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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 특이점이 온다 (281/326)

  < 280. 특이점이 온다 >

  280.

  사람이 돌을 다듬어서 날카롭게 만든다는 구상을 떠올려 실행하기까지는 수천년이 걸렸다.

  그리고 바퀴를 이용해 무언가를 나른다는 생각을 떠올리는 데에는 장장 수만 년에 달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발전된 형태로 발돋움 하는데는 그 절반의 시간조차 걸리지 않았다.

  기술의 발전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발전 속도는 가속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도 수없이 많다.

  혹자는 그 이유를 발전된 도구를 사용해 더 발전된 도구를 설계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마르쿠스도 물론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다.

  그러나 로마의 발전 속도가 자신의 예상 이상으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신호를 여기저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중 몇 가지는 정말 상상하지도 못하던 분야에서 목격됐다.

  발단은 로마에서 도착한 율리아의 편지에서부터 시작됐다.

  편지에서 그녀는 마르쿠스의 계획이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율리아와 소피아의 아성은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카이사르의 딸이자 마르쿠스의 아내.

  이런 배경이 가져다주는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들기는커녕 더욱더 굳건해져만 갔다.

  법과 제도, 기술이 갈수록 정밀해지고 있음에도 이때까지는 문제될 거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로마는 언제나처럼 평온한가 보군요."

  스파르타쿠스는 자신의 앞으로 온 편지를 읽어 내려가며 중얼거렸다.

  "오히려 이쪽이  훨씬 더 바쁜 것 같습니다."

  "어쩔 수 없지. 대규모로 전쟁을 치른 게 아직 몇 달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사타바하나를 제어하기 위한 거점 설치는 어떻게 됐지?"

  로마 상인들의 안전한 왕래와 사타바하나의 억제를 하기 위해서는 일정수의 군사 거점을 둘 필요가 있었다.

  스파르타쿠스는 전쟁이 끝난 이후부터 이런 기지의 설립에 신경 써 왔다.

  "문제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언제라도 다시 밀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의 준비는 끝났습니다. 해양의 통제권은 완전히 로마 쪽에 있으니까요."

  "잘했어. 앞으로 행동반경이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해군의 힘이 중요해질 테니 제해권을 확보하는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거야."

  어차피 배에 화포를 장착할 시점이 온다면 로마의 해군은 다른 국가의 해군과는 아예 다른 세상의 군대가 될 테니 초조함 따윈 느끼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느긋하게 아직 읽지 못한 편지의 뒷부분을 살펴보았다.

  안정되어 있는 정치 상황, 순조롭게 흘러가는 개혁, 모든 게 마음에 쏙 들었다.

  "카토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가 보군. 그래도 최근에는 꽤나 건설적인 비판을 하기 시작했다는 거 보면 역시 은퇴시키지 않는 게 옳은 판단이었어."

  "비판적인 의견은 중요하지요. 전쟁에서 작전을 세울 때도 언제나 반대편의 의견을 수렴하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고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은 건가요?"

  "뭐···평소와 별 다를 건 없는 것 같아."

  흐뭇하게 편지를 다시 집어넣으려던 마르쿠스는 순간 편지의 마지막 즈음에 나온 내용에 다시 한 번 눈길을 주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그 꽃이 굉장히 높은 값에 거래되고 있어요. 아마 당신의 인기가 그 정도로 드높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네요.>

  "편지에 어떤 문제라도 있습니까?"

  마르쿠스가 편지지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스파르타쿠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그냥 내가 저번에 로마로 가져갔었던 꽃 있지? 그게 요새 값이 엄청나게 올랐다는 내용이 적혀 있어서."

  "꽃이요? 무슨 꽃을 가져갔···아아, 이제 기억 났습니다. 그 샤론의 수선화인가 하던 그 꽃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진짜로 별 생각 없이 가져갔었던 건데······."

  서양에서 샤론의 수선화, 혹은 샤론의 장미로 알려져 있는 꽃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

  마르쿠스가 이전에 살았던 한국에서는 무궁화라고 부르는 꽃이다.

