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3. 그건 로마의 것이다 >
273.
로마가 어째서 강화협상을 거부했는지 이유는 일목요연했다.
처음에 말로 할 때 듣지 않았으니 이미 배는 떠나갔다는 의지를 관철한 것이리라.
간단히 말하자면 처음보다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건 사타바하나의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압수한 물품을 그대로 돌려주는 것까지는 괜찮다.
그런데 거기에 10배의 보상금을 얹어주고 그것과 별개로 전쟁배상금까지 지불하는 것은 상당한 출혈이다.
거기에 사절로 왕이 직접 나오라는 로마의 요구를 수용한 것만으로도 사타바하나는 크게 양보한 거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더한 조건을 제시하라는 건 이미 상대방을 패전국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였다.
여기서 계속 싸운다면 십중팔구는 사타바하나가 패전국이 되겠지만 아직 전쟁에서 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된 이상 결전을 벌여야 한다는 신하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도를 걸어 잠그고 각지에서 수비병력을 끌어모아 반격을 한다면 충분히 적을 몰아낼 수 있습니다."
"일단 로마 상인을 데려온 카샤파의 목을 쳐서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우리의 의지가 굳건하다는 걸 알아야 저들도 저런 건방진 짓거리를 더 하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찬동의 의견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하지만 더욱 신중해야 한다고 외치는 신하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로마군과 이 이상 싸우는 건 아직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로마에게 나라를 들어다 바치자는 말인가?"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미 로마 놈들은 이번 전쟁을 위해 엄청난 준비를 해왔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반면 저희는 로마에 대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저 괴물같이 강한 기병들을 보유했다는 게 다이지요. 그런데 그게 다일까요? 로마놈들의 후속 부대는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이 공성전에도 일가견이 있다면? 수도가 잠시도 버티지 못하고 함락된다면 어떻게 합니까.
"
수도 프라티슈타나는 처음부터 수비를 위해 만들어진 도시가 아니라 천혜의 요새라고 부르기엔 적합하지 않았다.
만약 수비군이 제때 편성되지 않으면 왕이 수도를 버리고 달아나야 하는 사태가 펼쳐질지도 몰랐다.
"로마와 싸우려면 저희 쪽도 최대한의 준비를 끝내고 만전의 상태에서 부딪쳐야 합니다. 이렇게 기습을 당한 상황에서는 백 번을 부딪쳐도 전부 깨질 뿐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잠깐의 굴욕을 참고 나중을 기약하시옵소서. 만약 여기서 더 싸움을 끌었다가 패하기라도 한다면 로마의 요구 사항도 점점 더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음."
미가스바티 왕은 가는 신음을 흘리며 입술을 씹었다.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하들은 결정적으로 말만 늘어놓지 말고 싸우고 싶다면 본인이 직접 군을 이끌고 나가라고 주장했다.
그 말에 자신 있게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번에 당한 대패가 너무 결정적이었다.
사타바하나의 입장에선 너무나 깊은 패배감이.
로마의 입장에선 상대방이 덩치만 큰 허수아비라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카르니 장군. 참고삼아 묻고 싶은데 여기서 어떻게 하면 로마와 싸워서 이길 수 있겠나?"
"외람된 말이오나 이긴다는 것의 범위가 중요합니다. 어떻게든 적을 밀어내면 충분한 것인지 아니면 적을 완전히 멸하는 데까지인지에 따라 가능성이 달라지겠지요. 지금의 상황에서 후자는··· 솔직히 방법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전자는?"
"폐하께서는 도시의 절반 이상은 초토화되는 걸 감수하고 적을 피해 도망 다니셔야 합니다. 그리고 적과의 전면전은 피하면서 적의 보급을 끊는 데에 주력해야겠지요. 이것도 쉽지 않은 방법이고 턱없이 많은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카르니 장군의 설명에 싸늘한 침묵이 좌중을 훑고 지나갔다.
여러 번의 전쟁을 겪고 승리를 거둔 그는 이미 로마와 싸우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린 듯 보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제 누구도 더는 싸워야 한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만약 로마가 사타바하나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전쟁을 시작한 거라면 저렇게라도 싸워야 하는 게 맞다.
하지만 로마가 이번에 전쟁을 일으킨 건 어디까지나 피해를 입은 로마 상인들에게 보상을 하라는 취지였다.
