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 그건 로마의 것이다 >
270.
인도 문화권의 황제라는 의미를 지닌 삼라트라는 호칭은 누구나 칭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아무리 일국의 왕이라고 하더라도 위세가 대단히 않다면 대왕을 의미하는 마하라자는커녕 라자라는 명칭조차 쓰기 힘들었다.
그런 점에서 사타바하나의 지배자는 삼라트라고 불리기에 충분한 힘을 지닌 몇 안 되는 군주였다.
데칸고원을 중심으로 철과 면화 생산에 강점을 보인 사타바하나는 수도 프라티슈타나를 중심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었다.
이미 인도 유역에서는 사타바하나에 대적할 만한 국가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슝가의 뒤를 이어 북인도를 도모해 보려고 했던 칸바 왕국도 사타바하나에게 밀려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인 신세였다.
마우리아 제국이 분열된 이후 인도에 이 정도의 강국이 등장한 건 처음 있는 일이다.
물론 사타바하나는 아직도 확장기를 맞이하고 있어 아직 국력이 최고조에 달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인도 유역 최강의 왕국으로 꼽히고 있었으니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닌 국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사타바하나는 단순히 군사력만 강한 국가는 아니었다.
이들은 철과 면화 생산의 강점을 십분 활용해 무역으로도 많은 이득을 축적하고 있었다.
한나라에서 비싼 값으로 비단을 사 오고는 있었지만, 우수한 면제품의 수출로 충분히 상쇄가 되는 정도였다.
로마에서도 과거에는 인도의 면섬유를 가져가는데 금으로 값을 치렀을 만큼 사타바하나의 면제품은 경쟁력이 높았다.
그런 왕국의 지배층들은 자연히 세상이 자신들이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고 여기기 마련이다.
이는 오만하거나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이라 비판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현 사타바하나의 지배층들은 철이 들었을 무렵부터 지금까지 쭉 자신의 왕국이 발전하는 모습만 보았기 때문이다.
전쟁을 했다 하면 대부분 승리고, 주변 국가들을 둘러봐도 경쟁 대상이 없는데 자만심이 생기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조금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흉노도 잠깐 반짝하더니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그들이 의식하고 있는 국가라고 하면 이제 로마와 한나라 정도밖에는 남지 않았다.
하지만 두 국가와도 국경을 접하고 있는 건 아니니 신경 쓰지 않는 지배층도 적지 않았다.
상당수의 크샤트리아의 인식 속에서 로마란 포도주와 설탕을 생산하는 대국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엄격한 카스트 제도로 신분이 구분되어있는 덕분에 자신들의 기득권이 흔들릴 거라는 걱정도 할 필요가 없었다.
대부분의 지배층들은 언제까지나 이런 부귀영화가 계속될 거라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사타바하나의 체계는 봉건제와 유사한 모습을 보였는데 제왕의 아들인 왕자들이 상당수 지방의 총독을 역임했으며, 그 밑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마을을 다스리고 지위를 세습할 수 있는 영주들도 존재했다.
수백 년을 공고히 내려온 이 체제하에서 로마라는 이물질에 주의를 기울인 이들은 별로 존재하지 않았다.
타디우스는 영리하게도 현지 귀족이기도 한 카샤파를 중간에 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카샤파가 로마 상인들을 데려온 것으로 보일 여지도 충분했다.
타디우스는 동방 최고의 거상답게 어마어마한 양의 설탕과 포도주, 로마산 비단을 가지고 사타바하나로 들어왔다.
예상대로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거래를 시작한 지 첫날, 계약된 양을 본 그는 곧바로 추가 물량을 본국에서 가져오라는 사람을 보냈다.
금화를 갈퀴로 쓸어갈 수 있겠다는 확신은 곧 현실이 되었다.
"하하하하! 아주 좋아. 돈을 번다는 게 이렇게나 쉬운 일인 줄 미처 몰랐습니다."
계약대로 이윤의 일부를 분배받은 카샤파의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찢어졌다.
"만족스러우시다니 저도 다행입니다. 덕분에 저 역시 예상하고 있던 이상의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 돈으로 여기서 다른 물품을 사서 로마에서 팔면 더 큰 이윤을 얻을 수 있겠지요. 타디우스 님의 자산이 한층 더 불어나겠군요."
