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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6. 한나라에게 전해 (277/326)

  < 276. 한나라에게 전해 >

  276.

  카샤파는 마르쿠스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마르쿠스는 1차 배상금을 징수하고 항구 지대에 치외법권을 설정한 뒤에 군대를 물리고 크테시폰으로 돌아갔다.

  카샤파는 마르쿠스의 비호 아래 수면 아래에 잠재되어 있던 불만 세력들을 한데 결집해 커다란 세력을 만들었다.

  사타바하나는 이런 그의 움직임을 손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카샤파가 마르쿠스의 사람이기도 했지만 그의 조직에 대놓고 로마 상인들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타디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상인들은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 와 카샤파의 뒤를 밀어주었다.

  훗날 북인도주식회사라고 불리게 될 거대 무역 조직의 탄생은 이렇게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치외법권이 설정된 항구 지역의 사람들은 더 이상 사타바하나가 인도의 주인이 아니라는 걸 빠르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동안 크샤트리아라고 어깨에 힘주고 다니던 이들도 이곳에서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기 일쑤였던 것이다.

  "뭐라고? 연체 이자를 내란 말이냐? 감히 나에게?"

  오늘도 어김없이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귀족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얼굴을 붉히고 있는 귀족과는 반대로 그 앞에 선 타디우스는 여전히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계약을 어기셨으니 당연히 그에 따른 불이익을 감수하셔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카샤파 님?"

  "물론. 계약은 신성한 것이니 누구라도 이를 가볍게 여기면 안 되지요. 크샤트리아나 브라만이라 할 지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카샤파의 말을 들은 귀족, 바라드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그는 이 항구 일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고위 귀족이었다.

  지금까지 거래를 하면서 납기일 하루 이틀쯤이야 자신의 마음대로 물려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초인적인 인내력으로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뭔가 착오가 있었던 모양인데 그쪽과 거래를 한 바이샤는 나의 수하다. 그러니 나의 비호를 받고 있다는 말이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꼴랑 하루 기한이 늦어졌다고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냐? 설마 내가 누구인지 모르는 건 아니겠지?"

  "그러는 그쪽분께서는 자신이 누구와 거래를 했는지 아십니까?"

  더 이상 참지 못한 바라드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반사적으로 무기에 손을 올렸다.

  "감히 이 항구에서 나 바라드에게 이 따위 태도를 취해? 이 따위 계약쯤은 마누 법전에 의거해 내 권한으로 처음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참으로 유감스럽게 됐습니다만."

  타디우스가 손짓을 하자 그의 뒤에 서있던 중무장한 병사들이 일제히 무기를 뽑아들었다.

  "이제 이곳에서는 마누 법전보다 로마의 법이 우선입니다. 이의를 제기하고 싶으시다면 이 조약을 체결한 귀국의 폐하와 로마의 샤한샤께 제기하시길."

  병사들의 흉흉한 기세에 압도당한 바라드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원의 손길을 찾았다.

  "로마 놈들이 감히 이 땅에서 멋대로 행동하다니. 캬사파! 너는 사타바하나의 크샤트리아면서도 로마의 앞잡이가 된 것이냐."

  "나를 당신들과 같은 크샤트리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니 감동으로 눈물이 날 것 같군. 그런데 어째서 마누 법전에는 우리를 한 단계 격이 낮은 크샤트리아라고 명시해뒀던 것일까?"

  "네놈 자신의 대우에 앙심을 품고······!"

  "그러니까 계약을 착실하게 지켰어야지. 내가 이미 몇 주 전부터 누누이 공지하지 않았나. 로마 사람들과 계약할 때는 그들의 법도를 충실히 따라야 한다고."

  카샤파가 손짓을 보내자 병사들이 순식간에 바라드의 호위들을 두들겨 패고 그를 포박했다.

  백주대낮에 벌어진 소란에 이미 거리는 타국에서 온 상인부터 일반 백성들까지 구경꾼들로 가득했다.

  카샤파는 이들을 둘러보며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모두 보았다시피 이곳에서는 로마의 법이 사타바하나의 법과 체계, 관습보다 우선시한다. 이전처럼 신분과 지위를 믿고 방종을 부리는 건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대다수의 선량한 백성들과는 연관이 없는 이야기일 테니 너무 불안해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지금처럼 법과 제도를 준수하라!"

