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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9. 그건 로마의 것이다 (270/326)

  < 269. 그건 로마의 것이다 >

  269.

  처음으로 맞는 로마의 밤은 꿈이라면 다시 깨고 싶지 않을 정도로 황홀했다.

  타디우스는 카샤파에게 로마의 유흥거리를 소개해주면서 자연스럽게 로마가 자랑하는 선진문물을 체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놀라운 것들이 너무 많아서 카샤파는 자신이 문명화되지 않은 야만국에서 온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특히 타디우스가 자연스럽게 꺼내서 읽은 신문이라는 것에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종이가 등장하지 않은 고대 시대에서 기록매체란 정말로 귀중한 물건 중 하나였다.

  심지어 종이가 나온 뒤에도 인쇄술의 발달이 있기 전까지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카샤파도 신문이 타디우스 같은 최고의 부호들만 받아볼 수 있는 상품이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안티오키아나 크테시폰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신문을 보고 있다는 말에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그러면 대체 사람들을 몇 명이나 쓰는 겁니까? 게다가 이 신문이라는 것 위에 쓰인 글자를 보아하니 세상에 둘도 없는 명필이 쓴 것 같은데요. 글자 하나하나가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하고 반듯하지 않습니까. 이런 명필들을 이렇게나 대규모로 부리다니······."

  "하하, 처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군요. 이건 사람이 손으로 쓴 게 아닙니다."

  "예? 사람이 쓰는 게 아니라니요?"

  "샤한샤께서 만드신 기구로 글자를 찍어내는 겁니다. 참고로 이 종이라는 물건 역시 그분의 작품이죠. 덕분에 저희는 매주 도시와 나라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주 손쉽게 알 수 있답니다."

  그저 놀라움과 경악의 연속이었다.

  대체 어느 내용이 쓰여 있는지 궁금해서 몇 가지만 알려달라고 하자 타디우스는 흔쾌히 신문의 기사 제목들을 번역해 주었다.

  가장 앞에 놓인 기사들은 주로 샤한샤와 그의 가족들에 대한 것이었다.

  비효율적인 행정을 개편하고 농업의 생산력을 크게 증가시킬 준비에 착수 중이라는 희망적인 내용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크테시폰에서 일어난 굵직한 사건들이 소개되었고, 이어서 안티오키아와 알렉산드리아, 몇 달전 로마에서 있었던 일들까지 적혀 있었다.

  이번 달의 특집 기사로는 이집트의 파라오에 관한 내용이 실렸다는데 그 내용이 제법 상세해 보였다.

  신문 사이사이에 실려 있는 광고나 구인란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신선하게만 느껴졌다.

  '대체 우리 쪽과 로마의 차이가 얼마나 벌어져 있는 거지?'

  보면 볼수록 따라간다거나 참고할 수 있는 수준을 한참 전에 넘어버린 듯했다.

  십 년, 아니 백 년이 지나도 사타바하나가 이런 체계를 갖추는 건 무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타디우스는 조금은 압도되어 버리기까지 한 카샤파를 데리고 술집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머리 아픈 이야기들만 했으니 이제부터라도 마음 편하게 즐기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죠. 이곳은 얼마 전에 개점한 곳인데 여인들도 아름답고 나름의 교양도 갖춘 곳이라 상류층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단, 가볍게 만지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노골적인 희롱은 금지되어 있으니 그 점만 유의하시면 됩니다."

  "혹시 술도 나옵니까?"

  "당연히 최고급의 포도주가 제공됩니다."

  "그 유명한 로마산 포도주의 맛을 볼 수 있다니 기대가 큽니다. 하하."

  사타바하나의 국교인 베다 힌두교에서는 음주를 완전히 금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종교적 순수함을 유지해야 하는 브라만 계층에게는 금주가 의무였다.

  금주가 존경의 대상이었으니 음주가 법적으로 금지는 되어 있지 않더라도 그리 훌륭하게 여겨지지 않는 건 당연했다.

  불교가 탄생하고 그 이념이 어느 정도 퍼진 뒤에는 그런 경향이 더 강해졌다.