전 국토를 난장판으로 만들면서 겨우겨우 상대를 물러나게 해봐야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아직 3만의 군사를 잃었을 뿐이다.
패전국처럼 왕이 직접 나가서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결정도 쉽사리 내리기 힘들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다.
로마군은 그러는 동안 착실하게 도시를 점령하며 재물과 식량을 약탈했다.
병합이 목적이라면 최대한 약탈을 자제하는 게 마르쿠스의 방침이었지만,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번 전쟁은 로마 시민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선전이었기 때문이다.
수레나스는 예상과는 달리 수도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미 수도로 가는 길은 뚫린 상황이었으나 후방을 안정화시키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던 까닭이다.
로마군은 사타바하나의 남서부를 철저히 약탈하며 자신들의 보급로를 확실히 다져두었다.
사타바하나는 일단 방어병력을 충실히 모아둔 뒤 재협상을 가지는 쪽으로 결론을 냈다.
일단 수적으로라도 엇비슷하게 전력을 맞춰두고 하는 협상과 아닌 건 상대적인 입장이 많이 차이 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전으로부터 한 달 정도가 지난 뒤.
간신히 버티고 있던 사타바하나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버린 사건이 터졌다.
각지에서 규합하고 있던 방위군이 수레나스가 이끄는 로마 기병대의 기습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것이다.
정보의 누출은 카샤파를 비롯한 외부에서 편입된 크샤트리아들이었다.
원래부터 주류 기득권층이 아니었던 그들은 이번 전쟁을 줄을 바꿀 절호의 기회로 여긴 것이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방위군 3만 5천 명이 또다시 어이없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이렇게 되니 사타바하나 입장에선 이제 더 싸움을 끌 여력이 남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마르쿠스가 이끄는 3만의 병사들이 서쪽 해안에 상륙했다는 보고까지 들려왔다.
북쪽에서 내려온 주력이라고 해봐야 현재로서는 5만에 불과한 상황.
적군은 확인된 것만 10만에 가까운 대군.
무엇보다도 양군의 질적 차이를 고려하면 실제적인 전력 차는 2배가 아니라 5배 이상 벌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진짜로 더 버텼다가는 왕조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질지도 몰랐다.
결국 미가스바티 왕은 다시 한번 로마군에 사절을 보내 강화협상을 청했다.
이번에는 기존의 조건이 아니라 로마 측이 제시하는 안을 그대로 수용하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마르쿠스는 승낙이라고, 그렇다고 거절이라고도 볼 수 없는 내용이 적힌 서신을 돌려보냈다.
서신에 적힌 내용은 실로 간결하면서도 굴욕적이었다.
<최소의 호위만을 대동한 채 사타바하나의 왕이 직접 로마군의 진지로 오라>
마치 아랫사람을 부르는 듯한 광오한 언사였으나 어쩌겠는가.
미가스바티 왕은 마르쿠스의 부름에 응하기로 하고 근위병들을 소집했다.
반대의 의견을 내는 이들은 이제 아무도 없었다.
※※※
미가스바티 왕은 사타바하나의 군주답게 최대한 호화로운 복장과 장신구를 걸치고 로마군의 진지에 당도했다.
전쟁에서 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도 일국의 왕으로서의 위엄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의 뒤를 따르는 병사들도 기세에 눌리는 법이 없도록 최대한 의장에 신경 썼다.
'저게 소문의 그 독수리 기병들인가.'
미가스바티 왕은 기지의 안쪽에 쭉 도열해 있는 기병들을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들은 그대로 등 부분에 펼쳐져 있는 날개가 인상적이면서도 위압적으로 느껴졌다.
들고 있는 창은 또 어찌나 길었던지 저 창의 일격 한 방에 자신의 병사들이 줄줄이 꼬챙이가 되었단 말이 절로 납득이 갔다.
보통 창이 저렇게 길면 내구성이 약해야 정상인데 딱히 그렇단 말이 들리지 않은 것도 신기했다.
'아무리 창으로 찌르고 화살을 날려도 갑옷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고 하니··· 그만큼 철을 제련하는 기술이 우리와 차원이 다르다는 건가?'
로마군의 진지를 둘러본 미가스바티 왕은 처음부터 자신들에게 승산이 별로 없었음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독수리 형상의 기병들만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병사들의 보고도 그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고, 직접 보니 그들이 풍기는 압박감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둘러볼수록 문제는 독수리 형상의 갑옷을 입은 자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로마군 전체의 무장 수준이 자신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만한 힘을 지닌 국가가 배를 타고 건너가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는 게 소름이 돋았다.
