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4. 새로운 파도 (265/326)

  < 264. 새로운 파도 >

  264.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대부분의 일들이 별 문제 없이 흘러갔다.

  오늘도 새벽부터 일어나서 당면한 일들을 거의 다 끝내 놓았기에 점심 무렵부터는 조금 여유가 생겼다.

  마르쿠스가 하품을 하며 응접실의 비치된 의자에 앉자 하인이 재빠르게 잔에 커피를 채워주었다.

  맞은 편에 앉은 율리아가 자연스럽게 자기 몫의 잔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다.

  평소와 같은 아내의 모습에 마음을 놓은 마르쿠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트라야누스와 이야기해 본다는 건 잘 풀렸나 보네?"

  "당신이 말한 그대로의 반응을 보이더군요. 그래서 저도 일단은 더 두고 보기로 했어요."

  "그래. 재차 말하지만 지금 바로 그렇게 한다는 게 아니야. 난 적어도 20년에서 길면 30년까지 바라보고 있는 장기적인 계획이라고. 그래서 지금 단계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던 건데."

  "당장 다음대가 아니라 몇 세대까지 더 뒤에 보고 있다면 당신 말대로 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겠단 생각은 들어요. 하지만 만약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낌새가 보이면 전 역시 아들 쪽으로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아무리 그 아이가 양보를 하겠다고 하더라도 합당한 보상과 대우를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게 옳다고 생각하고요."

  마르쿠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간 씁쓸하게 웃었다.

  당연히 율리아의 말이 없어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걱정마. 절대로 무리하게 일을 추진할 생각은 없으니까. 그리고 트라야누스에게 떼어줄 지위와 재산도 이미 계산해 뒀다고. 설마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아들에게 푸대접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글쎄요···당신이 하도 딸을 총애하니 저라도 아들을 챙겨줘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그것도 오해야. 내가 소피아를 더 챙겨주는 건 주변의 모든 환경이 트라야누스를 밀어줄 게 뻔해서니까. 그 애의 성향상 주변의 그런 분위기는 압박감으로 밖에 작용하지 않을 걸."

  마르쿠스는 위대한 아버지를 둔 부족한 능력의 자식이 어떤 마음을 품게 되는지 그나이우스와 섹스투스를 통해 똑똑히 보았다.

  모든 자식들이 행복하게 컸으면 좋겠다.

  이건 부모로서 가지는 당연한 심정이었다.

  마르쿠스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로마인이었지만 아직도 떨쳐내지 못한 현대적인 감성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대표적인 게 바로 자식들에게 가지는 남다른 감정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당연히 아들이 딸보다 훨씬 가치 있는 자식이라는 건 이해도하고 납득도 하고 있었지만, 그걸 자신에게 적용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이 부분은 철저하게 이성이 아닌 감성의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율리아의 소생과 다나에의 소생, 그리고 파라오들에게서 얻은 자식들의 대우를 다르게 하고 있긴 했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균형점은 평균적인 로마인의 사고와 마르쿠스의 사고가 조금이나마 다를 수밖에 없는 게 사실이었다.

  율리아도 그 점을 알고 있었지만 자식들에게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면 그걸로 상관없었다.

  물론 결과가 좋게 나온다는 전제 조건이 깔려 있을 때의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는 그럼 여기서 접어두도록 하죠. 어차피 가까운 시일 안에 결과를 확인할 수도 없는 일이니까요. 방금 전 하신 약속만 지켜주신다면 저도 아무런 불만 없어요."

  "고마워. 걱정할 일은 없을 테니까 마음 편히 지켜보고 있어."

  "알겠어요. 그럼 전 이제 일어나봐야겠네요. 오늘 손님이 오신다고 하셨죠? 가서 손님 맞을 준비를 끝내 놓을게요."

  율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하인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몇 분 채 지나지 않아 방문자가 왔다는 하인의 보고가 올라왔다.

  휴대용 시계가 있는 세상도 아닌데 어떻게 저렇게 칼같이 시간을 맞추는지 감탄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마르쿠스 님. 카토 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그래. 어서 모시고 오너라."

  허가가 떨어지자 하인의 뒤를 따라 카토가 커다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카토 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오랜만이로군. 자네는 지금도 바쁘게 지내나보군."

  인사를 받는 카토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달랐다.

  카랑카랑하고 힘이 넘치는 느낌이 아니라 어딘가 축 쳐져 듣는 이까지 힘이 빠지는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라도 터진 겁니까? 일단 여기 앉으시죠. 따뜻한 커피라도 한 잔 드리겠습니다."

