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1. 후계 구도 >
261.
사관학교의 건립 준비는 마르쿠스가 대권을 잡기 전부터 추진해 왔었다.
로마는 본래 성인이 된 원로원 자제들과 귀족들을 군대에 파견해 경험을 쌓게했다.
비유하자면 이들이 미래의 예비장교라 할 수 있다.
군제 개혁으로 징병제에서 모병제에 가깝게 변했음에도 이 전통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르쿠스는 미래의 원로원 의원들이 군대 경험을 가지는 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성인 남성의 상당수가 전장에 나가는 구조인 이상 지도층이 군 복무 경험이 없다면 이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을 그대로 쓴다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길 거라는 것도 대충 예상이 됐다.
이유는 간단했다.
로마는 이제 예전처럼 실전을 통해 장교를 육성하는 게 점점 불가능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로마군이 고대에서는 나름 체계적인 체제를 갖추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한계는 명백했다.
당장 포에니 전쟁이 끝난 뒤의 로마는 엄청난 저력으로 동방의 왕조들을 손쉽게 때려눕혔다.
그러나 더 이상 적이 없어지자 수십 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군단의 질이 떨어졌다.
자영농의 몰락과 겹쳐서 병사들의 전반적인 수준이 떨어진 것도 원인이었지만, 지휘관들의 무능력역시 변명할 여지가 없었다.
술라나 마리우스 같은 천재가 나오지 않았으면 로마는 북쪽에서 밀고 내려왔던 야만족조차 제대로 상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군단을 지휘하게 될 지휘관들의 수준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꾸준히 유지할만한 수단이 필요하다.
병사들의 질은 군단 내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거듭하는 것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
그러니 지휘관들을 전문적으로 육성할만한 기관을 세우는 게 먼저다.
마르쿠스의 이런 주장에 원로원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시민들이야 당연히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마르쿠스는 원로원의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곧장 로마와 동방 속주에 본격적인 사관학교를 설립했다.
귀족들도 군역의 의무를 져야 한다는 로마의 전통도 충실히 반영해두었다.
원로원에 입성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은 군에 지원해 일반병으로 복무하거나 사관학교에서 기초교육 정도는 수료해야 할 것이다.
사회의 지도층이 될 사람들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이유에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어차피 로마에서 정치적인 커리어를 쌓으려면 군에 지원하는 건 지금까지 당연한 일이었기에 반발도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더 편해진 거 아닌가? 멀리 있는 군단에 파견 나가서 구르는 것보다는 로마 인근에 있는 사관학교란 데에서 교육을 수료하면 되는 거잖아."
"듣고 보니 그런데? 마르쿠스 님께서 오히려 우리의 사정을 봐주려고 그러신 것 같구만."
"그런데 그만큼 교육이 힘들다는 거 아닌가?"
"오히려 좋지. 그만큼 우리 로마군의 수준이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을 테니까."
마르쿠스가 미래의 젊은 의원들을 사관학교에서 교육받게 한 이유는 단순히 그들만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사회지도층은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였으나 진짜 노림수는 다른데 있었다.
사관학교에서 지휘관들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는 이상 장래 군의 수뇌부들은 대다수가 사관학교 출신들로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사관학교의 총장은 마르쿠스였다.
이 자리만큼은 대대로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물려줄 생각이었다.
즉, 군단의 통수권자도 마르쿠스이며 장교들을 육성하는 기관의 수장 역시 마르쿠스의 가문이 맡게 된 셈이다.
로마의 군권을 합법적으로 틀어쥘 수 있다는 뜻이었다.
마르쿠스는 그 계획의 시발점이 될 1기 생도들을 흐뭇한 표정으로 쭉 둘러보았다.
귀족자제들과 여러 시험을 통과해 선발된 평민 출신의 생도들의 얼굴에는 각양각색의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떤 이들은 긴장한 것 같이 보였고 또 어떤 이는 흥분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자신들의 앞에 있는 마르쿠스에게 더없는 선망의 눈길을 보내고 있단 점 정도였다.
누구보다 발 빠르게 사관학교에 지원한 이들은 대다수가 군에서 출세할 야망이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그게 아니면 군인이 되어 나라와 시민들을 수호하겠다는 뜻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들에게 있어서 마르쿠스는 전설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었다.