  타국의 상인들은 그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특히 한나라에서 먼 길을 온 상인들은 예상치 못한 사타하바나의 초라한 대응에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전쟁에서 패했다고 하더니 이건 숫제 속국 비스무리한 처지가 되지 않았는가.

  그토록 명성이 드높던 천축의 대국이 이런 꼴이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상인들은 이 심상치 않은 기류를 하루라도 빨리 본국에 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

  천축의 지배자 사타바하나가 로마에게 패배했다는 놀라운 사실은 한의 황실에도 곧바로 전해졌다.

  어이가 없는 사실은 어찌나 빠르게 끝났던지 전쟁이 일어났다는 보고와 사타바하나가 패배했다는 보고가 거의 동시에 도착했다는 점이다.

  한의 11대 황제 유석은 최근 로마와 관련된 일만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려 짜증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드넓은 대전에서 수많은 대소신료들이 옥좌에 앉은 그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조정의 실세들이 대거 자리에 참석했다.

  홍공이 노환으로 사망하고 환곤의 실세가 된 석현.

  거기장군 이청과 표기장군 곽도군에 군의 최고 지휘관인 대장군 위군화까지.

  한 차례 신하들을 둘러 본 유석이 평소와 사뭇 다른 분위기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국정을 논하겠노라. 여기에 있는 자들 대다수가 알고 있겠지만 최근에 흥미로운 소식이 당도했다. 서역의 대진국(로마)과 천축(인도)이 전쟁을 벌였다지? 전쟁의 경과가 어떻게 됐는지 읊어보도록."

  천자의 명에 따라 환관이 종이에 적힌 문장을 읽어나갔다.

  유석은 로마산 물건의 수입을 그토록 줄이려고 애를 썼지만, 로마산 종이는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이 없어 이미 쓰이지 않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보고서는 한의 상인과 사타바하나 상인들의 증언으로 작성되어 꽤나 신뢰도가 높았다.

  사타바하나는 로마의 상인들과 거래하며 그들을 억지로 구금하고 물자를 빼앗았다.

  이에 격분한 로마의 샤한샤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100일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사타바하나의 왕에게 항복을 받아냈다.

  그 결과 사타바하나는 친로마파 세력과 로마 상인들이 득세하는 대혼란이 펼쳐졌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사타바하나는 천축에서 독보적인 세력을 구가하는 대국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렇게 맥없이 무너지다니 의외로군요."

  "로마는 통합된 흉노까지 물리친 저력이 있습니다. 천축으로서는 상대도 되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빠르게 무너졌는데···천축이 로마군의 전력을 제대로 몰랐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냉정하게 말해서 그들의 편제를 잘 모르는 건 우리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우린 그저 그들이 이상할 정도로 군사력이 강하다는 사실만 알 뿐이죠."

  거기장군과 표기장군의 대화를 들은 석현이 혀를 차며 중간에 끼어들었다.

  "분석해야 할 지점이 틀렸습니다. 천축이 로마보다 약하다는 건 이미 결과로 드러난 사실이고 그 경과야 알아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요. 중요한 건 로마가 어째서 천축을 공격했느냐 하는 겁니다."

  "보고에 의하면 천축이 로마 상인들을 함부로 대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전쟁을 위한 구실일 뿐이죠. 로마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확실히 알아야 합니다."

  "아아, 그러고 보니······."

  거기장군 이청의 가느다란 눈이 묘한 빛을 머금고 석현을 향했다.

  "공께서는 그 로마에 직접 다녀오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상당히 불쾌한 경험을 겪으셨다고 들었는데요."

  "아무래도 저희보단 석현 공께서 로마를 더 잘 아실 테니 고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표기장군 곽도군까지 약간의 비아냥을 머금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로마가 자신들의 물건을 다른 국가에도 수출하고 비단의 수입을 줄이겠다고 했을 때 석현은 자신이 직접 로마에 가 사태를 수습하려 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그 어떤 효과도 보지 못한 채 굴욕만 당하고 본국으로 돌아오는 처지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환관의 수장인 홍공까지 세상을 떠 현 황실에서 환관의 힘은 이전만 못한 게 사실이었다.

  석현은 자신이 무능력해서 이렇게 된 거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이 모든 걸 로마에 뒤집어 씌웠다.

  즉, 로마는 처음부터 한나라에 해를 가할 작정으로 정교한 설계를 했다는 주장을 한 것이다.

