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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 후계 구도 (261/326)

  < 260. 후계 구도 >

  260.

  카이사르는 결국 한에 대한 로마의 대응을 전부 마르쿠스에게 일임하는 데 동의했다.

  인도라면 몰라도 그보다 더 동쪽에 있는 한나라는 사실 카이사르에게도 미지의 존재였고, 사실 아직까진 그렇게 큰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보아하니 마르쿠스가 세우고 있는 계획도 최소 수십 년에서 길면 백 년까지 시간을 요하는 듯싶었다.

  자신이 살아서 결과를 볼 일이 없을 테니 마르쿠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카이사르가 한나라에까지 열정적으로 관심을 기울일 정도의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자, 그러면 이제 오늘의 일도 다 끝났으니 휴식을 가져보도록······."

  마르쿠스가 어깨를 쭉 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던 찰나,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옆에서 경호를 서고 있는 스파르타쿠스에게 향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방문객을 살폈다.

  활기찬 여인의 목소리와, 조금 멋쩍어하는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 갔나 했더니 소피아에게 붙들려 있었나 보군. 서류 작업이 싫어서 도망간 줄 알았는데.'

  누가 왔는지는 곧바로 파악이 됐지만 일단 스파르타쿠스가 보고할 때까지는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공적인 업무 시간에 아는 사이라고 절차를 생략하는 모습을 보이는 건 모범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마르쿠스 님, 소피아 님과 옥타비우스가 왔습니다."

  "일도 막 끝났으니 들어오라 해라."

  허가가 떨어지자 재빠른 걸음으로 소피아가 들어왔다.

  만면에 난처한 미소를 띠고 그녀의 뒤를 따라온 옥타비우스와 달리 소피아는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마르쿠스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일은 다 끝나셨나요?"

  "그래, 너도 오전 수업은 다 끝났나 보구나. 로마는 잘 지낼만하고?"

  근엄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누가 봐도 입가가 미친 듯이 씰룩이는 게 통제가 되지 않았다.

  딸 앞에만 서면 광대가 승천하는 그 모습이 워낙 익숙했던지라 이제 다른 사람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르쿠스의 옆에 찰싹 붙어 앉은 소피아는 책상 위에 있는 엄청난 양의 서류더미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

  "우와, 이걸 오전에 다 처리하신 거예요?"

  "물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랑 차를 함께 마실 시간이 줄어들지 않니."

  "헤헷."

  기분 좋은 듯한 웃음소리를 낸 딸에게 마르쿠스도 마주 미소를 지었다.

  꼭두새벽부터 과도한 업무량으로 쌓여있던 고통이 눈 녹듯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직장인들이 아무리 힘들어도 퇴근하고 반겨주는 딸을 보면 피로가 사라진다고들 했던 건가?'

  뒤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옥타비우스가 쭈뼛쭈뼛 다가와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제가 옆에서 도와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하게 됐습니다. 소피아 님이 아침 수업이 끝난 뒤에도 영 놓아주시질 않으셔서······."

  "상관없네. 자네 덕분에 저 아이가 즐겁게 놀았다면 그걸로 됐어."

  인자하기 그지없는 마르쿠스의 목소리에 옥타비우스가 내심 안도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소피아는 예전처럼 마르쿠스의 무릎 위에 앉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이제 다 큰 여성이 아직도 아버지 무릎 위에서 논다는 소문이 퍼지면 곤란했다.

  "그래, 둘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체스를 두고 있었는데 좀처럼 어느 한쪽으로 확 기울지 않아서 머리 좀 식히려고요. 마침 아버지도 지금쯤이면 일이 다 끝나셨을 것 같아서 같이 이야기나 좀 하러 왔지요. 할아버지도 괜찮으시죠?"

  애교가 듬뿍 담긴 목소리에 카이사르도 그저 좋다고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율리아의 지성과 아름다움을 그대로 물려받은 소피아에게 엄격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율리아를 제외하면 가문에 아무도 없었다.

  과장 좀 보태자면 그녀야말로 가문의 최고 실권자라 할 수 있으리라.

  본래 로마는 가부장적인 사회라 아들 쪽이 더 대접을 받는 경향이 있었지만, 마르쿠스의 가문은 완전히 반대였다.

  집안의 가장이 완벽한 딸바보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냥 무작정 딸이라고만 예뻐하는 건 아니었다.

