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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3. 특이점이 온다 (284/326)

  < 283. 특이점이 온다 >

  283.

  꽃 가격의 급락으로 커다란 손해를 본 군중들의 분노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거품이 최고조에 있을 때 터트린 건 아니었으니 이 정도지 만약 자연히 거품이 꺼질 때까지 놔뒀다면 사태는 훨씬 심각했을 것이다.

  평소에는 거들먹거리며 포로 로마노를 활보하던 기사계급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조용히 분위기만 살폈다.

  저택에서 있다가는 분노한 폭도들에게 두들겨 맞고 죽을까 봐 가까운 친지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했을 정도다.

  건장한 호위병들을 옆에 두고 있는 자들이라고 안심할 수는 없었다.

  이미 분위기 파악 못 하고 거리를 활보하던 몇몇 부유층은 험한 꼴을 당하기도 했다.

  자신은 무궁화 파동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항변해도 달라질 건 없었다.

  신문에서 지속적으로 나온 기사들로 인해 이미 시민들의 머릿속에는 기사계급의 인식이 나락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손해를 본 이들은 이 모든 걸 그들의 탓으로 돌렸다.

  지금까지 저들이 모은 재산은 모두 선량한 시민들을 선동해서 갈취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결코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는 광기의 물결이 몰아치고 있었다.

  분위기가 충분히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부하들을 보내 곤경에 처한 상인들을 데려오라 일렀다.

  모두가 로마에서 힘 좀 꽤나 쓴다며 떵떵거리던 이들이었다.

  이들은 카이사르를 보자마자 제발 폭도들의 난동을 멈춰달라며 빌었다.

  "자네들이 겪고 있는 고난은 안타깝지만 자초한 일이 아닌가. 물론 시민들을 강제로 진압할 수는 있지만 이들을 폭도로 규정해야 하는지도 조금 애매해서 말이지. 한편으로는 일종의 사기에 당한 피해자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사기라니요!"

  가장 앞에서 대표로 목소리를 높이고 있던 뚱뚱한 상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아무리 로마에서 산더미 같은 재산을 쌓아둔 이라도 카이사르의 앞에서도 당당할 수는 없다.

  그러나 억울함으로 범벅이 된 그의 목소리는 그런 공포를 뚫고 고성이 되어 터져 나왔다.

  "이건 엄연히 말하면 저희 탓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문에서 저희들을 파렴치한 사기꾼들처럼 묘사해서 생긴 일인 것을······."

  "오. 그러면 자네들이 했던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것인가?"

  "예? 아, 아니 물론 모든 게 사실이었던 건 아니지만 본디 상업이라는 게······."

  "상행위를 할 때 다소 과장을 섞는 것까지는 괜찮지. 하지만 거짓을 섞는 건 사기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카이사르는 이미 상인들이 무궁화 값을 올리기 위해 거짓 소문을 퍼트리고 소비자들을 선동했다는 증거를 상당수 가지고 있었다.

  또다른 상인 한 명이 파르르 손을 떨며 내뱉듯 항의를 토해냈다.

  "선동은 신문사도 하지 않았습니까. 사실 이 모든 게 저희의 잘못도 아닌데······."

  뚱뚱한 상인이 재빨리 그의 말을 받았다.

  "안 그래도 저희 사이에서는 이 모든 죄를 저희에게 덮어씌워서 희생시키려는 의도가 아닌가 하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덮어씌운다고? 내가 말인가?"

  카이사르가 천연덕스럽게 얼마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조소를 흘렸다.

  "자네 말뜻은 지금 나와 원로원이 언론을 장악해 입맛대로 사람들을 세뇌하고 있다는 것인가? 로마의 언론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을 권리를 지닌다고 분명히 법에 명시되어 있거늘. 자네들은 내가 법을 어기는 범법자라고 에둘러 비판하고 있는 것이로군."

  "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저희는 그저 신문에서 저희를 악의적으로 공격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리려······."

  입을 잘못 놀렸다는 걸 깨달은 상인들이 부랴부랴 고개를 땅에 박고 굽실거렸다.

  카이사르의 말대로 신문을 찍어내는 언론사는 표면상으로는 독립된 기관이었다.

  심지어 주식까지 발행해서 투자도 받고 있었다.

