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8. 로마 (259/326)

  < 258. 로마 >

  258.

  마르쿠스와 카이사르는 귀빈석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를 통해 들어갔다.

  아직 행사가 시작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원로원 의원들이 찾아와 아부 섞인 칭송을 늘어놓으며 분위기를 띄웠다.

  "여기까지는 전부 예정대로군요."

  속삭이는 듯한 브루투스의 목소리에서도 미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약간의 초조함과 기대가 공존하는 그의 시선이 어지러이 주변을 훑고 있었다.

  "모두가 마르쿠스 님이 로마의 지도자가 되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불안함은 느끼지 않나?"

  "불안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지금까지 마르쿠스 님은 본인의 말을 어기신적이 한 번도 없으신데요."

  굳건한 신뢰로 넘쳐나는 모습에 마르쿠스는 흡족한 웃음을 보였다.

  "자네의 기대를 배신하진 않겠네. 달콤한 미래를 속삭이는 것보다는 직접 행동으로 보여줄 테니 잘 보고 있게."

  "예."

  브루투스는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한 차례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주변에 늘어선 의원들을 향해 들으라는 기세로 소리를 높였다.

  "각국의 귀빈들과 로마의 지도층, 그리고 시민들이 이렇게 대규모로 한 자리에 모인 건 로마 역사상 이번이 처음일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위대한 역사의 현장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이 기회에 우리 원로원은 다시 한 번 다짐해야 합니다.

  오늘로서 로마는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낡은 과거와 이별하고 새롭게 변화할 재탄생의 순간입니다. 이런 극심한 변화의 파도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는 이는 단언컨대 단 두 명!

  "

  브루투스의 열정적인 호소에 자연히 좌중이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마르쿠스와 카이사르에게 쏠리는 그 시점에 브루투스의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막중한 과업을 짊어질 수 있는 이는 오롯이 위대한 마르쿠스와 카이사르 둘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 행운에 감사해야 합니다. 위대한 두 천재가 공화정의 새로운 기틀을 잡아가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관찰할 수 있으니까요."

  "옳소!"

  "브루투스가 시원하게 말해주는군."

  귀빈실이 순식간에 사방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로 가득 찼다.

  분위기가 완전히 무르익자 마르쿠스는 의원들을 대동하고 대경기장의 내부로 들어섰다.

  수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뒤를 따르는 모습은 마치 왕의 행진과도 같았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 문자 그대로 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렇게 생각하는 의원들은 아무도 없었다.

  브루투스의 존재 때문이었다.

  누구보다 앞서서 왕정에 반대하고 공화정 수호를 부르짖던 브루투스는 지금 누구보다 열렬하게 마르쿠스를 지지하고 있었다.

  브루투스의 정치적인 위세는 대단하지 않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은 아직도 유효했다.

  그런 브루투스가 대놓고 앞장서서 마르쿠스를 공화정의 수호자라고 하고 있으니 누군들 의심하겠는가.

  물론 브루투스가 마르쿠스에게 속아서 이러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마르쿠스의 진의를 다 들었고, 앞으로의 개혁이 어떤 방법으로 전개 될지도 알았다.

  앞으로 로마에 몰아칠 변혁의 파도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독재에 가까운 권력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로마는 체제의 정비가 사회의 발전을 따라가지 못해 스스로 자멸할 가능성이 높다.

  마르쿠스는 브루투스의 앞에서 대놓고 그렇게 말했다.

  브루투스는 그게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받아들였다.

  당장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의 로마만 해도 그러지 않았나.

  지중해의 패자가 된 로마는 너무 급속하게 발전하는 자신들의 성장세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온갖 사회문제가 대두되었고 백년이 넘어가도 제대로 된 해결방안이 나오지 않았던 게 현실이었다.

  마르쿠스의 말대로라면 앞으로 있을 변화는 고작 그 정도가 아니다.

  브루투스는 실제로 마르쿠스가 보여준 인쇄기를 구경했을 때 마치 다른 세상에 온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앞으로 십 년만 지나면 로마에서도 그런 물품들이 당연하다는 듯 보이게 될 것이라 했다.

