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4. 그건 로마의 것이다 >
274.
미가스바티 왕은 자신이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자애롭게 웃고 있는 얼굴로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말인가.
마르쿠스는 식은땀이 흐르는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잔을 하나 꺼내오게 했다.
"혹시 추운 것이오? 날씨가 온난한데도 그런 걸 보면 몸살기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 따뜻한 차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계속하는 게 좋겠소."
미가스바티 왕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뜨거운 잔을 받아들었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잔에는 커피를 따라둔 채로 태연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몸이 좋지 않은 거라면 회담일을 뒤로 미뤄도 무방하오. 아무리 그래도 아픈 사람을 세워두고 협상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아니··· 그건 아니오. 예상외의 조건에 놀랐을 뿐 아픈 건 아니오."
여기서 협상일을 뒤로 미룬다면 이걸 빌미로 또 어떤 추가조건을 붙일지 모른다.
미가스바티 왕이 숨을 크게 들이쉬고는 조심스레 물었다.
"이번 일을 주도한 자의 처벌을 원한다거나 하지는 않소?"
"내가 그자의 목을 요구하면 넘겨줄 수 있소?"
"그건······."
"나도 그렇게까지 할 마음은 없소. 어차피 이번 전쟁과 배상금으로 그자에 대한 처벌은 이뤄졌다고 보고 있으니까."
마르쿠스의 말대로였다.
이번 전쟁으로 사타바하나가 입은 피해는 건국 이래 가장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연히 이 사태를 촉발한 왕자에 대한 규탄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사와티를 차대 왕으로 세우는 것도 재고해 봐야 할지 모른다.
무난하게 진행될 거라고 예상했던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다.
'설마 일부러 국내의 혼란을 유도하기 위해 왕자에 대한 직접적인 처벌을 요구하지 않은 것인가?'
다른 후계자감이 있다면 이번 일의 책임을 물어 왕자를 후계자 자리에서 끌어내리면 된다.
문제는 지금 미가스바티 왕은 후계에 대한 마땅한 대안이 없단 점이었다.
게다가 이미 차대 왕으로 낙점된 것이나 다름없던 왕자는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해둔 상태였다.
마땅한 대안이 없이 후계자를 바꾸려고 한다면 왕자의 세력이 반발할 거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다.
차라리 로마가 왕자에 대한 처벌을 요구한다면 왕자의 세력도 대놓고 반발할 수는 없었을 터.
원망의 화살을 로마에 돌리는 형태로 후계 계승을 좀 더 안정적으로 치렀을 가능성도 있었다.
'악마 같은··· 이쪽의 전후 복구를 최대한 늦춰보겠다는 심산이로구나.'
찻잔을 잡은 손에 핏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최대한 억누르려고 했지만 가늘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무례를 저지른 왕자를 봐주는 건 고마우나 배상금··· 은 너무 과하게 책정된 게 아닌가 싶소. 조금만 더 관용을 베풀어 줄 수는 없겠소?"
"그 부분은 왕자의 목숨값이라고 생각해주시오. 우리가 왕자의 목을 요구하지는 못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은 받아야 하지 않겠소?"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의 거금은 쉽게 마련하기가······."
처음에 로마가 요구했던 보상금은 상인들이 당한 피해액의 10배와 전쟁 배상금이었다.
전쟁 배상금만 해도 사타바하나의 왕실 1년 예산의 절반에 달하는 수치였다.
그런데 여기에 2배를 요구하는 것도 모자라 로마군이 소모한 식량에 사망자들에게는 위로금까지 건네주라고 한다.
눈앞이 절로 깜깜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귀국의 사정을 고려해 일시불이 아니라 분할로 납부하도록 편의를 봐주겠소. 보상금의 액수를 2배로 올렸으니 2번에 걸쳐서 받는 걸로 하지. 3번 이상으로 나누는 것도 가능하겠지만 무한정 미뤄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3번째부터는 소정의 이자를 함께 받도록 하지."
살다 살다 배상금에 이자를 물려서 받아먹겠다는 말은 또 처음이었다.
"2번에 걸쳐서··· 지불하도록 하겠소."
"현명한 판단이오. 그럼 이제 나머지 안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도 좋겠소?"
"나머지 안건? 배상금 말고 또 무슨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거요?"
"어떤 문제가 일어났을 때 가장 중요한 일은 똑같은 문제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재발 방지책을 세우는 거라오. 만약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어떻게 되겠소? 그때는 우리도 지금보다 더한 철퇴를 휘두를 것이오."