  석현은 천축과의 전쟁도 그 연장선에 있는 일이라고 밀어붙이기로 작정했다.

  "로마, 특히 샤한샤의 위치에 있는 마르쿠스는 엄청난 야욕을 지닌 이입니다. 천축과의 전쟁에서 이긴 그는 그곳을 자신의 멋대로 주무르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아마 우리가 설치한 한사군이나 한구군 같은 행정 구역을 설치하려는 걸지도 모르지요."

  이 당시 한은 현대의 베트남 지역에는 한구군을,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에는 한사군을 설치해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사군 중에 임둔군은 현재 기능을 상실했지만 낙랑군과 대방군, 현도군은 멀쩡히 기능을 수행 중이었다.

  어쩌면 로마도 한과 비슷한 방식으로 지배력을 확장하려는 걸지도 모른다.

  유석에게는 석현의 주장이 꽤나 일리가 있게 들렸다.

  "그러면 로마가 동쪽으로 영역을 확대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고 봐도 되는 것인가? 천축은 그 교두보 역할을 하는 곳이고?"

  "그렇게 보는 게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자들의 욕망은 끝이 없습니다. 당장 이쪽과 무역을 하는 척하면서 비단과 차를 훔쳐가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 건은 어떻게 됐나. 정식으로 항의를 하겠다고 하지 않았었나?"

  로마에서 비단을 생산하는 걸 넘어 그 비단을 타국에 버젓이 판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유석은 하마터면 고혈압으로 쓰러질 뻔했다.

  소용없을 거라는 걸 잘 알지만 정식으로 항의 서신을 보냈던 것도 조금이라도 화를 삭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시간이 꽤 지났는데 답변이 돌아왔다는 보고는 받지 못했다.

  유석의 의문섞인 시선이 쏟아지자 석현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말을 더듬었다.

  "저, 그것이···너무나도 오만불손한 내용인지라······."

  "잘못한 놈이 도리어 성을 낸다더니 딱 그 짝이로군. 어떤 답이 돌아왔는지 대략적으로 요약해서라도 말해 보아라."

  "예. 그것이 그러니까······."

  한참이나 눈치를 보던 석현이 눈을 딱 감고 로마에게서 돌아온 답변을 들려주었다.

  "원래 비단과 차는 로마의 것이라고······."

  "뭐라?"

  "그리고 대국은 그런 사소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위엄이 필요한 것 아니냐. 스스로 소국으로 전락한다면 대국을 거스를 수 없게 된다. 빙빙 돌려서 말을 했지만 결국 요약하자면 이런 요지의 말을 보내왔습니다."

  천하의 중심인 중원.

  그곳의 황제인 천자에게 감히 누가 지금까지 이런 대역무도한 발언을 했던가.

  분노가 폭발한 유석이 옥좌에서 벌떡 일어나 얼굴을 붉혔다.

  "이 미천한 서양 오랑캐 놈들이 감히!"

  혹여라도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싶어 환관들이 황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군부의 장수들도 시선을 내리깔고 천자의 진노가 가라앉기만을 기다렸다.

  한참 동안을 씩씩거리던 유석이 이를 갈며 고성을 내질렀다.

  "로마 놈들과 모든 무역을 끊어버리겠다. 놈들도 물건을 가져다 팔 곳이 없으면 조바심을 느끼겠지."

  "폐, 폐하! 하오나······."

  "왜. 뭐 문제라도 있나?"

  "그, 그것이 설탕이야 결국 사치품이오니 수입을 끊을 수야 있겠지만 당장 종이 같은 것들은 대체할 물건이 없사옵니다. 이제 다시 와서 죽간에 기록을 한다면 효율이 너무나 떨어지는·······."

  "그러면 종이를 만들어라! 로마 놈들은 우리 물건을 잘만 훔쳐가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없지 않느냐!"

  본래 종이가 한에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웃지 못할 촌극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종이가 본격적으로 개발되는 건 아직 수십년 정도가 더 필요했으며, 결정적으로 종이를 만든다고 쳐도 질의 차이가 너무 컸다.

  감정을 가라앉힌 유석이 다시 옥좌에 앉으며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내 절대로 이 굴욕을 잊지 않을 것이다. 어떤 수를 써서라도 되갚아줄 것이야."

  < 276. 한나라에게 전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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