"그래야지요. 이미 구매할 품목은 정해놓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제가 현지 가격에 매입할 수 있게 준비를 도와드리죠. 면? 장신구?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이번 거래로 카샤파가 얻은 이윤은 금전만이 아니었다.
콧대 높던 다른 귀족들이 아닌 척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물건을 구매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통쾌했다.
심지어 그렇게나 자신을 무시하더니 조금 더 많이 팔아달라고 하는 사정하는 이들마저 나오지 않았던가.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카샤파는 타디우스가 원하는 건 뭐든지 구해다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면직물도 탐나긴 하지만 지금 원하는 건 그게 아닙니다. 제가 원하는 건 자원. 정확히 말하면 그걸 캐낼 수 있는 땅을 구매하고 싶습니다."
"땅을 사고 싶다?"
예상치 못한 요구에 카샤파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감돌았다.
"혹시 면직물을 아예 생산해서 로마로 계속 공급할 생각입니까? 그러면 분명 상당한 이윤을 지속적으로 얻을 수 있겠지만 그건 조금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럴 마음은 없습니다. 사실 본국에서도 목화 재배를 할 수는 있습니다. 다만 노동력이 너무 많이 들어서 결국 노예들을 사용해야 하는데 노예들을 사용한다고 해도 이게 공짜는 아니니까요."
그럴싸하게 둘러대긴 했지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니었다.
마르쿠스는 이미 목화 생산의 효율성을 폭발적으로 증가시킬 방안을 마련 중이었다.
목화로 실을 짓기 위해서는 목화솜의 씨를 빼내는 과정이 필수인데 고대 시기에는 당연히 이걸 수작업으로 했다.
그런데 이 씨를 분리하는 작업이 결코 쉬운 게 아니라 너무 과한 노동력을 요구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방식의 도구를 개발했는데 가장 원시적인 도구가 개발된 시기조차 기원후의 일이었다.
마르쿠스는 최대한 구현이 가능한 진보된 조면기를 만들어 생산효율을 극적으로 끌어올릴 계획이었다.
즉, 인도산 물품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는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타디우스로서는 사타바하나의 물건들이 전혀 끌리지 않았다.
그가 관심 있는 건 오롯이 마르쿠스에게 받은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이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천연비료입니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비료들이 저희가 재배하는 식량의 생산량을 극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도에 위치를 표시해드릴 테니 한번 보시죠."
타디우스는 마르쿠스에게서 받은 지도를 꺼내 카샤파에게 보여주었다.
카샤파는 우선 지도의 정밀함에 한 번 놀랐고, 별로 가치 있어 보이지 않는 땅이라는 데에 안심했다.
"이 정도면 제가 충분히 매입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진짜 이 막대한 돈으로 비료로 쓸 수 있는 물건이 나오는 땅을 사실 겁니까?"
"그렇습니다. 될 수 있는 최대한도로 구입을 할 계획입니다. 협조해주신다면 섭섭지 않게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저야 좋지만······."
돈도 준다고 하고 손해도 볼 게 없었으니 카샤파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사실 타디우스도 자신이 구할 초석의 용도가 정확히 뭐였는지 알 수가 없었으니 애초에 거짓말을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실제로 초석 원광을 실제로 본 뒤에도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샤한샤께서는 이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을 대체 어디에 쓰시려고 확보해놓으시려는 걸까. 설마 그 많은 양을 전부 다 농사에 쓰시진 않을 텐데.'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이걸 다 비료로 쓴다는 말을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카샤파도 타디우스가 사는 땅이 점점 더 넓어질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차피 별로 쓸모도 없어 보이는 물건이라 딱히 제지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카샤파야 중간에서 이득이나 보고 빠지면 그만이었으니까.
타디우스는 사들인 땅의 크기가 충분히 커지자 사람들을 고용해 명령받은 대로 초석을 캐기 시작했다.
전 세계가 초석을 얻기 위해 혈안이 되었을 정도로 인도에 묻힌 초석의 양은 차원이 달랐다.
과장 좀 보태서 말하면 그냥 땅을 파기만 해도 원광이 쏟아지는 수준이고 초석의 질 자체도 탁월한 수준이었다.
"좋아, 좋아. 그러면 오늘은 이제 남서쪽 해안가에 위치한 초석 지대를 사볼까? 여기에 배를 놔두고 바로 본국으로 퍼 나르면 딱이겠군."
