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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8. 특이점이 온다 (279/326)

  < 278. 특이점이 온다 >

  278.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전성기가 지난 이후로 이렇다한 유산을 후대에 남기진 못했다.

  그래도 몇 가지 눈에 띄는 걸작품들을 건조했는데,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화려하면서도 커다란 파라오 전용의 부선이었다.

  원양 항해용으로 지어진 다른 배보다는 조금 작았지만, 그건 비교대상이 고대 역사상 가장 커다란 배였기 때문에 그럴뿐이다.

  파라오 전용의 부선은 선체 길이만 100미터를 넘어가고 선폭도 10미터를 넘었다.

  건조된 지 무려 100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이 배는 꾸준한 관리와 보수를 통해 아직도 파라오들의 유람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나일강을 유람하며 언제라도 목욕을 할 수 있도록 호화로운 욕조가 여러 개 비치되 있었으며, 접견용 공간과 연회용 공간까지 따로 구분되어 있었다.

  심지어 파라오의 처소와 하인들의 숙박시설까지 나눠 놓았으니 이 배가 얼마나 거대한지 짐작이 갈 것이다.

  하지만 항해용이 아니었기 때문에 노잡이의 줄이 2단에 불과해 속도가 그리 빠르진 않았다.

  부선의 속도는 보통 호위하며 따라오는 호위병들과 비슷한 정도였다.

  그래서 병사들을 뒤에 두고 유유히 강변을 바라보며 유람을 즐기는 게 파라오의 행차 때 일상적으로 펼쳐지는 광경이었다.

  이 화려한 부선에는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각종 화려한 장식과 가구들이 점점 더 채워졌다.

  마르쿠스가 처음 파라오의 부선을 봤을 때는 상아와 황금은 물론 인도와 한에서 들어온 장식품들까지 눈에 띄었다.

  조각상들과 그림들 역시 제작자의 이름만으로도 천금을 받을 수 있는 문화재가 대다수였다.

  어째서 클레오파트라나 아르시노에가 자신에게 이 배를 보여주고 싶어했는지 이해가 갔다.

  '그나저나 이런 배를 티그리스 강까지 끌고 오다니······.'

  티그리스 강을 가득 채운 부선과 뒤를 따르는 호위병력의 물결을 본 마르쿠스의 입가에서 절로 쓴웃음이 새어 나았다.

  "굉장하죠? 로마가 다른 건 다 뛰어나겠지만 이 정도로 멋진 배는 로마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거예요."

  황금으로 만든 대좌에서 들려오는 아르시노에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듬뿍 서려 있었다.

  "예. 로마에도 수없이 많은 배가 있지만 이 정도로 거대하고 화려한 배는 없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배는 파라오의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과도 같으니까요. 나일강을 타고 내려가는 이 배를 보며 사람들은 파라오의 위광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 중요한 배가 지금은 티그리스 강에 있군요."

  "어쩔 수 없잖아요. 마르쿠스 님은 너무 바쁘셔서 도저히 저희와 나일 강 유람을 함께 해주시지 않으니까요. 그러니까 절충해서 티그리스 강을 유람하기로 한 거랍니다. 이 배를 여기까지 끌고 오는데 정말 엄청난 인력과 시간이 들었어요."

  마르쿠스는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의 의지에 혀를 내둘렀다.

  멤피스와 알렉산드리아 사이에 있는 이 배를 티그리스 강까지 옮기려면 대체 어떤 경로로 움직여야 할까.

  아마 엄청난 인력과 시간 외에도 막대한 돈을 갈아 넣었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나 정성을 들였으니 함께 유람을 해주지 않는다면 어떤 원망을 들을지 모른다.

  마침 대규모 전쟁을 끝내고 쉬고 싶기도 했던 참이다.

  한번쯤 느긋하게 티그리스 강을 둘러보며 이곳의 경치를 눈에 새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유람은 예상보다 더 흥미로웠다.

  지난 몇 년 사이 무역량이 폭증했기 때문인지 커다란 돛을 단 상선들이 쉴 새 없이 강을 넘나드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런 상선들을 상대로 장사하는 수상 상점까지 눈에 띄었고, 강변을 따라 움직이는 상인들의 마차에 실린 물건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통행량이 너무 많아지니 감독하는 경비들에게 과부하가 걸리는 것 같군. 아무래도 수를 좀 충원해줘야겠는데."