이런 군대를 휘두르는 상대방이 어떤 조건을 요구할 것인가.
과연 무엇을 원할까.
왕으로서는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는 중앙에 놓인 진홍색의 융단을 밟으며 진지의 중앙까지 나아갔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이 느껴졌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견고한 의자가 놓인 계단의 주위로 샤한샤의 측근으로 보이는 이들이 도열해 있었다.
독수리 모양의 훈장을 단 인물과 나이가 들었음에도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는 사내가 특히 눈에 띄었다.
미가스바티 왕이 자리에 멈추자 독수리 훈장을 단 사내가 계단 쪽을 돌아보며 고개를 숙였다.
"마르쿠스 님. 사타바하나의 삼라트 미가스바티가 마르쿠스 님의 부르심에 응해 당도했습니다."
절도 있는 목소리가 잦아들고 몇 초 뒤에, 계단 위에서 의외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어서 오시오. 사타바하나의 삼라트여. 내가 동방, 아니 그대들의 입장에서 보면 서역이겠군. 서역의 주인이자 샤한샤, 마르쿠스요."
생각보다 위압적인 목소리나 태도가 아니다.
그래도 미가스바티 왕은 안도감을 품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대방이 자신의 힘만 믿고 강압적으로 나오는 게 협상에서는 더 편했다.
그만큼 감정적인 상대와의 대화는 어떻게든 빠져나갈 구멍을 찾기 쉬운 까닭이다.
저렇게 부드러운 언사로 타국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는 자가 가장 골치 아픈 상대였다.
"처음 뵙겠소. 사타바하나의 삼라트 미가스바티요. 우선 이렇게 초대해주신 걸 보아 강화협상에 응할 마음이 있다고 판단해도 되겠소이까?"
"물론이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커질 일이 아니었는데 이런 비극으로 전개된 것에는 유감을 표하는 바이오."
선전포고와 동시에 쳐들어온 주제에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그걸 입 밖으로 내거나 표정으로 드러낼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그러게 말이오. 보다 더 원만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있었을 텐데 안타까울 따름이오."
"처음에 여기 수레나스가 보낸 협상안에 동의했다면 우리도 돌아갔을 거요. 하지만 그쪽에서 수용하기는커녕 도리어 군대를 보냈으니 우리로서도 더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니겠소?"
그러니까 한마디로 처음 말로 할 때 안 들었으니 좀 더 얻어터져 봐야 정신을 차린다는 표현이다.
미가스바티가 입가를 씰룩거리며 뻣뻣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말이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내가 당도할 때까지도 적극적으로 협상에 나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나로서도 마냥 관대하게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오. 싸움이 벌어지기 전이라면 몰라도 무엇보다 소중한 로마 시민의 피가 흐른 이상 그에 합당한 대가는 받아 내야지."
"실례되는 질문일 수도 있겠지만 귀국 병사들의 피해가 몇 명이나 나왔소이까? 내가 알기론 백 명도 채 되지 않을 거라고 알고 있는데."
"절대적인 수로만 보면 그 말이 맞소. 하지만 로마는 단 한 명이라도 로마 시민이 흘리는 피를 경시하지 않는다오."
미가스바티 왕은 헛웃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감정을 추슬렀다.
지금 확인된 것만 해도 사타바하나군의 사망자는 5만이 넘었다.
그런데 자국 병사가 백 단위도 아니고 십 단위로 죽었다고 흘린 피값을 받아야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그래서··· 그쪽이 제시하고자 하는 조건을 말해주시오. 이 자리에서 들어보고 결정을 내리겠소."
"간단하오. 종래에 우리가 요구했던 모든 배상금의 2배. 거기에 지금까지 우리 군이 소모한 식량의 지급. 추가로 사망한 로마군의 가족들에게 전달할 위로금을 건네주면 되오."
결국 감정을 다 억누르지 못한 미가스바티 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르쿠스는 그 모습을 산뜻하게 무시하며 깜빡 잊었다는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초석 일대의 영유권을 그쪽의 크샤트리아인 카샤파에게 일임하시오. 그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모든 초석은 우리 로마가 독점하도록 하겠소."
< 273. 그건 로마의 것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