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5. 새로운 파도 >
265.
동방으로 돌아온 마르쿠스는 오랜만에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와 의자에 깊숙이 몸을 파묻었다.
이번 귀환에서 율리아와 소피아는 함께 오지 않고 로마에 머물도록 했다.
두 사람이 로마에 남는다고 하자 자연스럽게 트라야누스와 다나에도 로마를 떠나지 않았다.
마르쿠스와 함께 안티오키아로 온 이들은 로마에 계속 머물 이유가 없는 두 파라오와 마르쿠스의 심복인 스파르타쿠스, 그리고 수레나스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의 두 딸도 로마에서 유학하는 게 좋겠다는 이유로 함께오지 않았다.
마르쿠스가 보기엔 트라야누스나 소피아와 친해지게 만드려는 게 진짜 목적이 아닐까 싶었다.
'그 정도야 상관없겠지. 가족끼리 사이가 화목한 건 좋으면 좋지 나쁠 일은 없을 테니까.'
이번에 마르쿠스와 동행한 그의 핏줄은 다나에의 소생인 아킬레스 한 명이었다.
무예에 소질이 있는 그는 스파르타쿠스와 수레나스의 밑에서 배우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함께 온 것이다.
가족들과 떨어진 건 조금 허전하긴 했어도 오랜만에 홀가분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어 이것도 꽤 신선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휴가를 즐기러 온 건 아니기 때문에 마냥 쉬고 있기만 할 여유는 없었다.
동방을 비운지 기간이 상당히 오래 흘렀는지라 살펴봐야 할 항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우선 신도시 개발 계획부터 볼까······."
푸블리우스에게 맡겼던 바그다드 유역의 개발은 이제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시내를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이 그대로 흘러가기 때문에 지리적인 측면에서 더할 나위 없는 이점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어차피 안티오키아는 70년 정도 뒤면 대지진으로 괴멸적인 타격을 받는다.
그것 한 번이라면 몰라도 500년 뒤에 다시 지진이 일어나 도시로서의 기능을 거의 상실하게 된다.
지리적인 측면에서 봐도 지금 안티오키아는 너무 서쪽에 치우쳐 있는 느낌이 강했다.
지금 안티오키아에 있는 거점들은 대부분 새로 지어지는 신도시로 옮기고 그게 불가능한 것들은 다마스쿠스로 이전할 계획이었다.
장기적으로 봐도 동방의 영토가 중동 전체로 뻗어나간 이상 바그다드 지역이 중심으로 훨씬 더 적합했다.
물론 바그다드라는 이름은 지금 쓰이지 않으니 새로운 도시는 조금 더 로마스러운 이름이 붙어야 한다.
푸블리우스의 보고서에 의하면 지금은 일단 마르코 폴리스라는 가칭으로 부르고 있는 상태라고 한다.
한나라의 사절을 이곳에서 맞이해 명령대로 임무를 수행해냈다는 보고도 흡족하게 읽었다.
'역시 믿고 맡길만한 능력이 있는 형제가 있다는 건 축복이지.'
정작 당사자인 푸블리우스는 역사에 남을 월계관 수여식에도 가보지 못하고 동방에서 업무에 시달려야 했지만 어쩌겠는가.
셉티무스는 이제 나이가 있어 무리를 시키면 안 되니 푸블리우스 외엔 마루쿠스의 대리를 봐줄 사람이 없는 것을.
그래도 마르쿠스 역시 피도 눈물도 없는 고대판 블랙기업 사장은 아니었다.
이번 신도시 건설을 마지막으로 푸블리우스에게 과중한 업무를 지우는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
물론 그때쯤이면 새로운 관료제를 도입한 행정 시스템이 대강 굴러가기 시작할 테니 마르쿠스의 부담도 한 결 줄어들겠지만.
'그럼 신도시 쪽은 푸블리우스에게 맡기기로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은 행정체계 개편과 증세, 그리고 기초과학 개선인가······.'
종이에 끄적여 정리할 땐 간단해 보였지만 막상 실행으로 옮기려고 하면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행정 체계를 개편하는 것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현대적인 체계는 당연히 구축할 수 없겠지만, 근세 시대 국가들의 제도를 버무려 완성도 높은 시스템을 구상하는 건 끝내놓았다.
문제는 언제나 예산이다.
관료제든 그와 엇비슷한 무언가든 일단 시행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지급할 돈이 필요했다.
그리고 국가의 돈이란 결국 세금이 바탕이 된다.
문제는 로마의 현 세금 체계가 정부의 덩치를 키울 수 있을만한 수준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는 세금을 넓고 얕게 걷는다는 로마의 이념 때문이기도 했고, 현실적으로 고대 사회에서 정밀한 징세가 쉽지 않다는 이유 탓이기도 했다.