  "여기까지 와서 또 그런 생각이나 하고 계신 건가요. 휴식을 취하러 왔으면 즐길 생각을 하셔야죠."

  마르쿠스가 불법 운반품을 수송하던 상선 하나를 단속하는 경비를 보며 중얼거리자 클레오파트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충분히 즐기고 있는 중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이집트에 있을 때 무리해서 시간을 내서라도 나일 강을 둘러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렇죠? 티그리스 강도 훌륭하긴 하지만 역시 나일 강에 비할 바는 아니거든요. 언젠가 이집트에 오실 일이 있다면 꼭 함께 유람을 즐겨요. 그때는 우리가 자랑하는 최고의 원양 항해선도 보여드릴게요."

  "여유가 생기면 꼭 그렇게 하도록 하죠."

  마르쿠스는 오래만에 감상에 잠겨 한때의 휴식을 만끽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유유히 배를 타고 주변의 경관을 눈에 담은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제는 가물가물해진 현대의 기억에서도 그는 배를 타고 유람을 즐겨본 적은 없었다.

  로마에서도 수많은 지역을 돌아다녔지만 그 대부분은 군대를 이끌고 땅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느긋하게 주변의 경치에 감탄하며 지친 마음을 달래는 시간을 가져본 건 수십년 만일지도 모르겠다.

  '앞으로 역사는 완전히 뒤바뀌어 가겠지만 이 아름다운 자연만큼은 원래의 역사와 다르지 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겠지.'

  주위의 번잡함에서 시선을 돌려보니 주변은 온통 경이로움으로 가득했다.

  강물의 색은 하늘을 그대로 담은 듯 맑았고, 저 멀리 보이는 사막의 시작점은 강변과 완벽히 대비되는 색조로 눈을 자극했다.

  아르시노에와 클레오파트라는 이번 유람을 어찌나 기대했던지 사전에 조사했던 내용을 재잘재잘 알려주었다.

  물론 그러면서 은근슬쩍 나일 강의 자랑을 끼워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번 유람은 피로를 풀어주는 여행일 뿐만 아니라 마르쿠스의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본래 지중해 세계나 페르시아권은 군주를 섬기기는 해도 절대적으로 숭배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 풍습을 간직하고 있는 건 이집트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마르쿠스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가 동방을 지배한 뒤로는 백성들을 괴롭히던 전란은 씻은 듯 사라졌으며, 식량 생산량은 폭증했다.

  로마와 그리스가 흉노의 침략에 전정긍긍해 할 때조차 동방은 그 정도로 위기감을 느끼진 않았었다.

  이미 동방에서 마르쿠스는 살아있는 신이었고, 백성들은 그 신이 언제까지나 자신들의 곁에 있어주길 원했다.

  그가 탄 부선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들은 인근 주민들은 강기슭으로 몰려와 꽃을 던지며 환호하고,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가끔 마르쿠스가 축복의 말을 해주기라도 하면 열광적인 함성이 강물을 밀어낼 정도로 터져 나왔다.

  클레오파트라와 아르시노에에게도 이번 유람은 기회였다.

  두 사람은 마르쿠스와 아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르시노에는 주로 마르쿠스의 사적인 부분들을 더 많이 알고 싶어했다.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법률부터 정치, 그리고 통치의 기술과 심지어 전쟁에 관련된 주제까지 물어보았다.

  중간중간 대화가 아닌 설교로 이어질 때도 있었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흐름이었다.

  그렇게 길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지금까지 눈치 채고 있지 못했던 사실도 하나 보였다.

  "마르쿠스 님, 혹시 고민하고 계신 사안이라도 있나요?"

  "···글쎄요."

  클레오파트라의 물음에 마르쿠스가 모호하게 말을 흐렸다.

  "저도 느꼈어요. 가끔씩 강 저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셨잖아요."

  옆에서 듣고 있던 아르시노에도 거들고 나섰다.

  마르쿠스는 이번에도 별다른 대답 없이 강 너머 동쪽을 바라보고 있던 마르쿠스가 금으로 된 의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릴 뿐이었다.

  잠시 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민이라고 할 정도로 거창한 건 아닙니다. 그냥···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면 좋을까 하는 사소한 망설임 정도겠지요."

  "그런 걸 바로 고민이라고 하지 않나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마르쿠스가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상선들의 행렬을 눈에 담으며 피식 웃었다.

  예전에는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가면 수많은 고민거리를 내려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크나큰 착각이었다.