어쩌면 마르쿠스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비결을 전수받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기대감을 품질 않는 게 이상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마르쿠스라는 이름이 가진 존재감은 너무 컸다.
마음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지만 정작 몸은 석고상처럼 굳어져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게 딱 보였다/
"이 자리에 모인 그대들을 환영한다.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니 자기소개를 하마. 내가 앞으로 그대들을 책임질 마르쿠스 크라수스다."
설마 모르는 사람이 있겠냐며 모두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소 경직된 분위기가 풀어진 걸 확인한 마르쿠스가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여러 차례 설명을 들었을 테니 이곳이 어떤 곳인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군은 국가를 수호하고 시민들을 지키는 방벽이다.
그리고 군의 지휘관이 잘못된 판단을 한다면 자신만 죽는 게 아니라 자신이 이끄는 병사들까지 전부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된다. 군이 무너지면 곧 국가와 시민들은 적의 위협에 무방비로 노출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지휘관의 판단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할 수 있다는 뜻이다.
"
생도들의 눈에 자연히 결연한 빛이 스쳐지나갔다.
따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들 중 상당수가 흉노 전쟁에서 대패했던 라리사 회전을 떠올렸다.
한 번의 패배로 무려 20만에 달하는 장병들이 죽었고, 로마가 패배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국토 전역을 뒤덮었었다.
"따라서 군을 이끄는 지휘관들은 언제나 냉철하고 이성적인 사고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동시에 그 사고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이론적인 근거와 전술, 전략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마르쿠스가 중간열에 서있는 생도 한 명을 앞으로 불러내 자신의 앞에 세웠다.
"그대들을 선별할 때의 평가기준은 내가 앞서 말한 바와 같았다. 여기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둔 이는 그대들의 앞에 선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다. 아그리파, 그대가 대표로 훈련에 임하는 생도들의 각오를 대변해 보도록."
긴장으로 딱딱하게 얼굴이 굳은 아그리파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손을 들어올렸다.
"저희들은 위대한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의 교육을 충실히 수행해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은 능력을 가지고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저의 모든 능력과 심장을 위대한 로마의 영광을 위해 바치겠습니다."
아그리파가 손으로 왼쪽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외쳤다.
"로마를 위하여!"
뒤에 있는 생도들도 일제히 같은 동작을 따라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로마를 위하여!"
그들의 젊은 패기와 열정을 만족스럽게 지켜본 마르쿠스는 뒷일을 부하에게 맡기고 자리를 떴다.
옆에서 모든 과정을 쭉 지켜보고 있던 카이사르가 작은 목소리로 감탄사를 속삭였다.
"이제 그야말로 모든 걸 손에 넣게 됐군. 이제야 왜 자네가 로마 그 자체라고 했는지 알겠네."
"사실 저보다는 후대를 위해서 한 일입니다. 제가 살아있을 때는 굳이 이런 과정을 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통제력을 발휘할 수 있으니까요."
"하긴 그도 그렇군. 그러면 지금부터 작업에 들어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안 그래도 그렇게 할 겁니다. 일단 방금 전 대표로 선서를 했던 아그리파를 소피아의 보좌로 붙여줄 예정입니다."
"자네도 결국 나와 별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게로군."
카이사르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깨물었다.
자식들의 능력을 고려해봤을 때 당연히 소피아를 밀어주는 게 옳긴 했다.
트라야누스는 군사적인 재능은 있을지 모르겠지만 국가를 이끌어나가는데 필요한 재능은 그게 아니다.
게다가 소피아의 옆에는 옥타비우스까지 있으니 정치적인 수완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여기서 무리하게 트라야누스의 손을 들어주면 숙청의 바람이 불거나, 궁중 암투가 격화될 우려가 있다.
문제는 군권을 어떻게 장악하냐는 것인데 아그리파를 소피아에게 붙이고 사관학교를 그녀에게 통째로 넘긴다면 문제가 해결된다.
마르쿠스는 아그리파에게 여왕을 수호하는 기사와 비슷한 이미지를 부여할 생각이었다.
다만 그러려면 몇 가지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카이사르는 예리하게 그 점을 파고들며 질문을 던졌다.