  그때의 로마는 어떤 모습일지 브루투스의 식견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공화정이 앞으로도 수천 년 이상 존속하도록 이끌 사람은 오직 마르쿠스 님뿐이다.'

  브루투스는 오직 그 길만이 로마가 번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확신했다.

  그렇게 결심을 굳히고 나니 이전의 유약했던 모습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지금의 그는 공화정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투사이자 스파르타쿠스나 수레나스 못지않은 마르쿠스의 신도였다.

  길을 튼 그가 군중들이 한 번에 보이는 계단 앞에서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르십시오. 위대하신 공화정의 인도자시여."

  마르쿠스는 뒤편에 원로원 의원들을 둔 채로 카이사르와 함께 자리에 올랐다.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들어 흔들어주자 대경기장이 뒤흔들릴 정도의 함성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마르쿠스가 이어서 펼쳐질 경기에 대한 축사를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소란이 뚝 멎었다.

  모두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경청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연설은 짧고 간결했다.

  원로원과 시민들에 대한 감사.

  그리고 대결을 펼칠 검투사들에 대한 격려.

  마지막으로 내년부터 시행 될 굵직한 정책들에 대한 홍보가 다였다.

  시민들은 다른 무엇보다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는 식량의 양이 증가할 거라는 말에 엄청난 반응을 보였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의 토지 개간이 상당수 진행된 덕분이었다.

  동북방에서도 보스포루스는 완전히 로마령으로 재편되었고, 흉노가 도주하고 무주공산이 된 흑토평야도 순조롭게 로마의 영토로 편입 중이었다.

  물론 여기서 생산되는 식량들을 무조건 로마로 가져가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현지인들의 불만을 살 게 뻔하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식량을 수탈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법령을 제정하고 엄격하게 집행했다.

  반출하는 식량은 평상시엔 어디까지나 잉여생산물이어야 하고, 이탈리아에 극심한 흉년이 들었을 때나 예외 사항을 적용한다는 게 법안의 골자였다.

  지금은 인구증가속도보다 생산량의 증가속도가 훨씬 더 빠른 이례적인 시기라 그래도 여유가 남았다.

  모든 게 순풍을 맞은 배처럼 편안하게 나아가자 마르쿠스는 근심없는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카이사르 역시 오랜만에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며 시민들과 교감하며 검투 시합을 즐겼다.

  어찌나 시민들의 열기가 뜨거웠는지 바로 옆에 앉아 있어도 목소리가 들리지 않아 필담을 주고 받아야 할 정도였다.

  마르쿠스가 종이에 이어나갈 말을 쓰려고 하자 지금보다도 더 커다란 성원이 솟구쳤다.

  오늘의 메인 이벤트가 개시된 것 같았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드디어 길고 길었던 시합도 이제 막바지. 로마, 아니 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최후의 검투사는 과연 누가 될 것인가. 최후까지 탈락하지 않고 이 자리에 선 두 챔피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십시오. 히스파니아의 챔피언 리오넬루스 메시우스!"

  "엥?"

  검투사의 이름을 듣자 마르쿠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빠진 소리를 냈다.

  카이사르가 왜 그러냐는 눈빛을 보내오자 그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저으며 종이에 대답을 썼다.

  "아닙니다. 그냥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아서요."

  "최근 가장 뛰어난 검투사라고 하니 당연히 어디선가 들어봤겠지. 솜씨가 아주 제법이라고 하던데."

  관중들의 폭발적인 성원과 함께 작달만한 검투사 한 명이 여유롭게 경기장 안으로 들어왔다.

  뒤이어서 진행자의 우렁찬 소리에 호응해 객석에 있는 안내원들이 똑같은 구절을 읊었다.

  "다음은 달마티아의 챔피언! 루키우스 모드리쿠스가 입장합니다. 과연 승리의 여신께서는 누구를 향해 미소 지어줄 것인가!"

  어디선가 들은 듯하기도 하고 본 듯하기도 한 검투사들의 대결에 마르쿠스의 신경도 자연스레 그쪽으로 쏠렸다.

  그의 뒤에서 호위를 서고 있는 스파르타쿠스도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경기를 관전했다.