  커피의 이색적인 향기를 신기하게 바라보던 카토가 한숨을 푹 내쉬며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자주 마실 수 있는 게 아니다보니 아직까진 조금 쓰게 느껴지는군."

  "그래도 이제 가격 안정화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못해도 내년부터는 한층 더 싼 가격에 공급할 수 있을 거라는군요."

  "그건 참 반가운 소리로군. 그때가 되면 나도 커피나 홀짝이면서 책이나 써봐야 하나 싶네."

  "원로원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으시나 보군요."

  마르쿠스는 현재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다는 핑계로 직접 원로원 회의에 얼굴을 비추고 있진 않았다.

  물론 그가 나서지 않아도 이미 원로원에서 결정되는 모든 대소사는 마르쿠스나 카이사르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문제는 천하의 카토조차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단 것이다.

  그의 신경이 온통 카이사르에게 쏠려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지금 그의 옆에는 받쳐줄만한 세력이 하나도 없었던 까닭이다.

  "요새는 정치에 회의마저 느끼고 있다네. 내가 원로원에서 아무리 소리를 높여봐야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데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는 요새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갈 때마다 신화에나 나오는 영웅의 능력을 얻은 기분일세. 거기 있는 사람들에겐 내가 전혀 안 보이는 모양이야.

  그야말로 투명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

  "

  "키케로 님에게 편지는 받아보셨습니까? 아직 그분과 친하게 서신을 주고받는 귀족들이 남아있는 모양이던데요."

  "그 쪼잔한 놈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게."

  조금 전까지의 무기력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상당히 날선 반응이 돌아왔다.

  "키케로 님이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으셨나보군요."

  "진짜 돌아버릴 지경이라네. 아니, 내가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도무지 믿지를 않아. 내가 아니면 밀고할 사람이 없다나 뭐라나······."

  "억울하시겠군요."

  정작 키케로에게 그 말을 흘린 건 마르쿠스였지만 카토는 그 사실을 꿈에서도 모른 채 열심히 키케로만을 씹어댔다.

  "내가 그런 쫌생이와 지금까지 같이 정사를 논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네. 거의 20년을 한 배를 타고 공화정을 위해 싸운 동지라 생각했거늘 이렇게 뒤통수를 칠 수 있단 말인가."

  "키케로 님은 자신이 뒤통수를 맞았다고 생각해 그러는 것일 테지만요."

  "그거야 물론···그렇긴 하겠지. 하지만 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하지만 내가 아니라면 밀고할 만한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니 나도 환장할 노릇일세. 혹시 브루투스가 어딘가에서 말실수를 한 건가 싶었는데 이야기해 보니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더군."

  "브루투스가 경솔하게 입을 놀릴 사람은 아니니까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브루투스가 입을 연 건 결코 실수나 경솔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는 치열한 고민 끝에 마르쿠스의 이념에 찬동해서 그의 편에 서기로 결정한 것이다.

  카토가 가장 믿는 브루투스마저 이미 돌아섰으니 사실상 그의 편이 되어줄 이는 이제 아무도 없었다.

  겉으로 티가 나지는 않았지만 카토 역시 최근엔 그런 사실을 조금씩이나마 느꼈다.

  무얼 해도 제대로 된 호응을 끌어낼 수 없으니 그렇게 느끼는 게 당연한 상황이긴 했다.

  "자네가 원로원에 들어와서 활동해준다면 나도 뭔가를 더 해보겠는데···자네는 그럴 만한 여유가 이제 없어 보이는군. 저번처럼 비상사태라도 터지지 않으면 무리겠지?"

  "예. 그리고 어차피 저는 다음 달 정도에 동방으로 가야 합니다. 그쪽에서도 해야 할 일이 많아서요."

  "이미 이 정도로 많은 걸 바꾸어놓았는데 아직도 할 게 더 많이 남았다라···나 같이 머리 굳은 사람은 잘 모르겠네. 요새 보면 내가 시대에 너무 뒤쳐진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라."

  카토의 목소리에는 그간 축적된 혼란과 한탄, 그리고 불안감이 진하게 서려 있었다.

  고지식한 카토조차 이미 로마 공화정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현 로마는 역사상 유례 없는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고, 그걸 이룩한 사람은 마르쿠스와 카이사르였다.

  이 두 사람 없이 원로원이 과연 로마를 지금처럼 이끌어나갈 수 있을까.

