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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9. 로마 (260/326)

  < 259. 로마 >

  259.

  숙소로 안내 된 클레오파트라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청량하면서도 향긋한 향기가 코  끝에 닿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향료를 만들 거라고 하셨었는데 벌서 완성 단계를 눈앞에 두고 있는 건가?"

  로마에 머무는 동안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는 마르쿠스의 별관에서 머물게 됐다.

  안티오키아에서도 그랬지만 그의 손길이 닿은 곳에서 잠을 청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사랑에 빠진 소녀라고는 할 수 없는 나이인데 조금 난감한 노릇이었다.

  "후후."

  주변에 아무도 없긴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와 황급히 입을 가렸다.

  아르시노에처럼 헤실헤실하는 모습을 보여서야 파라오로서의 위엄이 살지 않는다.

  로마에 있는 동안 확실히 입지를 다져놓을 필요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며 클레오파트라는 몸을 일으켰다.

  귀빈으로 초청을 받은 것이긴 해도 그녀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처리해야 할 일이 꽤 많았다.

  로마가 대격변을 맞이하고 있는 이상 이집트도 과거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됐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번 초청에 이집트의 실무자들을 여럿 데려왔다.

  발전된 로마의 체제를 잘 관찰하고 무엇이든 얻어갔으면 하는 바람에서였다.

  거기에 아직도 머리가 꽃밭인 여동생이 너무 과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적당히 제지하고, 이제 세상 모든 일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딸들이 사고를 치지 않는지도 봐야 한다.

  그러면서 이집트에 적용할 수 있을 만한 좋은 정책들이나 제도를 분석해야 하니 몸이 몇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마르쿠스를 붙잡고 정치에 대해서 날을 새서라도 고견을 들어보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지혜가 넘쳐나는 그라면 이집트에 유익한 조언쯤이야 몇날 밤을 새울 정도로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로마의 모든 걸 신경 써야 하는 그를 이 이상 귀찮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요새 보면 더욱 바빠지신 것 같은데···그분께서는 세계를 어떻게 이끌고 싶으신 걸까?"

  이미 로마라는 거대한 배는 대양을 향해 나아갔다.

  다만 클레오파트라 정도의 지성을 가진 사람에게도 그 종착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기에 국가의 방침이나 제도를 고찰하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본래 국가란 명확한 정체성에 따라 그에 맞는 법률과 행정제도가 자리잡을 수 있다.

  왕정과 공화정, 민주정의 법 체계는 당연히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지금 클레오파트라가 보기에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탈피하는 중이었다.

  지금이야 옛 공화정의 낡은 틀을 가지고 제정에 올라탄 형태가 됐지만 차츰 변해가리라 생각했다.

  카이사르도 슬슬 나이가 들고 있으니 그가 물러나면 마르쿠스가 로마의 모든 권력을 혼자서 틀어쥐게 될 테니까.

  그때가 되면 부정할 수 없는 제정 로마의 시작이다.

  하지만 동시에 뭔가 묘하게 걸리는 점도 있었다.

  그것이 정말로 사랑하는 부군이 원하는 나라일 것인가.

  아니면 자신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일까.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자신 역시 아르시노에와 별 다를 바 없는 수준이 된다.

  율리아는 뭔가를 아는 듯도 보였지만, 그녀 역시 모든 걸 완벽히 꿰뚫고 있진 않았다.

  너무 현명한 남성의 옆에 있으면 이토록 곤란할 때도 있는 법이다.

  자신이 앞장서서 남자를 끌어주기는커녕 뒤를 쫓아가는 데도 급급하니 조금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차라리 아르시노에처럼 생각 없이 마르쿠스의 행보에 감탄하기만 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그래도 어떤 형태가 됐든 그분이 내린 판단을 따라가야지."

  그녀는 마르쿠스가 직접 골라준 침상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정말 어떤 나라를 만드시려는 걸까. 귀띔이라도 해주시면 좋을 텐데. 혹시 알아서 추리해 보라는 일종의 시험인가?"

