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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7. 그건 로마의 것이다 (268/326)

  < 267. 그건 로마의 것이다 >

  267.

  파르티아의 수도였던 크테시폰은 언제나처럼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동방을 주름잡던 대국이었던 파르티아가 멸망한 뒤에도 그 성세는 꺾이지 않았다.

  이전과 다른 점이라면 현지 귀족들이 마르쿠스의 암살을 시도하고 몰락했다는 것.

  그리고 그 자리를 친로마파 귀족들과 로마인들이 차지했다는 점 정도였다.

  티그리스강을 끼고 있는 크테시폰은 워낙 입지가 좋아 동쪽과 남쪽에서 들어오는 상품들의 물류창고 역할도 충실히 수행이 가능했다.

  북서쪽에 지어지고 있는 마르코 폴리스가 완성된다고 해도 도시의 입지가 흔들릴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온 세상의 막대한 부가 집중적으로 모이고 있는 장소다.

  크테시폰의 규모는 이미 수도 로마를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해가 지날수록 유입되고 있는 외국인들의 수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인지 크테시폰의 사람들은 외국인이 지나간다고 해도 신기하다는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스나 알렉산드리아의 상인도, 로마에서 온 기사계급도, 심지어 갈리아와 아라비아, 인도에서 온 사람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도시가 바로 크테시폰이었다.

  인도에서 온 카샤파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보지 못한 다양한 인종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 절로 눈길을 빼앗겼다.

  성벽이 있긴 했으나 이미 성벽 밖까지 도시가 확장된 상태라 방어용으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도 신기했다.

  함께 온 안내인은 곧 있으면 성벽을 헐어버릴 계획이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아니, 도시에 성벽이 없으면 외적들로부터 도시를 어떻게 지킨다는 말인가?"

  "사실상 크테시폰이 있는 곳까지 뚫렸다면 방어 체계가 완전히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러면 성벽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수도 로마도 이미 한참 전에 성벽을 헐어버려서 성벽은 작은 터만 남아있다고 하더군요. 이곳도 그렇게 되는 거겠죠."

  "세상에······."

  카샤파는 한 번도 떠올려보지 못한 신선한 개념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처음에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여겼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로마는 그 흉포하고 강력한 흉노족을 간단히 이기지 않았던가.

  그 정도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으면 성벽이 의미가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성벽이 없으면 도시의 확장에도 구애를 받을 필요가 없고 공간도 더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다.

  '자신들의 국력에 절대적인 자신이 있으니 이런 방법을 취하는 거겠지. 역시 무서운 국가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이 광장의 중앙에 선 거대한 조각상에 닿았다.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음에도 조형에 흠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한 묘사가 눈에 띄었다.

  "저게 바로 동방의 샤한샤 마르쿠스 메소포타미쿠스인가?"

  "예. 아마 그럴 겁니다. 저도 실제로 샤한샤를 배알한 적은 없어서 정말로 저렇게 생기셨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듣기로는 지혜가 하늘에 닿아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사실일까?"

  "사실이라고 하더군요. 적어도 그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이번에 어르신께서 만나기로 하신 친우분께 들은 말이니 의심할 여지는 없겠지요."

  "허허··· 아무리 신과 가까운 이라고 해도 미래를 본다는 건 쉽지 않거늘. 그런 능력을 지닌 이들은 브라만 중에서도 찾기 힘들지 않나?"

  종교적 색채가 강한 인도에서 온 카샤파는 신의 권능이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다.

  애초에 인도는 그런 능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 브라만들이 사회의 최상층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걸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냈다간 즉시 매장이다.

  그런 점에서 로마는 좀 더 개방적인 사회라고 듣긴 했지만, 소문이란 언제나 과장되기 마련이니 직접 눈으로 볼 필요가 있었다.

  카샤파는 안내인과 함께 부지런히 발을 움직여 약속 장소로 향했다.

