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5. 특이점이 온다 >
285.
해대성에게는 로마에 와서 겪은 모든 일들이 충격적이었다.
처음 한나라의 수도인 장안에 갔을 때만 해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었다.
이것이 바로 문명국이자 천하의 중심에 선 나라의 위엄이구나 하는 느낌을 확실하게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하지만 로마에 와서 받은 충격은 장안에 갔을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한나라가 부여보다 훨씬 더 발전된 느낌이었다면 로마는 아예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르쿠스는 해대성에게 사람까지 붙여줘서 도시의 이곳저곳을 안내해줬다.
그는 크테시폰만이 아니라 현재 무서운 속도로 시설이 지어지고 있는 마르코폴리스도 구경할 수 있었다.
평탄하게 쭉 뻗어져 있는 도로에 신전과 공공건물이 쭉 들어서 있고, 흐르는 강을 타고 수백척의 배들이 쉴 새 없이 지나다녔다.
마르쿠스의 형상을 딴 10미터 높이의 조각상은 그가 평생에 걸쳐서 본 그 어떤 조각상보다 정밀한 조형을 자랑했다.
그 외에도 어떤 조각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열 두 명의 사람이 쭉 늘어서 있는 황금상도 그의 눈길을 끌었다.
옆에 따라 붙은 사람이 브리악시스와 레오카레스가 만든 조각상들도 있다고 했지만,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의미인지는 알지 못했다.
호텔에서 파는 최고급 음식들과 커피를 대접받고 신문을 찍어내는 공장까지도 견학해 보았다.
당연히 해대성으로서는 거기에서 쓰는 기구가 정확히 무슨 용도인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저 입만 떡 벌린 채 눈앞에 펼쳐지는 신문물의 향연에 압도당할 뿐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이 정도 규모의 도시가 로마 내에는 몇 개나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현재 동방 속주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는 안티오키아와 크테시폰입니다. 하지만 안티오키아에 있는 거의 모든 시설은 마르코폴리스로 옮겨질 예정이라 앞으로는 여기가 중심이 되겠죠. 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도 빼놓을 수 없겠군요.
그리고 바다를 건너가면 나오는 수도 로마도 이 도시들 이상의 웅장함을 자랑합니다. 현재 갈리아 지방에도 새로운 도시들이 건설중이니 수십년 뒤에는 이 도시들도 무시하지 못할 규모를 자랑하겠죠.
"
"그렇군요. 그런데 안티오키아에 있는 시설들을 굳이 옮길 필요가 있는 겁니까?"
"그곳에서 거대한 지진이 일어날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지진이 일어난 게 아니고···일어날 예정이라고요?"
"샤한샤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부터 100년도 더 뒤의 미래지만 안티오키아는 대지진으로 인해 괴멸적인 피해를 입을 거라고요."
해대성은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정작 그 말을 하는 안내인의 얼굴에는 한 점의 의심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100년도 뒤에 지진이 일어나 도시가 박살날 테니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말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지닌 이가 하는 말이라고 해도 허무맹랑하다고 여겨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니, 무리도 아닌가···그 사람의 말이라면.'
해대성은 며칠 전에 있었던 마르쿠스와의 대화를 떠올리자 다시 한번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한나라는 어차피 요동에 신경을 쓸 수 없으니 한사군을 치라고······.'
심지어 어느 군의 세력이 약세이니 어떤 방식으로 공격을 하라는 방침까지 일러주었다.
부여가 한나라에 대놓고 칼을 뽑을 수는 없다고 하자 한나라는 스스로 무너질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추상적인 미래를 예언하는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전하는 분위기였다.
지금 당장 치라는 것도 아니고 때가 되면 알아서 움직여도 된다고 했으니 해대성으로서는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 수십년 안에 한나라는 스스로 멸망의 길로 들어가고 100년 뒤에는 도시가 지진으로 파멸한다고 하고···진짜로 미래를 볼 수 있는 건가?'