  여왕의 혼잣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신들의 대행자, 최고의 로마인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받게 된 두 지배자는 집무실의 의자에 말없이 몸을 파묻고 누워있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그들이 치른 악전고투의 현장을 보여주듯 책상 위에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서류들이 쌓여 있었다.

  관료들에게 최대한 많은 일을 분배해주었는데도 최고 책임자가 검토하고 결제해야 할 일이 이만큼이나 쌓인 것이다.

  마르쿠스에게 있어서 특히나 더 절망적인 건 로마를 떠나 동방으로 돌아가면 이와 같은 작업을 한 번 더 거쳐야 한다는 점이었다.

  푸블리우스가 총독 대행을 맡고 있긴 하지만 동생이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역시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구조적인 개혁에 있어서는 당연히 자신이 직접 손을 대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로마 일은 그냥 카이사르에게 맡기고 자신은 한창 자라나는 사랑스러운 딸들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제 다 쉬었으니 슬슬 작업을 속행해 보도록 할까? 대충 보니 한 시간 정도만 더 고생하면 오늘 일은 끝낼 수 있겠군."

  "그러면 그냥 조금 더 쉬면 안 되겠습니까. 어제도 잠을 두 시간밖에 못자서 졸려 죽겠는데요."

  "그런가? 그럼 잠도 깰 겸 이야기나 조금 나눠보도록 하지."

  카이사르가 책상에서 미결제된 서류중 하나를 적당히 손에 들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행정관료들의 선임 말인데 정말로 내가 마음대로 처리해도 되겠나?"

  "전 어차피 몇 달 지나면 동방으로 갈 겁니다. 이곳의 국정은 앞으로도 장인어른께서 돌보셔야 하니 선호하시는 인선을 꾸리시는 게 낫겠죠."

  "그럼 나야 고맙지만···아무래도 쓸 만한 이들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야."

  "그건 교육의 탓도 큽니다. 그래서 저번에도 건의드렸다시피 대대적인 교육 제도를 한 번 손볼 필요가 있어요."

  카이사르가 전적으로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말했던 그 학제개편이라는 것 말인가? 확실히 지금보단 훨씬 실용적으로 보이더군."

  "실용적인 교육을 받고 성장한 세대가 업무에 투입될 때가 온다면 확실히 지금과는 다를 겁니다. 다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지요."

  어느 시대가 그렇지만 교육은 곧 나라의 근간이다.

  교육 체계를 완전히 바꾼다는 건 그만큼 엄청난 파장을 동반하는 법이다.

  특히 교육에 열과 성을 쏟는 분위기가 팽배한 로마에서는 더욱 그랬다.

  모두가 납득할 정도로 완벽한 청사진을 제시하지 않으면 누구도 따라오지 않을 게 뻔했다.

  다행히도 카이사르는 마르쿠스가 제안한 교육 개혁에 굉장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저번에 자네가 지나가듯 말했던 전문학교는 꽤나 흥미로운 시도라고 생각하네. 일단 이거라도 시범적으로 운영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럼 로마와 동방에 시험 삼아 몇 개 지어보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하지. 그리고 저번에 이야기가 나왔던 한나라와의 외교 말인데···그렇게 처리한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물론입니다."

  마르쿠스의 즉답에 카이사르가 짐짓 흥미롭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가 볼 때 마르쿠스의 조치는 다분히 감정적으로 보이는 게 사실이었다.

  원로원 역시 적극적으로 그에게 찬성하고 있었다.

  선동하는 건 문자 그대로 식은 수프를 들이키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감히 로마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흉노와의 싸움에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은 배은망덕한 국가.

  이 한마디만으로 원로원과 시민들의 태도는 불같이 달아올랐다.

  어차피 비단의 양산도 끝났고 찻잎의 제배도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으니 수입을 끊어버려도 로마엔 별 타격이 없었다.

  오히려 부가 해외로 유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이득이 훨씬 컸다.

  본래 한으로 가야 할 돈이 모조리 마르쿠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굳이 설탕의 수출까지 제한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한을 경제적으로 귀속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면 오히려 로마의 물품들을 적극적으로 수출해야 하지 않겠나. 커피와 설탕의 조합은 한에서도 호평이 자자하다고 자네가 직접 그랬던 걸로 기억하는데."