  애교가 많고 사랑스럽다는 걸 제외하고도 소피아는 마르쿠스와 대화가 통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옥타비우스를 항상 데리고 다니는 이유도 그래서였다.

  카이사르나 마르쿠스는 언제나 바빴고, 가문의 안주인인 율리아도 언제나 무언가 일을 하고 있었기에 대등한 수준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쌍둥이 동생인 트라야누스나 다나에의 아들인 아킬레스는 주로 몸을 쓰며 움직이는 걸 더 좋아해 취미가 맞질 않았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의 딸은 아직 어려서 대화는커녕 소꿉장난이나 하면서 놀아줘야 하는 대상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옥타비우스 외에는 어울릴 사람이 없었다.

  반면 옥타비우스는 옥타비우스대로 복잡한 심정이었다.

  그 역시 이야기가 잘 통하고 높은 지성을 갖춘 소피아와 어울리는 게 즐겁긴 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주도권이 완벽하게 소피아 쪽으로 쏠려 있다는 게 문제였다.

  옥타비우스는 보통의 로마인들처럼 상당히 가부장적인 기질을 지닌 사람이었다.

  원 역사에서도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가부장권, 파트리아 포테스타스를 거리낌 없이 사용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마르쿠스와 카이사르의 사랑을 온몸에 받는 소피아 앞에서는 한 마리의 순한 양처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말로 휘어잡아 조종할 수 있으면 모르겠는데 소피아는 부모의 지성을 그대로 물려받은 사람이라 그것도 불가능했다.

  심지어 다른 동생들처럼 체력도 좋고 활기도 넘쳐 이리저리 끌려다니기 일쑤였으니 지치는 게 당연하리라.

  그런데 이게 또 마냥 싫지만은 않다는 게 불가사의한 심정이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심란한 옥타비우스는 내버려 둔 채 소피아는 마르쿠스의 책상 위에서 눈에 띄는 문서를 발견하고 눈을 빛냈다.

  "원로원 의원들의 동향도 이렇게 보고가 올라오나 보네요. 신기해라."

  "혹시 몰라 말해두자면 감시를 하는 건 아니란다. 그냥 공적인 업무에 관해서만 보고를 받는 거지. 원로원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야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할 수도 있고, 원하는 정책을 더 쉽게 통과시킬 수도 있으니까."

  "이걸 보아하니 카토 아저씨는 여전하신가 보네요. 아직도 정정하시니 다행이에요. 키케로 할아버지도 그렇고 다들 착한 분이셨는데."

  소피아가 로마에 왔을 때 몇 번인가 두 사람을 연회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두 사람도 당연히 마르쿠스의 딸이자 총기가 넘치는 소피아를 귀여워했고 잘 대해주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이런 식으로 밀려난 카토와 키케로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듯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사적으로는 가깝게 지내고 싶지만, 그들이 가진 신념은 로마를 결국 퇴보로 몰아넣을 뿐이란다. 권력의 중심에서 배제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건 저도 공감하는데 그래도 카토 아저씨가 세력을 모을 수 있게 몰래 지원해줄 필요는 있지 않을까 싶어요. 세력이라고 해봐야 거창한 건 아니고··· 같이 싸워줄 의원 한두 명 붙이는 정도로?"

  흐뭇하게 이야기를 듣고 있던 카이사르가 관심을 드러냈다.

  "이유를 말해줄 수 있겠니?"

  "그거야 두 분은 카토 아저씨를 허울뿐인 반대세력으로 남겨두시려는 거잖아요. 그래야 우리 쪽 의원들의 단결력도 더 좋아지고 반대파에게 꼬투리 잡히지 않으려고 눈곱만큼이라도 주의를 기울일 테니까요."

  딱히 이야기를 들려준 적도 없는데 그녀는 마르쿠스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언제나 옥타비우스와 붙어 다니면서 이야기를 했을 테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리라.

  마르쿠스가 계속하라는 눈짓을 보내자 소피아가 태연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카토 아저씨는 원로원에서 거의 고립무원의 상태잖아요. 그나마 뒤를 봐주던 키케로 할아버지랑도 완전히 틀어져 버렸으니까 아무런 기반이 없죠. 이런 상황에서는 허울뿐인 반대세력조차 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내 쪽에서 몇 명 더 붙여주는 게 나을 거다, 이 말이로구나."

