이는 없었다.
어디까지나 로마인들의 인식 속에서는 두 파라오는 잘 쳐줘봐야 마르쿠스의 아내가 아닌 정부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딸이자 비너스의 환생으로 불리는 율리아의 존재감은 로마보다 한참이나 허약한 이집트의 왕들에게 밀리지 않았다.
환영식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가 마르쿠스에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도 로마인들의 인식에 부합했다.
과거 세계의 왕으로 군림했던 이집트의 파라오가 로마인의 앞에서 공손한 모습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통쾌해 마지 않았다.
"이집트의 여왕들이라고 해봐야 마르쿠스 님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구만."
"당연하지.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사실상 이집트는 마르쿠스 님의 속주나 다름없단 말도 있어."
"만약 마르쿠스 님의 아이가 이집트의 왕위를 넘겨받으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이집트도 로마령이 되는 건가?"
"글쎄···그렇게 되는 건가?"
웅성거리는 시민들의 인파를 둘러보는 카이사르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옆에 있는 마르쿠스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내일이면 식이 시작되는군."
"그렇게 되겠네요. 여기까지 오는데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습니다."
마르쿠스가 자신의 앞에서 공손히 손을 모으고 있는 아르시노에를 향해 살짝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사르가 그런 그에게 농담조로 한 머디를 건넸다.
"이제부터 왕이 되려고 하는 기분이 어떤가?"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게 작은 소리였다.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답했다.
"왕이라니요? 장인어른, 우린 고작 그 정도가 아닙니다."
카이사르의 목소리보다도 더 낮게, 그러면서도 확신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우리는 왕보다도 더 위대합니다. 우리가 바로 로마가 될 테니까요."
< 257. 로마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