  무궁화의 학명대로 원래는 시리아가 원산지라고 알려져 있었으나 진짜 원산지는 인도와 중국 서남부다.

  마르쿠스는 로마가 한과 교역하면서 상인들 틈새에 섞여서 실려온 무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딱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과거의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꽃이라 자연스럽게 정원에 심어서 꽃을 피우게 했다.

  로마에 갈 때도 씨앗을 가져가서 심었는데 이게 로마에서는 보지 못하던 꽃이라 눈길을 끌게 된 게 아닌가 싶었다.

  "마르쿠스 님이 쓰는 물건이 고가에 팔리는 건 예전부터 있어왔던 일 아닙니까? 예전에는 뭐였더라···마르쿠스 님이 사용하는 체스 말과 카드 구성이 엄청난 값에 거래 되기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랬지. 이번에도 돈 냄새를 잘 맡는 상인 몇이 그럴싸한 기획을 세운 모양이야."

  로마에는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신기한 모양의 꽃.

  거기에 마르쿠스가 직접 가져와서 심었다는 사실을 절묘하게 버무려서 광고를 했을 것이다.

  "보니까 어지간한 방충해에도 죽지 않는 꽃의 특성을 이용해서 온갖 과장된 말이 떠돌아 다니는 것 같아. 무슨 불사의 상징이라느니 신의 축복을 받은 꽃이라느니."

  "마르쿠스 님이 직접 가져와서 심었으니 후자의 경우 무조건 거짓말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겠군요."

  "시장의 가격은 뭐든지 수요와 공급으로 정해지니까 가격이 오르는 건 자연스러운 거겠지. 너무 과하지만 않으면 별 문제 없을 거 같긴 해."

  "어느 정도 오르다가 멈추지 않겠습니까. 그래봐야 그냥 꽃인데요."

  "그렇겠지. 그냥 꽃이니까."

  별로 대수롭지 않게 편지의 내용을 머릿속에서 지우려던 마르쿠스는 뭔가가 찝찝한 느낌에 눈살을 찌푸렸다.

  외래종 꽃에 사람들이 열광해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던 사건.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마르쿠스는 마침내 머리속에서 해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맞아. 17세기에 벌어졌던 네덜란드의 튤립 투기 파동. 역사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있긴 했었지.'

  튤립이 네덜란드의 상징처럼 알려져 있긴 하지만 사실 튤립의 원산지는 유럽이 아니다.

  오스만 제국에서 넘어온 외래종인 튤립이 네덜란드에 전해지며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게 이 거품의 시작이었다.

  부자들은 희귀한 튤립을 보유해 자신들의 부를 자랑하고 싶었기에 사람들은 너도나도 희귀종을 재배해 비싼값에 팔려고 했다.

  가격이 하루에 몇 배씩 오르는 건 기본이라 최고급 품종의 튤립 하나가 소 20마리 이상의 가격이 나갈 정도였다.

  이렇게나 거품이 낄 수 있었던 건 그만큼 당시 네덜란드의 금융 시장이 발전 중이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튤립을 이용한 온갖 파생 상품이 나오기도 했고, 어음과 신용까지 가져다 쓰면서 한층 더 거품을 불려나갔다.

  이 파동은 많은 교훈을 남겼지만 자본주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는 걸 알리는 확실한 신호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로마는 어떨까.

  마르쿠스가 편지에서 접한 내용은 워낙 단편적이라 아직 저쪽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외래종 꽃의 가격이 폭등하고 있다고 튤립 파동과 연관지어서 생각하는 건 비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로마의 금융시장이 역사상 전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되고 있다는 점을 함께 묶어서 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 번 상세히 알아볼 필요는 있겠어."

  튤립 파동이 가져온 결과가 세간에서는 네덜란드에게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 이후에도 튤립은 일정 이상의 가격을 유지했고 찾는 사람도 많았다.

  다만 원 역사에서도 그랬으니 지금도 그럴 거다라는 건 설득력이 없는 추론이었다.

  역사상의 튤립 파동보다 더 미미한 영향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반대로 훨씬 더 큰 파장을 몰고 올지도 모른다.

