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 특이점이 온다 >
284.
부여라는 이름은 고구려나 백제 같은 이름처럼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아도 친숙한 이름이긴 했다.
안 그래도 무궁화로 인해 문제가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여기에 부여에서 사람이 왔다고 하니 마르쿠스로서도 어딘가 묘한 감상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 상인을 데려와 봐. 내가 직접 보도록 하지."
"형님께서 직접 보실만한 가치가 있는 자입니까? 어디 붙어 있는 나라인지도 모르는 나라의 일개 상인인데······."
"신기하잖아. 그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수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여기까지 왔다는 게. 그러면 그 고생을 치하하는 정도는 해주는 게 도리겠지."
"역시 형님은 자비로우십니다. 그럼 한어를 쓸 수 있는 통역을 함께 데려오겠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곳에 부여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르쿠스는 내심 고구려인이나 부여인과 자신이 말이 통할까 궁금하기도 했으나, 아마 무리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한나라 상인들과 함께 섞여온 부여인이 한어에 능통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한나라 상인들과 대화할 때처럼 통역을 끼면 아무런 문제 없으리라.
그렇게 판단한 푸블리우스는 통역관을 불러 부여 상인을 알현실로 데려오라 일렀다.
마르쿠스는 일부러 천천히 커피 한 잔을 다 비운 뒤에 몸을 일으켜 알현실로 향했다.
그가 도착하자 새하얀 옷을 입은 동양인이 얼떨떨한 얼굴로 옥좌 앞에 무릎 꿇고 앉아 있었다.
그에게는 주변의 모든 사물이 신기하기 그지없는 것처럼 보였다.
황금과 각양각색의 보석으로 장식된 벽과 바닥이 뿜어내는 광채에 압도당한 그는 아무런 색깔도 없는 자신의 옷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위대한 샤한샤, 로마의 영속집정관이자 이집트의 보호자, 아라비아의 주인, 살아계신 유피테르의 화신에게 경배하시오!"
시종이 황금으로 만든 지팡이로 바닥을 탕 내리쳤다.
울려 퍼진 둔중한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부여 상인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한나라에서 천자를 배알했을 때보다도 더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아라비아가 어디인지는 몰랐지만 일단 로마와 이집트에 대해서는 확실히 공부를 해왔다.
샤한샤라는 게 왕중왕을 가리키는 의미라는 것도 알았다.
그는 사전에 연습한 대로 천자 앞에 섰을 때처럼 극도의 공경한 어조로 인사를 올렸다.
"위대한 왕들 가운데서도 가장 위대한 이름. 왕중왕을 알현할 수 있는 영광을 주신 데에 미천한 상인이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제 이름은 해대성이라 하옵니다."
"로마에 온 것을 환영하네."
마르쿠스가 아직도 어리둥절한 얼굴의 상인을 내려다보며 인사를 받아주었다.
"내가 어째서 보자고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로군."
"샤한샤께서 흥미를 가져주셨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옵니다."
마르쿠스의 말대로 해대성은 어째서 그가 콕 집어서 자신을 보자고 했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 중에 콕 집어서 자신을 보자고 한 데에는 분명 무언가 이유가 있을 터.
여기까지 온 목적을 고려하면 샤한샤와 안면을 트는 게 좋긴 하겠지만 이유를 모르니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마르쿠스 입장에서는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냥 한국인으로서 기억이 남아 있으니 부여 사람이라길래 신기해서 불렀을 뿐이다.
하지만 상인의 이름을 들으니 없던 호기심 하나가 더 생겨났다.
"해씨라고 하면 부여 왕족의 성이 아닌가?"
상상도 못 했던 지적에 해대성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예? 그, 그것을 어찌······."
"자네 생각보다도 난 더 많은 걸 알고 있네. 다시 묻겠는데 자네 부여의 왕족인가? 현재 부여의 왕이 누구였더라··· 금와왕인가?"
"그,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직계는 아니옵고 방계 출신인지라······."
해대성이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설마하니 상대방이 이토록 자신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까닭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로마의 샤한샤는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듣기는 했었다.