미친 소리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로마의 모두는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니 이제 그조차 헷갈릴 지경이었다.
실제로 마르쿠스가 한 업적들을 보면 진짜 미래라도 알고 있는 게 아니면 불가능해 보이는 것들도 많았다.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이미 마르쿠스를 현세에 강림한 신이라고 정식으로 공표하기까지 했다는 말도 들었다.
'샤한샤의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우리 부여의 미래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해대성은 분명 그럴 거라고 확신했다.
마르쿠스는 부여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많이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부여만이 아니라 모든 걸 다 그렇게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리라.
'현 왕의 이름은 물론 일곱 아들이 있는 것과 후비를 들였고 그 후비가 아들이 있는 것까지 다 알고 있었으니······.'
심지어 후비의 아들이 금와왕의 일곱 왕자보다 훨씬 더 재능이 출중하고, 그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까지 안다는 데에는 공포마저 느껴졌다.
특이하게도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한나라를 싫어하는 듯 했으나 그 이유도 이제 짐작이 갔다.
진정한 천하의 중심이 볼 때 한나라가 스스로 천자라 칭하는 게 얼마나 가소롭게 보였겠는가.
마르쿠스의 입장에서는 중원을 참칭하는 가짜를 처단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한나라를 해체하려 하는 것도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일단은 조금만 더 지켜보자. 여기서 가져갈 수 있는 지식과 상품들은 최대한 가져가야지.'
안 그래도 이 다음에는 신형 배의 진수식이 있기 때문에 그리로 가봐야 했다.
부여에서는 배를 볼 일이 사실상 없었고, 한나라에 갔을 때나 몇 번 본 정도였지만 대강 어떤 물건인지는 알았다.
로마의 배와 한나라의 배를 간접적으로나마 비교해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 할 수 있다.
행사가 열릴 해안으로 향하기 위해 마차에 오른 해대성의 가슴이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
원 역사에서 로마와 그리스에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갤리선은 1500년 이상을 최전선에서 활약해 왔다.
지중해 무역이 전부였던 고대 시대에는 풍향이 수시로 바뀌는 지중해의 특성상 노를 장비한 갤리선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가 커질수록 노잡이의 수도 많아져서 배의 적재량을 올리기 힘들다는 단점은 언제나 치명적이었다.
여기에 범선과는 달리 대형화 자체도 구조상 힘들고 침수의 위험도 높았다.
게다가 시대의 흐름상 로마는 앞으로 점점 더 지중해 바깥에서 항해를 할 일이 많아질 것이 자명했다.
무엇보다 앞으로 화포가 도입되기 시작하면 갤리선과 범선의 효율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벌어지게 된다.
조선의 판옥선 같은 방식으로 만들면 그나마 좀 낫겠지만, 그것도 완벽한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불규칙한 바람에 대응하는 것도 복합돛을 달면 어느 정도는 대처가 가능하다.
마르쿠스는 그리스와 알렉산드리아에서 장인들을 불러모아 아낌없이 자금을 투입해 수년에 걸쳐 연구를 시켰다.
미래의 지식을 제한없이 전부 쏟아부었기 때문에 엄청난 자금과 시간을 소모한 끝에 간신히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일단 대양 항해를 할 시범적인 모델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크고 웅장하게 만들었다.
카락이나 갤리온 같은 형태의 배는 처음이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배를 구경하기 위해 무리를 지어 몰려나왔다.
마르쿠스는 저 멀리서 두 눈을 휘둥그레 뜬 해대성을 자신의 옆으로 불러 감상을 물었다.
"제 평생에 이런 배는 처음 봅니다. 노가 필요없는 배라니···정말로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는 비효율적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라 이런 형태로 배를 발전시킬 생각을 못했던 거지. 하지만 로마가 서쪽으로 항로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이런 배가 필수라네."
"이런 배가 있으면 그야말로 세상의 끝까지라도 갈 수 있겠군요."
