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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 후계 구도 (264/326)

  < 263. 후계 구도 >

  263.

  다른 로마인들이라면 펄쩍 뛰었을만큼 통념과 동떨어져 있는 선언이었다.

  그럼에도 옥타비우스는 담담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받아들였다.

  머릿속으로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계산해본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 후계자는 소피아 님으로 확정됐다고 보면 되는 거로군요."

  "율리아가 트라야누스와 이야기를 해보러 갔다. 그 뒤에도 그녀가 내 의견에 찬성해 준다면 그렇게 되겠지."

  "트라야누스 님은 오히려 좋아할 겁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죠. 일단 한 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소피아 님이 후계자가 되는 건 어째서입니까? 평소에 따님에 대한 총애가 각별하셨기 때문인가요?"

  "그 아이가 능력이 훨씬 좋으니까. 트라야누스는 대제국을 경영할만한 그릇이 못돼. 아킬레스는 다나에의 아들이니 처음부터 고려 대상도 되지 못하고. 단지 그뿐인 이유다."

  아버지로서 딸을 사랑한다고 해도 고작 그런 이유로 국가의 대사를 결정하는 머저리는 아니었다.

  마르쿠스도 소피아와 트라야누스가 능력이 바뀌었으면 훨씬 편했을 거라는 생각은 줄곧 해왔다.

  만약 트라야누스가 소피아만큼의 능력이 있었다면 쾌재를 부르며 그를 후계자로 삼았을 것이다.

  "아무리 살아있는 여신으로 신격화를 한다고 해도···아니, 일단 거기부터 위험부담이 꽤 큽니다."

  "능력이 부족한 자에게 후계자를 물려주는 게 훨씬 더 위험부담이 크겠지."

  "그것도 그렇죠. 하지만 그냥 트라야누스 님에게 자리를 물려주시고 저와 소피아 님이 보좌를 해주는 방식도 있습니다. 이게 더 안정적인 방법이 아닐까요?"

  "이번 대에만 한정 지어서 생각하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방식을 취하는 것 자체가 결국 신으로서의 권위에 손상을 입히는 행위일 수도 있어. 어려운 문제야."

  옥타비우스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솔직히 마르쿠스의 말대로 트라야누스가 후계자가 된다면 자신이 실권을 쥘 수 있단 확신이 있었던 까닭이다.

  혼자라면 모르겠지만 소피아와 결혼을 해서 그녀의 권위를 등에 업으면 못하는 게 더 이상했다.

  마르쿠스가 후계자의 권위를 위해 조치를 취해두겠지만, 기초적인 능력차이가 너무 크면 그것도 유명무실해질 우려가 있었다.

  "몇 가지 우려되는 문제점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능력 위주의 상속이라는 건 확실히 괜찮은 방법이긴 합니다. 선택지의 폭이 넓어지니까요. 아들을 보지 못했거나, 지금처럼 아들의 그릇이 받쳐주지 못할 때 더 나은 선택지를 고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로마는 엄격하게 부계상속을 하고 있습니다. 소피아 님이 후계자가 되면 불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생길 겁니다."

  "그 부분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지. 이건 율리우스 리키니우스 가문에게만 적용되는 사항이라고. 이유는 앞서 말했다시피 우리 가문의 일원들은 신의 핏줄이자 살아있는 신으로 승화될 잠재성을 지닌 이들일세. 그러니 일반적인 기준이 적용될 수 없지. 오롯이 우리 가문만이 다른 로마인들과 완벽히 구분지어지는 건 정치적인 구도로 봐도 나쁜 모습은 아니야."

  "그런 측면에서도 볼 수 있겠군요. 그럼 만약 저와 소피아 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식이 아들이라면 그 아이가 살아있는 신이 되어 후계자가 되는 겁니까?"

  "그렇게 되겠지."

  옥타비우스가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의문이 해소된 것은 아니라는 듯 재차 질문을 던져왔다.

  "구상대로만 흘러간다면 저도 이의는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넘어야 할 난관이 많습니다. 신의 후예, 신의 은총을 받는 사람이라는 구호에 거부감을 느낄 로마인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신으로 추앙되는 건 넘어야 할 문턱이 한 계단 더 높습니다. 마르쿠스 님이야 가능할 테지만 소피아 님이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하니까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거 아니겠나."

  마르쿠스는 딱히 고대 사회에서의 가부장제가 잘못 됐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육체노동이 주를 이루는 사회에서 노동력의 가치는 당연히 사람의 가치를 대변할 수밖에 없다.

  다만 굳이 몸을 쓸 필요가 없는 위치나 신분이라면 선택지의 폭을 늘려놓는 게 더 실용적일 것이다.

