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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5. 한나라에게 전해 (276/326)

  < 275. 한나라에게 전해 >

  275.

  카샤파는 요 며칠 사이 태어난 이래 최고의 긴장감을 맛보고 있었다.

  처음 전쟁이 터졌을 때만 해도 반쯤 공황상태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전쟁의 원인 제공자로 엮여서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오랜 상행으로 다져진 생존본능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강자를 알아보는 촉이 발달 됐다고 해야할까.

  냉정을 되찾고 상황을 되돌아보니 자신이 어느 쪽에 붙어야 할지 대강 짐작이 갔다.

  어차피 사타바하나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면 카샤파는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고 봐야 한다.

  로마 상인을 끌어들여서 전쟁의 불씨를 지핀 그를 잠자코 봐줄 귀족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카샤파의 가문이 이룩한 부를 강탈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핑계거리를 만들 게 뻔하다.

  '어차피 사타바하나에서 미래가 없다면 작정하고 로마 쪽에 줄을 대는 게 오히려 더 안전하다.'

  전쟁이 잘만 풀리면 사타바하나에서 친 로마파로 승승장구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어떻게든 로마로 도망쳐서 후일을 도모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을 굳힌 카샤파는 바로 상륙한 수레나스에게 접촉해 정보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크샤트리아들을 포섭하기도 하고, 귀족들에게 불만이 있던 바이샤들까지 로마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이들이 제공하는 정보와 물품은 수레나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카샤파의 도박은 대성공으로 끝났고 수레나스는 그의 공로를 치하해 직접 마르쿠스에게 보고를 올렸다.

  마르쿠스는 칼리안에 군대를 주둔시킨 채로 사타바하나가 약속을 이행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수레나스의 보고를 들은 그는 카샤파를 데려오라 일렀다.

  그가 세운 공로를 인정하고 자신이 직접 치하하겠다는 이유에서였다.

  카샤파는 흥분된 마음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아퀼라누스의 안내를 받아 칼리안으로 들어왔다.

  로마군에 의해 반쯤 초토화 됐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도시 내부는 꽤나 평온해 보였다.

  이유를 물어보니 상당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처음부터 약탈은 물자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부에 보여주기 위한 용도였습니다. 약탈을 한 도시들은 왕과 그 측근들의 입김이 강하게 닿는 도시들 위주로 이루어졌고, 로마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올 도시들에서는 약탈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도시의 주민들에겐 마르쿠스가 자신의 재산으로 일정량의 보상까지 건네줬다는 말도 들었다.

  '샤한샤께서는 사타바하나에 자신의 세력을 심어놓을 생각이신가 보구나.'

  지금의 상황은 오히려 그에게 기회였다.

  여기서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 단숨에 도약할 수도, 혹은 적당히 쓰다 버려질 말로 전락할 수도 있으리라.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은 카샤파는 숨을 크게 들이마쉬고 마르쿠스가 기다리는 방으로 들어섰다.

  조금도 실수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등과 손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미천한 사타바하나의 귀족이 위대하신 샤한샤를 뵙습니다. 제 이름은 카샤파라고 하옵니다. 샤한샤를 배알할 수 있는 다시 없는 영광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카샤파는 삼라트의 앞에 설 때와 마찬가지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자네가 세운 공은 익히 들었네. 아주 큰일을 해주었어."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옵니다."

  타국에 붙어서 정보를 판 걸 당연한 일이라고 하니 어감이 좀 그랬지만, 마르쿠스는 만족했는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고개를 들고 일어서도 되네."

  "샤한샤의 앞에서 어찌······."

  "괜찮으니 일어서게."

  두 번째에나 가서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킨다.

  이쯤되면 이제 자국의 왕을 대하는 것보다도 더 조심스러운 태도였다.

  "자네에 관해서는 수레나스에게 전부 들었네. 조금 조사를 해보니 나의 상인들과 거래를 하면서도 정도를 지키고 신뢰를 쌓았다고 하더군."

  마르쿠스는 타디우스가 처음부터 그의 명령에 따라 사타바하나의 귀족을 포섭했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카샤파 역시 그런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상인으로서 지켜야 할 법도를 따랐을 뿐입니다."

