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그건 로마의 것이다 >
271.
사타바하나에서 일어난 일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작은 소요에 불과했다.
제왕이 다스리는 전제 국가에서 소란을 일으킨 상인 몇의 선박과 물품을 몰수한 일 따위는 그다지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아무런 명분도 없이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나름의 절차를 맞추는 시늉이라도 했다.
혹시 모를 외교마찰로 번지면 취할 조치까지 마련해두었으니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을 처리한 사타바하나 지배층의 시선이었을 뿐,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타디우스의 보고가 들어온지 단 하루만에 마르쿠스는 동방 속주의 권력자들을 불러모아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이렇게 신속하게 회의가 열릴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이미 사관학교 관련 행사 일정을 조정해두었기 때문에 상당수의 유력인사들이 크테시폰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마르쿠스의 측근들은 이미 돌아가는 사정을 대강 알고 있었지만, 아직 사태를 다 이해하지 못한 인물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대체 무슨일이냐며 멀뚱멀뚱 서로를 돌아보며 수군거리는 중이었다.
그런 작은 웅성거림도 마르쿠스가 알현실 내부로 들어서자 씻은 듯이 사라졌다.
마르쿠스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하자 안에 있던 모두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전부 모였군. 공사다망한 일정에도 이렇게 모여주니 고맙다."
"아니옵니다."
"샤한샤께서 부르셨으니 어떤 일이 있더라도 달려와야지요."
슬쩍 둘러보기만 해도 방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은 실로 화려했다.
마르쿠스의 심복인 수레나스와 스파르타쿠스.
그리고 영속 집정관의 권리를 얻으며 새롭게 편성하게 된 집정관 위원회의 고관들.
동방 속주에서 중용되고 있는 현지 귀족들과 새롭게 중책을 맡게된 실무진의 책임자들까지.
상당히 바쁜 격무에 매진 중일 사람들까지 모두 소집될 정도로 중요한 안건이 터진 것이다.
마르쿠스가 알현실에 놓여 있는 유일한 의자에 앉자 수레나스가 그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입을 열었다.
"마르쿠스 님, 모두가 소집에 응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래. 모두 고개를 들라."
"예!"
절대적인 충성과 경의가 담긴 목소리와 함께 모두의 시선이 마르쿠스에게 집중됐다.
"모두를 이곳에 모이라 한 이유는 로마에 대한 심각한 도발 행위가 자행되었기 때문이다. 수레나스, 설명하도록."
"예. 이미 들으신 분도 몇 분 계시겠지만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타바하나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던 로마 상인들이 물품을 갈취당하고 모욕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참고로 이들 모두는 로마 시민권자였습니다."
"허어···도적이라도 만난 것입니까? 주모자의 정체는?"
"사타바하나의 왕자와 귀족들입니다."
이번 일에 대해 처음으로 듣는 원로원 소속의 자문 위원단들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현지 귀족들 역시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긴 마찬가지였다.
"사타바하나의 왕자가 로마 상인들을 박해했다는 겁니까? 대체 이유가···이번에 인도로 간 상인들이라면 정식으로 인가를 받아서 간 이들이 아닙니까? 다시 말해서, 사타바하나가 로마에게 도발을 했다는 그런 뜻입니까?"
사타바하나 수준으로 로마에게 싸움을 거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제 정신으로 벌인 일이라고는 여기기가 어려웠다.
워원회의 일원인 파비우스가 신중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4년 전에 집정관직을 역임한 위엄있는 파트라키였으나, 원로원쪽에 더 가까운 성향이라 이번 일의 전모를 알지는 못했다.
"혹시 어떤 모략이 있는 건 아닙니까? 사타바하나와 로마를 이간질하려는 세력이 준동하고 있다거나."
"그건 아닌 듯 합니다. 이번 일을 주도한 스와티 왕자는 차대 왕으로 여겨지는 인물입니다. 게다가 그는 상인들의 물품을 모조리 압수하고 자신의 소유물로 삼았다고 하더군요."
"아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파비우스가 입을 떡 벌리고 마르쿠스의 안색을 살폈다.
마르쿠스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가늠해보기 위해서였다.