  당장 여기 상인들 중에도 신문사의 주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신문사의 최대 대주주는 마르쿠스의 가문이었고, 그다음 대의 주주들도 그의 클리엔테스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물론 카이사르는 신문사에게 압력 따위는 가한 적이 없었으니 그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자네들은 지금 로마의 집정관이 거짓된 정보로 기사계급을 음해하려 한다는 음모론을 제기한 걸세. 사실 그것도 이미 알고 있었네. 시민들에게 그렇게 해명하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던데. 어떤가?"

  카이사르의 차가운 눈빛을 받은 뚱뚱한 상인의 얼굴에 핏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카이사르는 이어서 강 건너 불구경을 하고 있는 뒤편의 상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번 투기 파동과 관련이 없는 그들은 자신들이 어째서 이 자리에 함께 불려왔는지 궁금한 얼굴이었다.

  "이번 건과는 관련이 없다고 마음 놓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오히려 자네들에게 걸린 혐의가 죄질이 더 나쁘다는 걸 아는가?"

  "예?"

  "거액의 상납금을 내고 주식을 일반에 공개할 수 있는 권리를 얻으려 한 사람들이 있다더군. 이 자리에서 묻고 싶은데 그 상납금을 내면서 이윤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 그건 그러니까······."

  "대충 어떤 방법을 쓸지는 알겠네. 무리하게 주가를 올리는 방법을 쓰겠지. 온갖 과장된 소문으로 투자자들을 선동해서 지갑을 열게 하겠지. 하지만 그런 식으로 주가를 올리면 언젠가 거품이 터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나?"

  누구도 입을 뻥끗하는 사람이 없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려고 애쓰는 상인들을 둘러보며 엄숙한 어조로 말을 이어나갔다.

  "자네들은 그저 재산을 불리려는 마음으로 그런 계획을 세웠겠지만.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건 자네들에게 속은 선량한 시민들일세. 그리고 돈을 잃은 사람들은 사전에 이를 예방하지 못한 나와 원로원을 비판하겠지. 나는 테베레강 밑바닥에서 단체로 시체를 건져내는 꼴을 볼 수는 없네. 그러면 내가 뭘 해야 하겠나?"

  "즉각 계획을 취소하겠습니다! 그러니······."

  "개인의 양심에 맡겨둬서는 언제나 같은 실수가 반복될 뿐이지. 나는 이번 사안을 교훈 삼아 훨씬 선진화된 법을 제정할 생각이네. 그리고 점점 더 상업이 시민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커지는 만큼 이를 부당하게 이용하는 자들에 대한 처벌도 강해져야 할 테고."

  과열되어 가는 시장에 찬물을 한 번 끼얹고, 새롭게 형성되어 가고 있는 자본가 계급에게도 일종의 경고를 주겠단 뜻이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첫 단추가 어떻게 끼워졌냐에 따라 이후의 흐름이 정해진다.

  처음부터 확실하게 선을 넘은 폭주는 철퇴를 맞는다는 선례를 심어줘야 차후 비슷한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대중들을 무지하다고 여기고 돈벌이를 위한 도구로 취급하면 언제라도 지금과 같은 처지가 될 수 있다.

  현 상황에서 상인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것도 없었다.

  왠지 설계 당한 느낌이 가득한데 그렇다고 증명할 수 있는 방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저기··· 그러면 저희들에 대한 처분은······."

  "로마의 경제를 어지럽혔으니 이후 제정될 법에 의거해 전재산 몰수와 추방이 당연하겠지만··· 처음 있는 일이기도 하니 한 번은 유예를 두는 게 합리적이겠지."

  "가, 감사합니다! 관대하신 카이사르시여!"

  "앞으로는 탐욕을 버리고 공명정대하게 상단을 운영하겠습니다."

  문자 그대로 지옥 밑바닥에서 건져진 상인들이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카이사르는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그들에게 종이 한 장씩을 나눠주었다.

  "하지만 이번 손해에 대한 책임은 분담해야겠지? 피해를 입은 시민들에게 전액을 보상해줄 수는 없겠지만, 일정 비율은 보상을 해줘야 하네. 그래야 성난 저들도 분노를 가라앉히고 다시 생업으로 돌아가겠지."

  종이에 적힌 계약서에는 우선 로마가 국고를 열어 시민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이번 사건과 연관된 상인들이 그 액수만큼 국고를 다시 채워 넣는다고 쓰여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그들이 따라야 할 지침들이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이, 이걸 전부 앞으로 지켜야 한다는 겁니까?"

  "물론. 대신 이 계약서에 서명하는 것으로 자네들의 허물은 덮어주기로 하지."