  "딱히 제한을 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한에게 독점적으로 제공하는 물건을 타국에도 풀어주는 거죠."

  "그 독점 수출에 대한 보상으로 상당히 쏠쏠한 이득을 누리고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괜히 수출경로를 다변화해서 이익이 깎이는 건 아닌지 걱정되는 걸세."

  "조금 깎이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새로 수출할 품목들이야 지금도 열심히 개발 중에 있으니까요. 몇  년만 있으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득이 불어날 겁니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터지지 않게 금융 쪽을 미리 손봐둬야죠."

  마르쿠스의 강한 자신감에 걱정은 접어두었지만, 여전히 의문점 하나는 사라지지 않았다.

  "혹시 자네는 한이 장래 로마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설마요. 한은 이미 저물고 있는 달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봐야 로마를 어떻게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먼 미래를 가정한다면  꽤나 귀찮은 상대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마르쿠스가 말하는 먼 미래가 어느 정도인지는 카이사르조차 짐작하지 못했다.

  가끔 마르쿠스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수백 년, 천년 뒤의 미래를 논하곤 했는데 지금도 그런 일환에서 꺼낸 말인 듯싶었다.

  "이제 대충 이해가 가는군. 장래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 싹을 잘라내겠다 이 뜻인가? 그런데 그럴 거면 오히려 경제적으로 더욱 예속을 시켜놓은 상태에서 끊어버리는 게 효과가 더 크지 않을까? 지금처럼 하면 오히려 저들이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모양이 될 텐데."

  "지금 당장 한나라의 숨통을 끊고 말고는 중요치 않습니다. 딱히 관심도 없고요."

  "음? 하지만 지금 밟아놔야 먼 미래에서 봤을 때도 힘을 못 쓰지 않겠나."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뛰어난 지혜를 가지고 있는 카이사르라도 이런 점에서는 마르쿠스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어쩔 수 없다.

  역사의 흐름을 전부 꿰고 있는 마르쿠스와 달리 카이사르는 어디까지나 현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인 까닭이다.

  게다가 중원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동양의 질서에 대해서도 무지한 그가 마르쿠스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였다.

  "한의 중심인 천자는 단순한 왕의 개념이 아닙니다. 굳이 이쪽에서 비슷한 개념을 따지자면 페르시아의 샤한샤나 이집트의 파라오 같은 거라고 해야 하겠죠. 동양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저 두 개를 다 합친 만큼의 파급력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 할 겁니다."

  "그런 거였군."

  카이사르는 확실히 범인과는 달랐다.

  그 정도의 설명을 들은 것만으로도 마르쿠스의 의도를 대강이나마 짐작한 눈치였다.

  "한을 망하게 해봐야 소용 없습니다. 새로 일어난 국가가 자신이 중원의 천자임을 자처하며 그 자리를 차지할 테니까요."

  "그럼 중원의 국력을 약화시켜서 이민족이 그곳을 차지하게 놔두는 건 어떻겠나? 우리의 지원을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알렉산드로스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파라오의 자리에 오른 것과 비슷합니다. 설령 흉노가 다시 부흥해 한을 정복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고 하더라도 그들 역시 천자를 칭할 겁니다. 한족을 정벌한다고 해도 그들이 세워놓은 초국가적인 질서에 흡수당할 뿐이란 겁니다."

  카이사르가 이제야 알겠다는 듯 무릎을 탁 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렇군. 자네가 하려는 건 천자라는 개념의 위치를 실추시키려는 것인가?"

  만약 천자가 더 이상 세계의 중심이자 천하를 통치하는 자의 대명사가 아니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이후의 정복자들도 천자를 칭할 이유가 없게 된다.

  마르쿠스가 굳이 파라오의 칭호에 목을 매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동양의 모든 국가들이 더 이상 한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알게 하는 게 제 목표입니다. 이미 몇 년 남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소문은 도는 법이고 그들도 곧 알게 되겠죠."

  마르쿠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지금 세계가 어딜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지를."

  < 259. 로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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