"이번 사태는 나로서도 분노를 넘어선 황당함을 느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는 사태다. 지금까지 우리가 대면한 국가들은 로마와 직접적으로 대립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로마의 시민을 부당하게 대한다는 건 꿈도 꾸지 못했으니까."
"사타하바하나는 왕정이고 로마와 교류를 하긴 했으나 제한적인 상업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이쪽의 제에 대해 문외한인 건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높다. 자신들 딴에는 '이 정도야 별로 문제가 되지 않겠지'라는 마음으로 일을 벌였을 수도 있다. 하나, 그로 인해 로마 시민들이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이상 어쩔 수 없다며 넘어갈 수도 없는 문제다."
"그건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위원회의 인사들이 납득하는 반응을 보이자 수레나스가 재빠르게 미리 준비된 신문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내일 크테시폰에 배포될 신문입니다. 안티오키아와 다마스쿠스,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그리스의 폴리스들에도 순차적으로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실릴 예정입니다. 이번 사건의 상세한 내용은 거기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위원회와 현지 귀족들이 신문을 펼쳐 들자 대문짝만하게 실린 헤드라인이 그들의 눈에 띄었다.
<사타바하나 왕족의 충격적인 만행. 로마 시민들이 타국에서 전례 없는 모욕을 당하다.>
기사는 인도의 왕자와 병사들이 어떤 식으로 로마 상인들을 대했는지 상세히 묘사하고 있었다.
당연히 적절한 수준의 과장이 조미료로 첨가되어 있었지만, 기사를 읽는 이들에게는 쓰여 있는 내용이 바로 진실인 법.
로마 시민권자를 조롱하고 발로 밟고, 침을 뱉기까지 했다는 글귀에 모두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이번 상행에 참가한 상인들 가운데 삼분의 이 정도는 공로를 인정받아 시민권을 얻은 속주민들이다. 하지만 로마의 시민이 된 이상 그런 구분은 무의미할 터. 나는 이들이 받은 모욕을 가볍게 넘길 마음이 없다."
"자비로우신 말씀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현지 귀족들의 고개가 한층 더 깊숙이 숙여졌다.
마르쿠스의 말은 나중에 시민권을 얻어 시민이 된 이들도 로마인으로서 누릴 권리를 확실히 보장해주겠단 뜻이었기 때문이다.
위원회 사람들도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았다.
이번 건은 어떻게 보면 현지 사람들의 충성을 한층 더 공고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로마 시민이 된 속주민들이 외국에서 모욕을 받은 일로 로마가 격분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속주민들의 반응이 어떻겠는가.
당연히 마르쿠스의 결정을 찬양하는 한편 자신들도 시민권을 얻고 싶다는 열망이 강해질 것이다.
"마르쿠스 님, 그럼 이번 일의 처리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정식으로 사절단을 파견해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고 정당한 보상을 받아내는 정도면 되겠습니까?"
"파비우스의 의견대로 온건하게 처리하는 방법도 있겠지. 하지만 이번 일을 저지른 건 저들의 고위 지배층이다. 우리가 요구해봐야 저들이 합당한 처벌을 할까? 그냥 적당한 희생양 하나 만들어서 그쪽에 뒤집어씌우고 사건을 덮으려 하겠지."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 확률이 높겠군요. 저희가 아무리 강력히 말해도 다음대의 왕이 될 사람을 처벌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이번 건은 절충점을 찾기가 어렵다. 이쪽이 외교적으로 항의해봐야 저들이 들을 가능성은 낮다. 엄격한 신분제를 유지하는 저들의 특성상 별것도 아닌 일로 귀찮게 군다며 욕이나 하고 말겠지. 그렇다고 가볍게 넘어가면 로마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수레나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모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마르쿠스 님의 혜안대로 어설픈 대처는 마땅한 실익을 거두기 힘듭니다. 보상금이야 받을 수 있겠지만 저희가 고작 그런 것 따위를 받기 위해 이 사안을 논하는 게 아니니까요.
이건 중대한 위신의 문제입니다. 저들은 마르쿠스 님의 인가를 받아서 정식으로 건너간 로마의 시민들에게 모욕을 주었습니다. 즉, 이는 마르쿠스 님과 로마의 체면을 짓밟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중대한 처벌을 내려야겠군요."