  카토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무엇보다 스스로 물러나려는 카이사르와 마르쿠스를 잡아 세운 건 다름 아닌 원로원이다.

  누가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영속적으로 집정관의 권리를 부여한다는 말도 안 되는 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는가.

  카토는 그때도 소리높여 반대를 부르짖었으나 누구도 그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공화정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직감한 건 바로 그때였다.

  안 그래도 나이가 들어 체력도 떨어지고 있는데 이런 일까지 겹치자 천하의 카토라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마르쿠스는 카토의 얼굴에서 그런 심경을 손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이건 썩 환영할만한 전개는 아닌데.'

  카토가 앞뒤가 꽉 막힌 보수주의자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지금 정계에서 아예 은퇴하는 건 마르쿠스가 바라는 게 아니었다.

  율리우스 리니키우스 가문이 완전히 통합되기 전까지는 양측의 결속력을 다져줄만한 적당한 샌드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지 그런 정략적인 이유만이 아니라도 카토의 존재는 긍정적인 역할도 담당하고 있었다.

  소피아의 말대로 어딘가에서 반대 의견을 내주는 이의 생각은 한번쯤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기 마련이다.

  지금 와서 카이사르가 입안한 정책에 진심으로 반대의견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은 카토 정도 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현대에서조차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일정 이상의 반대의견이 나오지 않는다면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 지도자들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반대의견을 듣고 싶어도 마르쿠스와 카이사르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가득한 이들에게서는 건강한 비판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카토는 아직 원로원에서 자리를 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가 진짜로 세력을 얻어서 정책에 제동을 걸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지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카토 님은 이제 거의 남지 않은 공화정의 상징과도 같은 분이십니다. 할 수만 있으시다면 계속 자리를 지켜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뭘 해봐야 전혀 소용이 없는데 슬슬 지친다네."

  "소용이 없지 않습니다. 사실 카이사르 님도 정책을 입안할 때 카토 님께 꼬투리를 잡히지 않기 위해 한 번이라도 더 연구를 하고 있을 겁니다. 만약 카토 님께서 사라지신다면 정책의 정교함이 더 떨어지지 않을까요? 그런 점에서만 봐도 카토 님의 존재 덕분에 로마의 균형이 무너지지 않고 있는 겁니다."

  "그···런가?"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관점의 이야기에 카토의 안색이 조금이나마 밝아졌다.

  "물론입니다. 안 그래도 제가 원로원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만큼 카토 님의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다른 의원들을 소개해 드리려 했습니다. 동방으로 떠나기 전에 몇몇 붙여드릴 테니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해준다면···내 다시 한 번 힘내보겠네."

  "예. 그리고 제가 동방에 가도 가족들은 당분간 로마에 남아있을 테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 같이 함께 가는 게 아닌가?"

  "아내와 딸은 아직 로마에 볼 일이 남아있어서요."

  사실 신격화 작업은 로마에서나 필요한 것이지 동방에서는 이미 할 필요가 없었다.

  동방 속주는 로마 본토와 문화와 사고방식이 많이 달랐고, 마르쿠스에 대한 의존도도 차원이 다를 정도로 높았다.

  동방 속주에만 쭉 발간했던 신문의 공이 컸다.

  이미 동방에서 마르쿠스는 황제이자 신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가 무얼 하든 불만을 가질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비밀을 요하는 실험을 하기엔 로마보다 동방이 훨씬 더 우월했다.

  마르쿠스가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카토에게 은밀한 목소리로 한 가지 부탁을 남겼다.

  "조만간 원로원에 커다란 안건 하나가 올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부디 카토 님께서도 찬성표를 던져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커다란 안건이라니? 또 뭔가 사건이 터질 게 남아 있단 말인가?"

  "예.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몇 년 이내에 전쟁이 한번 터질 수도 있습니다. 자원 확보를 위해서는 한번쯤 무력충돌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수순입니다."

  "자원 확보? 금광이나 은광이라도 발견한 것인가?"

  마르쿠스가 속내를 잠작하기 힘든 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금이나 은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취급을 받게 될 자원입니다."

  카토는 더더욱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관자놀이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금이나 은보다 더욱 귀한 자원이 대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저택을 나서는 카토의 얼굴에 떠오른 의문은 그가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풀리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이제 점점 더 마르쿠스의 생각을 짐작할 수 없었다.

  복잡한 마음으로 곤혹스러운 카토의 심정과는 달리 그를 태운 마차는 아무런 흔들림 없이 조용히 도로를 가로질러 나아갔다.

  < 264. 새로운 파도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