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2. 특이점이 온다 >
282.
세계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자본이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하면 반드시 유산계급, 혹은 부르주아라 부르는 계층이 발전하기 마련이다.
서구권의 경우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계급은 자신들의 권리를 계속 확장시켜 나갔다.
때로는 귀족과 대립하기도 하고, 때로는 함께 협력하기도 했다.
각국마다 발전 양상이 조금씩 다르긴 해도 한 가지 공통점은 있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 할수록 이들의 입지는 계속해서 커져만 간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본질을 고려한다면 경제권을 바탕으로 한 이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게 당연한 현상이긴 하다.
수도 로마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르쿠스의 금융 개혁이 꽃을 핀 시기부터 무섭게 성장한 기사계급은 이미 과거와는 위상이 한층 달라져 있었다.
원래부터 로마는 상위 기사계급이 귀족 못지않은 권세를 누리던 사회였다.
귀족이지만 기사계급의 대표격으로 인식됐던 마르쿠스는 처음에는 이런 현상을 묵인했다.
사실 로마에서 가장 많은 부를 벌어들이고 있는 사람은 마르쿠스 본인이었으며, 타디우스 같은 거상들을 이용해 자신의 입지를 계속 넓혀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로마에서 진행되고 있는 무궁화 투기 파동은 가만히 두고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마르쿠스가 자체적으로 보낸 조사원의 보고에 따르면 현재 로마에 있는 거대 회사는 또 다른 투자 광풍을 몰고 올 사업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은 원로원 의원들과 여러 관료들에게 접근해 주식을 일반에 공개할 수 있는 권리를 얻기 위해 로비를 펼쳤다.
그리고 막대한 상납금을 지불하는 만큼 주가를 올리기 위한 여러 가지 계획을 구상 중이었다.
당연히 다른 회사들도 언제라도 이 판에 뛰어들 수 있도록 주식발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역사에서 영국을 뒤흔든 남해 거품 사건과 소름 돋을 정도로 비슷한 전개 과정이었다.
마르쿠스는 과열되어 있는 시장에 조금 과격한 방식으로라도 찬물을 끼얹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카이사르는 마르쿠스의 이런 의견을 원로원에 전하고 자신 역시 동의한다는 뜻을 밝혔다.
"지금 몇몇 기사계급은 자신들의 우월한 자본을 활용해 고의적으로 시장을 교란하고 왜곡하며 돈을 벌어들이고 있소. 나는 이런 움직임을 그대로 두는 건 로마의 미래를 좀먹는 것이라 판단했으니 이제부터 그런 행위에 마땅한 제재를 가하려 하오."
"구체적으로 어떤 제재를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고의적으로 시장을 교란하는 자는 재판장에 세워 엄격한 법의 심판을 받게 하고 교도소에서 수십 년은 썩을 각오를 해야 할 거요. 당연히 부정하게 축재한 재산은 전액 국고로 환수될 것이고."
예상보다도 더 강경한 방식에 몇몇 의원들의 얼굴에 우려가 스쳐 지나갔다.
평소에는 카이사르의 의견에 어떤 반박도 하지 않던 의원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혹시 그들에게 돈을 받은 의원이 있다면 똑같은 죄목으로 처벌받습니까?"
"레피두스, 그야 당연한 것 아니겠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중한 처벌을 하겠다는 말을 하려던 카이사르는 의원들의 불안한 표정의 정체를 간파했다.
그러니까 이미 뇌물을 한 수레씩 받아먹은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자신도 같이 엮여서 심판을 받을까 봐 저렇게 전전긍긍해하는 것이리라.
'한심하긴······.'
아무리 자신의 파벌이라고 해도 공공의 이익에 해가 되는 이들이라면 냉정하게 쳐내는 게 맞다.
확실히 선을 그으려던 카이사르는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더 이해관계가 엮여 있는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다.
레피두스만이 아니라 이사우리쿠스, 바티니우스, 칼레누스, 심지어 자신의 충복인 쿠리오와 장인인 피소마저 떨떠름한 기색인 게 느껴졌다.
카이사르는 공적으로는 깨끗한 축에 속했지만, 융통성이 전무한 독불장군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편법으로 돈을 벌거나 재산을 축적하는 정도는 그냥 넘어가 주었다.
당장 그 역시 완전히 합법적이라고만 볼 수 없는 방법으로 상당수의 빚을 갚기도 했다.
물론 빼도 박도 못하게 뇌물을 받거나 국고를 횡령했다고 한다면 처벌을 받아야겠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좀 달랐다.