생산량과 수입에 비례하는 직접세를 걷으면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 되겠지만 이럴 때의 문제는 역시 조세저항이다.
지금까지 노예해방세와 상속세를 제외한 직접세는 납부하지 않던 시민권자들이 얼마나 반발할지는 쉽게 예상이 됐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역시 지금보다 더욱 생산량을 늘려주고 그 대가로 세금을 걷는 방법밖엔 없다.
100만큼 생산하고 있는 사람에게 150을 생산하게 해줄테니 이중 15만 내놓으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수락할 것이다.
'그래도 흉년이 들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이건 구휼정책으로 어떻게든 커버칠 수 있으려나.'
기초과학 개선 역시 머리가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는 곧바로 가시적인 성과를 올릴 수 있는 분야에만 투자를 했지만, 이 때문에 기초 학문 분야의 성장은 다른 기술들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는 태생이 문과인 마르쿠스로서는 어쩔 수 없이 소홀할 수밖에 없는 분야였다.
물리학이나 지구과학, 생물학, 그리고 화학은 과학과 기술 발전의 기초가 되는 중요한 토대다.
현재 로마는 이미 중세 수준을 넘을만한 조짐을 보이고 있는 몇몇 분야와 기초 과학의 괴리가 조금씩 커지고 있었다.
그러니 부랴부랴 연금술사들을 불러 모아 화학 쪽부터 손을 보려 한 것이다.
시기적절하게도 얼추 생각을 다 정리한 마르쿠스의 귀에 시종의 보고가 들렸다.
"마르쿠스 님. 알렉산드리아에서 연금술사들이 도착했습니다. 이리로 데려오도록 할까요?"
"그래. 그렇게 하도록···아니, 그것보다는 새로 만든 연구실에서 만나는 게 좋겠군. 그들이 앞으로 이용하게 될 시설이니까."
마르쿠스는 자신이 참고해야 할 몇 가지 서류를 확인하고 다시 명령을 내렸다.
"우선 그들을 시설로 안내하고 도시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어라. 내가 곧 가도록 하지. 아, 그리고 사람을 시켜서 타디우스에게 입궁하라고 이르도록. 오랜만에 사업 이야기를 좀 해야겠으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시종의 발소리가 점점 멀여졌다.
"좋아. 그럼 최대한 빨리 일을 처리해볼까."
마르쿠스는 최대한 빠르게 결제 작업을 마친 뒤 시간에 맞춰서 연금술사들을 방문했다.
호위들을 이끌고 연구실로 들어서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연금술사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앞에 있는 남성이 우르르 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보더니 조심조심 걸어 나왔다.
두리번거리며 사람들을 살피던 그는 마르쿠스와 눈이 마주치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아니, 이런. 위대한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께서 직접 와주실 줄은. 어전에서 크나큰 무례를 보여 송구합니다."
선두에 있던 남자를 시작으로 모든 연금술사들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로마에서와는 다른 반응에 마르쿠스는 절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집트와 동방에 있는 이들이 마르쿠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했다.
심지어 뒤에 있는 시종들의 대응 역시 제왕을 수행하는 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연금술사들이여, 배알을 허가하겠습니다."
시종의 말이 떨어진 뒤에야 연금술사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옷매무새를 다시 점검했다.
이집트에서 파라오 앞에 설 때는 이보다 더한 격식도 차렸기 때문에 아무런 반감도 없었다.
연금술사 중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이가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마르쿠스 님을 직접 배알할 수 있게 되어 더없는 영광입니다. 저는 위대한 파라오의 명을 받아 연금에 종사하고 있는 필리트리오스라 하옵니다."
"안티오키아에 온 걸 환영한다. 자네들이 어째서 여기까지 왔는지 이유는 알고 있겠지?"
"예. 앞으로는 알렉산드리아가 아닌 이곳에서 연금술의 연구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연금술이 아닌데···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했나?"
필리트리오스를 비롯한 연금술사들의 얼굴에 순간 곤혹스러운 빛이 스쳐지나갔다.
제왕의 물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좋을지 난처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한 거라면 그렇다고 말하거라. 이해할 수 없는 거라면 그렇다고 말하도록 하고. 너희를 탓하려는 게 아니다."
"예, 예. 대략적으로 듣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소인들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이 상당수 있었던지라······."