  "하지만 카이사르 님, 이건······."

  "한 가지 말하는 걸 잊었는데 자네들의 행동에 마르쿠스가 굉장한 불쾌감을 표출했다는 걸 알고 있나?"

  머뭇거리던 상인들의 몸이 그 자리에 딱 굳었다.

  "마르쿠스 님이······."

  "다른 것도 아니고 자신을 엮어서 돈벌이의 도구로 썼으니 유쾌할 리가 있겠는가. 그냥 돈을 벌기만 했으면 모를까 뻔히 나중에 가격이 폭락하게 되어 있는데 하필이면 그 물건을 마르쿠스의 상징으로 만들었으니 나라도 용서할 마음이 들지 않았겠지.

  그래도 내가 여기 계약서에 서명을 해서 뉘우치는 기색을 보인다면 용서해 달라고 어렵게 합의를 보았네. 하지만 싫다면 어쩔 수 없지. 마르쿠스가 자네들에게 어떤 처벌을 내리더라도 나는 관여하지 않을 걸세.

  "

  "하, 하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서명하겠습니다!"

  기사계급이 마르쿠스를 두려워하는 건 단순히 권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끝 모를 정도의 재력과 다른 이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상재.

  마르쿠스는 조그만한 공권력조차 쓰지 않고 그 어떤 거상도 묻어버릴 능력이 있었다.

  손까지 떨며 앞다투어 서명을 하는 상인들과는 반대로 그들을 내려다보는 카이사르의 눈빛은 그저 이전처럼 평온할 따름이었다.

  ※※※

  로마에서 벌어진 한바탕 소란 덕분에 금융에 관련된 법과 제도의 선진화는 완전히 급물살을 탔다.

  무엇보다 큰 소득은 한창 재산을 불려가며 나름대로 세력을 키우던 상인들의 고삐를 카이사르와 마르쿠스가 다시 움켜쥐었다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란 생물은 자신의 힘이 한창 커졌다고 생각하면 간덩이가 그에 비례해서 커지는 법이다.

  이걸 적절하게 눌러주지 않으면 훗날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

  한창 로마를 어지럽히던 소란도 피해를 입은 시민들에게 상당한 양의 돈이 뿌려지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잠잠해졌다.

  지금까지 얻은 이익을 다 토해낸 상인들이 여럿 나왔지만 시민들은 오히려 이를 고소해하며 카이사르의 결정을 칭송했다.

  반대로 이런 소란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실로 오랜만에 다시 로마의 땅을 밟은 키케로의 심정이 딱 그러했다.

  자신 정도의 인물이 다시 로마로 돌아왔는데 정작 그를 환영해주는 이들은 가족들과 가까운 친구들뿐이었다.

  로마로 돌아온 첫날부터 마음이 상한 그는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적어 마르쿠스에게 보냈다.

  짜증이 잔뜩 섞인 편지이긴 했지만, 그 점이 도리어 읽는 재미가 있었다.

  마르쿠스가 키케로에게 보낼 답장을 한창 종이 위에 써 내려갈 때였다.

  방으로 들어온 푸블리우스가 의자에 철퍼덕 앉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한나라 사신들과 상인들이 도착했습니다. 방금 그들의 얼굴을 보고 오는 길입니다."

  "수고했다. 내가 직접 검토해야 할 정도의 사안은 없었겠지?"

  "뭐, 그들이 하는 이야기가 언제나 다 비슷하죠. 아, 그래도 이번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복식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뭐라더라 상단에 엄청난 거금을 주고 섞여 들어온 타국의 상인이라던데요."

  "그래? 그건 좀 신기하구나."

  마르쿠스가 관심을 보이는 것 같자 푸블리우스는 기억을 더듬어 방금 전 보았던 상인의 용모를 대강이나마 설명해나갔다.

  "한의 사신이 아니라 대충 본 정도이지만 새하얀 옷을 입고 있어서 눈에 좀 띄더군요.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데 장장 몇 년이 걸렸다면서 설탕을 대량으로 사 가고 싶다는 말도 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데 몇 년이나 걸렸다고? 대체 어디서 왔길래."

  "부하에게 그저 스쳐 지나가며 들은 거라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다시 알아보라 하죠. 얼핏 듣기로는 부···여? 뭐 이런 발음이었던 것 같은데요."

  막연히 한의 남쪽에 붙어있는 나라에서 왔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던 마르쿠스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굳어졌다.

  "···부여라고?"

  < 283. 특이점이 온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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