"트라야누스는 자신이 가장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 그 아이를 달래줄 방법은 생각해 보았나? 그리고 아들이 있는데도 딸에게 실권을 몰아주는 건 로마의 보편정서에 어긋나는 행동일세. 이걸 납득시킬만한 과정도 생각해 놓았겠지?"
마르쿠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즉답했다.
"트라야누스와는 오래전부터 이야기를 나눠 봤습니다. 그 아이는 저처럼 할 수 없을 까봐 옛날부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고, 훨씬 더 똑똑한 누나에게 의존하는 경향도 강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오히려 아그리파와 함께 군권을 장악하는 쪽에 힘을 보태라고 하면 좋아라 할 겁니다. 그리고 소피아를 직접 여제로 내세울 마음은 없습니다. 그래도 불안한 요소가 있긴 하니 지금부터 미리미리 작업에 들어가야겠죠.
"
"소피아를 여제로 만들 생각이 없다? 방금 자네 입으로 소피아를 후계자로 삼겠다 하지 않았나?"
"소피아는 여제가 아니라······."
회심의 미소와 함께 말이 이어졌다.
"여신이 될 겁니다."
찰나의 순간 눈을 동그랗게 뜬 카이사르가 이내 전부 이해했다는 듯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신격화 작업을 하겠다는 거로군. 좋은 방안이라고 생각하네. 즉시 진행시키도록 하지."
고대에서 지배자가 신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건 너무나 흔하디흔한 프로파간다였다.
유대교의 경우 신의 기름을 부음 받은 자, 이집트는 태양신의 화신, 중원의 천자는 하늘의 아들, 그리고 원 역사에서의 로마 황제도 자신을 신이라 칭했다.
물론 고대의 사람들도 바보는 아니라 아무런 근거 없이 자신을 신이라 해봐야 마음속으로는 비웃는 이들이 더 많았다.
원 역사에서의 로마 황제 역시 진심으로 이들이 신이라 생각하는 이들은 의외로 적었다는 학설도 있다.
이런 점에서 마르쿠스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신과 관련이 있다는 말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신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면 이뤄낼 수 없는 업적들이 너무 많아 주변에서 그를 신의 사도라 추켜세우는 형국이었다.
대지의 여신 케레스의 지혜를 받은 자이자 물의 여신 테티스의 가호를 품은 자.
군신 마르스의 위업을 이룬 자 등등 신의 이름이 너무 많이 붙어 낯 뜨거울 정도로 칭호가 많았다.
거기에 카이사르는 공식적으로 신의 대행자라는 명칭을 수여받은 로마의 최고 신관이었다.
이 두가문의 결합에서 태어난 여인이 여신의 화신이라는 건 로마인들에게는 엄청난 설득력을 지녔다.
마르쿠스는 여기에 현대 지식의 정수가 담긴 화장법을 율리아와 소피아에게만 알려주었다.
당대에 구할 수 있는 온갖 천연재료를 끌어 모아 여러 번의 시행착오 끝에 만든 화장품과 화장법으로 두 사람의 미모를 한층 더 빛나게 하는데 성공했다.
안 그래도 원래부터 아름답기로 명성이 자자했던 여인들이다.
마르쿠스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결집해 개량한 비단옷과 세련된 화장법, 그리고 눈이 절로 돌아가는 장신구들로 치장한 아내와 딸은 현 시대에서는 인세에 강림한 여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낼 때면 여신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지어 로마 거리를 가득 매웠다.
어떻게 보면 마르쿠스보다 인기가 더 많은 게 아닐까 생각될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속내를 간파한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아들이 가문을 물려받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율리아였다.
집안에 괜한 풍파가 일지 않을까 우려하던 그녀는 마르쿠스의 의도를 단숨에 알아차렸다.
남편의 결정에 한 번도 이의를 제기한 적이 없는 그녀였지만, 가족의 문제에 관한 일만큼은 아무런 설명도 듣지 않고 넘어갈 수 없다고 여겼다.
밤이 깊은 고요한 어느 고요한 날.
그녀는 정식으로 마르쿠스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납득이 가는 말을 들려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죠? 당신 설마 트라야누스가 아닌 소피아를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요?"
< 261. 후계 구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