  "누가 이길 것 같아?"

  대결의 초반부는 엇비슷하게 흘러갔다.

  두 사람 다 신체의 우월한 힘으로 승부를 보는 타입은 아니라 숨막히는 기술의 향연이 펼쳐졌다.

  마르쿠스의 개혁 이후 검투 경기는 엔터테이먼트적인 성격이 강화되어 싸움 역시 화려함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기술의 극에 달한 두 사람의 대결은 거의 무협영화를 보는 듯한 화려함의 연속이었다.

  결판이 나지 않은 채 쭉 이어지는 대결을 주시하던 스파르타쿠스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히스파니아의 메시우스가 이길 듯합니다."

  결과는 스파르타쿠스의 예측대로 됐다.

  어마어마하게 길어진 혈전 끝에 메시우스의 검이 모드리쿠스의 허리춤을 훑고 지나간 것이다.

  뒤이어 비틀 거리는 모드리쿠스의 턱에 메시우스의 깔끔한 뒤돌려 차기가 작렬했다.

  체력을 다 써버린 듯 비틀거리던 메시우스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객석을 향해 무기를 치켜들고 포효했다.

  그의 검을 따라 모든 관중들의 주먹이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메시우스! 세계 최강의 검투사!"

  "와아아아! 검투의 신! 메시우스!"

  결승전은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게 치러졌다.

  마르쿠스가 직접 경기장으로 나가 검투의 신으로 등극한 메시우스에게 독수리가 조각된 우승 트로피를 수여했다.

  평상시의 검투 시합이었다면 여기서 일단락되었겠지만 오늘은 달랐다.

  진정한 메인 이벤트는 사실 지금부터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미 경기장에 나와 있는 마르쿠스와 카이사르를 중심으로 수백 명의 원로원 의원들이 쭉 늘어섰다.

  각국의 왕들과 귀족들도 자리에서 일어서서 예를 표했다.

  원로원의 대표로 축사를 하게 된 피소와 브루투스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 그들의 지도자에게 찬사의 말을 건넸다.

  먼저 피소가 월계관을 가지고 가 공손히 카이사르의 머리 위에 씌워주었다.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를 제패하고 흉노의 손에서 조국의 위기를 구한 위대한 이여. 로마의 최고 신관이기도 한 그대에게 원로원은 감사와 존경의 뜻을 담아 '신들의 대행자'라는 칭호를 수여하노라. 언제까지나 그 굳센  손으로 로마를 수호하고 원로원과 시민들의 적을 베어내기를."

  "영광스러운 중책을 기꺼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카이사르가 월계관을 쓰고 일어서자 각국의 정상들과 시민들이 온 힘을 다해 박수를 치고 함성을 내질렀다.

  다음은 마르쿠스의 차례였다.

  월계관을 들고 다가간 브루투스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존엄을 받아 마땅한 위대한 그대에게 원로원이 찬사를 보내노라. 파르티아와 아라비아, 그리고 모든 동방을 평정한 메소포타미쿠스의 앞에서는 억센 흉노족들조차 초라한 산적 떼에 지나지 않았다.

  그대는 로마의 적을 참한 것만이 아니라 신들의 지혜를 받아 로마인들의 삶을 그 어느 때보다 윤택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 은혜는 로마의 모든 국토 전역으로 뻗어 가리니 이보다 로마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가 어디 있으랴. 이에 원로원은 그대의 공을 기려 찬사하노라. 제 1시민이자 '최고의 로마인'인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에게 찬사와 존귀를.

  "

  "영광스러운 칭호에 누가 되지 않도록 앞으로도 더욱 정진하겠습니다."

  마르쿠스가 월계관을 쓰고 일어서자 이 이상일 수 있을까 싶었던 환호 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러다가 진짜로 대경기장이 무너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발 구르는 소리가 로마 시내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마르쿠스가 했던 말이 옳았다.

  그는 왕이 아니었다.

  왕보다도 더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

  모든 로마인들 중 유일무이한 지고의 위인.

  그게 바로 제 1시민이자 최고의 로마인, 마르쿠스 크라수스였다.

  < 258. 로마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