미가스바티 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그건··· 다시는 로마 시민들에게 실례되는 행동을 하는 자가 없도록 내가 철저히 감독하겠소. 믿어주시오."
"물론 삼라트의 진심을 의심하는 건 아니오. 하지만 사람이 하는 일은 결국 어딘가 허점이 생기기 마련. 제도와 법으로 다스리는 게 가장 변수가 없는 확실한 방법이라는 데에 동의해주실 거라 믿소."
"그렇지만······."
"혹여 내가 모르는 더욱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들어드릴 테니 말해 보시오."
미가스바티 왕이 어물어물 입을 열려 했으나 결국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는 못했다.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지자 마르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하게 웃었다.
"서로 간에 이해가 일치하다니 이보다 기쁜 일이 없소. 칼을 맞대기 전에 이렇게 합의가 됐다면 무익하게 피가 흐를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게 말이오."
"그럼 상세한 세부 내역은 실무진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이쪽은 큰 틀만 제시하도록 하겠소. 이의가 있다면 말해주시오."
"일단 들어보고 판단을 내려보겠소."
미가스바티 왕은 이제 마르쿠스의 말을 더 듣고 있기가 무서웠다.
이건 칼을 들고 강제로 협박하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예의와 논리의 가면을 쓰고 압박하니 마치 사타바하나가 원해서 이런 꼴을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런 왕의 심경은 알 바 아니라는 듯 마르쿠스는 여전히 정중한 어투로 자신의 요구사항을 입에 담았다.
"우선 로마 상인들은 사타바하나의 서쪽 항구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하오. 그리고 로마 상인들의 안전을 위해 본국의 기술자들이 주기적으로 해안을 측량할 것이오. 물론 결과는 귀국과 공유할 것이고."
'이제 아예 대놓고 지도를 작성하려고 하는구나.'
"그리고 양국의 상인들과 백성들이 무역하는데 관리들이 개입하는 걸 일절 금지하도록 해야 할 것이오. 이건 귀국만이 아니라 본국에도 공평하게 적용되는 사안이니 너무 걱정 마시길. 이번 비극도 결국 자유로운 백성들의 무역을 관리가 통제하려다가 일어난 일이니 불안의 싹을 미연에 뽑으려는 것이오."
"알겠소. 그렇게··· 하지."
조건을 들으면 들을수록 늪에 빠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왕으로서는 마르쿠스의 노림수를 전부 간파하는 게 불가능했다.
깊게 검토해볼 만한 시간도 없었고, 상대방의 제안이 최소한의 공정성을 가면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조약도 자신들에게 불리하고 상대방에게 유리할 거라는 확신은 있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사타바하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마땅한 반박의 근거가 없는 게 현실인 것을.
마르쿠스는 이후에도 새로운 기구의 설치라든가 이해하기 힘든 사항들을 줄줄이 읊어댔다.
"사타바하나는 앞으로 로마를 최혜국으로 대우해 줘야 하오. 알기 쉽게 설명하자면 로마는 사타바하나가 특정 국가에게 적용하는 우대 사항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해줄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오. 이는 로마 상인들이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차별 대우를 받지 않기 위해서요. 물론 우리 로마도 사타바하나의 상인들을 차별하는 일은 없을 것이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자세한 건 실무진들에게 말해둘 테니 차후 검토해 보도록 하시오. 요는 양국이 무역하는 데 있어서 최대한 차별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오."
"그렇다면야······."
일단 겉으로만 볼 때는 상식적인 요구이긴 했다.
하지만 그런 미가스바티 왕도 마르쿠스가 마지막에 제시한 조건만큼은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치외법권? 그러니까··· 본국에서 로마인이 죄를 범해도 그 판결을 귀국에서 내리겠다는 말이오?"
"그렇게 이해해도 무방하오. 물론 조사와 판결은 조금의 치우침도 없이 공평하게 이뤄질 것을 약속드리리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조약이··· 이건 명백한 불평등 조약 아니오."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이해해주셨으면 하오. 당장 귀국은 죄를 지은 백성들을 처벌할 때 어떻게 하고 있소? 제대로 된 재판의 절차는 지키고 있는지, 죄를 지은 사람이 변호인을 선임할 수 있는지,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지 않소이까. 실제로 귀국의 법률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번 사태 같은 촌극이 벌어질 일도 없었을 테고."