  거대한 광장 바로 옆에 있는 웅장한 건물이 목적지라 길을 잃을 염려는 없었다.

  그냥 멀리서 봐도 한눈에 저곳이다라는 걸 알 수 있다고 했었는데 실제로 와보니 정말 그랬다.

  그가 온 사타바하나에서도 당연히 숙박시설이나 식당이 있긴 했지만, 이 정도의 규모를 지닌 시설은 단 하나도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지어놓을 필요가 있을까 의문이었으나, 정문에서부터 보이는 화려함에 그런 생각조차 머리에서 사라져 버렸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여러분들께서는 이곳에 방문하시는 게 처음이신가요?"

  그들이 인도 남부에서 왔다는 걸 복식으로 알아차린 안내원이 산스크리트어로 말을 걸어왔다.

  엄청나게 유창한 발음까지는 아니었지만 이런 시설에 산스크리트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외국에서 모국어로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면 당연히 호감도는 말할 필요도 없이 올라가는 법이다.

  카샤파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곳에서 약속이 있어 찾아왔네. 친우가 예약을 해두었다고 했는데······."

  "친우분의 성함을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가텀이라고 이곳에서 터를 잡은 상인일세."

  종업원은 알겠다고 답한 뒤 팔랑거리는 무언가에 적혀 있는 명단을 확인해보았다.

  '저게 그 종이란 물건인가 보군. 보관과 작성이 용이해서 최근에 우리 쪽에도 많이 들어오고 있다는데 돌아갈 때 대량으로 구해갈 방법이 없을까? 떼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물욕이 가득한 눈빛으로 종이를 구경하고 있던 카샤파에게 안내원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확인이 됐습니다. 그럼 사교의 정원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내부로 들어간 카샤파는 시설의 안쪽은 더욱 화려하다는 사실에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랐다.

  무역으로 번성하고 있는 사타바하나의 왕궁보다도 이곳에 더 값진 장식품들이 많은 게 아닐까 의문이 들 정도였다.

  곧이어 넓직하면서도 고풍스러운 좌석으로 안내된 그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우의 얼굴을 발견하고 반갑게 다가갔다.

  "오랜만일세, 가텀! 이게 대체 몇 년 만이지?"

  "십 년쯤 된 거 같은데 자네도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군. 사타바하나는 좀 살 만한가?"

  "그럭저럭. 내가 바이샤들 따위처럼 상인이나 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적응해야지 어쩔 수 있겠나."

  카사퍄와 그의 친우 가텀은 본래 인도-스키타이 왕국의 귀족이었다.

  그러나 내부 권력 경쟁에서 밀린 그들은 나라 밖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가텀은 파르티아를 정복하고 무시무시한 기세로 떠오르고 있는 로마를 기회의 땅으로 여기고 서쪽으로 빠져나갔다.

  반면 카사퍄는 사타바하나 왕조에서 크샤트리아의 지위를 약속받고 가문의 재산과 사병들을 데리고 이주했다.

  이 시기에도 이미 천 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카스트 제도는 인도 내부에 뿌리 깊이 박혀 있었다.

  그들은 이 제도를 색깔을 의미하는 바르나라 칭했는데 이 바르나의 신분 구분과 가문의 직업을 나누는 자티는 인도에서 사람을 나누는 절대적인 척도였다.

  가장 상위의 계급은 승려계급인 브라만이고 그 다음이 왕족과 귀족, 장군들이 속해 있는 크샤트리아다.

  그 아래가 부유한 자영농과 상공업자들인 바이샤였으며 이 바이샤들까지는 그럭저럭 사회에서 끝발이 먹힌다고 볼 수 있다.

  그 아래로는 천민계급인 수드라가 있으며 카스트 아래의 카스트인 파리아. 즉, 불가촉천민이라 불리는 이들도 존재했다.

  카샤파는 분명 크샤트리아로 편입된 귀족이었지만 타국에서 망명해 왔다는 이유로 크샤트리아로서의 대접을 거의 받지 못했다.