타디우스는 마치 땅따먹기라도 하듯이 쉬지 않고 토지를 매입해 가면서 부지런히 초석을 캐냈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언젠가 밟히기 마련인 법.
웬 로마 상인 한 놈이 엄청난 황금을 쓸어 담아 그 돈으로 토지를 사고 있다는 소문이 현지 지배층들의 귀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뭐라? 사타바하나에서 물건을 판매한 돈으로 이쪽의 토지를 사들이고 있다고?"
"그건 완전 우리가 로마 놈에게 우리의 땅을 가져다가 바치고 있는 꼴이 아니더냐."
"교역을 가장해서 몰래 쥐새끼들을 심어 놓으려는 수작일지도 모르겠군."
타디우스가 땅을 산 범위가 워낙 넓었기 때문에 현지 영주들의 반응도 각양각색으로 터져 나왔으나, 긍정적인 반응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나 귀족들의 머릿속에는 또 한 가지 공통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걸 빌미로 로마 상인을 족친다면 놈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몰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귀족들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꾸물거리다가는 다른 이가 선수를 칠지도 모른다.
뒤를 봐주는 현지 귀족이 있다는 사실도 별로 문제 될 건 없었다.
고위직에 있는 장군들에게 카샤파는 근본도 없는 가짜 크샤트리아 정도에 불과한 까닭이다.
거의 동시에 움직인 실력자들 가운데 타디우스와 대면하는 데 성공한 행운 아닌 행운을 누린 이는 스와티 왕자였다.
현 삼라트 미가스바티의 유력한 후계자로 여겨지는 그는 일개 로마 상인의 권리쯤이야 신경도 쓰지 않고 병사들과 함께 들이닥쳤다.
"이게 대체 무슨 무례인가!"
분노와 당혹감이 서린 타디우스의 호령에도 인도의 병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로마 상인들을 강제로 포박한 그들은 타디우스를 무릎 꿇린 뒤 스와티 왕자의 앞으로 끌고 갔다.
타디우스는 짐짓 억울하다는 듯 거세게 목소리를 높여 통역을 요구했다.
"우리는 정당한 계약에 따라 거래를 치렀소. 그런데 갑자기 들이닥쳐서 이런 만행을 저지르다니. 우리가 대체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려주시오. 그리고 그대들은 대체 무슨 권리로 로마 시민인 우리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인가!"
타디우스의 말을 들은 통역병이 조소를 지으며 통역을 해주었다.
그의 말을 이해한 병사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야, 이 멍청한 로마인이 하는 말 들었냐?"
"잘 쳐줘 봐야 바이샤 정도밖에 되지 않는 평민이 지금 누구 앞에서 입을 놀리고 있는 건지 자각이 없는 건가?"
부하에게 말을 전해 들은 스와티 역시 피식 웃으며 한마디 대꾸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로마 놈의 물건을 모조리 몰수하고 추방해 버려라. 그리고 놈이 산 땅은 다시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이루 말할 데 없는 폭거였지만 왕자에게는 자신의 판결이 잘못됐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차대 샴라트가 될 자신이 타국의 백성이라고는 해도 귀족도 아닌 평민의 권익 따위를 신경 써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과욕을 부렸다며 목을 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자신은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뭔가가 걸리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이는 오직 왕자의 부관뿐이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로마에서 항의를 할지도 모르는데요."
"항의? 로마에서 고작 상인들 몇 놈 때문에 우리에게 항의를 한다고?"
"그냥 상인이 아니라 아마 로마에서 힘 꽤나 쓰는 상인일 겁니다. 그 정도면 로마의 권력자들에게도 줄을 대고 있을 가능성이 크지요."
"그러면 우리 측에 명문을 만들면 그만이지. 외국인에게는 땅을 팔지 않지만, 저 상인들은 그 법을 우회하기 위해 교묘한 속임수를 부렸다. 만약 항의가 들어온다면 우리는 적법한 절차로 공무를 집행했으니 그렇게 알라고 통보하도록."
"예."
우려를 표했던 부관도 그 정도면 로마도 뭐라고 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항의가 멈추지 않는다면 뒤로 어느 정도 금을 찔러주면 조용히 다시 입을 닫을 것이다.
권력자들의 속성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하지만 스와티는 물론 그의 부관도 알지 못했다.
억울하다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끌려가는 타디우스의 입가에서 숨길 수 없는 미소가 새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 270. 그건 로마의 것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