  그러니 뭐든지 사전에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책을 찾아보는 게 중요했다.

  마르쿠스는 역참을 최대한 활용해 가장 빠른 속도로 로마에서 상세한 내용을 조사해 올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얼핏 꽃의 가격 하나 알아보는데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은 상황이었으나 수하들은 군말 없이 명을 실행했다.

  물론 아무리 빨라도 동방에서 로마까지 소식이 닿으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육로로만 쭉 달리면 역참으로 시간을 크게 당길 수 있지만 바다 쪽은 어쩔 도리가 없었던 까닭이다.

  다행히도 일주일 뒤에 소피아가 보낸 후속 편지 덕분에 로마의 상황이 어느정도는 파악 됐다.

  <사랑하는 아버지에게>편지는 이런 어구로 시작했다.

  총명한 소피아는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어머니 율리아와 할아버지인 카이사르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눠보고 나름대로 자신의 생각을 적어 보낸 것이다.

  <혹시 저번에 아버지께서 가져오신 꽃이 엄청나게 고가에 거래되고 있단 말 기억하시나요? 고작 일주일 지났을 뿐인데 지금은 가격이 훨씬 더 말이 안 되게 올랐어요.

  그때도 비쌌는데 지금은 10배가 훌쩍 더 올랐으니까 짐작이 되시죠? 일주일만에 가격이 10배가 오르는 건 어떻게 봐도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할아버지도 지금 추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계세요. 개입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으신 것 같아요. 아버지께서 정확한 지식 없이 시장에 개입하면 도리어 왜곡만 더 키울 수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마 그 조언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리 카이사르가 천재라고 해도 지금 발전해 나가고 있는 금융 체계는 그에게 완전히 미지의 개념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손을 쓰는 게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소피아의 말대로 확실한 해결책 없이는 섣부르게 시장을 주무르지 말라는 마르쿠스의 조언도 한몫을 했으리라.

  거품이 끼기 전에 대처하는 게 최고였겠지만 어설프게 개입하다가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은 건 옳은 판단이었다.

  <지금은 로마의 중산층들까지 죄다 달라 붙어서 꽃의 품종을 개량하는데 열심이에요. 가장 고가로 팔리는 건 샤한샤라는 품종이에요.

  우리집 정원에 심어져 있는 품종인데 색깔과 모양을 좀 개량한 것도 같아요. 현재 이 샤한샤 품종 한 송이면 최고급의 포도주와 커피를 수레로 실을 정도로 살 수 있어요.

  시장의 자연스러운 흐름도 좋지만 제가 볼 때는 너무 과열된 게 아닌가 싶어요.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조언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 편지를 읽게 되신다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할지 방침을 알려주세요.>

  이 뒤에는 언제나 건강을 챙겨라, 사랑한다, 하는 애정어린 표현들이 쭉 이어졌다.

  평상시에 사랑이 듬뿍 담긴 딸의 편지를 받았다면 입이 헤실헤실 풀어졌겠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긴가민가 하고 있었지만 이걸로 확실해졌다.

  현재 로마에 부는 광풍은 분명히 훗날 역사에 고전 경제계의 위기 중 하나로 기록될만한 사안이었다.

  이대로 놔둔다면 아마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는 높은 확률로 테베레 강 밑바닥은 다 같이 손잡고 뛰어든 사람들로 자리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거품이 끼기 전에 분명히 몇 년에 걸친 조짐이 있었을 텐데 전혀 보지 못했다니···내 실책이로군."

  로마에 있는 동안은 정치와 사업 쪽에만 신경 쓰느라 다른 분야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가지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만약 마르쿠스가 로마를 떠나기 전 아주 사소한 낌새라도 눈치 챘다면 이 사달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에 여러 가지 가정을 달아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다.

  중요한 것은 끝도 없이 올라간 이 광기의 물결을 최대한 조용하게 연착륙 시키는 것이다.

  마르쿠스는 즉각 이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수레나스와 푸블리우스, 그리고 자신의 위원회를 소집하라 일렀다.

  < 280. 특이점이 온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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