  심지어 인도-스키타이가 흉노 손에 사실상 망한 거나 다름없게 된 뒤로는 그런 취급이 더 강해졌다.

  가문의 위세를 회복하기 위해 상행위를 하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그를 우습게 보는 크샤트리아가 꽤 많았다.

  반면 이미 로마인이나 다름없어 보이는 가텀은 그런 친우의 낡은 관념을 정정해주었다.

  "여기서 그런 말을 입에 담았다가는 본전도 못 건질 걸세. 로마에서는 상업을 중하게 여기거든. 당장 샤한샤께서도 어린 시절 상업으로 막대한 부를 얻어 기반을 마련하셨다고 하니 말 다 했지."

  "그런 비화가 있었나? 하긴 대충 그럴 거 같긴 했네. 내가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만 해도 온갖 인종의 상인들을 봤으니까. 보니까 키는 멀대같이 크고 수염도 덥수룩하면서 피부는 눈처럼 새하얀 사람들도 있더군. 거참 신기하단 말이야."

  "여기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더 신기한 것들도 많이 볼 수 있네. 눈처럼 새하얀 사람도 있는 반면 아예 피부가 새까만 사람들도 있거든."

  "나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듣긴 했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시설의 직원으로 보이는 이가 고상한 모양의 컵 두 개와 작은 단지 하나를 가지고 왔다.

  가텀은 이 모든 게 익숙한 듯 자연스럽게 컵을 받아들고 안에 든 묘한 액체의 향을 맡았다.

  "이게 대체 뭔가? 뭔 색깔이 이렇게 거무스름해? 이거 마실 수 있긴 한 건가 의문이 드는데."

  "이런, 자네는 몰랐나?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커피라는 걸세. 최근 들어 상류층 사이에서는 급속도로 유행을 타고 있는 물건이지. 알기 쉽게 비유하자면 로마식 차라고 생각하게."

  "차? 향기가 완전 다른데······."

  카샤파가 미심쩍은 눈길로 눈앞의 검은 액체를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코를 가까이 가져갔다.

  처음엔 이질적이었으나 계속 맡다 보니 냄새 자체는 그렇게 나쁘진 않은 것 같았다.

  "이곳의 귀족들과 부호들은 이제 아침과 점심마다 이 커피를 한 잔씩 마셔주는 게 교양이라네. 자네도 로마의 고위직들과 만나 연줄을 쌓아놓으려면 익숙해져야 할 거야. 참고로 샤한샤께서도 매일같이 이 커피를 입에 달고 사신다더군. 그리고 자네가 만나고 싶어하는 거상 타디우스 님도 이 커피의 애호가일세."

  "그럼 마셔볼 수밖에 없겠군. 그런데 왜 이걸 아침이랑 점심에만 먹나? 밤에는 안 먹어?"

  "이게 놀랍게도 이 커피라는 음료는 마시면 잠이 잘 안 오거든. 그래서 밤에 마셔버리면 수면에 들지 못할 수도 있네. 그래서 아침과 점심에 많이들 마시는 거라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마시지 않을 수는 없다.

  한 차례 심호흡을 한 카샤파는 조심조심 잔을 들어 액체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을 본 가텀이 뭐라 한마디를 하려고 했으나 그보다 먼저 혀로 커피의 맛을 본 카샤파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크악! 이게 대체 뭔 맛이야? 쓰기만 하고 더럽게 맛도 없네. 뭔 독약인가? 로마인들은 이런 걸 마신다고?"

  "허허··· 그러니 내가 먼저 설탕을 타주려고 했거늘. 초짜는 설탕을 넣어 마셔야 그나마 맛있게 커피를 즐길 수 있단 말일세. 그러다가 이 향과 맛에 익숙해지면 서서히 설탕을 줄여나가는 거지. 이 설탕의 양에 따라서 맛이 변하는 게 또 커피의 묘미지. 나는 이제 한 스푼 정도만 넣어서 마신다네."