  "듣자하니 사타바하나에서는 크샤트리아가 직접 상행위에 종사하는 걸 상당히 깔보는 분위기가 있다지? 시장에 교란이 생길까봐 그런 거라면 이해하겠지만 그런 이유도 아니라고 하니 자네도 지금까지 고생이 많았겠군."

  "저로서는 로마의 자유로운 분위기가 그저 부러웠을 따름입니다."

  "그렇군. 그래서 사타바하나가 아닌 로마의 편에 서기로 마음을 굳혔던 건가?"

  카샤파는 여기서 곧바로 대답을 하는 건 너무 기회주의자처럼 비칠 수 있을 것 같아 일부러 살짝 뜸을 들였다.

  "더욱 더 넓은 세상에서 제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기대에 부응해주는 게 샤한샤인 내가 마땅히 베풀어야 할 도리겠지. 공을 세운 이는 그에 맞는 보상을 받아야 하는 법."

  마르쿠스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본 카샤파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허면 저는 앞으로 어떻게 처신하면 되겠습니까?"

  "자네는 앞으로 사타바하나에 남아 힘을 좀 써줘야겠네. 물론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해주지."

  "그···외람된 말씀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사타바하나에 계속 남아 있는다면 신변에 위협이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사타바하나의 기득권층은 저를 로마에 빌붙은 배신자라고 생각하고 있을 텐데요."

  카샤파의 본래 계획은 마르쿠스와 함께 로마에 건너가 그쪽에서 귀족의 지위를 받는 것이었다.

  사타바하나에서 축적한 모든 재산을 가지고 로마로 건너간다면 그곳에서 새로운 성공가도를 시작할 수 있을 거라고 봤기 때문이다.

  물론 마르쿠스는 카샤파를 그런 식으로 이용할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었다.

  "자네의 안전은 내가 보장해주지. 자네의 가문은 정식으로 로마의 친우로 공표될 걸세. 자네의 가문을 해한다는 건 곧 로마에게 칼을 들이대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도 일러두지. 이미 이번 사건으로 교훈을 얻은 이들이 또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할 가능성이 얼마나 있겠나?"

  "그렇기야 하겠습니다만···그러면 혹시 저도 시민권을 얻을 수 있는 겁니까?"

  "물론. 원한다면 주겠네. 하지만 사타바하나에서 행동할 때는 로마의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친우로서 행동하는 게 더 모양새가 좋을 것 같으니 염두해 두게. 여기서 더욱 큰 공을 세운다면 정식으로 로마의 귀족으로 편입될 수 있도록 내가 직접 손을 써주겠네. 내가 맡긴 일을 전부 해낸다면 원로원 의원직을 주지 못할 것도 없겠지."

  원로원이라는 단어에 카샤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로마 내에서의 인식과 외부에서의 인식이 조금 다르긴 했으나, 어쨌든 원로원은 최고의 귀족들만이 모이는 장소라 여겨지는 건 변함이 없었다.

  원로원에 받아들여 주겠다는 건 사타바하나처럼 무늬만 크샤트리아로 대하는 게 아니라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였다.

  "제 모든 걸 바쳐서 샤한샤의 명을 완수해내겠습니다. 어떤 명령이라도 내려주십시오."

  "훌륭한 각오로군. 그럼 곧바로 임무를 맡기도록 하지. 우선 여길 떠나기 전에 사타바하나가 로마와의 조약을 지키는 걸 감시하는 기관을 만들 생각일세. 그리고 자네가 그 기관의 수장이 되도록 힘을 써둘 걸세."

  "사타바하나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조약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러면 강제로 돈을 징발할 수 있는 권한을 자네에게 줄 테니 너무 걱정 말게. 사타바하나가 조약을 이행하도록 감시하는 건 어차피 부차적인 임무에 불과해. 자네가 그 직함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은 사타바하나 내에 친로마파 세력을 만들어 그들을 규합하는 걸세."

  이번 전쟁이 끝난다면 사타바하나 왕실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사와티 왕자는 당연히 자신의 자리를 보전하려고 애쓸 테고, 이런 사태를 촉발시킨 그에게 불만을 가질 귀족들도 더러 생길 것이다.

  로마의 압력에 굴하면 안 된다고 소리를 높이는 이들도 나올 것이고, 반대로 카샤파처럼 로마에게 붙어서 이권을 챙기려는 이들도 우후죽순 솟아날 것이다.

  이런 이들을 선별해 친로마파 세력을 구축하면 된다.