"세상의 끝이라 해봐야 결국 한 바퀴 돌아서 원래대로 올 뿐일 텐데 뭘."
대수롭지 않게 답한 마르쿠스는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슬쩍 시선을 돌렸다.
해대성은 마르쿠스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멍하니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내가 무슨 이상한 소리라도 했나?"
"아니···서쪽으로 쭉 가는데 어떻게 제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씀이신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
"그거야 지구는 둥그니까···아, 맞다. 지금은 그게 통용되는 시기가 아니었지."
마르쿠스는 해대성의 반응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간과하고 있었던 중대한 실수를 하나 발견했다.
그렇다.
이 시대의 동양은 중국 주나라 시대의 개천설에 입각해 지구를 평평하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사각형이라는 게 동양의 통설이었다.
하늘과 땅이 모두 둥글다는 인식이 생긴 건 후한 때 혼천설이 등장한 뒤에 정설로 굳어졌다.
마르쿠스가 놓친 건 이 점이 아니었다.
서양은 이미 아리스토텔레스 시기부터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이 나왔고, 에라스토테네스는 오차가 조금 있긴 해도 지구의 둘레까지 계산해 냈다.
도리어 이런 배경 때문에 마르쿠스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이 시기 천문학의 주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주변의 행성들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는 천동설이었다.
이걸 놓친 게 뭐 얼마나 큰 실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대양을 횡단할 항해를 계획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현재까지 정립된 천문항법은 전부 천동설을 근거로 작성되었고, 앞으로 발전하게 될 항법도 그럴 것이다.
며칠 만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항해할 때에는 이게 그렇게까지 큰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먼 대양까지 나가는 항해를 할 경우에는 위험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천동설을 근거로 천체를 계산하면 위치가 정확하게 나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마르쿠스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배를 살피고 있는 항해사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자네, 혹시 천문학에 대해 좀 아는 바가 있나?"
"샤한사께서 말을 걸어주시다니 크나큰 영광······."
"인사는 일단 생략하고 내 물음부터 답해보게. 자네들 천문학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지?"
항해사들은 자신들끼리 시선을 한 차례 교환하고 자부심 넘치는 미소와 함께 어깨를 쭉 폈다.
"당연히 천체의 움직임은 눈을 감고도 계산할 수 있습니다. 정밀도 높은 항해를 하려면 천문학에 대해 아는 건 필수니까요."
"그렇군. 그러면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이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지?"
"지동설 말씀이십니까?"
"오, 아는군. 그래 지동설에 대한 자네들의 견해를 듣고 싶은데."
항해사들은 피식 웃으며 고민할 가치도 없다는 듯 바로 즉답했다.
"그거야 말도 안 되는 엉터리 이론이지요."
"···아······."
"제가 알기로는 아리스타르코스가 그런 주장을 최초로 제기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번쯤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평가를 내리긴 했지만, 결국 그 뿐이지요. 별로 진지하게 논의할만한 가치는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지 이유라도 좀 알려주겠나?"
마르쿠스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설레설레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뒤편에 서있는 스파르타쿠스와 수레나스는 이 논제에 대해서 별 생각 자체가 없는 듯 보였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도는 게 그냥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었던 것이다.
항해사들 역시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스럽게 늘어놓았다.
"우선 간단합니다. 지구가 정말로 우주의 먼 거리를 돈다면 어째서 별의 시차현상이 생기지 않는 걸까요. 게다가 지구가 그렇게 빠른 속도로 돌고 있는데 우리가 그걸 느끼지 못한다는 게 말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지구가 정말로 돌고 있다면 제가 여기서 물건을 떨어트렸을 때 수직으로 낙하하는 것도 말이 안되는 현상이죠."
수레나스와 스파르타쿠스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면 생각지도 못한 암초에 걸린 마르쿠스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장애물을 넘으면 어김없이 또 다른 장애물이 나오는구나······."
< 285. 특이점이 온다 > 끝