  어딘가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가텀이 함께 딸려 나온 작은 단지의 뚜껑을 열었다.

  설탕이라면 카샤파도 잘 알고 있는 가루였다.

  뿌리면 단맛이 난다는 이 물질은 인도에서도 못 구해서 안달인 어마어마한 고가의 상품이었다.

  이런 걸 매일같이 넣어서 마신다는 데에서 로마가 얼마나 부유한 국가인지 대강 짐작이 갔다.

  설탕을 거의 잔에 붓다시피 해서 커피를 다시 마셔본 카샤파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까보단 훨씬 낫군. 달달하니 이 정도면 나도 괜찮게 먹을 수 있겠어."

  "그렇다니 다행이군. 그러면 마시면서 듣게. 우리가 이걸 다 마시고 조금 쉬고 있으면 타디우스 님께서 오실 걸세.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절대로 그분에게 무례하게 굴지 말게."

  "당연하지. 로마에서 한 손에 꼽히는 거부라는데 내가 그런 거물의 신경을 거슬러서 좋을 게 뭐가 있겠나. 그런데 그 사람은 귀족인가?"

  "하아··· 그러니까 그런 구분이 의미가 없단 말일세. 일단 그분은 귀족은 아니고 기사계급일세."

  "우리로 치면 크샤트리아가 아닌 바이샤로군."

  "로마는 평민이라고 해도 언제든 자격만 갖추면 귀족 가문으로 올라서는 게 가능하네. 그러니 제발 신분과 관련해서는 한 마디도 꺼내지 말게. 타디우스 님은 그 샤한샤의 심복이나 다름없다는 소문도 있으니 절대 그분의 기분을 티끌만큼이라도 상하게 하면 안 돼.

  자네만이 아니라 자네를 소개해준 나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단 말일세.

  "

  친우의 엄중한 경고에 카사퍄의 고개도 자연스레 세로로 흔들렸다.

  아무리 거상이라고 해도 일개 상인이 샤한샤의 심복이라는 소문에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로마는 인도와는 다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텀은 아무래도 불안했는지 주변을 슬쩍 둘러보고는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춰서 말을 보탰다.

  "샤한샤와의 관계는 나도 잘 모르지만 일단 그분의 동생인 푸블리우스 님과 자주 접촉하는 사이란 건 확실하네. 푸블리우스 님은 샤한샤께서 자리를 비우실 때마다 대행을 맡을 정도로 권력의 핵심에 계신 분이야. 잘만 하면 그분에게 줄을 댈 수도 있으니 최대한 공손히, 유익한 정보를 가져다 바치게."

  카샤파는 친우의 거듭된 충고를 흘려듣지 않았다.

  어차피 이대로 쭉 간다면 그의 가문은 평생 사타바하나에서 제대로 된 대우도 받지 못하는 반쪽자리 크샤트리아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되느니 친우인 가텀처럼 로마의 편에 서서 화끈하게 도박을 걸어보는 게 좋을 수도 있다.

  결연하게 표정을 바로 하는 그의 눈에 저 멀리서 걸어오는 중후한 인상의 중년인이 보였다.

  자신들이 있는 쪽을 바라본 중년인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자 가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타디우스 님, 이곳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격식을 따질 필요 없네. 자네에겐 몇 번이나 유용한 정보를 받았는데 이 정도 부탁쯤은 당연히 들어줘야지."

  샤한샤의 심복이라는 소문이 있는 거상, 타디우스는 가볍게 가텀의 인사를 받으며 카샤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 곳에서 오신 손님을 환영합니다. 저희 쪽에 파실 아주 귀한 정보가 있으시다고요."

  카샤파가 너무 오만하지도,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은 표정을 유지하려 애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확인하고 싶은 사항이 있는데······."

  그는 가텀의 불안한 눈짓을 일부러 무시한 채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267. 그건 로마의 것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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