한마디로 너네 법률 시스템은 너무 후진적이라 도저히 믿고 맡길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르쿠스의 말을 조금 들어보니 미가스바티 왕도 논리적인 반박을 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사실 이건 근대적 법제를 도입한 국가가 그렇지 않은 국가를 상대로 치외법권 적용을 주장할 때 피는 전형적인 논리였다.
"우리 측에서 믿을 만한 법 집행을 한다면 되지 않겠소?"
"물론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도 믿고 맡길 수 있을 거요. 하지만 최소한 그런 제도가 갖춰질 때까지는 치외법권을 유지하는 게 옳지 않을지?"
"···으음······."
"그리고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치외법권을 사타바하나 전역에 적용해 달라는 게 아니오. 무역이 이뤄지는 항구와 우리가 채굴 권리를 가진 초석 일대에만 이 조약을 적용해 주시오."
"만약··· 이 조항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미가스바티 왕이 약간 식은 차로 입술을 축였다.
상대방이 화를 낼 거라고 생각해 긴장한 그가 꼴깍 침을 삼키고 마르쿠스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마르쿠스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않은 채로 즉답했다.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그건 귀국의 자유 아니겠소? 우리는 어디까지나 우리의 요구사항을 말할 뿐 결정을 내리는 건 귀국의 몫이오."
"그러니까···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이오?"
"물론 그렇게 되면 슬프지만 회담은 결렬일 테고 우리는 행동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점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소."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협박 아닌가!"
"앞서 말했지만 문제가 일어난다면 본질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게 중요하오. 평화적으로 불안의 싹을 뽑아내지 못했다면 결국 물리적으로라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지."
그 순간 평온하기만 하던 마르쿠스의 목소리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낮게 가라앉았다.
"선택은 그쪽의 몫이니 현명한 판단을 내리도록."
그 말만을 남기고, 마르쿠스는 다시 부드럽게 웃으며 침묵을 지켰다.
고민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힘과 명분, 양쪽에서 밀려버린 이상 미가스바티 왕의 선택지는 처음부터 한 가지로 좁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귀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소."
"고마운 말씀이구려. 오늘은 정말 기쁜 날이구려. 무의미했던 전쟁이 끝나고 양국이 새롭게 우정을 맺게 됐으니."
'우정이 아니라 쓸만한 노예를 한 명 구한 기분이겠지.'
미가스바티 왕은 이제 더 이상 허탈한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가 허탈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양국의 우호가 오래 가기만을 바랄 뿐이오··· 정말로."
마르쿠스는 혼이 반쯤 빠져나간 상태로 진지를 빠져나가는 미가스바티 왕을 정중하게 배웅해주었다.
이번 전쟁의 소기의 목적은 이걸로 전부 달성됐다.
인도 전쟁은 그가 벌였던 종래의 전쟁들과 달리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일으켰던 전쟁이 아니다.
현재 기술력상 로마의 영토 확장은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기 때문이다.
수렌 왕국과 카렌 왕국조차 괴뢰정권을 수립해서 속국으로 삼은 상태였으니 이 이상 행정 영역을 넓히고 싶지는 않았다.
흑토 지대야 식량이 어마어마하게 나오는 곳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 쳐도, 인도 전체를 지배하에 두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다.
마르쿠스가 이번 전쟁을 통해 달성하려고 했던 노림수는 초석 확보를 제외하고 크게 세 가지였다.
첫 번째는 로마의 힘을 동방의 국가들에게 보여주고 이를 통해 상인들의 교역을 원활히 하는 것.
두 번째는 인도 왕조를 무릎 꿇림으로써 마르쿠스의 위엄을 한층 더 드높이는 것.
이는 알렉산드로스 대제조차 이루지 못한 위업이었으니 선전용으로는 최고의 업적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어떻게 보면 가장 중요한 세 번째 목적이 바로 앞으로 새롭게 바뀔 로마의 전쟁과 국제 외교와 조약 등을 실험해 보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타국을 지배하는 게 이제 한계에 달한 이상 전쟁에서 이기더라도 기존과는 다른 형태로 지배력을 행사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마무리 자체는 원하는 대로 진행되었다.
이제 앞으로의 흐름을 주시하고 필요한 부분을 수정하거나 보완하기만 하면 된다.
마르쿠스는 원로원에 보낼 보고서와 신문에 실리게 될 문구에 적당히 살을 보태라며 수레나스에게 간단한 지침을 적어주었다.
거기에 적힌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마르쿠스 인도 제패.
로마 시민권자를 건드린 자에 대해 열 배로 복수.
100일도 안 되어 압도적 승리.>
< 274. 그건 로마의 것이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