  사실 이렇게 해놓아도 어지간한 경우라면 후계자는 남자아이가 될 확률이 높긴 할 것이다.

  이건 트라야누스와 소피아처럼 이례적으로 한쪽으로 능력치가 기운 이례적인 경우가 생겼을 때를 위한 조치에 가까웠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한쪽 성별의 아이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을 경우에 대한 대책도 됐다.

  '문제는 후계자를 정하지도 못하고 죽는 경우겠지.'

  안정적으로 계승만 한다면 절대로 권위가 흔들리지 않을 시스템은 만들 수 있다.

  암살 문제도 리스크를 0으로 만드는 건 불가능하고 최대한 줄이는 선에서는 방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병이나 천재지변으로 급사해버리는 것만큼은 마르쿠스도 어쩔 방도가 없었다.

  최악의 경우를 고려해 이중삼중으로 안전망을 깔아놓을 필요가 있었다.

  몇 가지 방식들을 이미 생각해 두긴 했지만, 그것들은 전부 후계자의 권위가 반석처럼 안정되어 있을 때 가능한 것들이었다.

  이게 성공하기 위해서는 결국 돌고 돌아서 신격화 작업이 중요하다는 결론으로 귀결된다.

  후계자를 어떤 방식으로 물려주든 그와 상관없이 가문의 구성원들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작업은 이뤄져야 한다.

  옥타비우스는 이 부분이 쉽지 않을 거라 예상했으나 그건 그가 마르쿠스가 비축해두고 있는 지식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일부러 쓰지 않고 아껴둔 카드는 산더미처럼 많이 쌓여 있었다.

  로마의 전권을 장악한 상태이니 예전처럼 죽 쒀서 개줄 꼴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직 시간도 충분히 남아 있다.

  어쩌면 이렇게 분주하게 준비해도 마르쿠스가 너무 장수해 소피아가 먼저 세상을 뜨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지금 마르쿠스가 해야 할 일은 이 제국이 수백 년을 넘어 수천 년간 존속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는 일이었다.

  이 작업은 단순히 몇 년에 걸친 개혁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 마르쿠스가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 계속해서 진행시켜도 부족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후계 구도에 관해서는 대강 이해했습니다. 마르쿠스 님이 크라수스 님처럼 정정하시다면 소피아 님이 자리를 물려받는 건 못해도 이삼십년 후일 테니 준비할 기간도 충분합니다. 분명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계실 텐데 이다음으로 착수할 사업은 무엇입니까?"

  눈치가 빠른 옥타비우스는 먼저 말하기도 전에 마르쿠스가 하려는 걸 이해하고 운을 띄웠다.

  언제라도 격무에 매진할 준비가 되어 있는 훌륭한 비서의 표본이다.

  물론 사장인 마르쿠스도 날밤을 새서 일에 매진하니 어쩔 수 없이 따라가는 것일 테지만.

  "로마는 이미 많은 분야에서 주변 국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농업도, 금융도, 군사력도, 그리고 그 군사력을 뒷받침하는 다양한 기술도 족히 수백 년은 앞서 나가고 있다고 봐야겠지."

  "다 마르쿠스 님의 손길이 닿은 덕분입니다."

  정상적인 개발기간을 밟았다면 천년하고도 수 백년 은 더 지난 뒤에야 탄생하는 개념을 적용중인 산업도 있었다.

  "다만 한 가지 아직 제대로 된 걸음마조차 떼지 못한 분야가 있어. 심지어 장기적으로 보면 그 중요도가 결코 낮지 않은 학문이란 게 마음에 걸리는군."

  "혹시 선박이나 해상 운송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물론 그 분야도 개선이 더 필요하긴 하지. 하지만 종래의 갤리선보다 대양 항해에 적합한 배를 개발하는 건 이미 연구에 착수했다. 아마 몇 년 안에 대략적인 결과가 나올 거야. 내가 집중적으로 손을 대려는 건 화학 쪽인데 이 분야만큼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얼마만큼의 진보가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 걸린단 말이야."

  "화학?"

  당연히 돌아오는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지금 시대는 기초적인 화학의 개념도 제대로 정립된 시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화학의 정의가 물질의 구조와 변화를 연구하는 분야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이와 비슷한 학문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데모크리토스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물질의 근본요소에 대해 고찰한 바 있었다.

  엠페도클레스가 제창한 세상 만물이 흙, 불, 물, 공기의 4가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는 4원소론은 현대에도 유명했다.

  여기에 민간 신앙이나 그리스의 철학, 점성술 등 온갖 분야가 결합되어 생겨난 학문이 있다.