아마 지금 돈을 받은 이들의 태반은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는 생각으로 받아 챙긴 게 대다수일 것이다.
통상적인 뇌물과 현재 기사계급이 편의를 봐 달라고 찔러주는 돈은 양상이 조금 달랐다.
금융 관련 계통의 법은 정비되어 있지 않았으니 법망의 허점을 파고드는 것도 손쉬웠다.
이런 상황에서 무작정 의원들을 함께 벌하는 건 상책이 아니었다.
아무리 권력이 카이사르에게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귀족과 기사계급 전부를 적으로 돌리는 건 현명한 방법이라 볼 수 없다.
'역시 이럴 때 필요한 건 갈라치기겠지.'
어차피 원로원 의원들과 기사계급의 이해관계는 그렇게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게 아니다.
조금만 빠져나갈 구멍을 줘도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챙기는 게 전형적인 귀족의 방식이다.
카이사르는 이번에도 그럴 수 있도록 손절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원래 부당이득을 취한 자들은 예외 없이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아야 하네. 하지만 지금은 법이 정비되고 있는 과도기적 시점이라는 걸 고려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우선 지금 터져 나오고 있는 문제들을 예방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고 그 법을 어긴 이들에게는 엄격한 처벌을 내린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네. 다만 의도치 않게, 혹은 아직 관련 지식이 부족해 본의 아니게 발을 담근 이들에게는 소급 적용을 하지 않도록 법을 만드는 건 어떻겠나?
"
그러니까 처벌받기 전에 알아서 관계를 끊으라는 신호였다.
이걸 이해하지 못할 바보들은 현재 원로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명안이십니다!"
"과연 카이사르 님이십니다."
"이보다 공명정대한 방법은 또 없을 겁니다."
앞다퉈서 찬성의 의견이 솟아나왔다.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반대 의사를 표출하는 건 단 1데나리우스의 뇌물도 받지 않은 카토뿐이었다.
"그건 너무 관대한 처사가 아닙니까? 탐욕에 굴복해 사회를 어지럽힌 이들은 원로원 의원의 자격이 없습니다. 감옥에 보내지는 않더라도 의원의 자격을 박탈해서 후대에 교훈으로 삼는 것이······."
"어허! 그건 너무 과격하지 않소!"
"그렇소! 카이사르 님은 아직 새로운 법체계에 익숙하지 않은 의원들을 배려해 이토록 관용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오. 이 깊은 뜻을 이해해야지."
카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그를 성토하는 말들이 쏟아졌다.
어떤 이들은 얼굴을 시뻘겋게 붉히며 삿대질까지 해댔다.
당연히 뇌물을 받은 액수가 큰 이일수록 과격한 반응이 나오는 것이라 예상해볼 수 있었다.
카토는 경멸스럽다는 표정으로 도로 자리에 앉았다.
"이리도 썩어빠진 이들이 로마의 원로원 의원이라니······."
"자자, 삼촌. 너무 그러지 마세요. 카이사르 님도 무작정 부패를 덮어주려고 저런 결정을 내리신 건 아니잖아요."
브루투스의 만류에도 카토는 찡그린 얼굴을 다 피지 않았다.
물론 그도 카이사르가 무작정 의원들의 죄를 덮어주려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알았다.
귀족들이 부패한 기사계급을 싸고돌지 못하게 확실한 선을 긋고, 고립된 그들을 손쉽게 요리하려는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은 이미 챙길 만큼 챙겼으니 이제부터는 깨끗한 척 손을 씻고 모르는 척하면 그만이다.
즉, 기사계급만 일방적으로 나쁜 놈을 만들어서 매장해 버리겠다는 심보였다.
효율적이고 실리적인 방법이었으나 그렇게 썩 마음에 드는 방식은 아니다.
하지만 카토가 마음에 들어하든 들어하지 않든 상관없이 회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어차피 자신들이 엮일 일이 없다는 보장을 받은 의원들은 거리낌 없이 기사계급의 비리를 폭로하고, 이를 방지하기 위한 법안을 논의했다.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제출된 법안들을 쭉 검토하며 내심 키케로의 부재가 아쉬워졌다.
키케로라고 자본과 금융에 관한 지식이 뛰어난 건 아니지만, 법을 만드는 데 있어 그의 식견은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법을 입법할 때는 이게 기존의 다른 법들과 어떤 점에서 충돌이 되는지도 면밀히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런 걸 검토하고 보완하는 데에는 키케로만 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고생도 꽤 했을 테니 이제 슬슬 다시 불러들이는 걸 고려해봐도 되겠지.'