  "그렇죠. 최소한은 구색은 갖춰놔야 의견이라도 개진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건강한 반대세력의 존재는 꼭 정략적으로만 가치를 지니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반대 의견에 논리적인 이유가 있다면 정책을 한 번쯤 더 고찰해 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잖아요?"

  "하하하, 우리 손녀가 아주 총명하구나."

  카이사르가 흡족한 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소피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편으로는 손자인 트라야누스가 그녀의 절반만큼이라도 따라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손녀인 소피아의 재능이 아깝다는 마음도 들었다.

  만약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카이사르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 자신의 핏줄이기도 한 그녀에게 모든 걸 물려주려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마에서 여인은 그런 위치에 오를 수 없었다.

  먼 훗날이라면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무리였다.

  자연히 눈길이 소피아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옥타비우스에게 향했다.

  마르쿠스의 심복이기도 하고 카이사르의 친척이기도 하니 신분 자체는 걸릴 게 없었다.

  만약 소피아와 옥타비우스가 이어진다면 이보다 좋은 그림이 나올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둘을 결혼시킨 뒤 실권을 모계 쪽으로 돌려버리는 건 어떨까.

  이건 현실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마르쿠스가 과연 어떤 안배를 두고 있을지가 가장 중요했으나 하나의 선택지로 염두에 두는 건 나쁠 게 없어 보였다.

  이윽고 차를 두 잔 정도 마실 때까지 수다를 떨던 소피아는 만족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르쿠스는 옥타비우스를 거의 끌고 가다시피 밖으로 나가는 딸의 뒷모습을 마냥 좋다는 듯 싱글벙글 웃으며 바라보았다.

  카이사르도 별반 다르지 않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착하기도 하고 통찰력과 지혜도 두루 갖추고 있는 게 꼭 어렸을 때의 율리아를 보는 것 같구만."

  "장인어른께서 율리아를 얼마나 사랑하셨을지 대강 짐작이 갑니다."

  "하지만 딸아이가 너무 똑똑하면 좋기도 하면서 안타까운 마음도 든다네. 자네도 그렇겠지?"

  "제가요?"

  "저렇게 똑똑한 아이가 가문을 이어받을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나?"

  마르쿠스가 진심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없는데요."

  "······."

  진성 딸바보 마르쿠스는 딸이 똑똑하고 사랑스러우면 그저 그걸로 좋았다.

  카이사르의 어이없다는 눈빛이 적나라하게 꽂혀 들어왔다.

  "그래도 조금은 생각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 이제 슬슬 후계구도도 생각을 해봐야지. 나야 뭐 자네에게 물려주면 그만이니 손녀 손자들을 마음껏 예뻐하기만 하면 되는데 자넨 아니지 않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 생각해둔 바가 있으니까요."

  "그래? 그럼 나도 그 고견을 좀 들어볼 수 있을까?"

  "소피아는 트라야누스보다 훨씬 더 머리가 좋은 아이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쭉 그랬고 앞으로도 그 애는 누나 앞에서는 찍소리도 하지 못할걸요. 만약 옥타비우스가 옆에 있다면 더더욱 그렇겠죠."

  "하지만 집안의 가장이 될 사람은 트라야누스 그 아이라네. 그건 그리 좋은 상황이 아니야. 소피아는 소피아대로 불만이 쌓일 수도 있고. 두 사람의 능력이 합쳐지면 트라야누스를 밀어내고 옥타비우스 쪽으로 권력을 집중시킬 가능성도 충분하지 않겠나."

  어차피 그런 상황이 벌어질 거라면 처음부터 소피아와 옥타비우스를 밀어주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카이사르의 의도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마르쿠스 역시 수많은 가능성을 하나하나 검토하며 가장 이상적인 후계구도가 무엇일지 고민을 했었으니까.

  "아직 시간이 있으니 한 가지 경우로 가능성을 좁혀놓진 않았습니다. 마침 이 다음 일정이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와 관련되어 있으니 거기서 마저 이야기를 나눠 볼까요?"

  "다음 일정이라면 분명······."

  "예. 사관학교의 설립 기념행사입니다. 제가 직접 수석 입학생도에게 축사를 읊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이름이 어디 보자······."

  마르쿠스가 일부러 한 차례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입니다."

  < 260. 후계 구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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