왕족이라 하면 천신의 피를 이었다고 말하는 게 당연했으니 그런 말을 별로 귀담아듣진 않았다.
그러나 직접 와서 마주해 보니 상인들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진짜 신인지 아닌지는 차치하더라도 지혜가 하늘에 닿았으며 모르는 게 없다는 말이 사실인 건 확실해 보였다.
"그래. 방계라고 해도 왕족인 자네가 어째서 상인들 틈에 끼어서 여기까지 먼 길을 온 것인가. 대량으로 설탕을 사 가고 싶다는 목적이 다는 아닐 것 같은데."
"로마의 명성은 현재 하늘에 닿아 제가 있는 곳까지 들려올 정도입니다."
"그래? 구체적으로 어떤 말이 돌고 있는지 한번 말해보게."
"그렇게까지 자세한 소문은 아니옵니다. 다만 몇 년 전부터 한나라까지 왕래한 사신들이 묘한 풍문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한나라에서 더욱 서쪽으로 가면 천하의 모든 부가 집중되고 있는 나라가 있고, 한나라조차 우습게 볼 정도의 기술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말들이 풍문처럼 떠돌고 있습니다."
부여는 원래부터 외부의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는 것으로 성장해온 국가다.
흉노족의 청동기와 목축문화를 기원전 3세기쯤 이미 받아들였고, 조금 뒤에 한족의 철기와 농경문화까지도 흡수했다.
물론 기후의 차이로 인해 농경은 그리 발달하지 못했으나 외부의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특성은 지금도 여전했다.
마르쿠스는 자신의 계산보다도 더 빠르게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게 의외이긴 해도 이를 긍정적인 신호라고 받아들였다.
어쨌거나 한 왕조의 지배력과 영향력이 약해지는 건 단기적으로도 장기적으로도 이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한사군의 반응은 어떤가? 그쪽에서는 한군현이라 하나?"
"그들의 존재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해대성은 이제 놀라움을 넘어선 경이로움마저 느끼고 있었다.
동방 속주에서 만주와 한반도까지는 세상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고대 시대의 기준에서 보자면 서로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서방 세계 전체를 통치하고 있는 지배자가 자신들의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으니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한이 설치한 4개의 현은 한의 통제하에 있는 곳이니 예나 지금이나 변함은 없습니다. 다만 주변 소국들의 통제를 이전처럼 원활히 하는 건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겠지. 원래 지배와 복종에 사람의 인식이 미치는 영향력은 상당하니까."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당장 저희 귀족들 사이에서도 한나라가 생각했던 것만큼 대단한 곳이 아니었다는 말도 나오고 있으니까요."
옆에 있는 나라가 가장 강대한 대국이자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냥 자신들보다 좀 더 강한 대국이라고 인식하는 건 하늘과 땅만큼이나 큰 차이가 난다.
역사가 계속 이렇게 흘러간다면 중화사상은 여기서 더 발전하지 못하고 폐기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 왕조 내에서야 계속 중화를 외치겠지만 주변에서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으면 공염불이 될 뿐이다.
"그래서 자네가 온 이유는 그 소문이 과장인지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고?"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로마에서 나는 진귀한 물건들을 가져갈 수 있는 만큼 본국으로 가져가는 게 역시 최우선이었습니다. 본래 저희는 한을 통해 로마의 물품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도저히 물건을 얻을 수가 없었던지라······."
"아, 그랬지. 한에 수출하는 양을 확 줄여버렸으니까 자신들이 소비하는 것도 부족할 거야."
마르쿠스는 어째서 이번 상인단에 타국 상인들이 제법 많이 섞여 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한나라가 지금까지 선심 쓰는 척 조공국들에게 하사품을 내려왔었는데 그게 막히니 직접 물건을 구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자네들의 사정은 알겠지만, 부여와 본국은 거리가 너무 멀지 않을까? 당장 자네만 해도 여기까지 오는 데 몇 년이 걸렸는데 정기적인 교역을 하는 건 힘들다고 봐야겠지."
"그 부분을 어떻게든 할 방법이 없겠습니까?"