  하나의 고민을 해결하면 두 개의 고민이 새로 생긴다.

  역사가 그가 알던 사실과 완전히 분기해 버린 이상 세심하게 고려해야 할 사항은 늘어나면 늘어나지 결코 줄진 않았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당면한 문제는 인도와 한나라 정도지만 그보다는 내부의 발전 속도도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지금의 로마 영토는 너무 넓다.

  영해를 제외하고 순수 면적으로만 봐도 전성기의 청나라 이상일지도 모른다.

  중간에 바다를 끼고 있기까지 하니 역참을 활용한다고 해도 통제력을 유지하는 게 힘들었다.

  마르쿠스가 살아있는 시점이야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100년쯤 지난 뒤에는 어떨까.

  지금의 과학발전 속도라면 100년 뒤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질 수 있다.

  시대를 너무 과도하게 앞서간 기술과 군사력이 어떤 방식으로 폭주하게 될지는 마르쿠스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이제 발전 속도에 제동을 걸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기초적인 분야는 이미 씨앗을 다 뿌려놨으니 마르쿠스가 개입하지 않아도 여러 곳에서 성과가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속도가 붙은 발전의 성과는 마르쿠스의 예상보다도 한층 더 빨랐다.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게 남아있지 않았다.

  ※※※

  마르쿠스의 지시대로 연구과제를 시행중인 연금술사들은 최근 새로운 지식을 알아가는 즐거움으로 행복에 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금까지 해답을 알지 못해 고뇌했던 수많은 질문들이 명쾌하게 풀려나가는 쾌감은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수면시간조차 극단적으로 줄이고 하루하루를 연구와 실험으로 지새우고 있었다.

  명칭부터 새롭게 바꾸었다.

  이제 그들은 자신들을 연금술사가 아닌 화학자라고 칭하기 시작했다.

  조금 조잡하고 원시적이긴 해도 그들은 이미 렌즈로 사물을 확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여기에 마르쿠스가 현미경의 원리까지 알려주자 엄청난 시행착오를 거쳐 원시적인 현미경까지 만들어내기도 했다.

  물론 진짜 현미경이라고 부르기엔 부끄러울 정도의 수준이었으나 이것만 해도 이들에겐 어마어마한 발전이었다.

  여기에 체계적으로 물질을 혼합해 가해지는 자극과 반응을 정리하던 그들은 이내 엄청난 발견을 해내기에 이르렀다.

  수석 화학자 필리트리오스는 이 발견을 보고하기 위해 급히 마르쿠스를 초청했다.

  유람을 끝내고 돌아온 마르쿠스는 화학자들의 부름에 응해 연구실까지 걸음을 옮겼다.

  최근에 화학자들의 연구실은 그들의 요청에 의해 엄청나게 두꺼운 철문으로 막힌 상태였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화학자 두 명이 마르쿠스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바닥에 엎드려 그를 맞이했다.

  "수고가 많다. 문을 열어라."

  "송구하오나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지금 안에서 최종 실험이 진행중이온데 위험할 수도 있어 이중으로 문을 닫아둔 상태이옵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쪽은 안이 텅 빈 공터일 텐데? 그런데 위험할 수도 있다니······."

  그때였다.

  꽈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발밑이 들썩일 정도의 진동이 전해져 왔다.

  진원지는 명백하게 철문의 안쪽이었다.

  "이 소리는 설마······."

  "최근 들어 저희가 발견한 성과입니다. 한데 너무 위험해서 조심조심 다루고 있습니다. 안전이 확보되면 샤한샤께 보여 드리고 고견을 여쭙고자 이렇게······."

  콰앙! 콰아앙!

  몇 번 더 폭음이 울렸다.

  마르쿠스는 귀에 울리는 굉음에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화학자들은 내심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처음 이 현상을 접했을 때 어찌나 놀랐던지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기 때문이다.

  몇몇 화학자들은 아문 라의 분노라며 머리를 부여잡고 벌벌 떠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달랐다.

  그가 놀라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예전 한국 군대에 있을 때 이보다 훨씬 더 큰 폭약의 소리도 몇 번이나 들어 본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기억에 비하면 명백히 초라한 규모의 소리였으니 호들갑을 떨며 놀랄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의 이유로 마르쿠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히 묻어 있었다.

  "이건 생각보다 너무 빠른데······."

  < 278. 특이점이 온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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