  "연금술의 기반이 되는 거라고 생각하면 대충 감이 올 거다. 뭐, 정확히 따지고 들면 조금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지금 단계에서는 연금술을 일컫는 거라고 하는 게 이해가 더 잘 될 테니까. 연금술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그거야 당연히 알고 있죠. 미다스에게 부여됐었다는 모든 걸 황금으로 변하게 하는 바쿠스 신의 권능을 재현하려는 연구가 아닙니까. 지금은 이집트의 연구수준이 그리스보다도 더 높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걸 손보겠다고 하심은······."

  옥타비우스는 이미 이집트가 한참 전에 마르쿠스의 밑으로 들어갔음을 떠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신들의 지혜를 물려받은 마르쿠스라면 연금술의 비의를 이미 꿰뚫어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기대와 경의로 잔뜩 부풀어 오른 그의 두 눈이 반짝였다.

  "납을 금으로 만드는 방법을 알고 계시는 거로군요! 그렇다면 정말 엄청난 상징이 될 겁니다."

  연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금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그를 통해 자신의 영혼을 완벽하게 승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미 마르쿠스가 연금술의 극의를 깨닫고 있을 거라고 결론을 내린 옥타비우스는 잔뜩 흥분한 채로 말을 이어나갔다.

  "이게 가능하게 된다면 누구도 마르쿠스 님의 신성성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겁니다. 그야말로 현세에 강림한 신!"

  "잔뜩 흥이 오른 와중에 미안한데 그건 불가능하다."

  "예?"

  어리둥절한 옥타비우스의 반응을 뒤로하고 마르쿠스는 담담하게 고대의 모든 권력자들이 바라던 염원에 사형선고를 내렸다.

  "연금술 같은 거 불가능하다고."

  엄밀히 말하면 옥타비우스의 예상이 틀린 건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분명 연금술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연금술이라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한 허구의 소산이라는 걸.

  "사실 다른 금속으로 금을 만드는 게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라고 하는데 이것도 한참이나 기술이 더 발전해야 가능해질 거야. 그리고 그래봐야 거기에 쏟는 자원이 금의 가치를 아득히 초월하기 때문에 채산성도 맞지 않고."

  "그렇다면 역시 신화에서 나온 내용들은······."

  "무슨 수를 써도 불가능하니까 신의 영역인 거지."

  "그러면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바친 시간과 열정들이 무의미했다는 거로군요. 하지만 방금 전엔 그 분야를 집중적으로 발전시키겠다고···아, 그렇군요.

  금을 만들어내는 건 불가능하지만 그 방법을 발견하기 위해 쌓아온 기술들이나 개발한 도구들은 쓸모없지 않았다는 뜻이로군요. 그리고 앞으로는 다른 목적을 위해 조금 더 효율적으로 사용하겠다고 이해하면 되겠습니까?

  "

  앞에서 가볍게 던진 말 한마디로 정답까지 도달해버리는 상식 밖의 이해력은 언제 봐도 감탄만 나올 정도로 뛰어났다.

  덕분에 마르쿠스의 입장에선 사소한 것 하나하나 챙기면서 명령하지 않아도 되니 이야기를 진행하기도 편했다.

  "그 말 그대로다. 일단 알렉산드리아에 전갈을 보내 연금술사들을 전부 로마로···아니, 안티오키아로 보내라고 일러라."

  "예. 모든 연구자재와 서적들을 포함해서 전부 옮기라 이르겠습니다."

  "못해도 내년부터는 연구가 시작될 수 있도록 최대한 서두르라는 말도 덧붙이도록."

  "예. 그런데 연금술사들이 과연 납득하겠습니까? 그래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절부터 국가의 지원을 받아 매진해온 사람들인데요."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의 인장까지 찍어줄 테니 문제없을 거다."

  알렉산드리아에서 현재 파라오와 마르쿠스의 권위는 이집트가 최전성기를 달릴 때의 파라오의 위엄에 못지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이집트에서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시 되는 나일강의 범람 주기를 완벽하게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알렉산드리아에서 마르쿠스와 파라오의 말은 곧 법이자 절대적인 진리였다.

  그들이 금을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하면 불가능한 것이다.

  감히 이의를 제기할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방을 나가려던 옥타비우스가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그런데 물질의 구조를 연구하고 해명하는 학문이 그렇게나 큰 변화를 초래할 수 있는 겁니까?"

  제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자신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영역은 통찰할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즉답했다.

  "어마어마한 변화가 찾아올 거다. 지금까지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던 엄청난 것들을 볼 수 있을 거야."

  < 263. 후계 구도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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