"글쎄··· 일단 생각을 좀 해보도록 하지. 하지만 너무 기대는 말게. 물리적으로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머니까."
동남아 정도의 위치만 되더라도 인도에서 실어나르는 방법도 있을 테지만 만주까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였다.
이건 지금의 배를 개량해 대양 항해가 가능한 범선이 나와도 무리다.
최소한 기차를 깔거나 증기기관을 단 배들 정도는 나와줘야 엄두라도 낼 수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는 어떤 방식으로 검토를 해봐도 로마가 부여와 직접 교역할 방법은 없었다.
중간에 여러 단계를 거치는 방식으로는 가능하겠지만 그러면 가격이 너무 오른다.
물론 부여가 가격을 지불할 수만 있다면 그래도 되겠지만 현재 부여는 고작 해봐야 연맹왕국 정도에 불과했고, 그리 부유하지도 않았다.
아무리 봐도 로마에서 원하는 값을 맞춰 줄 만한 수준이 돼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이대로 그냥 보내긴 조금 불쌍하기도 한데······.'
현재 날이 갈수록 추락하고 있는 한의 위신과 근처 국가들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뭔가 그럴싸한 그림이 떠오를 것도 같았다.
원 역사의 흐름상 전한은 이미 내리막길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멸망한다.
뒤이어 역대 최단 통일 왕조인 신나라를 거쳐 후한의 시대로 흐르지만, 거기까지 그대로 똑같이 흘러간다는 보장은 없었다.
당장 효원황제 유석도 역사대로라면 아직 더 살아있는 날이 많아야 하는데 최근에는 오늘내일하는 상태라는 소문도 들렸다.
아마 마르쿠스의 의도적인 공작으로 지나치게 스트레스를 받다 보니 건강에 한층 더 악영향이 온 탓이리라.
이대로 십수 년 안에 전한이 주저앉는다면 동아시아의 정세 자체가 급변할지도 모른다.
물론 로마 입장에서는 그냥 강 건너 불구경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조금 더 장기적인 미래를 고려한다면 마르쿠스가 원하는 대로 흐름을 제어할 필요는 있었다.
'좋아. 우선 한사군과 한구군부터 해체해 버리도록 하자. 그리고 나머지는 천천히 쪼개버리면 되겠지.'
한창 중흥기를 누리고 있는 나라를 외부에서 어떻게 하긴 힘들어도 이미 내리막길인 나라를 뒤흔드는 건 손쉽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마르쿠스는 불안한 얼굴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해대성을 향해 온화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방면으로 고민을 해보았으나 부여가 로마와 교역을 하려면 어마어마한 비용을 감수해야 할 걸세."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습니다."
"부여의 위치상 해로를 통해 교역할 수는 없으니 육로를 통해 수레가 움직여야 할 테고, 그러면 자연히 많은 중간상을 거칠 수밖에 없지. 한나라의 각 성에도 여러 사업소를 둬야 할 테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수밖에 없어."
"그, 그렇다면··· 역시 불가능한 것입니까?"
해대성의 두 어깨가 축 늘어지려던 찰나, 마르쿠스가 달콤한 미끼를 내밀었다.
"하지만 자네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만 준다면 못할 것도 없겠지. 아주 관대하고 특별한 조건으로 물건을 보내주도록 하겠네."
암울함으로 물들어 있던 해대성의 두 눈이 삽시간에 다시 기대로 번뜩였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그,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희가 들어드릴 수 있는 요구라면 당연히 들어드리겠습니다."
부여가 만약 로마의 물건을 받는다면 그들은 주변의 국가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어지간히 무리한 조건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거래를 잘 성사시키고 돌아간다면 부여에서 해대성의 입지는 훨씬 더 견고해질 것이다.
마르쿠스는 곧장 입을 열지 않고 바싹 달아오른 상대방의 반응을 여유롭게 살폈다.
그리고 해대성의 초조함이 극에 달한 그 순간, 마르쿠스는 자신이 원하는 사항들을 하나하나 풀어내기 시작했다.
< 284. 특이점이 온다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