최대한 불경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는 필리트리오스의 얼굴에서 땀이 뻘뻘 흘러내렸다.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투스신의 가르침에 의하면 연금의 의의란 단순히 금을 만드는 것이 아니옵니다. 인간이 더 높은 존재로 승화되기 위한 과정을 탐구하는 것에 그 의의가 있사옵니다. 마르쿠스 님께서 연금술을 대대적으로 손보겠다고 하셨다는데 그 진의가 ······."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금을 만들지 못한다고 너희를 사기꾼이라 하거나 핍박할 마음은 없으니. 그랬다면 이런 시설까지 지어주면서 너흴 데려왔겠느냐. 오히려 너희는 이집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풍족한 환경에서 연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다른 금속을 금으로 만들려는 헛된 시도가 아니라 더 건설적인 걸 하라는 것이지."
"그···정말로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금속을 금으로 만드는 게 정말로 불가능한 것이옵니까? 위대한 헤르메스 트리스메기투스의 가르침에 의하면 이는 불가능한 것이 아니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모든 사물은 불완전한 것에서 완전한 것으로 향한다는 가르침을 내린 바 있습니다. 금은 곧 가장 완벽한 금속. 그러니 당연히 불완전한 금속을 금으로 변환하는 것이야말로 연금술이 지향해야할 길이 아닐런지요.
"
마르쿠스는 답답함으로 복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굳이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사실 헬레니즘의 연금술사들의 대부분이 금속 직인들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나름대로 자신들의 경험이 바탕이 된 이론이었다.
금속을 섞으면 베이스가 된 두 금속 중 어느 쪽과도 색이 같지 않은 합금이 만들어지는 데에서 착안한 이론이었다.
이들은 이걸 남녀가 결합하면 태어나는 아이가 부모와 똑같이 생기지 않았다는 데에 비유했다.
이렇게 금속들을 결합하면 새로운 금속이 생기니 점점 더 완성도를 올려 가다보면 가장 완벽한 금속인 금이 나올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 원리를 적용하면 인간 역시 가장 완벽한 존재로 태어날 수 있다는 게 이집트 연금술사들의 믿음이었다.
현대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마르쿠스가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망상에 불과했으나 마냥 무식하다고 비웃을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를 통해 다양한 성과가 나왔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금속 처리를 위해 다양한 시약을 개발하기도 했고, 계란을 증류해 황과 같은 다양한 물질을 얻는데도 성과를 보였다.
이들이 개량한 증류기와 냄비, 여과기, 간단한 비커 등은 마르쿠스의 기술자들도 아주 요긴하게 사용한 물품들이었다.
"너희가 금을 제조할 수 없는 이유는 내가 설명해줄 수 있다. 하지만 너희들의 지식으로는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거다. 정확히 말하면 납을 금으로 바꿀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너희들의 방식으로는 수천 년이 지나도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해야 맞겠지."
연금술사들은 마르쿠스의 말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이해했다.
고작 인간인 그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하지만 살아있는 신인 마르쿠스는 가능하다.
과학적인 상식이 아직 부족한 그들에게 마르쿠스의 말은 그렇게 들렸다.
"역시···신의 지혜를 지니신 마르쿠스 님께서는 납을 금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알고 계시다는 말씀이로군요."
"방법이야 알지. 문제는 지금의 수준으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설령 가능해진다고 해도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그 의미가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그 과정까지 이르는 방법을 탐구하는 것 자체엔 분명히 의미가 있을 터. 원한다면 거기까지 이를 수 있는 길은 알려주겠다."
연금술사들의 표정이 완전히 변했다.
그들은 신의 목소리를 들으려는 신도들처럼 필사적으로 귀를 기울이며 빌었다.
"진리에 다가설 수 있다면 어떤 가르침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부디 저희들이 그 위대한 지혜의 일부라도 누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너희들이 해야 할 건 물질의 구조와 변화 그 자체에 주목하는 것이다. 기존의 4 원소설 같은 건 버리고 내가 알려주는 방식으로 학문을 탐구해라."
신이나 다름없는 존재로 받아들여 질 때 편리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기존의 상식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말을 해도 누구도 의심하지 않고 귀를 기울여주지 않는가.
사실 권위에 의한 호소나 다름없는 방식이었으나 효율성만 따진다면 지금 이 방법이 가장 좋았다.
마르쿠스가 지금의 연금술사들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작성한 앞으로의 지침을 필리트리오스에게 전달했다.
그리고 품속에서 어떤 가루가 든 주머니를 꺼내 추가로 그의 손에 올려주었다.
"내가 가르쳐준 방식대로 일단 이 가루들을 연구해 보거라. 그 성과를 보고 이후의 방침을 내려주도록 하마."
필리트리오스는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열어 그 안에 든 가루를 확인해 보았다.
처음 보는 생소한 하얀 가루를 보는 필리트리오스의 눈이 탐구욕으로 거세게 불타올랐다.
"최선을 다해 기대에 보답하겠습니다!"
< 265. 새로운 파도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