  크샤트리아들은 주로 귀한 손님들이 올 때에 술을 내놓았으며 평상시에는 되도록 음주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충분한 돈과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술의 유혹을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아무리 금주가 사회적인 계율이었어도 몰래 마시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외부에서 편입된 크샤트리아인 카샤파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껏 먹고 마실 수 있는 자리가 굉장히 반가울 따름이었다.

  특히 시중을 들러 온 여성들의 외견은 더없이 만족스러웠다.

  로마의 여성들은 아름다운 비단 옷을 입고 있었는데 비단 자체는 카샤파도 익히 알았다.

  인도에서도 한의 비단은 최고의 인기 상품이라 굉장히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는 이 귀한 비단을 독자적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최근 들어 급속도로 보급되고 있는 중이었다.

  게다가 로마 특유의 개방적인 문화까지 더해져 온갖 종류와 형태의 비단옷들이 나오고 있었다.

  카샤파의 시중을 들어주는 여인들은 속이 다 보일 정도로 얇고 몸에 착 달라붙는 비단옷을 입고 있어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저런 옷들을 여러 벌 구입해 가고 싶을 정도였다.

  여기에 달콤하면서도 깊은 맛을 내는 포도주까지 계속 들어가자 자연스럽게 말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선택이 잘못됐던 것 같습니다. 저도 사타바하나가 아니라 로마로 갈 걸 그랬습니다. 그랬으면 지금처럼 타국까지 와서 어떻게든 이득을 보려고 아등바등하는 상황은 되지 않았을 텐데······."

  "인생이란 무릇 선택의 연속인 법. 어느 길을 가더라도 선택의 순간은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너무 심려치 마시지요."

  "후··· 그런 말씀도 이런 기회의 땅에 사시니 할 수 있는 겁니다. 사타바하나는··· 아니, 사타바하나만이 아니라 베다를 떠받드는 모든 국가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오늘 이 도시를 둘러보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런 경직된 문화로는 주변의 발전에 뒤쳐질 뿐이라는 걸."

  카샤파의 마음을 아직도 심란하게 만드는 이는 낮에 보았던 수레나스였다.

  외부에서 편입된, 그것도 초기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을 부린 타국의 귀족이 능력 하나만으로 저런 자리까지 간 것이다.

  그 모습이 먼 타국까지 와서 발로 뛰어다니는 자신의 처지와는 너무 비교되어 서글펐다.

  게다가 말을 들어보니 로마는 수레나스만이 아니라 이미 여러 현지 귀족들이 원로원에 들어갔다고 하지 않는가.

  여기에 로마의 우월한 문물들을 접하고 포도주가 끝도 없이 들어가자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던 생각이 조금씩 구체화되었다.

  혹시 자신도 공을 세우면 저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뱀의 머리가 아닌 허리 정도밖에 되지 않는 현실에서 벗어나 용의 꼬리라도 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생각에 그칠 뿐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망상은 어디까지나 망상으로 그쳐야지 입을 함부로 놀리면 패가망신하기 딱 좋은 법이다.

  설령 로마로 귀의하려고 해도 자신의 가치를 충분히 끌어올린 상태에서 말을 꺼내는 게 좋을 것이다.

  점점 취기가 오르는 와중에도 그의 눈빛만큼은 조금도 탁해지지 않은 채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

  다음날까지 카샤파를 융숭하게 접대한 타디우스는 정식으로 그와 계약을 맺었다.

  사타바하나로 로마의 상인들이 진출하는데 그가 편의와 중개를 봐주고, 대가로 이익의 일부를 공유한다는 협정이었다.

  양쪽 모두 크게 만족한 채로 협상이 끝나자 타디우스는 국경을 안전하게 넘어갈 수 있도록 사람을 붙여주기까지 했다.

  카샤파나 가텀과 헤어진 타디우스는 그길로 곧장 크테시폰의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가 탄 마차를 알아본 경비들은 별다른 제지나 검사 없이 그대로 그를 안으로 안내했다.

  "푸블리우스 님은 안에 계신가?"

  "예. 지금 집무실에 계십니다."

  "그럼 안내해주게."

  시종의 뒤를 따라 집무실로 들어선 타디우스의 눈에 방의 주인인 푸블리우스가 두 개의 잔에 커피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크테시폰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그가 사람을 시키지 않고 직접 차나 커피를 따를 상대는 이 동방에 단 한 명밖에 없다.