  "사타바하나의 왕실을 혼란속으로 몰아넣어서···스스로 무너지는 걸 노리시는 건가요?"

  "글쎄. 자신들이 멋대로 망해버린다면 결국 그 정도 수준밖에 되지 않는 나라였다는 거겠지. 아예 몰락하게 만들 마음까지는 없네. 다만 이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이용하자는 주의일 뿐."

  "혼란이 점점 더 커진다면 내전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 상인들과 자네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로마의 군대가 다시 들어볼 수밖에 없겠지."

  카샤파는 슬슬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마르쿠스는 사타바하나를 직접 지배하는 걸 부담스럽다고 여기고 있는 게 확실히 티가 났다.

  카샤파가 보기에도 로마가 사타하바나를 그대로 합병하는 건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한 번에 꿀꺽 삼키기에는 사타바하나의 영토가 지나치게 컸고, 로마와의 물리적 거리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타바하나가 로마와의 전쟁 가능성에 대해 안일한 판단을 내렸던 데에는 이런 이유도 한몫을 했다.

  설마 로마 놈들이 제대로 점령도 못할 땅에 대대적인 침공을 하겠는가.

  한다고 하더라도 조금 깔짝대다가 돌아가겠지.

  하는 류의 낙관적인 예측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고대 사람들과는 여러 방면에서 인식이 달랐다.

  특히 로마는 이런 마르쿠스의 방식을 실현하기에 꽤나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의 속주 정책 또한 넓은 의미에서 보자면 식민주의와 어느정도 상통하는 바가 있었던 까닭이다.

  그러나 로마의 방식은 어디까지나 정착형 식민주의에 더 가까웠다.

  마르쿠스는 인도에 로마 시민들을 대량으로 이주시킬 마음이 처음부터 없었다.

  아라비아의 경우 아직 이슬람 문화가 자리를 잡기 전이라 합병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지만 인도 지역은 달랐다.

  이런 곳은 종래의 방식으로 합병하는 것보다는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넘어오게 하는 게 상책이었다.

  자원만 뽑아갈 수 있다면 굳이 로마령으로 삼을 만한 이유도, 가치도 없었다.

  "카스트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로마의 영향력을 오히려 반길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로마는 신분 이동에 있어서 이곳보다 훨씬 더 자유로우니 짓눌려 살던 계층에게는 희망의 땅으로 여겨지겠지요."

  "그렇겠지. 지금은 민족주의 같은 개념도 없을 때니까. 적절한 당근과 희망만 던져준다면 손쉽게 포섭이 가능할 거야."

  민족주의가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는 몰랐지만 카샤파는 사타바하나의 주민들의 상당수를 자신의 편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다.

  당장 자신도 크샤트리아였지만 뿌리깊게 내린 불만이 얼마나 컸던가.

  더욱 더 올라가고 싶어하는 상승욕구를 지닌 바이샤들이나 천대받고 살아가는 수드라의 욕망을 살살 긁어주기만 하면 된다.

  원래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연히 카스트를 어지럽혔다는 죄목으로 즉결 처형당하겠지만 카샤파의 뒤에는 로마가 있다.

  어지간히 대놓고 하지만 않으면 그 누구도 감히 불만을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카샤파는 한시라도 빨리 마르쿠스의 명령을 이행하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드디어 콧대만 높던 브라만들과 크샤트리아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볼 수 있겠구나. 흐흐흐.'

  지금까지 차별받아왔던 것만큼, 아니 그 이상의 굴욕을 그대로 돌려줄 것이다.

  기대와 흥분으로 가득한 그의 눈에는 완전히 막장으로 치닫는 사타바하나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마르쿠스는 기묘한 열기로 눈을 빛내는 카사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명령을 내렸다.

  "세력을 대충 규합했다 싶으면 한 가지 소문을 흘리게. 참고로 소문을 흘려야 할 곳은 사타바하나가 아니라 외국이라네."

  "외국이라면 칸바 같은 곳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더 동쪽으로?"

  "동북쪽. 특히 한나라에 소문을 퍼트리게. 이번 전쟁에서 사타바하나가 어떻게 패배했는지, 그리고 얼마나 굴욕적인 조약을 맺었는지 자네들의 입으로 직접 한나라에 전하도록."

  < 275. 한나라에게 전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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