"그렇다면 지금 즉시 군사를 일으킬 준비를 해야겠군요!"
"병사들을 모으고 보급로를 어떻게 짤지도 계산을 해봐야 합니다."
봇물이 터지듯 사방에서 이야기가 쏟아지자 마르쿠스가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러자 소란스럽던 실내의 분위기가 다시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그럴 필요는 없다. 준비는 이미 전부 되어 있을 테니까."
"예? 전쟁의 준비가 이미 되어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미 오래전 수레나스에게 다양한 경우에 따라서 언제라도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라 일렀다. 어떤가, 수레나스. 준비는 끝나있겠지?"
"예. 명령만 주신다면 바로 군사를 일으켜 사타바하나에 엄중한 처벌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선전포고를 할 사절도 이미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우리 군대가 놈들의 영역에 당도할 때쯤이면 딱 좋게 사절이 도착하겠지. 로마에도 내 뜻을 실은 서신을 보내놓았으니 그쪽도 신경쓸 필요는 없다."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있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있겠는가.
현지 귀족들은 물론 위원회의 모두 역시 이번 전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다.
이번 전쟁을 지휘하게 될 사령관으로는 당연히 수레나스가 임명됐다.
그가 다시 한 번 옥좌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결연하게 의지를 불태웠다.
"이번 전쟁은 로마를 이해하지 못하는 저 먼 동방의 국가들에 대한 포고입니다. 이번 소식을 전해 들은 모든 국가들은 로마 시민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게 되겠지요."
"그래. 어차피 한 번쯤은 이런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저들은 로마에 대해 무지하니까."
마르쿠스가 옥좌에서 몸을 일으키며 엄숙하게 선포했다.
"모든 아퀼라누스들을 광장에 소집해라. 시민들에게 전쟁을 알리는 연설을 시작하겠다."
※※※
사실 타디우스가 인도로 향하는 배를 타기도 전부터 마르쿠스는 사타바하나를 치기 위한 준비에 착수해 있었다.
덕분에 마르쿠스의 명령이 떨어진 지 며칠 되지도 않아 로마군단은 사타바하나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그리고 눈속임을 위해 로마의 가장 동쪽에 있는 카렌 왕국과 수렌 왕국에서도 육로로 군대를 진군시킬듯한 모양새를 취했다.
하지만 그런 심상치 않은 움직임보다도 더 먼저 로마에서 보낸 선전포고가 사타바하나의 수도에 당도했다.
사타바하나의 궁전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각지에 있는 귀족들을 규합해 최대한 신속하게 회의를 열었으나 이해할 수 없다는 고성만이 빗발칠 뿐이었다.
"아니, 로마가 우리 바로 옆에 인접해 있는 국가도 아닌데 이런 일로 전쟁을 선포하는 게 말이 되는 겁니까?"
"귀족도 아니고 고작 평민 상인 몇 놈을 족쳤을 뿐인데 전쟁이라니. 이건 그냥 로마에서 우리와 싸우려고 적당한 건수를 구실로 잡았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그 로마 놈이 마구 캐고 있었다는 돌덩이 같은 걸 차지하기 위해 오는 걸지도 모르죠."
"그럴 리가 있나. 그딴 게 뭐라고 전쟁까지 일으킨다는 말인가."
귀족들의 아우성을 듣고 있던 미가스바티 왕이 피곤한 듯 한숨을 쉬었다.
"선전포고문을 가져온 사절은 이렇게 말했네. 로마의 모든 시민들은 로마의 것. 그러니 로마의 샤한샤는 자신들의 얼굴에 정면으로 침을 뱉은 행위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고."
딱히 선전포고문을 전부 보지 않아도 로마의 의지가 얼마나 강경한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어째서 이 정도의 일로 과민반응을 보이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어쩌면 왕자가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쨌든 상대의 목적이나 노림수와 관계없이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
로마군이 쳐들어오는 건 기정사실이었으니 맞서 싸울 군사들을 소집하고 방어 전략을 수입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타바하나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선전포고문이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로마의 대군이 육로와 해로로 밀려올 거라는 급보가 도착한 것이다.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고, 촉박하게.
전쟁의 불길이 사타바하나를 집어삼켰다.
< 271. 그건 로마의 것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