  타디우스가 옆으로 슬쩍 비켜서서 푸블리우스의 뒤에 가려져 있던 사람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위대한 샤한샤를 뵙습니다. 크테시폰에 오셨다는 보고는 듣지 못해 미처 배알할 준비를 하지 못한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않아도 되네. 나는 일단 사흘 뒤에 도착하는 걸로 되어 있으니까. 그 전까지는 좀 여유롭게 지내면서 계획의 진행도를 점검해볼 생각이네."

  "그럼 이 자리에서 한꺼번에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우선 명령대로 사타바하나의 귀족 한 명을 포섭했습니다."

  "쓸 만한 자인가?"

  마르쿠스의 물음에 타디우스가 즉각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사용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보였습니다. 경직되어 있는 왕조에 대한 불만이 상당해 보이더군요. 일부러 만나는 날짜를 조정해 아퀼라누스의 행진을 보여줬는데 그때 표정이 상당히 가관이었습니다. 수레나스 님을 바라보는 시선에 감정이 그대로 묻어나오더군요."

  "어떤 종류의 불만이 축적되어 있는지 대강 짐작이 가는군. 확실히 요긴하게 쓸 수 있겠어."

  "그래도 타디우스가 사타바하나에서 공작할 때 저희 쪽에서도 도움을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면 더 효율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을 텐데요."

  푸블리우스가 탁자 위에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의 어조에서는 일이 잘못될 수 있다는 긴장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리 남부 인도에서 가장 강한 세력을 지니고 있다고 하더라도 통일 왕조가 아닌 이상 로마의 적은 될 수 없다.

  해로와 육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이상 설령 전쟁으로 발전한다고 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마르쿠스는 동생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나무라는 대신 돌려서 그의 생각을 정정해주었다.

  "푸블리우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을 생각해 본다면 타디우스의 뒤에 내가 있다는 사실은 드러내지 않는 게 좋아. 어디까지나 일개 로마의 상인이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게 그림이 좋다."

  "이후의 명분을 고려해본다면 확실히 그게 좋긴 하겠지만, 작업이 좀 지체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 오히려 더 빨라지겠지. 샤한샤의 위광을 업고 있는 상인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사타바하나 쪽에서도 경계를 할 수밖에 없을 거다. 섣불리 건드리긴 꺼려지는 상대로 느껴질 테니 태도도 조심스러워지겠지."

  "인도에는 카스트라는 신분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로마의 신분제보다도 훨씬 더 엄격하고 폐쇄적이라고 하더군요. 제가 포섭한 인도 귀족의 말에 의하면 귀족 신분이 아닌 저를 그쪽에서 꽤나 무시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타디우스의 설명에 푸블리우스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그들이 설마 로마의 시민권자를 무시할까? 미친 게 아니고서야······."

  로마 시민권이 지니는 위력은 로마의 영향력이 닿는 땅에서는 절대적이라고 해도 좋았다.

  특히 타디우스처럼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이었던 이들은 더욱 특별했다.

  로마는 타국이 자신들의 시민권자를 무시하는 걸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그 대상이 로마를 대표하는 거상 중 한 명이라면 말할 것도 없으리라.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로마의 사정일 뿐, 인도의 문화는 또 다르다.

  마르쿠스는 처음부터 그렇게 될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카스트와 자티는 그쪽 문화에서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진리야. 아마 그쪽에서는 자신들의 문화를 고려해서 귀족이 왔어야 한다고 여길 거다. 뭐 원래 문화는 상대적인 거니까 그쪽의 입장을 고려하면 영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지."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그자들의 비위를 맞춰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그 말도 맞지.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진행하면 돼. 모든 건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전 귀족도 아닌 일개 상인. 그리고 제 뒤에는 샤한샤께서 계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 중간에서 중재해줄 귀족도 중앙에서 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자는 아닙니다. 여러 가지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겠군요."

  타디우스가 과장되게 한숨을 쉬며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 그런 거였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푸블리우스가 이제야 전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이쯤 되면 너도 알겠지?"

  마르쿠스가 피식 웃으며 마침내 이번 계획의 전모를 입에 담았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 자체가 이번 계획의 핵심이다."

  < 269. 그건 로마의 것이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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