카토와 키케로의 사이는 이미 최악으로 틀어졌으니 둘이 합심해서 카이사르에게 반대할 일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로마로 돌아오는데 적절히 편의를 봐준다면 카이사르 쪽에서 그의 능력을 발휘해줄지도 모르는 일이다.
카이사르는 투자를 선동하는 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안을 면밀히 검토해 보는 한편, 키케로에게 적을 편지의 내용을 진지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
로마에서 나날이 가격이 올라가고 있는 샤론의 수선화, 무궁화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희귀품종을 재배하는 데 성공해 일곱 언덕에 저택을 구매했다는 사람들의 성공담이 연일 시내에 맴돌았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대량으로 무궁화 재배를 해서 파는 기사계급은 계속해서 투기를 부추겼다.
"아직도 샤론의 수선화를 재배 안 한다고? 이게 공짜로 돈을 나눠주고 있잖아! 그냥 데나리우스를 삽으로 퍼서 뿌리고 있다고! 너희도 알지? 위대한 마르쿠스 님의 가호가 이 꽃에 깃들어 있다는 걸. 희귀한 품종일수록 더욱 가호를 잘 받을 수 있어. 그러니까 늦기 전에 빨리 올라타라고."
심지어 향간에는 '나는 무적이다, 무궁화는 신이고'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구호까지 떠돌았다.
하지만 거품이 끼다 보면 언젠가는 반드시 터지는 법.
이렇게 끝도 없이 올라갈 것만 같던 무궁화의 가격이 갑작스레 돌변하기 시작했다.
로마에서도 간행을 시작한 주간 신문에 실린 특집 기사가 바로 시발점이었다.
<충격! 샤론의 수선화는 사실 위대한 마르쿠스가 가져온 꽃이 아니었다?> <샤론의 수선화는 인도에서 그냥 굴러다니는 흔한 들꽃. 희귀품종이라는 것 역시 근거 없는 소리.> <동방에서 자신의 이름이 도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쿠스의 대분노. 샤론의 수선화 투기 한풀 꺾이나?>
신문의 거의 모든 지면에 현 투기 광풍을 저격하는 내용이 실렸다.
사실 신문에 적힌 내용이라고 다 진짜는 아니었다.
하지만 현 시기는 신문의 내용이 진실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이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과거의 대중들은 신문은 사실만을 말한다고 믿는 경향이 훨씬 강했다.
여기에 사전에 포섭한 여러 기사계급의 인터뷰까지 실렸다.
"시민들은 마르쿠스 님을 숭배하니까 그 이름을 팔아서 돈을 벌 기회라고 생각했던 거죠. 마침 마르쿠스 님이 동방 상인에게 선물 받은 꽃을 기념으로 로마에 갖고 오셨으니 그걸 기회로 삼은 겁니다. 그 꽃에 과한 의미를 부여해서 수요를 부추기면 대량으로 돈을 벌 수 있잖아요?"
"이미 천문학적인 액수로 돈을 번 사람들은 이미 이 판에서 빠질 준비에 들어갔어요. 아마 1년 내로 꽃의 가격이 폭락할걸요? 아는 사람들은 이미 수익 볼 만큼 봤으니 손해가 아니고 그걸 모르는 불쌍한 다수만 손해를 끌어안고 가겠죠. 자신들끼리 있을 때는 공공연하게 자신들을 코끼리에 비유하고 뭣 모르고 뛰어드는 다수의 시민들을 짓밟히는 개미라고 표현하더군요."
이 인터뷰가 공개되자 로마는 문자 그대로 완전히 뒤집어졌다.
당연히 하루가 다르게 신고가를 경신하던 무궁화의 가격도 폭락하기 시작했다.
가격이 수직하강하기 시작하자 패닉에 빠진 수많은 이들의 분노가 그대로 이번 투기를 조장한 기사계급에 집중되었다.
거품의 붕괴로 일어날 혼란과 불만을 전부 자본가 계급에 대한 분노로 돌려버린 것이다.
"으아아아! 이 개자식들아! 내 돈 돌려내라!"
"탐욕에 미친 돈의 망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자!"
코끼리를 물어 죽이자는 개미들의 아우성이 로마 전체에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 흐름을 주도한 카이사르는 강 건너 불구경하듯 흘러가는 사건을 관찰하고 있었다.
마르쿠스가 알려준 계획의 1단계는 한 치의 빗나감도 없이 완벽하게 시행됐다.
거대한 나무를 뒤흔들었으니 가지에 열린 과실들이 떨어질 터.
이제 떨어진 열매들을 수확할 차례였다.
< 282. 특이점이 온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